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4월 일본에서 김정화, 나혜석 등을 중심으로 조직된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는 1919년 동경의 2.8독립선언에 적극 참가하였다.
1927년 5월에 민족주의 여성운동계인 김활란, 유영준, 유각경 등과 사회주의 여성운동계인 박원민, 정종명 등이 '근우회'를 창립하였다.
'근우회'는 여성문제 토론회와 강연회 개최, 야학실시, 문맹퇴치, 여공파업의 진상조사, 고아주학생운동 및 각종 항일학생운동 지도와 지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9년까지 충청도를 제외한 전국 57개, 해외 3개의 지회를 조직하고 일본에 항의문서를 발송하기도 하였다. 일제의 탄압과 여성운동자들과의 사상적 차이로 1931년에 해체되었다.
'근우회'가 해체된 후, 여성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하여 국내항일비밀단체 또는 동북항일유격대, 조선의용군, 한국광복군 등에 참가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 2월 김마리아, 황에스터 등이 '근화희'를 조직하여 재미한인들의 광복운동을 후원하고 여자유학생간의 친목을 도모하였다.
1921년 6월 숙명여학교 보습과생들은 일본인 교사의 교수방법에 불만을 품고 '동맹휴학'을 하였다. 이러한 동맹휴학은 전남 영암의 공립보통학교, 황해도 신막공립보통학교, 함흥의 영생여학교, 경성여자상업학교 등 전국적으로 퍼졌다.
1929년 11월 3일 일본인 남학생이 통학열차 안에서 여학생을 희롱한 것으로 학생운동이 발생하자, 이에 동참하고 시험을 거부하는 '백지동맹'을 벌였다.
1940년 9월 광복군이 창설되자, 독립운동지도자의 자녀와 부인 등이 광복군 여성대원으로 편성되었다. 그중 오광심, 김정숙, 지복영, 조순옥, 신순호, 민영주는 총사령부가 창설될 당시부터 광복군에 편성된 여성대원이었다.
광복군총사령부는 광복군의 선전활동을 위해 오광심, 지복영, 조순옥 등의 여성대원을 주축으로 선전과를 편성하고, 한국어,중국어,일어 등으로 된 전단과 벽보를 작성하고 배포하는 활동을 벌였다. 또한 오광심, 지복영, 조순옥 등의 여성대원들은 광복군의 기관지 <광복> 발간활동에 참여하여 원고의뢰와 작성, 번역 등 간행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현재까지 국가보훈처에서 공식적으로 판단하는 여성대원 인원은 약 20여 명에 불과하지만, 당시 총사령부 예하에 4개 지대가 편성되었으며 각 지대별로 약 30여명이 활동한 기록으로 추정하건대, 여성대원 인원은 약 100여 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