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활동 2 (운동화와 똥가방)

최근 편집: 2019년 7월 8일 (월) 14:50

국제 외교 연대운동

미국에 온 이후 나는 베트남전 당시의 미국 내 반전운동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필리핀,니카라과,엘살바도르,팔레스타인 등의 미국 내 제3세계 운동과 미국인 형제들이나 단체들의 제3세계 연대운동에 대해서도 보고 듣게 되었다. 또한 나는 미국 내의 좌파운동,평화운동,노동운동,흑인 형제들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의 민권운동에 대해 보고 듣고,실 천을 통해 배우면서 국제 외교 연대운동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국제사회에서 국제 외교 연대운동을 가장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제3세계 운동 세력인 필리핀의 민족민주전선(NDF)도 가장 중요한 지역인 미국에서는 세 차례나 장기 체류 대표단을 파견하는 등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미국 내에서 국제 외교 연대운동 을 가장 성공적으로 하고 있는 제3세계 운동 세력은 엘살바도르의 ‘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이고,과테말라,푸에르토리코,동티모르,카슈미르,티베트 그리고 우리나라 등의 외교 연대운동은 아주 취약하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또 미국 내의 일부 동포 운동가들이 조국의 인권 문제에 대해 가 끔 떠들어대는 미국의 극우 정치인을 지지하거나,냉전논리 분단논리도 극복 못한 채 인권운동 차원의 외교 연대 활동을 해 온 바람에 제3세계 운동권이나 진보적인 미국인 형제들로부터 ‘코리언들은 자신들의 문제도 잘 모른 채 운동을 한다는 비아냥거림을 듣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리저리 궁 한 끝에 나는 국제 외교 연대운동을 ‘인류의 공존공영을 목적으로 하여 구체적인 국제 과제를 해결하기 위한 운동에 주체 적으로 참여하거나,자기 나라 자기 민족의 특수한 과제의 해결을 위해 다른 나라 다른 민족의 지원과 협력을 이끌어 냄과 동시에,다른 나라 다른 민족의 과제 해결을 위해 지원 협력하는 운동’이라고 정의했다. 그리고 우리의 국제 외교 연대운동의 무대로는 미국이 가장 중요하고 적합하며 그 다음은 유럽이라는 결론은 내렸다. 왜냐하면 미국과 유럽은 국제 정치적 영향력이 크고, 제3세계 운동 세력들도 많이 활동하고 있고,UN을 비롯한 국제기구도 많이 있고,국제사회와의 접촉 교류의 기회도 많기 때문이었다. 그 두 곳은 활동도 자유롭고 우리 동포들도 꽤 많이 살고 있으며 미국과 조국과의 관계가 특수하다는 점에도 주목했다.

나는 국제 외교운동을 위한 원칙과 자세를 다음과 같이 세웠다.

  • 우리 민족의 국제 외교 연대운동의 과제는 자주 민주 통일 평화이다.
  • 외교,연대 활동을 할 때는 언제나 자신을 6천만 민족의 대표이자 조국 운동권으로부터 파견된 대표라고 생각해서 어느 때 어느 곳에서라도 민족의 존엄과 조국운동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일이 없도록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 각국의 의회와 정부는 전략 대상이고 대중은 전술 대상임을 명심하여 장기적 안목에서 꾸준히 각국의 운동단체,사회단체 , 종교단체 , 노조,언론계 등을 상대로 한 홍보 선전 교육 활동과 연대활동을 펴나가 대중여론을 우리 운동에 대한 동조, 지지와 방향으로 조성하여 그 여론이 자국의 의회와 정부에 압력을 넣도록 해야 한다.
  • 외교활동은 대상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갖춘 후 구체적이 고 명확한 과제와 목표를 갖고 당당하면서도 진실하게 해나가야 한다.
  • 미국인 형제들과 단체들에 대해서는 우리 운동의 대외적 지향이 평화공존이고 조국과 미국의 대등한 관계 정립의 추구라는 사실을 밝히고 당당하나 정중하게 대해야 한다.
  • 타 국가,타 민족 운동가들에 대해서는 비록 서로의 과제는 다를지라도 궁극적 지향이 우리의 그것과 본질적으로 같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동지적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대해야 한다.
  • 구체적인 연대활동을 할 때는 목적 및 의의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서로의 고유성과 특수성에 대한 존중을 바탕삼아 동반자적 애정과 신뢰를 가지고 성실하게 해나가야 한다.
  • 홍보 선전 교육활동을 할 때는 우리 민족의 문제가 일반적인 제3세계 국가나 민족들의 문제와 달리 고도의 국제성과 고도의 군사긴장이라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고도의 정치력과 지혜를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고 조국의 역사와 현실, 운동의 목표 및 현황에 대한 학습을 철저히 하여 이론 무장을 한 후 논리적,체계적으로 해나가야 한다.

  재미한청련은 국제 외교 연대운동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의욕적으로 황무지를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홍보 선전 교육용 자료들을 영어와 우리말로 만드는 사업부터 시작했다. 초기에는 데이비드 이스터씨가 주도하고 있는 신한정책위원회에서 만든 몇 종의 전단을 약간 손질하여 썼다. 나중에는 핵,주둔미군,분단,인권,노동 등을 다룬 십여 종의 분야별 전단과 구호단추(Button) 십여 종,구호딱지 (Sticker) 네 종을 만들었다. 또 핵군사 문제를 다룬 슬라이드 필름(파멸이냐 생존이냐) 과 조국의 운동권에서 제작한 다양한 주제의 비디오테이프 등 의 시청각 자료들을 영어로 다시 녹음 제작했고 5.18, 핵,주둔 미군,분단 등의 문제를 다룬 대형 걸개그림,각종 가로글막(Placard), 농기,깃발 등도 마련했다.

  재미한청련은 한발 더 나아가 86년에 뜻을 함께 하는 선배들과 함께 워싱턴 DC에 외교 홍보활동을 위한 전문 마당집인 한겨레 미주 홍보원(94년에 이사진 분열로 포기하고 대신 코리아 홍교육원을 설립함)을 설립했다. 한겨레 미주홍보원에서는 조국의 현실과 운동을 다루는 Korea Report 라는 영문 기관지를 부정기적으로 발간하여 20개국의 독자들과  미국 내의 거의 모든 진보단체들과 개인들에게 보급 판매하였으며 Korea Today라는 남부조국의 현실을 알리는 영문 자료집을 발간하여 보급 판매하는 등의 활동을 했다.

  한청련과 한겨레는 그렇게 노력해서 마련한 각종 자료와, 독일과 캐나다에서 제작한 5.18 관련 비디오 테이프,그리고 하비 목사가 주관하는 북미한국인권위원회에서 만든 영문 자료들을 가지고 온갖 집회와 시위에 빠지지 않고 참가하여 보급 판매하였다. 몇 개 지역에서는 타민족 형제들을 상대로 해서 조국과 미국의 관계에 관한 공개토론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한청련과 한겨레가 얼마나 악착같이 홍보 선전 교육활동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두 가지 사례가 있다. 네바다주의 사막 한 가운데서 핵실험 반대 천막농성을 할 때였다. 전기가 없는 사막이라 타민족 형제들은 촛불을 켜고 지내는데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은 발전기를 싣고 가서 농성중인 타민족 형제들을 상대로 틈틈이 조국의 핵과 군사문제를 다룬 슬라이드를 상영하여 농성자들을 놀라게 했다.

  또 89년의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의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행진’ 때는 비디오 확대영사기와 스크린까지 싣고 가서 행진에 참가한 타민족 형제들을 상대로 조국의 현실과 운동을 다룬 비디오를 틈틈이 상영해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해외한청련 차원의 홍보 선전 교육활동도 알차게 진행되었다. 91년에는 문화선전대를 만들어 ‘해방의 소리’ 라는 공연물을 가지고 독일,프랑스,영국 등 유럽 7개국과 호주를 돌며 홍보 선전 교육활동을 벌였다. 93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서 열린 세계인권대회에 장기수들이 살고 있는 독방을 실물 크기로 만들어 가지고 가서 조국의 인권 실태를 폭로하는 등의 활동을 벌여 나갔다.

  한청련과 한겨레는 연대활동 또한 맹렬히 전개해 나갔다. “우리가 가야 그들도 온다’는 구호 아래 각종 연합시위나 집회에도 충실히 준비해서 자발적,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제3세계운동 단체들의 독자적인 집회나 시위에도 열심히 참여하였다. 뿐만 아니라 필리핀에서 열린 ‘평화와 발전을 위한 아태지역 민중회의’와 ‘국제평화대회’,스페인에서 열린 ‘유럽비핵군축 회의와 일본에서 열린 ‘원수폭 금지대회’ 등에 대표를 파견하고 타민족 형제 대표단의 남부조국 방문을 주선 안내하는 등의 연대활동도 충실하게 전개하여 타민족 형제들과의 신뢰를 쌓아갔다.

  한청련과 한겨레는 경험 없는 외교활동도 연구하며 열심히 해나갔다. 진보적인 도시 버클리시를 상대로 외교활동을 해서 86년 5월에 ‘광주민중의 날’ 을 선포하게 했다. 89년과 90년에는 평화협정체결을 촉구하고 유엔 분리 가입을 저지하기 위해 각각 20개국의 UN 대표부를 직접 방문 호소하고 세계 각국의 대표부에 문건을 발송하는 등의 외교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편 ‘재유 한청’, ‘재호 한청련’, ‘재캐나다 한청련’도 독자적인 국제 외교 연대운동을 열심히 해나갔다. 그 중 특히 재유 한청은 유럽지역에 파견 나온 남부조국 운동단체 대표들을 위해 통역 안내하는 등 조국운동권의 외교 연대운동을 보조하는 특별한 활동을 헌신적으로 많이 했다.

  한청련과 한겨레는 그동안의 성과를 토대로 89년에 우리 운동을 집중적으로 지원, 협력하는 타민족 형제들 중심의 연대조직인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 연대위원회’(이하 국제연대위)를 결성하고 워싱턴 DC에 본부 사무실을 마련했다. 90년에는 ‘국제연대위 미주지역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한청련과 한겨레의 이러한 외교 연대활동이 순탄하게 발전한 것만은 아니었다.

  한번은 연대운동에 좋은 경험이 된 사건이 하나 있었다. 우리 조국의 문제를 가지고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신한정책위원회’ 같은 소규모 미국인 형제단체 대표들과 개인들 그리고 동포운동가 몇 명이 1년에 두 차례씩 모여 정보를 교환하는 활동을 협의하는 ‘Korea Organizers Meeting(KOM)’ 이라는 모임이 있었다. 한청련은 85년부터 그 모임에 대표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한청련이 외교 연대활동을 하던 회원 한 명을 규약 위반으로 제명하자 KOM에 참가하는 미국인 형제 단체 하나와 개인 몇 명이 그에 항의하여 한청련을 비난해 오기 시작했다. 나와 한청련은 격분했다. 우리는 “자기 나라가 우리 조국에 지은 죄를 생각해서라도 속죄하는 자세로 연대해야지 자기 나라 정부를 흉내내 제국주의적 자세로 내정 간섭적 행위를 하고 있다. 민족의 존엄과 한청련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그따위 건방진 짓을 용납할 수 없다”고 밝힌 후, KOM과의 관계를 끊고 독자적인 외교 연대운동을 정력적으로 개척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2년이 지난 후 한청련을 비난 했던 미국인 형제들이 그 모임에 나오지 않게 되고,미국인 형제단체가 서면으로 사과를 해왔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단체와 개인들이 간곡히 요청해왔기 때문에 한청련은 다시 KOM에 대표를 파견하게 되었다. 그 사건 이후 한청련과 한겨레는 더욱 분명한 원칙과 자세를 가지고 외교 연대운동을 해나갔고 타민족 형제들이나 단체들도 다시는 그따위 짓을 하지 않았다.

  한청련이 겪은 그 사건은 미국 내 제3세계 운동과 그에 연대하는 미국인 개인 또는 단체들과의 사이에서 나타나는 일반적인 갈등이 표출된 사건 중의 하나였다. 제3세계 문제 해결을 자기 나라 문제 해결을 위한 방도의 하나로 생각하는 일부 진보적인 미국인 형제들이 제3세계 운동과 연대하여 활동할 때는 거의가 다 특정한 나라나 민족의 운동을 택해 집중적,전문적으로 연대해 나갔다. 그런 과정에서 연대운동의 조직화에 대한 미국인 형제들의 자체 요구와 당사국,당사 민족운동 세력의 요구가 맞아떨어질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미국인 형제들을 중심으로 한 연대조직이 만들어졌다. 그런데 그러한 연대조직이 결성되면 그 조직과 당사국,당사 민족 운동 세력과의 사이에 상호간의 관계정립 문제를 둘러싸고 미묘한 갈등이 일어나곤 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러한 갈등은 연대조직이 독자성을 갖고 활동해야 하는가 아니면 보조적 역할을 해야 하는가의 문제를 둘러싼 것이었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독자성을 주장하는 연대조직은 성공하지 못하고 보조적 역할을 자임한 연대조직은 성공했다.

  성공적인 연대운동 조직의 전형적인 예가 엘살바도르 민중 연대위원회 (CLSPES)이다. 그 연대조직은 조직의 지도자로 엘살바도르인 안젤라 산브라노를 추대하는 등 겸손한 자세로 보조적인 연대운동을 해서 미국 내의 제3세계 운동 연대조직들 중에서 가장 모범적인 그리고 성공적인 조직으로 평가받았다. 그렇게 성공적인 활동을 했기 때문에 엘살바도르 민중연대위원 회는 FBI의 불법 도청과 와해 공작을 집중적으로 당했다.

  특정국,특정 민족의 운동과 연대하는 미국인 형제들의 연대 조직이 보조적 역할을 자임하는 경우는 그 연대조직이 특정국,특정 민족의 운동을 지도하는 대표적인 조직,이를테면 아프리카 민족회의(ANC),팔레스타인 민족해방기구(PLO),파라분도 마르티 민족해방전선(FMLN),필리핀 민족민주전선(NDF)과 같은 권위 있는 조직과 연대할 경우였다. 다시 말해서 그 연대 조직이 권위를 인정한 지도 조직으로부터 국제 외교 연대운동의 임무를 부여받고 파견 나온 운동가나 미국에 거주하는 해외동포이면서도 그 지도 조직의 미국 내 대표로 임명된 운동가의 권위를 인정할 경우였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대표적 지도 조직이 없거나,있다 해도 미국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고 또 미국 내의 대표도 임명하지 않은 특정 국,특정 민족운동과 연대하려 하는 미국인 형제들은 자연스럽게 그 나라, 그 민족의 미국 내 동포사회 운동과 연대하게 되었다. 그럴 때면 미국인 형제들은 그 동포사회 운동의 강약 정도 및 대표적 운동조직 유무,그 운동조직의 본국 본거지 운동과의 관계,그 운동조직의 이념,노선, 규모,사업,활동 내용 등을 보고 개인적 차원에서 연대할 것인가 조직적 차원에서 연대할 것인가를 결정했다.

  뿐만 아니라 조직적 차원의 연대를 할 경우 독자적 활동을 할 것인가 보조적 활동을 할 것인가도 결정했다. 따라서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만한 대표적 지도 조직도 없고 미국에 대표를 파견한 적도,미국 내 동포운동가 중에서 대표를 임명한 적도 없는 우리 조국 운동의 외교 연대운동은 자연스럽게 재미동포사회 운동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동포사회 운동이 취약하면 필연적으로 미국인 형제들의 연대운동도 취약하거나 자족적 수준에 머물 수밖에 없고, 앞에서 이야기했던 사건 때처럼 가끔 건방진 짓도 하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한청련과 한겨레는 감당하기 힘든 사명감 속에서 분명한 원칙과 자세를 갖고 외교 연대운동을 개척해 나갔고 조국운동의 명예를 지켜나갔던 것 이다.

  그러한 노력의 성과로 우리운동에 대한 미국인 형제들이나 조직들의 연대운동도 활발해지게 되었다. 연대하는 그들 스스로가 보조적 역할을 자임하게 되었으며,국제연대위 또한 조국운동과 한청련,한겨레의 권위를 인정하고 보조적 역할을 자임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하튼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의 헌신적인 노력의 결과 우리들의 외교 연대운동은 급속도로 성장 발전하였다. 그 때문에 타민족형제 운동가들이나 단체들 사이에서 우리들의 외교 연대 운동은 화젯거리가 되었다. 세계 각지에서 모범적으로 외교 연대운동을 하고 있지만 유독 미국에서만 성공하지 못해 고심하고 있던 필리핀 민족민주전선이 미국 내의 외교 연대운동 역량 강화 임무를 주어 세 번째로 파견한 대표단의 책임자가 두 차례나 나를 찾아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며 조언과 협조를 부탁해 올 정도까지 되었다.

“동포사회에 어떻게 뿌리를 내리게 되었는가?”

“국내 외교 연대운동을 어떻게 개척해 왔는가?”

  한청련과 한겨레는 그동안의 외교 연대운동을 통해 자신감 을 갖게 되자 90년 초에 스위스 제네바에 ‘국제 외교 연대 마당집’을 설립할 것을 결의하고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가 제네바를 택한 까닭은 유럽이 국제 외교 연대운동의 무대로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고 제네바에는 세계여성기구(WILPF), 세계교회협회(WCC) 등과 같은 국제 민간기구들과 국제노동기구(ILO)와 같은 UN 기구들이 모여 있는 데다 지리적으로 유럽과 근동지역,북아프리카 지역을 무대로 활동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제네바 외교 연대 마당집 설립 계획은 나의 국제 외교 연대운동의 강화를 위한 장기구상 중의 첫걸음이었다.

  나는 그때 2000년까지의 10년 동안에 서부 및 남부 유럽,근동지역 , 북아프리카 지역을 맡을 제네바 마당집을 첫걸음으로 하여 UN을 집중적으로 맡을 뉴욕 마당집,북부유럽을 맡을 독일의 베를린 마당집,남태평양 지역을 맡을 호주 마당집,동남아 지역을 맡을 필리핀 마당집,중남미 지역을 맡을 코스타리카(또는 파나마) 마당집,중동지역과 남아시아 지역을 맡을 이란 마당집,중부 아프리카 지역을 맡을 케냐 마당집,남부아프리카 지역을 맡을 남아프리카 마당집 순으로 세계 각지에 외교 연대 마당집을 세워 나갈 장기구상을 했었다.

  그렇게 구상을 한 후 나는 외교 연대 마당집에서 상근하기로 결정된 오상목,이성옥 회원과 함께 제네바에 가서 기초 조사를 마치고,이란에 설립할 마당집에서 근무할 외교 연대 전문 요원도 미리부터 아랍어와 회교에 대한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생각해 마땅한 인물을 찾고 있었다. 그런데 한 회원이 자원하고 나서 흐뭇했는데,그때 국제정세와 조국정세가 격변하기 시작하며 조국의 운동은 침체되기 시작했다. 미국 경제도 불황에 빠져들었다. 그 때문에 외교 연대운동의 장기구상을 백지화시켰고 자금 마련의 토대였던 회원들의 사업도 불황 때문에 제네바 마당집 설립 계획마저 무기한 연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1년 앞도 못 내다본 내 자신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과학적인 정세전망의 중요성,지식과 정보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깨달았다. 외교 연대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일화도 많았다. 그 중에서 조국의 운동권과 관계된 두 가지만 소개하겠다.

  5.18을 한 달 앞둔 92년의 어느 날이었다. 광주에서 부탁이 왔다. 5.18 기념행사에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과 브루스 커밍스 교수를 포함한 유명인사 4명을 초청할 테니 우리말 초청장을 영역하여 초청 대상자들에게 발송해 달라는 것이었다.

  미국에서는 유명 인사들을 초청하려면 약 1년 정도의 시간을 두고 초청해야 하고 초청장에는 교통비와 숙박, 체류비를 어떻게 하겠다고 명시하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한 달도 안 남기고 비용에 대해 언급도 안한 초청장을 보내와서 당황한 나는 광주로 전화를 했다.

“한 달도 안 남았는데 그렇게 갑자기 초청하면 어떻게 갈 수 있어?”

“한 달이면 충분 안 하요? 그 새끼들 뭐가 그리 바쁘다요?”

“최소한 6개월 정도 시간을 두고 초청해야지. 그리고 비행기 값과 숙박비는?

“돈 많은 놈들이니까 자기들 돈 갖고 비행기 표 사서 오라고 하쇼. 먹여주고 재워주는 것은 우리가 책임질 테니까.”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특히 케네디 의원은 간다하더라도 혼자 안가고 서너 명의 수행원과 함께 갈 거라고. 그리고 사례비도 주어야 하고. 여기서는 1시간 정도 행사에 참석하면 만 불 이상 줘야 해.”

“뭔 새끼들이 그렇게 떼 지어 다닌다요. 그리고 사례비 만 불이요? 어림없는 소리 말라고 하쇼. 자기들이 도리어 기부금을 내놓고 가야제.”

초청장은 발송되지 않았다.

90년대의 범민족대회를 한 달 정도 앞두고 서울에서 전화가 왔다.

“이번 범민족대회에 UN에서 100명 정도 참관단을 보내도록 해 주시오.”

“미쳤어? UN이 할 일이 없어서 그런 일을 해?”

“그 새끼들 하는 일이 뭐 있소. 그런 일이나 해야지.”

통화는 빨리 끝났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조국에 있었으면 틀림없이 저렇게 했을 거라고. 그나저나 조국운동의 졸속과 과시와 허장성세가 빨리 없어져야 할 텐데…외교 연대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속상하거나 난처한 경우도 많았다. 조국 운동권의 초청을 받아 행사에 참가하고 돌아온 타민족 형제가 나중에 주기로 약속한 항공료를 안 준다며 비난하고 다닌 경우도 있었다(우리들이 해결했음). 또 국제회의에 참 하거나 미국을 방문한 조국의 운동단체 대표들 중 일부가 한청련,한겨레와 연대하는 타민족 형제들을 만나 낯 뜨거운 짓을 하는 경우도 가끔 있었다.

“우리가 코리아에서 국제연대운동을 가장 활발하게 하고 있다. 우리와 교류하고 연대하자.”

“한청련과 연대하고 있는데..”

“한청련은 대표성도 없고 과격해서 위험하다. 관계를 끊고 우리와 연대하자.”

타민족 형제들은 곧바로 한청련 회원들에게 그러한 대화 내용을 알려주곤 했다. 그럴 때마다 회원들은 민족적 수치감 때문에 고개를 못 들었다.

6년 만의 망명 허가

  81년에 시애틀 이민국에 정치 망명을 신청한 후 몇 년을 기다려도 재판이 열리지 않기에 나는 주위와 상의하여 86년에 변호사를 샌프란시스코의 진보적인 변호사인 마크 밴더후트로 바꾸었다. 변호사 비용은 할부로 했고 북가주에 거주하시는 이만영 선생님이 도움을 주셨다. 그 변호사를 통해 나의 망명 신청을 샌프란시스코 이민국으로 옮겨 제출했다. 그리고 변호사의 요청을 받고 광주에 연락해서 나의 정치 망명 허가 탄원서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윤영규 선생님,조비오 신부님,강신석 목사님, 문병란 선생님 등 재야,종교계,학계 원로 30여 명이 연명으로 탄원서를 보내주셔서 변호사를 통해 법원에 제출했다. 그 후 나는 몇 가지 사업 활동에 매달려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변호사로부터 재판 날짜가 잡혔다는 연락이 왔다.

  87년 4월 17일,나는 변호사와 함께 법정에 나갔다. 판사는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후 검사에게 국무성의 소견을 말하라고 했으나 검사는 소견이 없다고 답했다. 정치 망명 재판에 서는 이의제기 또는 반대 의견을 밝히는 국무성의 소견이 결정적 역할을 하는데 나의 경우에는 국무성에서 소견을 제시하지 않음으로써 나의 정치 망명 허가를 동의해버린 것이다. 국무성 의 소견이 없자 판사는 그 자리에서 나의 정치 망명 허가 판결을 내렸다.

  실로 만 6년 만의 정치 망명 허가였다. 나는 코리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 정부로부터 정치 망명 허가를 받은 사람이 되었다. 기쁘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한 착잡한 심정으로 법정을 나오며 생각했다.

“미국의 지배하에 있는 정권에 쫓겨 미국으로 도망 나와,대중 강연과 시위와 성명서와 전단 등으로 48년 이후의 우리 민족에 대한 미군의 범죄와 5.18 학살 배후조종을 규탄하고,조국에 주둔하는 미군의 철수와 배치한 핵무기의 철거와 작전지휘권의 반환 등을 주장하는 활동을 맹렬히 하고 있는 내가 미국 정부의 법적 보호를 받게 되었으니 도대체 이 나라는 어떻게 된 나라인가? 그나저나 미국 정부가 나의 망명을 허가하는 걸 보니 두환이도 끝났구나. 다음 정권은? 친미개량 정권?”

  어쨌든 내가 정치 망명 허가를 받은 사실이 외신을 통해 나갔다. 한국일보,동아일보 등의 미국 현지 판에는 그 기사가 실렸다,그러나 조국의 언론들은 여전히 침묵으로 일관했다.

  며칠 후 민족학교 식구들과 한청련 회원들이 나의 망명을 축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서 나는 만리타국에 홀로 도망온 놈을 따뜻하게 보살펴주고 도와주신 분들에 대한 고마움에 감정이 복받쳐 올라 나도 모르게 울고 말았다. 김동건 선생님 내외분, 김상돈 장로님 내외분,김용성 박사님,정만수 선생님 내외분,최진환 박사님,전진호 형,이길주 이사님,홍기완,임소영…

  나는 망명 허가를 받음으로써 미국 밖을 여행할 수 있는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신청만 하면 미국 영주권도 받을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LA 한인회장 선거의 승리와 패배

  87년 봄 조국에서 한창 직선제 개헌투쟁이 진행되고 있을 때였다. 나는 LA에서 야심만만한 일을 하나 시작했다. 미주에서 우리 동포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LA의 한인회를 개혁하기 위해 동포 김모 씨를 한인회장 후보로 내세우고 선거운동을 시 작했던 것이다. 그분은 민족학교와 한청련에 우호적이며 후원 도 했고 인권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품도 괜찮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 분에게 세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 당선되면 4.19와 5.18 기념행사를 한인회 주최로 해줄 것. 둘째,한청련 회원들이 한인회관에 자원봉사자로 나가 동포사회 봉사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해줄 것,마지막으로,선거 비용은 꼭 필요한 최저액만 쓰고 선거가 끝나면 반드시 언론을 통해 결산 공고를 할 것 등이었다. 그 분의 응낙을 받은 후 후보로 추대했다.

  당시 미국 각지의 동포 집중 거주지에는 어디에나 한인회가 있었다. 그 한인회들은 필라델피아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다 대사관과 영사관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한인회장들과 임원들도 거의 전.노 일당의 지지자들이서 운동권에 대해 항상 비협조적이거나 적대적이었다.

  나는 미주 최대 동포 거주지인 LA의 한인회를 우리가 추대한 후보를 당선시켜 우리가 주도하고,또 한인회의 공식적인 동포사회 봉사활동을 우리 회원들이 맡아서 헌신적으로 해 나가면,그리고 한인회 이름으로 4.19와 5.18 기념행사를 개최해 나가게 되면,IA 지역을 조국과 민족을 위한 거대한 해외운동의 거점으로 바꾸어 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변화된 LA 한인회의 영향은 각 지역의 동포사회에 파급되어 타 지역 한인회도 서서히 한청련과 각 지역 마당집이 중심이 되어 주도해 나갈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승리할 자신이 있었다.

  나는 73년 전남대학교 농과대학 3학년 재학 중에 친구 한 명을 농대 학생회장 후보로 내세우고 선거운동을 한 적이 있었다. 올바른 학생운동을 위해서는 학내 선거부정을 뿌리 뽑고 훌륭한 학생들이 학생회를 장악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뛰어들었다. 그때 나는 선거비용을 후보등록에 필요한 7백 원으로 정하고 후보로부터 절대로 더 이상 쓰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서 영향력 있는 학생들을 찾아다니며 함께할 것을 호소했다. 선거비용이 7백 원이라는 말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미친 짓 않겠다며 자리를 차고 일어나 버렸다. 그러나 나는 뜻을 같이 하는 몇 명의 후배들과 함께 독심으로 밀고나갔다. 진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우리들의 승리,무투표 당선이었다.

  어쨌든 LA 한인회장 선거에서 윤 모라는 상대 후보는 평통자문위원 출신으로 영사관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고 있었고 돈이 많은 사람이었다. 우리 쪽 후보가 알려지고 민족학교와 한청련이 적극 밀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선거판은 서서히 민주 대 반민주,전두환 반대 세력 대 지지 세력의 대결구도로 바뀌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대로 우리를 겨냥한 추악한 반공소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 규모와 강도는 예상을 뛰어넘었다. 우리 쪽을 공산당이나 친북 세력으로 몰고 심지어 우리 쪽이 이기면 LA 한인회관에 붉은 깃발이 휘날릴 것이라는 등의 어처구니없는 내용의 유인물들이 뿌려졌다. 그리고 주간지 코리언 스트릿 저널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신문들은 윤 후보 편을 드는 기사를 써대기 시작했다. 후보들의 합동유세가 있던 날이었다. 우리 회원들이 풍물을 치며 행진하고 있을 때 윤 후보 쪽의 이사 후보 한 사람이 이렇게 큰 소리를 쳤다.

“저놈들 빨갱이가 확실해. 6.25때 중공군들이 인해전술을 쓸 때 꼭 저렇게 꽹과리를 쳤거든.”

  정말 치졸하기 짝이 없는 반공소동이었다. 윤 후보 쪽은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라스베이거스에 있던 동포 폭력배들까지 동원해서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고 유권자들을 매수해 엄청난 돈을 뿌렸다. 한밤중에도 동포들 집에 우리 쪽 후보 이름으로 전화를 걸어 불쾌하게 만드는 등 조국의 선거 운동에서 쓰였던 온갖 추악한 방법들까지도 총동원했다.

  나는 광주와 서울로 연락해서 LA 한인회장 선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협조를 부탁해서 광주의 십여 개 운동단체들과 민주 통일 민중운동연합의 부의장이신 김승훈 신부님의 지지 격려의 글을 받아 선전 자료로 활용했다. 선거전을 철저하게 민주 대 반민주,반전두환과 친전두환의 대결구도로 몰아갔다.

  선거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내려온 샌프란시스코 회원들과 LA 회원들은 나와 함께 우리 쪽 김 후보의 선거 사무실이 있는 모텔에서 자고 밥까지 해먹어 가며 최선을 다해 뛰었다. 각 지역 한청련도 격려의 글과 성금으로 지원하고 나섰고 방미 중이던 원동석 교수님(목포대 교수)도 반공소동에 분개하여 적극 협조해 주셨다. 약 한 달 동안 사연 많은 선거운동이 끝나고 투표 도 무사히 진행되었다. 개표 과정에서 말썽이 생겨 경찰이 출동하여 지켜보는 가운데 개표를 끝냈다. 결과는 예상했던 대로 우리 쪽의 승리였다. 3백표 차이였다.

  우리들은 환호했다. 해외 동포사회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다며 모두들 흥분했다. 그러나 환호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예상치 못한 사태가 발생했다. 투표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등의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대며 패배한 윤 후보 쪽에서 선거 무효 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미국 내에서는 소수민족 사회 내부의 선거를 둘러싼 시비나 단체 간의 갈등에서 비롯된 소송이 제기되었을 경우에는 대부분의 경우 법원이 재판을 마냥 끌어버리는 방법을 써서 타협에 의한 자체 해결을 유도한다. 결국 양측의 변호사들만 재미보고 소송 당사자들은 돈과 시간만 낭비하게 되어 있다. 소송이 제기되자 LA 한인회는 기능이 마비되었다. 재판 승리에 자신이 있던 우리 쪽도 분노를 참으며 재판 결과를 마냥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조국에서 오신 임진택님의 창작판소리 ‘똥바다’의 순회공연과 유홍준 교수,김용태 선생의 ‘민중미술 슬라이드쇼’ 순회개최,8월 대회 개최,문병란 교수의 순회강연회 개최 등을 하느라고 바쁘게 뛰어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청천 벽력같은 사건이 발생했다. 우리가 당선시킨 김모 씨가 비밀리에 윤 후보 측과 협상을 했던 것이다. 한인 회장직은 자신이 차지하는 대신 이사장과 이사의 과반수를 윤 후보 측이 맡고, 또 자신은 윤 후보 측이 요구한 성명서를 발표하고 윤 후보 측은 성명서가 발표되자마자 소송을 취하한다는 밀약을 맺은 후 곧바로 성명서를 발표해 버린 것이었다. 그 성명서 앞으로는 사상이 의심스러운 일부 운동세력과 관계를 끊겠다는 내용이었다. 언론들은 그 일부 운동세력은 민족학교와 한청련을 지칭하는 것이라고 보도했다. 당선자 김모 씨는 온몸으로 뛰어 자신을 당선시킨 우리들과 지지해 준 동포들을 비열하게 배신해 버린 것이었다.

  나와 회원들은 배신감과 허탈감으로 인해 치를 떨었다. 나는 김모 후보에 대한 판단을 잘못했던 것이고 상대편을 너무 얕잡아본 것을 인정하고 많은 반성을 했다. 우리의 6월 항쟁은 그렇게 승리한 듯 했다가 패배로 끝나버렸다. 부끄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