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운동

최근 편집: 2017년 6월 13일 (화) 04:15

묻혀진 여성 항일운동

  • <암살>의 전지현 같은 여성 독립운동가 1900명 넘는다
  • 1919년 3.1운동 직후부터 1943년 2월까지 국내외에서 다양한 애국부인회가 조직,통합되면서 항일운동을 하였다.다음을 참고할 것 애국부인회
  • 그외 3.1운동 이후 1920년대까지 조직된 여성항일단체: 대한부인청년단(평남 사천), 대한국민부인향촌회(평남 순천), 부인관찰단(평남 안주), 대한독립부인청년단(평남 대동), 여자복음회(평남 개천), 의용단과학생구국단(부산)
  • 1905년 4월 일본에서 김정화, 나혜석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는 1919년 동경의 2.8독립선언에 적극 참가하였다.
  • 1927년 5월에 민족주의 여성운동계인 김활란, 유영준, 유각경 등과 사회주의 여성운동계인 박원민, 정종명 등이 '근우회'를 창립하였다.
    • '근우회'는 여성문제 토론회와 강연회 개최, 야학실시, 문맹퇴치, 여공파업의 진상조사, 고아주학생운동 및 각종 항일학생운동 지도와 지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까지 충청도를 제외한 전국 57개, 해외 3개의 지회를 조직하고 일본에 항의문서를 발송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여성운동자들과의 사상적 차이로 1931년에 해체되었다.
  • '근우회'가 해체된 후, 여성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국내항일비밀단체 또는 동북항일유격대, 조선의용군, 한국광복군 등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 1928년 2월 김마리아, 황에스터 등이 '근화희'를 조직하여 재미한인들의 광복운동을 후원하고 여자유학생간의 친목을 도모하였다.
  • 1921년 6월 숙명여학교 보습과생들은 일본인 교사의 교수방법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하였다. 이러한 동맹휴학은 전남 영암의 공립보통학교, 황해도 신막공립보통학교, 함흥의 영생여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등 전국적으로 퍼졌다.
    • 1928년 11월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장매성, 박옥련 등이 '소녀회'를 결성하였다.
    • 1929년 11월 3일 일본인 남학생이 통학열차 안에서 여학생을 희롱한 것으로 학생운동이 발생하자, 이에 동참하고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벌였다.
  •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독립운동지도자의 자녀와 부인 등이 광복군 여성대원으로 편성되었다. 그중 오광심, 김정숙, 지복영, 조순옥, 신순호, 민영주는 총사령부가 창설될 당시부터 광복군에 편성된 여성대원이었다.
    • 광복군총사령부는 광복군의 선전활동을 위해 오광심, 지복영, 조순옥 등의 여성대원을 주축으로 선전과를 편성하고, 한국어,중국어,일어 등으로 된 전단과 벽보를 작성하고 배포하는 활동을 벌였다. 또한 오광심, 지복영, 조순옥 등의 여성대원들은 광복군의 기관지 <광복> 발간활동에 참여하여 원고의뢰와 작성, 번역 등 간행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 현재까지 국가보훈처에서 공식적으로 판단하는 여성대원 인원은 약 20여 명에 불과하지만, 당시 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가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별로 약 30여명이 활동한 기록으로 추정하건대, 여성대원 인원은 약 100여 명이었다.

항일 운동가

남성 항일 운동가

같이 보기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