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활동 3 (운동화와 똥가방)

최근 편집: 2019년 7월 8일 (월) 14:52

‘한겨레운동 재미동포 연합(한겨레)’ 결성

86년 여름에 민족적이고 진보적인 그러나 거의 유명무실해진 미주민련의 어르신들이 나에게 새로운 장년 노년층의 운동체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내가 82년 말에 세웠던 10년 계획 속에는 장,노년층 조직 계획도 포함되어 있었으나 나는 일언지하에 그 요청을 거절했다. 민족학교 설립과 재미한청련 조직 과정에서 겪은 기성 운동권의 중상과 방해공작에 질려 일찌감치 포기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미주민련 의장이신 임창영 박사님 (전 유엔대사,5.16군사 쿠데타 직후 미국에 망명. 96년 초에 작고)께서 다시 한 번 더 간곡하게 부탁하셨다. 난처해진 내가 거절의 명분을 찾기 위해 미주민련을 해체하신다면 고려해 보겠다고 대답했더니 박사님은 즉석에서 해체하겠다고 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장,노년 운동체 조직사업을 시작해야만 했다.

나와 각 지역 한청련 회원들은 1년 동안 그동안의 사업 활동을 통해 알게 된 각계 각층의 선배님들 중에서 적합하다고 판단되는 분들을 모시고 대화와 학습을 하는 등의 준비를 거쳤다. 87년 8월 LA에서 한청련 주최로 열린 “민족의 통일과 단결을 위한 해외동포 대회”때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 (이하 한겨레)’을 결성하였다. 한겨레는 LA 등 7개 지역에 지역 조직을 둔 전국적으로 재미한청련과 비슷한 목적을 가진 그러나 통일성과 규율이 조금 떨어진,36세 이상의 동포들을 회원으로 하는 장년,중년,노년층의 조직체였다. 거의 모든 사업과 활동을 한청련과 함께 하였고 각 지역 마당집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초기의 한겨레는 조직 역량이 취약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36세가 되어 재미한청련을 졸업한,훈련되고 경험이 많은 그리고 지도력이 있는 청년들이 자동적으로 입회하게 되자 점차 자연스럽게 그 조직력이 강화 발전되었다. (나는 결성 초기부터 한겨레의 평회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렇게 한청련과 마당집 그리고 한겨레를 조직하면서 나는 동포청년들의 교육과 문화운동에도 힘을 쏟았다.)

87년 대선과 절망

  87년 4월에 미국 정부로부터 정치 망명 허가를 받으면서 나는 미국 정부가 조국에 개량적 친미정권을 수립하기로 했다는 것을 감지했었다. 그 이후의 6월 항쟁, 6.29 선언,직선제 개헌 등으로 이어지는 조국의 정세 변화와 미국에서 일어난 몇 가지 사건들은 나의 예감이 맞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다.

  미국에서도 뉴욕과 LA 등지에서 조국의 6월 항쟁과 보조를 맞추어 궐기대회와 시위가 개최되었다. 각지의 행사 때마다 상상도 못한 일들이 우리들을 놀라게 했다. 행사의 주최 측은 그 동안 줄곧 우리들을 친북이니 빨갱이니 하며 중상하던 교회 운동 세력과 DJ 지지 세력들이었다. 그런 행사에는 전두환 일당을 지지하고 우리를 적대시했던 통일교도들과 보수 기독교단 신도들이 적극 참가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국의 민주화 문제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일부 미국 정계 인사들까지도 참가하였고,궐기대회 때는 미국 국가까지 장엄하게 울려 퍼져 누가 봐도 미국의 입김이 뒤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그때 조국에서 오신 스님 한 분이 우리가 궐기대회장에 들고 나간 ‘미군철수’,‘핵무기 철거’ 피켓을 우격다짐으로 빼앗는 횡포를 부렸다. 더구나 터무니없이 미국 국가를 연주하는 주최 측의 자세에 분노해서 더 이상 우리는 그런 집회와 시위에는 참가하지 않았다.

   6.29 선언이 나온 이후 동포 인권 운동단체들은 조국의 민주화가 다된 것처럼 희희낙락했다. 그러나 나는 미국의 기만적 계량화 음모를 예의 주시하며 회원들에게 일시적 정세 호전에 낙관하여 방심하거나 동요하지 말 것을 주문했다. 장기적 전망을 갖고 운동을 충실하게 해나갈 각오를 새롭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국에서 대통령직선제를 주 내용으로 하는 개헌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고 나는 연말의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80년 초의 세칭 ‘서울의 봄’ 때처럼 DJ와 YS간에 후보 경쟁이 시작되고 그것이 분열로 이어지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러는 한편,분열의 대가를 톡톡히 치러 본 두 사람이기에 비록 경쟁은 하겠지만 자멸적 분열로까지는 안 가리라 생각하며 조국정세의 변화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국의 정세는 내가 우려했던 방향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야당의 분열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리라 믿었던 조국의 운동권마저 ‘비판적 지지’ 운운하는 세력들로 인해 분열의 길로 치닫기 시작했다. 나는 분노와 절망으로 몸부림쳤다.

  결국 대통령 자리에 눈이 멀어버린 DJ는 자신이 YS보다 더 훌륭한 대통령감이고 당내 경선을 통해서는 자신이 후보가 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자,YS와 힘을 합쳐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은 고문으로 자신의 추종자들은 간부나 당원으로 활동하고 있던 신민당에서 추종자들을 이끌고 나가 평민당을 만든 후 스스로 후보로 나서버린 것이다.

  DJ는 야당을 분열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감정을 이용해 국민들까지 분열시키기 시작했다. 남북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는 것도 이리 괴롭고 서러운데, 지역감정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는 것을 조금이라도 걱정했다면 DJ는 호남인들에게 지역차별과 지역감정 조장의 원흉이 역대의 독재정권이지 영남인들이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인식시키고 추악한 지역차별은 참다운 민주정부의 수립을 통해서만이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서 망국적인 지역감정과 갈등을 완화시키는 노력을 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직 호남 출신인 자신이 집권해야만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호남인들을 현혹하여 민주화운동의 중심세력이던 호남인들을 자신과 자신의 당에 대한 맹목적 지지 세력으로 오도,변질시켜 자신과 당을 제외한 다른 정치인이나 당은 무조건 배척하게 만들어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망국적인 지역분열,지역대결을 전제한 ‘4자필승론’까지 내세우며 선거운동을 하기 시작한 DJ의 분열행위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DJ의 분열 행위는 그 어떤 변명을 해도 용서할 수 없는 반역사적이고 반민족적인 행위였다. 수많은 조국 동포들이 죽음과 고문과 투옥과 가정불화와 가난을 무릅쓰고 줄기차게 투쟁하여 미국 정부와 전.노 일당으로 하여금 전략적 후퇴를 하지 않으면 안 되게끔 만들어 놓았는데,DJ는 그 피와 땀과 눈물로 쟁취한 역사적인 기회를 자신의 야심 충족의 기회로 생각하여, 똘똘 뭉쳐 대결해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분열 행위를 함으로써 싸우기도 전에 미국과 전.노 일당에게 승리를 안겨주고 만 것이다.

  나를 격분시키고 절망하게 만든 것은 DJ뿐만이 아니었다. 민족민주운동과 선거운동을 혼동하여 이의 분열행위를 방조 지지함으로써 전술적으로는 DJ를 돕고 전략적(결과적)으로는 미국과 전.노 일당을 도와버린 ‘비판적 지지’ 운운하는 일부 운동권 세력도 절망하기에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과감한 투쟁을 전개해 온 그들이,그렇게 치열한 학습과 사상 투쟁을 해온 그들이,그렇게 과학적 사고와 조직적 실천을 강조해 오고,그렇게 통일 단결을 외쳐온 그들이 피어린 투쟁을 통해 쟁취한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여 전.노 일당을 집중 공격하고 신민당을 적극 지지하여 선거전을 ‘민주 대 반민주’ 대결 구도로 몰아가 미국과 전.노 일당의 음모를 분쇄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이의 적전 분열 행위를 방조,지지했을 뿐만 아니라,한술 더 떠 DJ가 선거전을 ‘민주 대 반민주’ 대결 구도는커녕 반운동적이고 반민족적인 추악한 지역대결 구도로 몰아가는 것까지도 방조 지지하여, 싸우기도 전에 미국과 노태우 일당에게 승리를 안겨주어 버렸으니 나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비판적 지지 세력들은 미국과 전.노 일당 그리고 그들의 지지 대중들을 어떻게 그렇게 과소평가할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그렇게 대중들의 의식 수준과 자신들의 역량을 과대평가할 수 있었을까? 정말로 그들은 분열해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최악의 경우에도 지켜내야 할 운동의 존엄성과 대의,그리고 목숨을 걸고라도 지켜내야 할 대중의 신뢰를 어떻게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또 선거 패배 이후의 운동을 고려도 하지 않은 채 승리가 보장된 최후의 대결인 양 어떻게 그렇게 맹목적으로 DJ를 지지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정말로 DJ에 대한 지지와 YS에 대한 배척이 민주 대분열이 아니고 훌륭한 민주 대연합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정말로 자신들이 DJ와 평민당을 견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을까? 그들은 정말로 김대중이가 YS 보다 더 많이 탄압받았기 때문에 더 많이 민주화운동을 해왔다고 생각했고 김대중이가 YS보다 더 진보적이고 더 도덕적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대중들은 DJ가 분열해도 노태우나 YS보다 더 많이 지지해줄 것이라고 믿었을까?

  나는 미국 현지에서 미국의 CIA 요원들이 대거 조국으로 들어가 DJ와 YS의 분열 조장,분열 유지 공작을 하고 있다는 소식과,심지어 미국의 군 정보기관 최고위급 책임자들까지 조국으로 들어가 공작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또 조국으로부터는 운동권의 분열 심화,지역감정 격화,후보 단일화 불가능 등의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광주운동권에 실낱같은 기대를 걸고 전화를 걸어 호소하기 시작했다.

“후보 단일화를 위한 최후의 열쇠는 광주운동권에 있다. DJ에게 강력한 압력을 넣어 사퇴하게 하라.” 그러나 대답은 한결같았다.

“여러 면에서 YS보다 DJ가 더 낫다. 여기서 그런 짓 했다가는 몰매 맞아 죽는다.”

절망감 때문에 늘어져 있던 나는 회원들에게 말했다.

“노태우가 당선된다. 노태우의 득표 숫자는 YS와 이의 득표 숫자를 합한 것보다 적을 것이다. DJ는 3등 날 것이다. 조국의 운동 세력 대부분이 엄청난 과오를 저질러 앞으로 운동 역량이 급격히 약화될 것이고 대중의 신뢰도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우리들의 짐이 더 무거워졌다. 멀리 보고 묵묵히 일해 나가자.”

그리고 또 이렇게 제안했다.

“후보 단일화가 안돼서 실패가 확실하니 독자 후보라도 지원해서 운동의 대의를 선전하고 후보 단일화를 위한 최후의 압력을 넣도록 하자.”

나의 제안에 따라 회원들은 독자 후보 진영에 후원금을 보내고 격려의 전화를 아낌없이 해줬다. 선거를 10여 일 앞둔 어느 날 연대운동을 하던 타민족 형제 운동가들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분열되어 있다가도 뭉쳐야 할 때인데 너희들은 뭉쳐 있다가 분열해서 싸우냐? 분열해도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너희 나라 대중들의 의식 수준이 높고 운동 세력의 힘이 강하냐?”

“괴롭다. 더 이상 묻지 말라. 나도 이해 못하고 있다.”

선거가 끝나고 개표 결과가 나왔다. 예측한 대로였다. 개표가 끝나자마자 유럽의 모 운동가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울에서 국제사회에 컴퓨터 부정선거를 폭로해 달라는 부탁을 해왔다.”

  나는 정말로 분통이 터지고 말았다. “비열한 놈들! 컴퓨터가 개표하고 컴퓨터가 검표하나? 컴퓨터만 계산할 줄 알고 사람은 계산을 못하나? 개표 종사원들,참관인들,지구당이나 중앙당 직원들은 덧셈 뺄셈도 못하고 각 후보 득표 숫자도 파악 못하는 머저리들인가? 나쁜 놈들! 분열해서 져놓고 애먼 컴퓨터 핑계를 대다니..”

  87년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내가 운동에 참여한 이후 가장 큰 절망감을 맛보게 해준 87년은 그렇게 가버렸던 것이다.

‘미주 한겨레신문’ 발간 시도와 실패

  88년이 되어 나는 회원들과 함께 또 하나의 일을 시작했다. 동포들을 의식화하고 동포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언론 매체가 꼭 필요한데 자체 역량으로는 주간지 발행도 불가능한 실정이어서 우리들은 신문 노래만 부르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조국의 한겨레신문사에서 미주지역 지사를 맡아서 해 줄 사람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발 벗고 나섰다. 조국의 한겨레 신 문에 미주 현지판을 붙여 보급하자. 현지판은 역량에 맞게 처음에는 주 1회부터 시작하여 점차 발행 횟수를 늘려가자. 조국에서처럼 뜻있는 동포들과 함께 주식회사를 만들어 발간해 보자. 우리들은 그렇게 결정하고 난 다음 각 지역 동포사회를 누비고 다녔다.

  동포들을 설득해 조국에서 해직된 언론인들을 포함한 9백 7십 명을 모아 ‘미주 한겨레신문 발간 준비 위원회’를 결성하고 장단기 사업계획서를 작성한 후 조국의 한겨레신문사에 제출했다. 그러나 89년이 되어도 한겨레신문사에서는 어떠한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기다리다 지친 우리들은 모든 것을 백지화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들은 노 정권의 중상모략으로 인해 한겨레신문사에서 우리를 얼마나 부담스럽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고려하지 않고,또 한겨레신문사의 내부 사정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의욕만 앞세우고 일을 추진했다가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전두환, 노태우 방미 규탄시위

  미국에 있는 동안에 5.18 학살 원흉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몇 차례씩 다녀갔다. 그들이 올 때마다 대사관과 영사관은 바퀴벌레가 권력을 잡아도 아부하고 지지할 것이 뻔한 동포사회 유지란 작자들과 한심한 일부동포들을 동원해 그들로 하여금 공항 화물터미널에서 환영의 박수를 치게 했다. 그리고 조국의 언론들은 그때마다 그들의 환영이 미주 동포 전체의 환영이나 된 것처럼 크게 보도하곤 했다.

  한청련,한겨레는 전.노가 올 때마다 도착하는 공항과 숙소 겸 리셉션 장소로 쓰는 호텔,그리고 연설하는 대학 등을 악착같이 쫓아다니며 규탄시위를 했다. 물론 다른 운동단체 사람들과 일부 동포들이 함께 하기는 했으나 언제나 그들은 소수였다. 조국의 언론들은 우리들의 시위 사실을 아예 안 다루거나 다루어 보았자 겨우 몇 줄을 할애하는 정도에 그치곤 했다.

  전두환이 시애틀에 왔을 때,돈이 없어 비행기로 못 가는 샌 프란시스코와 LA 회원들이 18시간과 24시간을 자동차로 달려가 시애틀 회원들과 합류해서 규탄시위를 했던 것처럼,전.노가 LA나 샌프란시스코,시애틀로 오면 서부지역 회원들이 집결해서 시위를 하고 워싱턴 DC나 뉴욕으로 오면 동부자역 회원들이 집결해 시위를 하곤 했다. 한번은 사정을 잘 모르는 수행 기자들이,가는 곳마다 똑같은 복장을 하고 똑같은 구호를 외치고 똑같이 풍물을 치며 시위하는 우리 시위대를 보고는 자신들처럼 계속 비행기를 타고 쫓아다니는 같은 시위대로 착착하고 “그 사람들 기동력 한번 끝내준다.”고 말해 웃은 적도 있었다.

  나는 전두환이 LA에 왔을 때 규탄 시위를 하면서 묘한 경험을 한번 했다. 우리는 그때 흡혈귀 모습을 한 전두환 인형을 만들어 군복을 입히고 군화를 신긴 후 목에 밧줄을 걸고 끌고 다니며 시위를 했었다. LA공항 화물터미널 앞 인도에서 전두환의 도착을 기다리며 시위를 할 때 우리들은 그 두환이 인형을 길바닥에 눕혀 놓고 오갈 때마다 사정없이 짓밟으며 분풀이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시위에 참가한 타민족 형제들도 웃으면서 그 인형을 짓밟았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더 이상 밟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부탁해 놓고 나서 나의 묘한 감정에 놀라 많은 생각을 했다. 제기랄! 나도 어쩔 수 없는 놈이구나. 두환이도 내 민족이라고…

5.18 기념행사 개최

나는 해외동포들이 5.18 정신을 올바르게 기념, 계승하고 전.노 일당의 학살만행을 두고두고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알찬 5.18 기념행사를 해마다 꾸준히 해나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각 지역 한청련,한겨레는 지역적 조건에 따라 단독 또는 공동으로 개최하거나,LA에서처럼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함께 ‘5월제 추진위원회’ 라는 상설기구를 만들어 개최해 나갔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는 다른 운동단체들의 5.18에 대한 관심이 식어감에 따라 LA를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지역에서 한청련,한겨레가 일반 동포 단체들의 후원 하에 단독으로 기념행사를 개최해 나가게 되었다. 행사 내용도 초기에는 강연을 중심으로 했다. 그러나 동포들의 참여도가 떨어지기 시작한 80년대 말부터는 조국의 영화운동 단체들이 제작한 영화필름을 구해 상영하는 등 문화행사 중심으로 바꾸어 나갔다.

  한청련,한겨레와 5월제 추진위원회는 조국의 문화운동 단체들과 김용태(민예총 사무총장) 형님의 적극적 협조 덕분에 노 정권의 감시망을 뚫고 제때에 필름을 입수하여 89년 5.18 기념행사 때는 ‘오 꿈의 나라’,90년에는 ‘파업전야,91년에는 ‘어머니,당신의 아들’,92년에는 ‘닫힌 교문을 열며’ 등을 기념식에 이어 상영하는 등 꾸준히 5.18 기념행사를 개최해 나갔다. 내가 귀국한 뒤로도 한청련,한겨레,5월제 추진위원회는 94년에는 광주의 극단 토박이를 초청하여 미주 전역에서 연극 ‘모란꽃’을 공연하고 95년에는 광주의 가수 박문옥,오창규씨를 초청하여 각 지역에서 노래공연을 하고 96년에도 극단 토박이를 초청하여 연극 ‘금희의 오월’을 순회공연 하는 등 지금도 계속해서 5.18 기념행사를 충실하게 개최해 나가고 있다.

건강이 나빠지다

  87년부터 내 몸에 조금씩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허리가 안 좋아 가끔 고생을 한 것 빼고는 앓아누운 적이 없는 건강한 체질이었다. 그런데  87년부터는 1년에 한 두 번 씩 나하고는 전혀 인연이 없던 감기에 걸리기 시작하더니 88년부터는 이가 흔들리기 시작하고 또 자주 허리가 불거져 나와 반듯하게 서서 걷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서서 걸어야 했다. 89년부터는 깊은 잠을 못자고 하룻밤에 대여섯 번씩 잠을 깨곤 했다. 특히 89년 말부터는,허리가 한번 뒤로 불거져 나왔다하면 며칠 지나면 저절로 다시 들어가곤 하던 예전과 달리,한 두 달 동안 계속 그 상태를 유지해 나를 괴롭혔고,나 스스로 생각해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자주 신경질과 화를 내게 되었다.

  그렇게 몸이 나빠지자 겁이 난 나는 90년 말을 기해 그 즐기던 담배도 끊어 버렸다. 할 일이 많은데 이러다가 폐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건강한 몸으로 조국에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나 나는 회원들의 정성스런 보살핌과 정효정 씨와 김정주 선생님의 헌신적인 치료 덕분에 92년부터는 건강을 되찾게 되었다. 그렇지만 회복되었어도 그전처럼 밤새워 이야기하기가 쉽지 않을 정도의 건강이었다.

조국 운동에 대한 연대와 지원

  한청련과 한겨레는 국제 외교 연대운동을 벌이는 한편 조국 운동에 대한 연대활동과 지원활동 또한 어려움 속에서도 헌신적으로 해나갔다. 85년이 되자 광주에서 연락이 왔다. 전국차원의 ‘5`18 광주 민중혁명 기념사업 및 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5추위)가 결성 되어 모금운동을 시작했으니 미국에서도 호응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때는 조직역량도 아주 약하고 재정적으로 허덕이고 있을 때였다. 하지만 한청련은 총력을 다해 모금운동을 펴기로 결의 하고 뜻을 같이 하는 동포들과 함께 조국의 그것과 같은 이름 의 추진위원회를 LA, 북가주,시카고,뉴욕,필라델피아 5개 지역에 구성했다. 그리고 1년 동안 모금운동을 전개했다. 많지는 않았지만 당시의 우리 처지나 역량으로는 대단한 액수인 2천8백만 원(약 3만5천 불)을 모아 전액을 조국의 5추위에 보냈다. 당시의 모금활동 때 LA 지역에서는 김수남 교수(조선대 교수)가 몇 개월간 직장까지 쉬면서 모금활동을 해 많은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또 86년의 조국의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에 연대해 뜻 있는 동포들과 함께 7개 지역에 민주개헌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서면 접수활동을 펴 한 달 만에 1만1천 명의 서명을 받아 조국으로 보냈다. 또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규탄투쟁에 연대해 뉴욕에서 5일간의 단식농성을 전개하고 전두환 정권 영구집권 음모분쇄를 위한 투쟁에 연대해서는 LA에서 10일간의 단식농성을 전개했다.

  88년 조국의 백기완 선생님이 주도한 민족통일 마당집 한돌 쌓기 운동에 호응해 뜻을 같이 하는 동포들과 함께 캐나다 토론토를 포함한 10개 지역에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1년 동안 모금운동을 전개해 미주운동 사상 최대 액수인 7천만 원(약 8만5천 불)을 송금했다. 조국의 ‘국토순례대행진과 8.15 남북청년학생회담’,‘제1차 범민족대회’와 ‘한총련 출범식’에는 각각 두 명씩 대표를 파견했다.

  피코 코리아 노조 대표단이 못 받은 임금을 받기 위해 미국에 와 피코 본사를 상대로 투쟁할 때와 미국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후 재판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왔을 때 함께 농성과 시위를 하고 대표단 지원을 위한 모금운동을 펴는 활동도 했다. 재미동포가 사주인 조국의 US Magnetics사의 노조투쟁에 연대하여 LA에 있는 본사 앞에서 시위도 하고 결정적인 정보를 노조에 제공하는 등의 활동을 펴 투쟁을 성공시키는 데 이바지했다. 전교조 대표단의 북미주 방문 활동도 다각도로 지원하였다.

  또 조국의 정치범들에 대한 옥바라지를 계속하는 한편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워싱턴 포스트 지에 광고를 게재하고 김근태씨,김현장-김영애씨 부부,고현주씨,흥성담씨의 석방을 위해 두 차례에 걸쳐 10여 명의 미국 상 하의원들과 수십 명의 각계 지도자들에게 호소하여 석방탄원서를 노 정권에게 보내는 등 정치범 석방운동을 폈다. 조국의 ‘국가보안법 철폐와 장기수 석방을 위한 운동’에 연대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포들과 함께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을 위한 미주본부를 결성한 후 연대단식과 시위 등을 하였다. 조국의 평화운동을 위해 재정지원도 하고 각종 시청각 자료들도 보내는 등 조국운동에 대한 다양한 연대활동과 지원활동을 꾸준히 계속해 나갔다.

“거지들 모임 같다.”

나는 조국에서 운동을 할 때 뼈저리게 느꼈던 운동자금과 재정안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말로 할 짓 못할 짓 다 했다. 나는 운동자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운동가나 운동조직의 자세부터 바로 잡혀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생각이었다. 그에 따라 맨 먼저 회원들에게 헌신적인 참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기본적인 자기생활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재산과 소득을 빼고는 운동자금으로 다 써야 한다는 것,그렇게 할 때만이 대중들의 후원을 떳떳하게 받을 수 있는 자격이 생기고 또 운동도 제대로 할 수 있다는 것,운동가나 운동조직의 의식 수준이나,자세,규모,사업,활동 내용에 비추어 운동자금이 너무 적으면 운동의 발전이 없고 너무 많으면 운동이 타락하거나 내실이 없어지게 된다는 것을 누누이 강조했다. 또 운동조직은 자급자족의 원칙을 굳게 지켜 최소한 기본적인 운영자금을 성원들 스스로 마련하고 그 외의 자금은 대중의 후원을 받아 해결하되 절대로 사심이 담긴 조건을 단 후원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헌신적 자세로 올바르게 운동을 해 가면 대중들의 후원은 필연적이라는 것,단 1불을 후원금으로 받았을 때도 그 후원금을 내신 분은 그 1불을 조국과 민족을 위해 알차게 써달라고 우리들에게 위탁했다고 생각하여 책임감을 가지고 알차게 써야 하고 공개,합법운동을 하고 있는 만큼 꼭 결산서를 보내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는 것도 강조했다.

  내가 조국에서 운동할 때 가진 것도 없으면서 재산목록을 작성한 후 꼭 필요한 속옷,고무신,등을 포함한 20여 가지의 물건들만 남기고 나머지 것들은 동지들에게 다 주어버렸는데 그 때 나의 재산목록 1호는 손목시계였고 2호는 만년필이었다는 이야기와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동지들과 함께 빙과도 팔고 월부 책장사도 하고 포장마차를 운영하기도 했었다는 이야기 따위를 들려준 후 소득증대와 소비절약을 구호처럼 되풀이했다.

  각 지역 마당집과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은 운동자금 마련을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했다. 깡통과 중고품 수집 판 매,판화제작 판매,마당집과 집회 시위장에서의 도서 자료 판매와 같은 기본적인 수익사업 외에도 일감을 받아와서 옷에 단춧구멍 뚫어주기, 부품 조립해주기,인쇄물 분류해주기도 하고 축제나 옥외 행사장에서 김치나 불고기 같은 우리 음식 판매, 발렌타인 날이나 어버이날의 길거리 꽃 판매,연말의 크리스마스 장식용 나무 판매도 해나갔으며 심지어 LA 한청련 회원들은 집단으로 영화 촬영장의 엑스트라로 나가기까지 했다.  

  수익사업 중 가장 고생이 많았던 것은 크리스마스 장식용 나무 판매사업이었다. 한청련,한겨레는 2년에 걸쳐 나무 판매를 해 2,400만 원(3만 불)을 벌었는데 다른 수익사업은 지역사업 이었지만 이것은 연합사업이었다. 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11월 하순부터 크리스마스까지 한 달간을 하루 24시간씩 통째로 매 달려야 하는 참으로 고달픈 수익사업이었다. 각 지역에서 파견된 회원들과 일부 뉴욕 회원들은 뉴욕의 맨해튼 중심가 목 좋은 곳을 몇 군데 골라잡은 후,받아 온 나무들을 인도 한쪽에 쭉 늘어 세워 놓고 혹독한 추위 속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대소변도 제대로 못 보면서 가정집에 배달도 하고 훔쳐 달아나는 사람 추격도 하고 밤새워 보초를 서기도 하는 고생을 하며 팔았다. 나머지 뉴욕 회원들 또한 한 달 동안 판매하는 회원들에 게 끼니마다 따뜻한 국물이 있는 식사를 마련하여 갖다 주고 가끔 교대도 해주는 고생을 했다.

  한청련은 재정안정을 위해 회원들에게 매월 내는 회비 외에도 고통 받는 조국운동가들을 생각하며 한 달에 두 끼씩 굶은 후 두 끼 값을 내게 하고,1년에 24시간씩 특별노동을 한 후 그 시간을 최저임금으로 계산해 돈을 내도록 했다. 뿐만 아니라 87년부터는 남부조국 운동 지원을 위한 ‘황토기금’을 설립해 모든 회원들이 연초에 스스로 약정한 1인 1일 1불 이상씩 기금을 내도록 했다. 그것도 부족해 LA같은 지역에서는 담배 피우는 회원들에게 ‘신명세’ (남 생각 않고 담배피우며 신명을 내는 데 대한 벌금) 라 하여 매월 10불씩 내게 하는 등 점차 회원들의 기본적인 부담감을 늘려나갔다.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은 또한 조직에서 특별한 사업 활동을 할 때나 조국운동 지원을 위해 동포사회를 상대로 모금운동을 할 때,또는 특별한 손님이 와서 접대비가 많이 들어갈 때도 기부금을 내고 마당집에도 정기적으로 기부금을 내는 등 자신들의 재산과 소득에 비해 굉장히 많은 돈을 자발적으로 내놓았다.

  한청련,한겨레는 의사와 같은 전문 직종이나 야채가게 같은 자영업을 하는 소득이 괜찮은 소수의 회원들과,저임금과 단순 노동으로 빈곤한 생활을 하는 다수의 회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마당집 상근을 위해 직장을 포기한 회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좋은 직장에 있거나 사업을 하던 회원들도 조직의 필요에 의해 타 지역으로 이사를 가기도 하고 조직의 사업 활동 때문에 가끔 직장을 쉬거나 영업을 태만하게 하는 바람에 소득이 줄어들게 되었다. 게다가 각종 부담금과 기부금까지 내야 해서 회원들은 점점 더 가난해져 갈 수밖에 없었다. 회원들은 좋은 자동차는 말할 것도 없고 쓸 만한 가구 나 전자제품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하게 되고 옷도 거의 못 사 입었다. 가끔 조국에서 나온 회원들의 가족, 친지,친척들은 그 렇게 가난하고 검소하게 대충 살아가는 회원들의 생활 모습을 살펴보고 ‘거지들 모임 같다.’느니 하면서 화를 내거나 빈정거리며 안쓰러워했다. 조국에서 나온 운동가들도 ‘이런 정도인 줄은 몰랐다.’며 놀라곤 했다.

  한청련,한겨레도 조직적 차원에서 사업 활동을 할 때마다 비용을 줄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해방의 소리’ 순회공연이나 세계인권대회 참가를 위해 회원들을 유럽에 파견할 때도 밑반찬과 취사 장비를 가지고 밥을 해먹도록 했다. 여러 명의 회원들이 타 지역을 가야할 때도 비행기 값을 아끼기 위해 15시간 안팎의 거리는 자동차로 가게 했다. 마당집이나 행사장에 필요한 집기나 시설들도 가능한 한 회원들이 직접 만들어 쓰게 했다. 한청련,한겨레가 경비절감을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를 보여주는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겠다.

  ‘8월 대회’와 ‘10월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어려움은 마땅한 대회 장소를 구하는 문제였다. 우리들은 회의장과 숙소를 따로 쓰고 밥도 사먹어야 하는 호텔이나 야영장 같은 곳의 대회는 아예 꿈도 안 꾸었다. 2백여 명이 3일 동안 직접 해먹을 음식물을 손수 준비하고 직접 가져간 침구로 대회장 바닥에서 잠까지 잘 수 있는 사용료가 아주 싼 건물을 찾았다. 그러나 미국사회에서는 그런 식의 대회는 상상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 조건에 맞는 건물을 구하기가 참으로 힘들었다. 그래도 언제나 우리는 끈질긴 노력 끝에 재정이 어려운 교회 같은 곳을 빌려 미국인 형제들의 표현을 빌자면 ‘집 없는 사람들의 회의’를 성공적으로 치러 내곤 했다.

  돈을 아끼기 위한 우리의 노력 중 기억에 남는 일화가 하나 있다. 가끔 LA에서는 동포 운동단체 대표들이나 명망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곤 했는데 회의장은 항상 식당이었다. 회의가 끝나면 참석자들이 음식 값으로 10불씩 내야 했다. 나도 그런 회의에 몇 차례 참석했는데 의미도 없는 회의에 갔다가 10불씩 을 내고 오는 것이 아까워서 회원들과 상의해 다음부터 그런 회의에 나가면 음식을 먹지 않는 대신 돈을 안내고 그냥 나오기로 결정했다. 그렇게 결정한 후 그런 회의가 또 있어서 유선모,김한경 회원과 함께 나갔다. 모두들 맛있게 먹고 있을 때 우리 셋은 먹고 왔다면서 음식에는 손도 안대고 나오는 침을 몰래 삼키며 우두커니 앉아 있어야 했다. 괴롭기도 하고 슬퍼지기도 해 혼이 났다. 그 후에도 우리들은 몇 차례 그렇게 버티다가 도저히 안 되겠기에 방침을 바꿔 그 다음 회의 때부터는 사정없이 먹어버렸다. 그렇게 우리들이 운동자금을 마련하고 비용을 줄이기 위해 별짓을 다하고 있던 86년 초에 단비가 오듯 조국의 김지하 형님으로부터 난초 그림 18장이 왔다. 그 난초들을 하나에 평균 160만원씩 받고 팔아 얼마나 긴요하게 썼는지 모른다.

  여하튼 시간이 흐르면서 각 지역 마당집과 한청련,한겨레는 늘어가는 동포들의 후원 덕분에 만성적인 재정난을 서서히 극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회원들은 여전히 ‘거지’같이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