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기

최근 편집: 2023년 8월 6일 (일) 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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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해방기 조선인민공화국
미군정 소련군정
대한민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

해방기(解放期), 또는 해방정국(解放政局)이란 1945년 8월 15일 광복 직후부터 1950년 6·25 전쟁까지의 시기를 일컫는 말이다.

한반도 정세

일제강점기 말경, 일본인들은 패전의 임박으로 인한 신변의 위협을 느꼈고, 조선인들은 필연의 해방을 대비해 연합국과 협상할 자신들의 정부를 조직할 필요를 느꼈다. 이에 총독부는 여운형과 협상하여 ①정치범과 경제범을 즉시 석방하고, ②3개월간의 식량을 보전하며, ③치안 유지·정치운동·인력의 훈련 및 동원에 조선총독부가 간섭하지 말 것을 조건으로 여운형 측은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발족을 묵인하고 일본인의 안전을 보장받았다.[주 1]

그러나 총독부는 해방 후에도 건준에 행정권을 인계하지 않았고, 건준은 좌익의 지지를 얻었으나 우익은 아직 귀국하지 않은 임정을 지지했다. 38선 이북에 소련군이 진주하자 인공은 조선공산당 인사들을 대거 참여시켰고, 구색을 맞추기 위해 임정 등 우익 인사들의 자리도 명목상 비워 놓았다. 그러나 총독부의 행정, 경찰, 군대 조직을 끝내 인수하지 못한 채 미군의 진주를 3일 앞두고 급하게 조선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조선인민공화국은 전국 각지에서 '인민위원회'를 구성하여 어느 정도 수준있는 지방자치를 개시하였는데, 하필 미군정은 이를 소련식의 공산주의 단체로 오인하여 강압적으로 해체시켰다. 한편 북조선의 소련군은 처음에는 인민위원회에 호의적이었으나, 신탁통치 오보사건 이후 인민위원회를 폐지하고 북한의 건국을 위한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설치하였다.

한편 임정의 경우, 미국은 한반도의 국민들이 선거로 뽑은 주체가 아니라 하여 임정의 주권을 부정했고, 미군정의 하지 중장은 임시정부를 갱단 취급하며 입국을 불허했다. 연말쯤이 되어서야 임시정부 요인들은 전원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다.

사회상

38선 이남과 이북은 어느 정도 왕래가 가능했다.

개성시대한민국 관할이었다.

군정청 여론국에서는 조선 인민이 어떤 종류의 정부를 요망하는가를 관찰키 위하야 30 항목의 설문을 열거하고 여론을 조사하였는데 설문에 반영된 민의는 다음과 같다.

▲문3. 귀하의 찬성하는 것은 어느 것입니까?

가. 자본주의 : 1,189인 (14%)

나. 사회주의 : 6,037인 (70%)

다. 공산주의 : 574인 (7%)

라. 모릅니다 : 653인 (8%)

- 동아일보 1946. 8. 13., 군정청 여론국 조사(서울 시민 약 1만명 대상 조사)

당시 사람들은 사회주의라는 단어 자체에 특별한 거부감을 갖고 있지 않았던 듯하다.

장차 수립될 임시정부는 어떠한 형태의 것이어야 하며 어떠한 정책을 실시해야 할가 하는 데 데해서 국민의 관심은 실로 크다. 여기에서 조선신문기자회에서는 이에 대한 여론을 드러보고저 3일 오후 5시부터 1시간 동안 서울시내 중요지점 10개소에서 일제히 통행인 2,495명에 대하야 5가지 설문으로 여론조사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3. 국호는?

(A) 대한민국 : 604표 (24%)

(B) 조선인민공화국 : 1,708표 (70%)

(C) 기타 : 8표 (1%)

(D) 기권 : 139표 (4%)

4. 정권 형태?

(A) 종래제도 : 327표 (14%)

(B) 인민위원회 : 1,757표 (71%)

(C) 기타 : 262표 (10%)

(D) 기권 : 113표 (5%)

5. 토지개혁 방식?

(A) 유상몰수 유상분배 : 427표 (17%)

(B) 무상몰수 무상분배 : 1,673표 (68%)

(C) 유상몰수 무상분배 : 260표 (10%)

(D) 기권 : 99표 (5%)

- 조선일보 1947. 7. 6., 국호는? 정권형태는? 기자회서 가두여론조사

당시 사람들의 미군정에 대한 불만이 상당했던지, 미군정에 의해 이미 해체된 조선인민공화국의 체제를 이상적으로 여긴 사람들이 많았던 듯하다. 1946년 8월 11일 한국여론협회가 행인 4782명을 대상으로 '군정에 대하여 잘했다고 생각하는 점'을 묻자 응답자 중 4686명(98%)이 기권하기도 했다.

주요 사건

  • 신탁통치 오보사건
  •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
  • 대구 10·1 사건
  • 제주 4·3 사건
  • 명태 사건
    1949년 1월, 제 1사단장에 취임한 김석원 대령이 남북 교역장에서 이루어지던 교역을 중단시켰던 일로 인해 육군본부와 알력을 빚었던 사건을 가리킨다. 당시 남북 교역장에서는 물물교환 방식의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거기에서 북한에 시멘트, 전선 등의 전략물자를 넘겨주고 그 대가로 명태를 받아 이를 판매해 남한 군, 관 고위층이 돈을 벌고 있었다. 김석원은 명태를 트럭째로 다 압수해 장병들 부식으로 나눠주든가 팔아서 군비에 충당했다. 이로 인해 육군본부와 김석원 대령 사이에 알력이 발생하여 대통령에게 출두하게 되었는데, 김석원 대령이 이승만의 면전에서 항의하자 이승만이 격노하여 채병덕 당시 육군총참모장과 나란히 해임되었다. 둘은 머지않아 복직된다.

미디어에서

  • 드라마 야인시대의 2부 초반은 해방기를 배경으로 한다.

부연설명

  1. 일설에 의하면, 당초에는 송진우와 6월부터 계속 교섭하였으나, 서울에 진주할 연합군을 소련군이라고 잘못 인지한 총독부가 우파인 송진우를 내치고 좌파 사회주의자 여운형과 담판토록 했는데,종전 다음 날인 16일 오후, 서울 진주군이 소련군이 아닌 미군이라는 정보를 뒤늦게 입수하게 되자 돌변한 것이라는 설이 있다.[1] 다만 당시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遠藤柳作)는 1957년 한 인터뷰에서 송진우와의 접촉설을 부인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