한국청년연합

This page was last edited on 26 December 2022, at 01:35.

한국청년연합5·18 민중 항쟁의 정신을 계승하여 1984년부터 2008년까지 미국 전역, 그리고 캐나다, 호주, 유럽 등지에서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 통일을 위한 활동을 펼친 조직이다. 줄여서 한청련 또는 한청으로도 불렀으며, 영문명은 Young Koreans United (YKU)이다. 미국 내 조직은 재미한국청년연합으로 불렀다.

이주·이민자 국제 심포지움에서 사용한 소개 영상

2008년에 5·18 민중 항쟁 28주년을 기념하여 이주·이민자의 인권현황 및 사회적 권리보장 모색을 위한 국제 심포지움을 열어 그간의 활동을 정리하고 책자를 펴낸 후 장년층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으로 재조직을 거쳤다. 한청련의 회원들은 오늘날 NAKASEC 소속 각 지역 마당집의 일원으로 그리고 지역 활동가로 활동하고 있다.

활동

5·18과 해외운동

주체적인 해외운동의 거름, 5·18

5.18 광주민중봉기 7주년 범동포 기념식 (1987)

5·18 민중항쟁은 윤한봉이라는 조직운동가를 통해 해외운동의 꽃을 피우게 한다. 밀항 후 5·18의 마지막 수배자는 빚진 자의 책임을 다하고자 1983년 나성에서 민족학교를 설립한 것을 시작으로 동포 청년들을 교육 및 조직하여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 통일을 위한 다양한 활동들을 펼쳐나갔다.

그리고 1984년 나성한국청년연합 결성으로 미주 8개 지역 회원 단체를 연합하는 재미한국청년연합(한청련), 미국 외 캐나다, 호주, 유럽의 동포 청년이 주축이 된 해외한국청년연합 결성으로 조직력을 확대했다.

또한 장년 활동가를 중심으로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한겨레)이 창립되어 세대, 지역을 뛰어 넘는 해외운동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된다. 한청련, 한겨레 회원들은 해외운동이 남북을 객관적으로 봐야 하고, 남한(남부조국)과 북한(북부조국)을 하나의 조국으로 생각하는 해외동포의 주체적인 운동으로 발전 시키려 했다.

해외동포대회

꾸준한 학습, 운동의 생활화

한청련의 강한 조직력과 활동력은 꾸준한 학습을 통한 정세분석과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리며 구체적 실천을 중시하는 운동의 생활화로 뒷받침되었다. 1985년 8월 상항 재미동포대회를 시작으로 정기적인 전국 대회를 갖고 주제 발표와 토론, 학습을 통해 인식의 통일을 이루어 내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청련, 한겨레 장단기 활동계획을 수립하고 실천하였다.

조국운동 연대

조국의 자주와 민주화를 위하여

1980년 5·18 민중항쟁 이후 더욱 더 뜨거워진 조국의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고 군사독재에 반대하기 위해 한청련은 많은 조국운동 지원활동을 하였다. 당당한 해외운동 세력으로서 조국운동과의 든든한 연대를 쌓아가는 한편 미국, 해/내외 동포들은 물론 타민족 진보세력들과도 함께 미국정부를 대상으로 다양한 활동을 펼쳐나갔다.

미주평화대행진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10만명의 서명운동

외세의 전쟁개입후 갈라진 한반도는 아직도 정전이 아닌 전휴으로 남아있다. 남북이 서로를 언제든지 공격할 수 있는 대치 상황이기에 미군의 핵무기로 무장한 남부조국에서 평화정착운동은 조국의 민주화만큼이나 중요한 숙제로 남아있다. 특히 미국의 선제공격에 대항하는 북부조국의 핵무기 발개논리는 더욱더 한반도를 위험속으로 몰아넣게 되기에 오직 양국간의 평화적 외교수단을 통해서만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길 바란다.

1988년 4월부터 14개월 동안 한청련, 한겨레는 Korea Support Network (한국지원연락망) 단체들과 함께 한반도에 배치된 주한 미군 핵무기 철거 서명운동을 벌여 귀중한 10만 여명의 서명을 받았다. 이 서명용지를 뉴욕 유엔 본부 앞 광장에서부터 필라 연방청사까지 차량 행진, 그리고 워싱턴 디씨까지 장장 150 여 마일을 7일 간의 평화대행진을 통해 1989년 7월 27일 미 연방 의회에 전달하였다. 10만 여명의 서명을 받기 위해 한청련과 한겨레는 30만 명 이상의 미국 시민과 동포들을 만나 주한 미군 핵무기 철거의 당위성에 대해 알렸다. 다음을 참고할 것 한청련 1980년대 활동#미주평화대행진


국제평화대행진

백두에서 한라까지 평화를

1989년 8월 세계 평화 운동가들과 연대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을 주도적으로 전개하였다. 한청련 회원 120여명과 외국인 30여명이 참여했고 전국대학생협의회 대표 임수경전국정의평화사제단 대표 문규현 신부가 합류한 세계의 이목을 한반도에 집중시킨 대행사였다. 또한 15일과 22일의 단식을 통해 한반도의 군사 긴장완화 및 평화협정 체결을 UN에 촉구하였다. 1989년 10월 UN 앞 22일간의 단식운동은 UN 창립 이래 최장기간의 단식 농성으로 기록되었다. 다음을 참고할 것 한청련 1980년대 활동#국제평화대행진

인권옹호

인권존중을 위하여

일제의 잔재가 군사독재정권까지 이어져 내려온 국가보안법은 반공, 반정부라는 이름 아래 수많은 민주운동열사들을 죽음과 고통으로 몰아갔다. 체제의 유지를 위해 인권이 무시되고 국제인권위원회에서조차 폐지를 권고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국가보안법은 이데올로기 유지의 보조자로 존재하고 있다.

교육, 문화

교육을 통한 조직

모든 활동의 뿌리는 교육에 있다. 폭넓은 지지와 참여를 이끌기 위해 동포들에게 교육자료를 제작하여 보급하였다. 이러한 꾸준한 교육활동을 통해 조직의 뿌리가 더욱 깊어졌고, 풍물을 중심으로 마당극, 풍물공연, 강습 등 우리 문화를 계승 발전 시킨 홍보활동을 개발했다. 아울러 각종 시위에서는 반드시 풍물패를 동원해 활동을 효과적으로 타민족들에게 알리는 좋은 기회로 만들 수 있었다.

전쟁반대

총성없는 세상에서

우리민족은 한국전쟁을 통해 누구보다 전쟁의 고통과 이로 인한 분단의 아픔을 잘 알고 있다. 한청련/한겨레는 평화정착운동의 일환으로 모든 군사패권정책과 전쟁을 반대하는 활동을 해오고 있으며, 특히 9·11 이후 부시정권의 선제공격 정책을 비판해왔다.

북녁동포돕기

진정한 평화와 통일을 위한 밑거름

1996년 북부조국의 대홍수 이후 식량위기에 처한 우리의 반쪽 동포들을 지원하기 위해 한청련과 한겨레는 “북한수재동포돕기 쌀 한 포대 보내기 운동 추진위원회”를 주도적으로 결성했다. 또한 유엔 산하 세계식량기구와 함께 “북한어린이 점심용 영양과자 보내기 캠페인”을 펼쳤고 4년의 가두 모금활동을 통해 모아진 총 30여 만 달러의 성금을 세계식량기구에 전달했다. 다음을 참고할 것 한청련 2000년대 활동#2001

동포사회운동

한 손에는 조국을, 한 손에는 동포사회를

1992년 나성사태를 통해 재미동포들은 경제적 부조리와 인종차별의 어두운 현실을 잿더미 속에서 지켜보았다. 또한 90년 중반부터 미 전국에서 불기 시작한 반이민 공세는 재미동포 이민자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에 1994년 한청련, 한겨레의 지원으로 지역사회에서 20년 넘게 활동한 나성 민족학교, 시카고 한인교육문화마당집 뉴욕 청년학교, 필라 청년마당집들이 연합하여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미교협)’를 결성했다. 이후 미교협은 전국의 재미동포들을 대변하여 본격적으로 이민자 권익옹호 운동, 소수민족 민권운동에 뛰어들었다. 다음을 참고할 것 미주 한인 사회의 정치적 각성

연표

1945  8.15 광복의 기쁨, 그리고 이데올로기의 대립의 시작: 일본 45년 식민지 생활에서 해방되는 기쁨, 하지만 이데올로기의 대립은 시작되고...

1950 6.25 한국전쟁: 한민족간의 비참한 전쟁과 갈라져버린 한반도: 한민족간의 전쟁으로 인해 (수많은 희생들과 함께 ) 끝내 한반도는 남북이 갈라지고 맙니다.

1960 4.19 학생운동: 이후 남한 이승만 부패정권에 반대하는 민중들의 4.19혁명이 일어나고, 1년후 5.16 군사쿠테타박정희의 독재가 시작됩니다.

1970 11.13 전태일 열사 분신: 아울러 경제성장이라는 명목아래 노동자의 탄압은 계속되고 전태일 열사의 죽음은  노동, 민주화 운동 성장의 밑거름이 됩니다.  

1980년대

1980 신군부 전두환의 등장과 학생운동: 마침내 박정희의 죽음으로 18년의 군사독재가 끝이나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등장으로 민주운동세력들은 더욱 더 탄압을 받기 시작합니다.

1980 5.18 민중항쟁: 결국에는 광주에 계엄군을 보내 시민학살을 자행, 민주화에 대한 염원을 막으려 했으나 이로 인해 5·18민중항쟁은 오히려 민주화운동이 더욱 커나가는 중요한 디딤돌로 거듭나게 됩니다. 다음을 참고할 것 5·18 민중항쟁 관련 활동 (LA 지역)

1981 4월 윤한봉 미국망명: 한편 5·18민중항쟁 마지막 지명수배자 윤한봉은 살아남은 자의 빚을 안고 미국에 망명, 해외운동의 주체인 한청련/한겨레를 조직하게 됩니다. 다음을 참고할 것 한청련 1980년대 활동

1990년대

다음을 참고할 것 한청련 1990년대 활동

2000년대

다음을 참고할 것 한청련 2000년대 활동

자료집: 해외에서 피어난 5.18 정신

해외한국청년연합/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 해외운동사 자료집 (1984-2008)

자료집 커버

이 자료집은 한국청년연합 (이하 한청련)과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 (이하 한겨레)의 생생한 해외운동 활동기록들을 시대별로 간추려 담고 있습니다. 한 장, 한 건의 기록들을 통해 5.18 정신이 해외운동에서 디딤돌이 되는 과정과 오늘 현재까지 어떻게 그 정신이 계승되고 있는지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자료집을 지난 2006년에 5월 영령의 품으로 돌아가신 전 해외 한청련 및 한겨레 지도위원이신 고 윤한봉 선생님께 바칩니다.

지난 25년 동안 한청련의 활동에 함께 해 주신 모든 후원자, 회원분들께 머리 숙여 감사 드립니다. 고 윤한봉 선생님을 통해 해외에서 계승된 5.18 정신은 수 많은 동포 청년들에게 바르게 산다는 것, 뿌리를 안다는 것, 굳세게 사는 것, 그리고 더불어 사는 것에 대해 고민하게 해 주었습니다.

매년 5.18 기념식 및 진상규명 활동을 펼칠 때 마다 “빨갱이”라는 손가락질도 받고, 한반도 평화 및 통일 활동 관련 “반 통일단체”라는 운동권의 중상 모략을 받기도 했지만, 25년이 지난 오늘 5.18은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고, 한청련의 정신은 여러지역에 뿌리를 내리며 정의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동포사회운동으로 발전되었습니다.

해외에서 꽃 핀 5.18 정신, 고 윤한봉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꾸준한 학습, 운동의 생활화” 정신은 앞으로도 계속 올바른 삶, 정의, 평화, 인권이 존중 받는 세상을 위해 계승 될 것 입니다.

윤한봉 선배님을 생각하며

강완모 전 재미한국청년연합 회장

내가 윤한봉 형님을 처음 만난 것은 아마 1983년 5월 어느때 쯤인 것 같다. 뉴욕에 유학생으로 와 있던 나는 조국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던 몇몇 친구들과 함께 그를 뉴욕에서 처음 만났다. 도회지에서 자라나며, 대학의 먹물만을 잔뜩 갈고 있었던 우리는 그럴듯한 차림새의 점잖은 사람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들어오는 사람의 차림새며 모습이 영 우리가 생각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서울역 앞의 지게꾼 아저씨 같은 주름 많은 사람이어서, 이 사람은 아닐테고, 그 뒤에 또 누가 들어오지 않나 하며 주위를 살피던 기억이 새롭다.

윤한봉 생일

그렇게 처음 만난 한봉이 형님은 사정없이 우리를 뒤흔들어 놓았다. “살아있는 예수야....” “한국의 레닌이야…” 그때 같이 만났던 사람들이 하던 말들이다. 그 뒤 일년도 안 되는 동안 우리는 뉴욕, 뉴잉글랜드, 필라델피아에 한청련을 만들고 그 후 거의 10년 동안 천둥 벌거숭이, 야생마가 되어 한봉이 형님과 시간을 함께 했다.

이제 세월은 흘러 초기 한청련 세대의 자식들이 대학에 가고, 그 사이 형님은 우리 곁을 떠나 하늘 나라로 갔다. 남겨진 우리들은 “이럴 때 형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하며, 그를 그리지만 답답함 속에서 별 수 없이 우리끼리 헤쳐나갈 수 밖에 없다. 오늘 윤한봉 형님을 생각하며 그 분이 남긴 교훈속에 우리 자신을 되돌아 본다.

작은 것에 파묻혀 큰 그림은 못 그리고 앞날에 대한 비전도 없이 그날 그날 되는대로 지나고 있지 않은가? 세계를 넘나드는 정세학습을 하고, 중장기 사업계획하에 꿈과 희망을 얘기하던 그 분의 가르침을 헛되이 하고 있진 않은가?

허공에 붕 뜬 얘기로, 현실이나 실질과는 동떨어진 계획으로, 다수 이웃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끊임없이 대중과의 소통을 강조하고, 그 속에서 길을 찾던 그 분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세상은 엄청나게 변하고 있는데 과거의 방식이나 관습에 젖어, 오늘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를 못 보고 있지는 않은가? 교조적이지 말고, 살아 움직이는 변화무쌍한 현실속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그 분의 가르침을 잊지는 않았는가?

이제 미국 동포 사회의 중심 세대로 진입하고 있는 2세대들이 그들의 꿈을 펼치고 운동을 이어받아 해 나갈 수 있게 우리는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가? 세대, 문화 차이의 벽을 뛰어 넘으려 노력하고, 1.5세나 2세들에게 무한한 애정을 베풀었던 그 분의 가르침을 소홀히 하고 있진 않은가?

이 많은 물음속에 무엇 하나 시원한 대답을 못하며, 당신의 추모 1주기를 맞습니다.

남겨진 일, 다 못다한 일, 남은 사람에게 맡기시고, 하늘나라에서 평안히 쉬소서.

윤한봉선생이 우리에게 남겨준 소명

장광선 필라한겨레동포연합

우리가 민족민주통일운동에 참여하는 것은 조국에 대한 향수나 단순한 민족애에 의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민자로서 이 땅에 자자손손 뿌리를 내리고자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극대화한 자본주의와 개인주의로 인해 자기 정체성을 잊어버리고 이웃과 사회 심지어는 부모, 형제자매까지도 외면할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무사안일한 개인적 성공의 장미빛이 우리를 끝없이 유혹하기 때문입니다.

한청련 대회

만약 이런 유혹에 빠진다면 우리의 정신은 황폐해지고 질시와 경멸의 대상으로 전락하게 됨으로써 번영된 미래를 자손에게 물려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에 이웃과 사회, 조국에 대한 우리의 연대와 의무를 끊임없이 재확인하고 우리 자신들을 건전하고 정의롭게 가꾸도록 노력해야합니다. 자녀들에게 남겨준 올바른 정체성은 우리를 다른 모든 민족성원에게서 존경 받게 하고 더욱 더 이 땅에 번영의 뿌리를 내려나가게 할 힘이 될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민족민주통일운동에 참여하는 까닭이고 자신과의 끝없는 투쟁이기도 합니다.

조국의 민주화와 평화통일운동을 자신과의 투쟁으로 인식하면서 이것을 개개인의 의식화가 아닌 조직적이며 대중운동적으로 발전시키게 된 계기가 바로 5·18 민중항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기층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서 미국에 망명한 윤한봉선생의 지도력은 우리를 튼튼한 운동조직으로 성장하게 만들었습니다. 한국청년연합과 한겨레동포연합은 대중운동조직단체로서

첫째, 지속적인 조국역사, 문화, 사상, 정치정세 학습활동을 통해 자기정체성 확립을 이루었습니다. 분단된 조국을 하나의 조국으로 인식하고 치열한 냉전구도를 허물기 위해 대화와 협력의 장을 열어나간 국제자주평화통일행사는 우리 조직의 자랑스러운 사업 중 하나입니다.

둘째. 기존 동포운동조직들의 소수 선각자와 학자들의 모임 형태를 벗어나기 위해 활동력이 왕성한 청년층의 관심과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내고 노동자와 소상인들을 운동의 주체로 받아들였습니다.

셋째. 운동을 생활화하는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한 끼 금식, 각종 폐품 모으기 등으로 활동자금을 마련하고 엽서쓰기, 전보 보내기 등의 작은 노력들이 바로 민주화와 통일운동에 연계되는 활동임을 깨닫게 한 것입니다. 아울러 전통 공동체 문화인 풍물을 여러 행사에 사용하여 보다 효율적이고 적극적으로 대중의 관심을 불러오게 하였습니다.

넷째, 주류사회를 향한 보다 적극적인 홍보와 광범위한 정치, 사회 각계각층, 그리고 타민족 형제자매의 유대강화를 위해 힘썼습니다. 정치 문화 홍보원과 봉사교육단체 운영, 그리고 의회 로비활동 경험등은 대중운동과 전문화 기관운동을 잘 조화시킨 예입니다.

다섯째, 차별받는 소외계층을 위한 실질적인 사회문제들에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이민자들과 서류미비자들을 위한 권익옹호 활동은 소수민족운동을 우리 조직이 이끌어가는 모범적인 활동사례입니다.

여섯째. 진보운동은 바로 자신의 희생과 기득권의 양보임을 자각하게 하였습니다. 지도자나 간부, 혹은 일반 회원이나 후원자로 활동하던지 상관없이 모든 참여자들은 그 활동이나 조직 때문에 한 개인이 사회적으로 명성이나 어떠한 정치적 이득을 얻은 바가 없습니다. 오로지 순수한 헌신만이 사회변혁의 가장 큰 원동력임을 깨닫고 자부심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제가 바라기로는 우리가 이제까지 진행해 온 위와 같은 조직활동이 보다 강화, 확산되어 우리의 정치력이 이 땅에 확고하게 뿌리내리고 더 많은 후배들이 주류에 당당하게 합류하는 큰 물줄기를 형성해가기를 소망합니다.

이것이 28년전에 5·18 민중항쟁이 우리에게 던져준 소명이며 윤한봉선생의 유지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