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활동 1 (운동화와 똥가방)

최근 편집: 2019년 7월 8일 (월) 14:48

재미한국청년연합의 결성

나는 83년 10월부터 미주 청년운동조직을 만들기 위한 준비를 했다. 83년 12월 30일,2박 3일 동안 샌프란시스코의 한 노조건물에서 서부지역청년대회를 열었다. 그 대회에는 민족학교 활동을 통해 의식화된 LA 지역 청년들과,내가 시애틀에 있을 때 사귄 후 계속해서 연락을 취해왔던 시애틀 지역 청년들,비행기 값이 없어 주위의 도움으로 7〜8 차례 자동차로 올라 다니며 대화해서 뜻을 함께하게 된 샌프란시스코 지역 청년들,그리고 민족학교를 방문했던 뉴욕과 시카고 지역의 몇몇 청년들이 참가했다.

  대회에서는 조국 정세,재미동포사회의 현황,해외운동의 현황,미주청년운동의 필요성 등에 관한 분석과 토론을 집중적으로 했다. 대회 마지막 날인 84년 1월 1일에는 참가자들이 뜻을 하나로 모아 ‘재미한청련’(재미한국청년연합)을 결성했다. 마침내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 평화를 위해 일하고 동포사회를 위해 일할 해외동포 청년운동조직이 출현한 것이다. 미주 최초의 청년운동체가 결성됨으로써 해외운동사,미주운동사에 커다란 획을 긋게 된 것이다. 참가자들은 재미한청련 결성과 동시에 그 자리에서 ‘미국 각 지역에 한청련을 조직한다. 매년 8월에 대회를 연다. 각 지역 한청련은 LA의 민족학교와 같은 마당집을 설립하기 위해 노력한다고 결의했다.

  나는 광주수난자돕기회 결성과 민족학교 설립에 이어 재미한청련을 결성함으로써 미국에 온 후 2년 반만에 본격적인 해외청년운동의 첫 발을 내딛었다. 감개무량했다. ‘오월 영령들이여,조국의 동지들이여! 이 못난 놈이 온갖 어려움을 뚫고 마침내 미국에 청년운동조직을 만들고야 말았습니다. 계속 힘을 주소서.’

  재미한청련을 결성한 후 나는 각 지역 한청련 조직 및 마당 집 설립 활동에 들어갔다. 활동자금이 없던 당시의 상황에서 나는 우선 먹여주고 재워줄 사람이 있는 곳부터 찾아가 활동을 시작했다. 미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청년들을 만나 밤을 새워 설득하고 호소하여 호의적 반응을 보이는 청년들과 함께 학습을 시작했다. 일정 기간의 학습을 끝낸 청년들 중 의식화가 되었다고 판단되는 청년들로 하여금 그 지역 한청련을 결성하게 하였다.

  나는 조국과 민족에 대해 별 관심이 없는 청년들에게는 조국의 현실과 운동 현황,그리고 조국과 미국과의 관계를 소상하게 설명해서 민족의식과 조국애를 일깨워 주고,미국 사회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떳떳이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조국의 민주 자주 통일 평화를 위해 운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조국과 민족에 대한 관심도 있고 운동에 대한 관심도 있으나 조국을 버리고 이민 온 데 대한 죄책감과 낮은 의식, 그리고 부족한 운동경험에 기인한 열등감과 자괴감 때문에 머뭇거리는 청년들에게는 이민현상을 개인적 차원에서 민족적 차원으로 끌어 올려 역사적 배경 속에서 설명하고 또 낮은 의식과 부족한 운동경험은 더 열심히 학습하고 실천하면 극복할 수 있다고 설득했다.

  해외운동을 매도 안 맞고 감옥에도 안 가며 하는 운동이라고 우습게 보거나,해외운동을 조국운동의 종속적, 위성적 주변적 운동으로,심지어 조국운동에 대한 응원 정도로 인식해서 그 주체성,창조성,고유성,독자성에 대해 회의하거나 부정하는 사람들에게는 매 맞고 감옥에 가는 것이 훌륭한 운동의 척도가 될 수 없다는 것과,헌신적으로 땀 흘리며 하는 운동이 더 중요 하다는 것,그리고 해외운동도 조국운동과 똑같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외운동은 조국의 민주 자주 통일 평화라는 민족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민족민주운동의 특수한 지역운동이라는 것,따라서 해외운동은 독자성을 가지고 특수성과 전문성을 키워가야 한다는 것,그리고 해외운동은 상대적으로 안전한 지역에서 하기 때문에 물적 인적 (기능적)으로 조국운동에 대한 지원도 해야 하고 조국운동에 대한 국제적 지원을 강화하기 위해 국제외교 연대운동도 해야 하는 등의 특별한 역할도 있다는 것을 열심히 인식시켜 나갔다.

  유학생들에게는 더 직접적으로, 조국에서는 동료 청년학생들이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공부만 하고 있느냐고 힐난하며 운동 참여를 촉구했다. 나는 여러 사람들의 헌신적 도움 덕분으로,일부 못된 운동가들과 영사관의 집요한 방해공작과 갖가지 어려움을 극복하고 86년 8월까지 서부의 시애틀과 LA 지역, 중부의 시카고,덴버,달라스 지역 그리고 동부의 뉴잉글랜드, 뉴욕,필라델피아,위싱턴 DC 지역의 한청련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다만 뉴잉글랜드,달라스,덴버 지역 한청련은 80년대 말에 조직 관리의 어려움 때문에 해체시켰다.

미국의 중남미 개입 규탄시위장의 충격

  83년 말이었다. 니카라과,엘살바도르의 운동단체들이 중심이 되어 미국의 중남미 개입 규탄 시위가 있었다. 그 시위에 나는 민족학교 청년들과 함께 참가했다. 비가 내리는 겨울이었지만 수천 명이 참가했다. 행진을 마치고 공원에 모여서 성토대회를 하고 있을 때였다. 모여 서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하도 여러 사람들이 촬영하기에 그들에게 물었다.

“왜 이렇게 많이 촬영하느냐?”

그러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대답했다.

“코리언들이 우리들과 같은 구호를 가지고 시위에 참가한 것 이 이번이 처음이라 신기해서 그렇다.”

우리들 중 한 친구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너희들과 다른 구호를 가지고 참가한 코리언이 있느냐?”

“그렇다. 이리 따라와 봐라.”

우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사람을 따라갔다. 앞장섰던 그 히스패닉 형제가 웃으며 손으로 가리킨 곳을 본 순간 나는 경악했다. 충격을 받아 한참 동안 그 자리에 굳은 채 서 있었다. 공원 밖 한쪽 도로변에 4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다음과 같은 구호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서있었다.

“공산주의보다는 전쟁을!”

“빨갱이들은 지옥으로!”

그들 중의 소수는 백인 형제들이고 다수는 우리 동포들이었다. 통일교도들이 반대시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각 지역의 마당집 설립

  처음 계획했던 대로 나는 각 지역에 한청련이 만들어질 때마 다 가능한 한 뜻을 같이 하는 그 지역 동포 선배들과 함께 LA 의 민족학교와 같은 마당집들을 설립하여 그 마당집을 근거 삼아 활동하도록 했다.

  각 지역 한청련은 운동경험도 없고 의식수준도 낮고 결성된 지도 얼마 안 돼 역량이 취약했다. 하지만 나는 학습과 실천을 병행해야 한다는 지론과 IA 민족학교 성공 경험을 강조하며 한청련 회원들에게 마당집 설립을 적극 종용했다. LA 민족학교를 설립할 때와 마찬가지로, 밤잠을 안자고 몸소 연장을 들 고 뚝딱거렸다. 비품을 기증받거나 주워 나르고 도서 자료를 수집하는 등의 노력을 해서 차례차례 마당집을 설립해 나갔다.

  민족학교와 마찬가지로,각 지역 마당집은 이사진을 구성할 때 그 지역의 뜻을 함께 하는 선배들을 많이 추대하고 한청련 회원은 몇 명만 이사가 되었다. 그리고 원장 또는 총무나 실무자는 한청련 회원이 맡았다. 나머지 한청련 회원들은 마당집의 자원봉사자가 되었다. 워싱턴 DC를 제외한 각 지역 마당집도 비영리단체로 등록하고 면세 허가를 받았다. 마당집의 상근자 들은 민족학교에서처럼 무보수로 일하고 숙식은 마당집에서 해결했다.

  LA의 민족학교,산호세의 민족교육봉사원, 뉴욕의 청년학교, 필라델피아의 청년마당집,시카고의 한인교육문화마당집,토론토의 민족교육문화원,워싱턴 DC의 코리아 홍보교육원의 상근자 10여 명은 학업을 중단하거나 직장을 포기한 남녀 회원들이었다. 그 회원들은 짧게는 2년 길게는 5년 동안을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성실하게 일해 주위 동포들을 경탄하게 만들었다. 각 지역 마당집은 설립 초기의 어려움을 의지와 땀으로 극복하고 서서히 동포사회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각종 도서와 자료 수집도 LA 민족학교처럼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모았다. 제일 적은 곳이 1500여 권의 도서 와 300여 종의 자료를 모았고 제일 많은 민족학교는 3500권의 도서와 1500여 종의 자료를 모았다. 그렇게 모은 도서 자료들 은 학습용으로도 쓰고 일반 동포들에게도 무료 대출했다.

  교육활동으로는 정기적으로 매월 2회에서 4회 정도의 학습을 꾸준히 해나갔다. 가끔 특별강좌나 좌담회를 열었으며 여름 방학을 이용해 여름학교와 같은 특별 프로그램을 운영하기도 했다. 봉사활동은 지역 실정에 따라 무료 세금보고서 작성,무료법률 상담,노동 상담,노인봉사,무료 번역통역 등의 일을 꾸준히 해나갔다. 재정은 회원들과 일반 동포들의 기부금으로 대 부분 충당하고 한청련과 함께 각종 수익사업을 벌여 부족분을 메워 나갔다.

  상근자들과 자원봉사자들의 식사 문제는 회원들과 동포들이 기증한 음식물로 해결했고 옷 문제는 판매용 헌옷들 속에서 골라 입어 해결했다. 각 지역 마당집들은 94년에 ‘미주 한인봉사 교육단체협의회’를 결성해서 전국적 차원의 연합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95년에는 동포들과 다른 이민 소수민족들의 반이민법 제 정 저지투쟁을 조직,주도하여 동포사회와 다른 소수민족들로 부터 커다란 신뢰를 받기도 했다.

“임금님 사위 항쟁이 뭡니까?”

  미국과 캐나다,호주 등지에 살고 있는,특히 미국에 살고 있는 동포 청년들은 동질성이 거의 없었다. 그것이 어느 정도인 지 25세 전후의 청년들을 예로 들어보겠다.

  그들은 비슷한 나이의 청년들이지만 너무나 이질적이고 복잡 다양한 청년들이었다. 5살 이전에 이민 온 청년과 대학을 졸업하고 군대생활도 마치고 직장생활까지 하다 온 청년,이민 온 후 동포사회 속에서 성장하거나 거주한 청년과 타민족 형제 들 사회 속에서 성장하거나 거주한 청년,이민 온 후 현지에서 학교를 다닌 청년과 다니지 않은 청년,이민 온 후 가정에서 기초적인 민족교육과 우리말 교육을 받은 청년과 못 받은 청년,영어 또는 우리말을 잘하는 청년과 잘 못하는 청년과 둘 다 잘 하는 청년,살고 있는 나라를 조국으로 생각하는 청년과 대한민국(남부조국)을 조국으로 생각하는 청년,언젠가 조국에 돌아갈 생각을 가진 청년과 현지에서 뼈를 묻을 생각을 가진 청년, 조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잘 아는 청년과 잘 모르는 청년, 조국의 현실에 관심이 있는 청년과 전혀 없는 청년,조국과 미국의 관계에 대해 아는 청년과 모르는 청년, 유신체제를 겪은 청년과 안 겪은 청년,5.18을 겪은 청년과 안 겪은 청년,백제나 신라 그리고 전봉준 장군과 정약용 선생을 아는 청년과 모르는 청년 등 너무나 이질적이고 복잡 다양한 청년들이었다.

  조국과는 달리 혈연,지연,학연 등의 연고가 거의 없고 이민 온 시기가 달라 개인적,사회적, 역사적 경험이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지식의 정도,사고방식,언어 구사능력,정서 등이 천차만별인 청년들,게다가 조국의 청년들에 비해 의식수준이 낮은 청년들을 상대하면서 나는 당혹감도 많이 느꼈고 애로도 많이 겪었다. 그러나 특수한 사회적 조건 때문에 운동 참여 동기 가 필연적이고 사회적인 조국 동포들과는 달랐다. 조국과 민족을 위한 해외 동포들의 운동 참여 동기는 지극히 우연적이고 개인적이다. 사회적 조건의 변화가 없는 한 조국 동포들의 운동은 지속될 수밖에 없는데 반해 해외 동포들은 개인적 충격이나 감동 같은 운동 참여의 동기가 약화되거나 운동 과정에서 긍지와 보람을 못 느끼고 실망하거나 심한 비판을 받거나 갈등,충돌 등을 겪게 되면 쉽게 운동을 중단하거나 포기해 버린다. 따라서 해외 동포운동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해외 동포들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과 의식과 동질성과 통일성을 끊임없이 강화시켜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 조직적 차원의 긍지와 보람과 희망을 끊임없이 불어넣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학습과 실천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사명감을 가지고 부족한 역량을 메우기 위해 청년들의 학습과 실천을 지도해 나갔다.

  초기의 학습지도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역시 학습용 도서 자료의 구입이었다. 간신히 구한 학습 자료들을 그때그때 복사하여 썼다. 민족학교 초기인 84년의 경우에는 1년 동안 무려 12만 장의 학습 자료를 복사하기도 했다. 나는 청년들과 만나면 밤을 새워가면서 대화를 나눈 후 학습 참여의사를 밝힌 청년들을 따로 모아 마당집이나 마땅한 가정집에서 정기적으로 민족 사 학습을 함께 해 나갔다. 나는 학습지도에 최선을 다했다. 한자를 못 읽는 청년들을 위해 학습 자료에 나오는 한자마다 우리글로 발음을 써주기도 하고 시간이 없어 학습에 못 나온 청년의 업소로 찾아가 단둘이 앉아 학습을 하기도 했다. 단식 중에도 입에서 단내를 풍겨가며 학습지도를 하고 허리가 아파 몸을 움직이지 못할 때는 문짝에 묶여 누운 채 실려 수련회장으로 가기도 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각 지역 마당집과 한청련은 학습용 도서 자료들을 거의 다 확보하게 되었고 연합교육부에서 세운 역사,경제, 철학, 조직 등의 분야별 학습계획에 따라 타 지역과 경험 을 교환해 가며 많게는 주 1회,적게는 월 1회의 정기적인 자체 학습을 생활화해서 꾸준히 해 나갔다. 각 지역의 학습지도는 의식 있는 유학생 회원들과 동포 청년들 중에서 모범적으로 의식화된 회원들이 주로 맡아서 했다. 특히 유학생 회원들은 조국에서 싸우고 있는 동료 학생들과 친구들에 대한 죄의식 속에서 공부를 하다가 나를 만난 것이 계기가 되어 학업을 중단해 버린 회원들이었다.

  학습을 하는 과정에서 많은 일화가 있었다. 2세나 1.5세 회원들 중의 일부는 우리말이 서투르기 때문에 학습을 매우 힘들어했다. 그러나 그들은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사전을 찾거나 다른 회원들에게 물어가며 열심히 학습을 해나가 주위를 감동시켰다.

  어느 날 부마항쟁에 관해 학습을 하던 때였다. 도중에 임경규라는 2세 회원이 느닷없는 질문을 했다.

“임금님 사위 항쟁이 뭡니까?”

  모두들 어리둥절했다가 그 질문의 배경을 알고는 폭소를 터뜨렸다. 그는 ‘부마’가 부산과 마산을 줄여 쓴 말인 줄 모르고 사전을 찾아 ‘임금님 사위’라는 뜻풀이가 나오니까 이해가 안 가 그런 질문을 했던 것이다.

  또 한 번은 내가 빈민들의 굶주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어릴 때 이민 온 한 회원이 느닷없는 질문을 해왔다•

“도대체 굶주림이라는 것이 어떤 거예요?”

“아니 배고픈 경험 안 해봤어요?”

“나는 배가 고프면 그때그때 먹었기 때문에 잘 몰라요.”

“......”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말이 서투른 2세들도 점점 우리말을 잘 하게 되었고 의식도 좋아져 대부분이 전문성을 가지고 헌신적으로 활동하는 훌륭한 운동가로 성장하였다. 그들 중 일부(김난원,한진아,임경규, 이진숙,흥정화 등)는 한청련의 간부나 마당집의 원장,또는 이사가 되어 맹활약을 하게 되었다.

  한청련은 조직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히자 예비회원제를 운영했다. 역사 학습을 마친 청년들 중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청년들을 예비회원으로 인정하고 일정한 학습과정을 또 한 차례 밟게 한 후 정회원으로 받아들이는 등 가입 절차를 강화했다.

  조직생활 수칙을 만들고 회원들을 상대로 조직시험을 보는 등 점차 조직규율을 강화해 나갔다. 또 못된 외부 세력들의 분열,와해공작으로부터 조직을 지키기 위해 보안지침을 만들어 회원들로 하여금 엄수하도록 했다.

  나는 동포들의 거주 지역이 너무 분산되어 있고 또 멀리 떨어져 있어 접촉,교류가 어렵다는 점에 주목했다. 그래서 회원들의 통일,단결을 위한 동질성 강화와 일체감 조성을 위해 가능한 한 자주 접촉하고 교류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해 무리해서라도 매년 한 차례씩 전체 회원이 한자리에 모이는 총회를 겸한 대회를 갖도록 했다. 그 대회를 84년부터 88년까지는 매년 8월에 열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8월 대회’라 불렀고 그 이후로는 재정난 때문에 2년에 한번씩 10월에 열었는데 ‘10월 대회’라 불렀다. 지역을 바꾸어 가며 열었던 이 대회는 2박3일 동안 참가자들이 시위도 하고 집중적으로 학습과 토론도 하는 정치집회이자 연합수련회였다. 또 즐겁게 어울려 놀기도 하는 신나는 잔치마당이기도 했다.

  대회의 일정은 크게 나누어 백악관,UN본부,영사관 등을 상대로 한 시위와,제3세계 운동 연대,해외운동 발전,조국의 평화와 통일,2세 운동,동포사회 운동 등을 주제로 한 학습과 토론 그리고 대화와 놀이 및 정기총회로 짜여졌다. 참가자들은 한청련 회원들과 예비회원들,연대하는 타민족 형제들과 유럽,일본,호주, 캐나다 등지의 동포 청년 운동가들 그리고 후원자 들이었다.

  한청련은 한겨레와 해외한청련이 결성되자 대회를 함께 주최하고 준비해 나갔다. 8월 대회와 10월 대회는 나같이 영어를 잘 못하는 참석자들과,타민족 형제들이나 2세들처럼 우리말을 잘못하는 참석자들을 위해 동시 통역시설을 준비하는 등 철저한 준비와 알찬진행 덕분에 항상 성공적으로 끝났다.

  나는 해외 동포 청년들이 올바른 통일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남부조국과 북부조국,그리고 미국을 객관적으로 봐야 하고 남북을 하나로 보는 통일된 조국관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올바른 민족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노력했다. 나 자신을 스스로 해외운동 개척,강화를 위해 일정 기간 파견 나온 사람으로 생각하여 내가 귀국하게 되더라도 해외운동이 해외 동포들 스스 로의 힘으로 변함없이 지속될 수 있도록 만들어놔야겠다고 생각하여 가능성이 있는 회원들의 지도력과 조직의 강화를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지도력과 조직의 강화를 위해서 한청련 초기부터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연합 임원들의 회의인 중앙 위원회와 각 지역 대표위원들의 회의인 대표위원회를 매년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열도록 했다. 그리고 2박 3일 동안 진행되는 대표위원회에서는 희망하는 모든 회원들은 참관할 수 있게 했다. (87년에 한겨레가 결성된 후부터는 한겨레의 대표자회의를 한청련의 대표위원회와 함께 열었기 때문에 회원들은 그 회 의를 ‘합동회의’라 불렀다.)

   또한 나는 동포 청년들이 너무 비과학적이고 비조직적인 생활을 하는 데 놀라 사업 활동을 할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일상생활 속에서도 과학적 사고와 조직적 실천을 할 수 있도록 철저하게 훈련시켜 나갔다. 어떠한 일을 하더라도 의의와 목적을 정확히 인식하고 치밀한 준비를 한 후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하고 실천 속에서 모범을 보여 갔다.

  한청련의 조직시험 문제에는 남들이 보면 웃을 문제도 출제했다. 그 중 두 가지만 소개해 보겠다.

1. 회원들이 어떤 동포로부터 저녁식사 초대를 받아 함께 가기로 했다. 어떤 준비가 필요한가?

정답: 초대자의 이름과 전화번호,주소를 기입한 정확한 약도를 만든다. 마당집과 한청련을 소개할 전단과 자료 그리고 적당한 선물을 준비한다. 타고 갈 자동차를 점검한다.

2. 마당집에 불이 났다. 맨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정답: “불이야!” 하고 외치며 불을 끈다. 불가능할 때는 전화로 소방서에 신고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회원들은 “중요한 서류를 챙겨 밖으로 피한다.’고 했다.)

  여하튼 시간이 흐르면서 한청련 회원들은 상당한 수준의 의식을 갖추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높은 동질성,통일성,규율까지 만들어 냈다. 또한 한청련 조직은 제3세계 운동을 포함한 미국 내의 모든 진보적인 운동 세력들 가운데서 유일무이한 청년학생들의 운동조직,가장 맹렬한 사업 활동을 하는 통일성을 갖춘 전국적인 운동조직,회비 납부율이 95%를 웃도는 엄격한 규율의 특이한 활동가 조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터닦기와 틀잡기 – 문화운동(1)

  재미동포들의 운동에는 문화운동이 없었다. 운동 단체들이 주최한 집회나 시위에 나가 보아도 문화운동적 요소는 거의 없었고 노래도 ‘우리 승리하리라와 ‘부름받아 나선 이 몸’,그리고 ‘고향의 봄’만 부르고 있었다.

  동포들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데 필요한 민족정서를 일깨우기 위해서,또 운동의 대중화를 위한 선전교육을 위해서,그리고 회원들의 통일 단결을 위한 정서의 통일을 위해서라도 나는 문화운동이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문화운동의 경험도 기량도 없으면서 광주에서 문병란 선생님,황석영 형님,김남주 시인으로부터 얻어들은 보잘 것 없는 지식과,광주의 극단 광대를 후원했던 얄팍한 경험을 최대한 활용하여 문화운동을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민족학교는 설립 직후부터 탈춤강습과 우리노래 보급을 하고 운동가요 테이프와 ‘조국의 노래’라 이름 지은 운동가요집을 만들어 보급 판매하기 시작했다. 또 청년학교는 조국에서 만든 판화를 널리 보급하기 위해 옵셋 인쇄로 수천 장을 만들어 보급 판매하였다. 민족교육봉사원에서는 84년에 한청련 회원 한 명을 광주로 파견하여 사물놀이를 배워오게 한 후 풍물 강습을 시작하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 지역에 한청련이 조직되고 마당집들이 설립되자 문화운동도 서서히 기틀을 잡아가기 시작하였다. 운동가요 테이프도 10여 종을 편집 제작하였고,‘조국의 노래’도 몇 차례 개정 증보판을 발간하였으며 상당수 회원들이 탈춤도 추고 사물도 칠 수 있게 되었다.

  85년은 미주의 문화운동사에 획기적인 해였다. 방미 중이던 황석영 형님이 뉴욕 한청련의 일부 회원들을 묶어 문화패 ‘비나리’를 만든 후 집중 지도하여 조국의 분단과 5.18, 핵문제 등을 다룬 창작 마당극 ‘청산이 소리쳐 부르거든’을 공연했다. 공연을 본 타민족 형제들과 동포들의 평가가 아주 좋아서 동부 지역 여러 곳에서 초청공연을 하게 되었다.

  비나리 활동을 계기로 한청련 회원들의 문화운동 기량은 급속도로 향상되었고 문화운동에 대한 자신감도 부쩍 커졌다. 그렇게 되자 다른 지역 한청련들도 뉴욕의 비나리를 본받아 LA에는 ‘한누리’,시카고는 ‘일과 놀이’,산호세는 ‘새누리’라 이름한 자체 문화패를 다투어 만들어 나갔다. 문화운동 역량이 강화된 각 지역 한청련과 마당집들은 풍물강습,여름철의 문화 강습,대보름 때의 동포 상가 지신밟기 등을 하는 한편 창작극을 공연하고 각종 집회나 시위장에서 사물놀이를 하는 등 활동을 꾸준히 해나갔다.

  91년에는 해외한청련이 그동안 축적한 문화운동 역랑을 결집해 ‘해방의 소리’라는 작품을 갖고 50일 동안 유럽과 호주에서 순회공연을 하기도 했다.

  한청련과 한겨레는 또한 독특한 시위문화도 만들어 갔다. 타 민족 형제들과 함께 하는 각 지역의 각종 연합 연대시위 때마다 풍물패를 앞세웠다. 그 뒤를 하얀 고무신과 하얀 농민복에 하얀 머리띠를 두른 회원들이 타민족 형제들에게는 없는 다양한 색깔의 독특한 농기들을 들고 따라가면 모든 사람들의 눈길이 한청련과 한겨레의 시위대에 집중되었다. 아무렇게나 입고 피켓과 플래카드만을 들고 아무런 악기도 없이 시위에 참가하는 타민족 형제들은 독특한 우리 시위대의 모습과 모든 잡소리를 제압해버리는 위력적인 풍물 소리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는 모든 시위 때마다 우리 풍물패가 맨 앞에 서게 되었을 뿐 만 아니라 타민족 형제들의 독자적인 집회나 시위 때도 우리 풍물패는 빠지지 않고 초청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한청련과 한겨레는 항상 집회 시위가 끝나면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여 아무렇게나 쓰레기를 내버려두고 떠나버리는 타민족 형제들에게 모범을 보여주기도 했다. 민족적 색채가 짙고 조직적이고 박력있는 우리 시위대는 미국뿐만 아니라 호주,캐나다에서도 급속도로 유명해져 갔다.

운동의 생활화 – 문화 운동(2)

  나는 회원들의 품성개조와 올바른 생활문화 창조를 문화운동의 중요한 몫으로 보고 최선을 다해 노력했다. 평소의 생각대로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을 수없이 강조했다.

   “운동은 대중 함께 잘못된 문화와 체제와 법과 제도를 바꾸기 위해서 투쟁함과 동시에 자신과 대중을 교육시키며 , 지향하는 새로운 문화와 체제와 법과 제도를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자신과 대중으로 변화시키는 활동이다. 운동가나 운동조직들 이 대중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 투쟁도 교육도 성공할 수 없다. 대중의 신뢰는 선전선동이나 이론 교육만으로는 얻을 수 없고 실천교육(솔선수범)을 제대로 해야만 얻을 수 있다. 실천교육은 주로 대중들이 보고 느끼고 판단할 수 있는 구체적 생활 속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운동가들은 조직생활은 물론이고 가정생활,직장생활,사회생활 그 자체가 운동이라는 것과 대중들은 항시 운동가들의 생활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철저히 인식하고 운동의 생활화를 이뤄야 한다.”

  나는 ‘자신이 향하는 새로운 사회에 부적합한 자신의 품성과 생활 자세를 고치지 못한 운동가와 생활 속에서 모범을 보이지 못하는 운동가는 대중은커녕 어린이들 교육도 제대로 할 수 없고 대중의 신뢰는커녕 동지들과 자기 자녀들의 신뢰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해 혹독하게 노력해야 한다.’고 누누이 강조했다. 또한 ‘모든 운동조직들은 개개 조직 특유의 문화와 기풍과 분위기가 있는데 대중들은 운동 조직들의 주의 주장보다 그것들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조직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통일,단결을 위해서는 사상 의식의 통일도 중요하지만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인식의 통일과 좀 더 구체적인 사물에 대한 견해의 통일 그리고 사상 의식과 인식과 견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정서의 통일 또한 매우 중요하다고 되풀이 해 강조했다. 내가 정서의 통일이 중요하다고 특별히 강조한 이유 중의 하나는 조국 동포들과 달리 해외 동포들은 여러 면에서 동질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나의 노력과 실천에 영향을 받았는지 각 지역 마 당집과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서서히 남다른 생활문화를 만들어 갔다. 자유주의,개인주의,이기주의 대신 공동체적인 절제와 헌신,희생과 상부상조의 기풍이 자리 잡게 되었다. 사치,허영,낭비,나태,위선 대신 검소,근면,성실, 진실의 기풍이 자리 잡아 삔들바우들은 기를 못 펴고 돌쇠와 곰바우들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

  여성 간부들의 비율을 높이기 위해 노력하고 남성 우월주의 작태에 대한 비판을 일상화했다. 설거지는 무조건 남성 회원들이 하고 자녀가 있는 여성 회원들에 대해 특별한 배려를 했다. 밤에 여성 회원들이 떠날 때는 무사히 차가 출발할 때까지 남성 회원들이 나가서 지켜보아 주는 일도 생활화 했다. 그 결과 여성들의 참여가 많아져 급기야 여성 회원 수가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기혼 여성 회원들은 그동안 미국 여성들처럼 무비판적으로 써왔던 남편의 성을 버리고 자신의 성을 되찾아 쓰기 시작했다. 또 손님들에게 정중히 대하고 어르신들을 깍듯이 모셔 어르신들이 떠날 때는 문 밖까지 나가서 인사하고 장애자들을 정성으로 대하고 흑인 형제들을 비롯한 타민족 형제들을 존중했다. 무절제한 음주를 금하고 주위 환경을 항상 깨끗이 청소 정돈하고,남의 집에 초대받아 갔을 때는 청소와 설거지를 다 해준 후 빈 깡통을 모아서 가지고 돌아왔다. 결혼식은 개량형 전통혼례식으로 하는 등의 생활문화를 만들어 갔다.

  각 지역 마당집과 한청련,한겨레는 자신의 이름과 자녀들의 이름을 ‘죤’,‘메리’와 같은 강아지 이름으로 쓰는 회원들에게는 우리 이름을 쓰도록 하고,우리말이 서투른 회원들까지도 타민족 형제들을 상대할 때를 제외하고는 가능한 한 우리말만 쓰도록 했다. 그동안 무비판적으로 써오던 명칭과 용어들을 하나 둘 검토하여 멸시와 조소의 뜻이 담긴 교포를 ‘동포’로,침략 백인들이 붙인 인디언을 ‘원주민’으로,한심한 동포들이 멸시와 천대의 뜻으로 쓰는 깜둥이,연탄, 깜씨, 니그로,흑인을 ‘흑인 형제’ 또는 ‘아프리칸 어메리컨’으로,다양한 타민족들을 통칭할 때는 ‘타민족 형제’로 바꿔 쓰고,해외동포는 조국을 하나로 보아야 한다는 뜻에서 분단용어인 ‘남한-남조선’, ‘북한-북조선’을 ‘남부조국’,‘북부조국’으로,‘한국어-한글’은 ‘우리말, 우리글’로,센터를 ‘마당집’으로 바꿔 쓰는 등 언어문화에도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우리들이 남다른 생활문화를 만들어 가자 그것을 좋게 본 회원들의 가족들과 친지들 그리고 일반 동포들의 우리들에 대한 신뢰는 점차 높아져 갔다. 그리고 바꾼 명칭과 용어들 을 회원들이 자연스럽게 쓰게 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 회원들은 서로 지적하고 핀잔을 주고받으며 함께 노력해서 새로 바꾼 명칭과 용어들을 자연스럽게 쓰게 되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손님들이나 일반 동포들과 대화할 때 느꼈던 초기의 어색함도 잘 극복해 나갔다. 손님으로 온 조국의 일부 운동가들은 ‘깜둥이’라는 말을 너무 자연스럽게 쓰고 우리 회원들보다 영어 단어를 더 많이 써서 나를 아주 난처하게 만들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