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활동 4 (운동화와 똥가방)

최근 편집: 2019년 7월 8일 (월) 14:55

FBI의 교묘한 탄압

  FBI는 교활한 방법으로 나와 민족학교를 음해했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 후 FBI 요원들을 처음 만난 것은 83년 6월이었다.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나서 기자회견을 통해 신분을 밝힌 지 며 칠 후 미국인 FBI 요원 두 사람이 민족학교로 나를 찾아와서 물었다.

“미국을 좋아하느냐?”

“싫다.”

“만약 미국에서 망명 허가를 안 해주면 어떻게 하겠느냐?”

“독일로 가겠다.”

그들과의 두 번째 만남은 87년이었다. 어느 날 난데없이 우리 동포 FBI 요원이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었는데 헤어질 때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고 그를 돌려보냈다.

“앞으로 민족학교에는 오지 말라. 할 말 있으면 전화를 하라.”

  그 얼마 후 그 요원으로부터 전화가 와서 밖에서 만나 함께 식사를 했는데 몇 달 지나 또 전화해 만나자고 해서 나는 만날 필요가 없다고 거절해 버렸다. 그때부터 FBI의 비열한 중상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우리들을 친북이니 과격하다느니 하며 비방하고 다니는 각 지역의 운동단체 사람들은 물론 우리들에게 우호적이거나 협조적인 사람들까지 찾아다니며 이런 따위의 교 활한 질문들을 계속 되풀이 하고 다녔다.

“윤한봉이 북에 갔다 왔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가? 윤한봉이 돈이 어디서 나서 그렇게 돌아다니며 활동한다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가족전체가 불법체류자인 회원의 집에 신분증도 내보이지 않고 허락도 안 받은 채 들어가 회원 부모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윤한봉이라는 사람을 아느냐? 그 사람이 88서울올림픽 때 테러를 한다는 정보가 있어 조사하고 있다.”

  그렇게 말하고 나서는 회원 부모들에게 영주권까지 보여 달라고 해서 온 집안 식구들을 불안에 떨게 만들기도 했다. 신분증을 제시하지 않는 것,허락 없이 남의 집에 들어가는 것, 이민국 소관인 불법체류자의 신분 확인을 하는 것은 전부 불법이다. 뿐만 아니라 회원들의 직장이나 아파트로 찾아다니며 책임자나 관리인에게 회원에 관해 이것저것 캐묻는 등 비열한 짓도 계속했다.

  그들은 우리 동포들이 조국에서와 똑같이 정보 사찰기관에 대한 공포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과 FBI가 찾아왔을 때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거의 모르고 있다는 사실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었다. 그들은 나와 한청련,한겨레에 대해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단체와 개인들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 회원,예비회원,후원자들 중에서 약점이 있거나 약한 사람들에 대해서까지도 훤히 알고 있었다. 그들은 또 자신들이 신분과 아름을 밝힐 경우 자신들이 한 불법행위에 대해 우리가 법적 대응을 하리라는 것까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는 만큼 정확하고 적절하게 행동했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이 예상하고 기대했던 결과는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우리들을 중상모략하고 비방하던 동포운동가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신이 나서 떠들고 다니기 시작했다.

“윤한봉이가 북에 갔다 왔다더라. 윤한봉과 한청련은 이제 끝났다. FBI가 뒷조사를 하고 다니는 것을 보니 뭔가 터질 것 이다. 위험하니 가까이 하지 마라.”

  일부 후원자들은 우리들과 한동안 거리를 두었으며 불법체류 회원은 가족들의 압력을 이겨내지 못하고 탈퇴하고 일부 회원들은 위축되거나 불안해했다. 나는 격분하고 말았다. 내가 북부조국에 갈 수도 없고 간 적도 없다는 것과 내가 활동비를 어떻게 마련하는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고 나나 한청련,한겨레가 얼마나 철저하게 공개 합법 운동의 원칙을 지키고 있는가를 제일 잘 알고 있으면서도 교묘하게 해코지를 하고 다니는 그들의 교활함에 나는 치를 떨었다.

  나는 간부들과 의논해서 즉각 대책을 세웠다. 한청련은 합법권리 센터 (Center Constitutional Rights) 에 협조를 요청해서 한청련 회원들이 FBI와 문제가 생기면 적극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아놓았다. 그리고 그 단체에서 제작한 「만약 수사관이 찾아온다면」이라는 소책자 내용을 모든 회원들이 숙지하고 85 년에 만든 자체 보안지침도 철저히 준수하도록 지시했다. 또 한 시민권 획득 자격이 있는 회원들은 빠른 시일 내에 시민권을 취득하고 불법체류 회원들도 빠른 시일 내에 영주권을 취득하도록 했다. 또 FBI가 만나자고 해도 응하지 말고 찾아와도 집에 못 들어오게 하고 찾아온 요원의 신분을 확인한 후 명함을 꼭 받아놓고 무엇을 물어도 대답을 거부해 버리라는 지시도 했다.

  그러한 조치를 취한 후부터 모든 회원들은 FBI 요원들이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고 뭘 물어도 답변을 거부해 버리는 등 당당하게 대응해 나갔다. 자격이 있는 회원은 모두 시민권 신청을 했다. 그 후 일부 회원들이 시민권 취득을 위한 면접시험 때 한청련과 관계된 질문을 받는 어려움을 겪었고 심지어 미군에 입대하여 남부조국에 주둔하고 있던 한 회원의 동생이 현지의 미군 정보기관으로부터 한청련과의 관계에 대해 조사률 받는 일까지 있었다.

그러나 한청련,한겨레는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 후로도 남부조국에 비치된 미국 핵무기 철거를 요청하는 10만 명 서명 운동을 전개하였고,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대 행진과 11만 명의 서명용지를 미국 의회에 전달하기 위한 미주 평화행진을 실시했다. 더 나아가 2차에 걸친 ‘평화협정 체결 촉구와 유엔 분리 가입 저지’를 위한 유엔 본부 앞 단식농성까지 결행했다. 한청련은 FBI뿐만 아니라 노태우 일당의 탄압에 대해서도 법적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90년 5월에 워싱턴 DC에 비영리 단체로 등록해 버렸다. 우리가 아는 한 FBI의 교묘한 탄압은 90년 이후부터는 중단되었다.

운동화와 똥가방

  나의 생활은 민족학교 초기에는 좀 어려웠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해결되어 85년부터는 별 걱정 없게 되었다. 생활이라 해봤자 가족도 없고 집도 절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통장이나 수표도 없는 데다 술도 체질이 특이해 전혀 못 마시기 때문에 먹고 자는 것이 해결되고 담배만 있으면 충분했다.

  나는 조국에서 운동할 때처럼 가방 하나 달랑 어깨에 메고 운동화나 고무신을 신은 채 드넓은 미국 땅을 누비고 다녔다. 그 가방에는 손톱깎이,빗,이쑤시개,칫솔,치약,양말,속옷과 필기 도구,자료철,책 한두 권이 들어 있었는데 모두들 그 가방을 똥가방이라 불렀다.

  각 지역 마당집이나 회원들과 후원자들의 집에서 자고 먹었다. 옷은 얻어 입거나 중고품 옷 중에서 골라 입었다. 신발과 담배 또한 주위의 도움으로 해결했다. 한번은 전남대 송기숙 교수님이 오셨을 때 나는 고무신을 신은 채 라스베이거스 관광을 시켜드린 적이 있었다. 세계적인 환락의 도시와 고무신이 영 안 어울리게 보였는지 송 교수님은 돌아오는 길에 무조건 나를 신발가게로 끌고 들어가셔서 “운동을 하려면 운동화나 신고해라.” 하시며 반강제로 운동화 한 켤레를 사주셨다.

  활동비 문제 또한 시간이 갈수록 회원들과 후원자들의 도움이 늘어 서서히 해결되어 갔다. 철따라 옷을 선물해 주신 분들, 자동차로 나를 태우고 다니느라 수고해 주신 분들,정성으로 대접해 주고 재워 주신 분들,그리고 활동비에 보태 쓰라고,용돈으로 쓰라고,보약을 사먹으라고 하면서 쓸 데 안 쓰고 절약 한 돈을 내놓은 전진호 형과 같은 분들,땀 흘려 번 돈,특히 사업하느라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사간을 낼 수 없어 행사나 학습이나 회의에도 잘 나오지 못하고 가끔 나왔다 하면 피곤에 못 이겨 꾸벅꾸벅 졸 정도로 잠 안 자고 번 돈을 내놓은 강병호씨 같은 회원들과 후원자들 그리고 이름을 숨기고 몰래 내 똥가방에 돈을 넣어 놓곤 하는 고마운 분들 덕분에 나는 마음껏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분들 덕분에 나는 각 지역을 돌아다니며 조직 관리도 하고 사업 활동지도도 하고 학습지도도 하고 수련회도 하고 후원자 관리나 상근자들 격려도 하고 대중강연도 하는 등의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탄압 속에서 고생한 조국의 운동가들이 손님으로 오면 관광도 시켜드리고 조국의 옥중에 있는 친지들에게 영치금도 보내주고 건강이 안 좋은 조국의 운동가들에게 가끔 보약도 사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여행증명서와 영주권을 받다

나는 그동안 청년운동 조직을 만들기 위해 가고는 싶었으나 신분 때문에 못 간 캐나다와 유럽과 호주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해서였다. 망명자 여행 증명서(Refugee Travel Document)는 88년 초에 나왔다. 유효 기간이 1년뿐이어서 1년이 지나면 반환하고 새로 발급받아야 하는 까다로운 여행증명서였다. 여행증명서의 5쪽에는 여행 제한란이 있었는데 여행 불가 지역 세 곳이 적혀 있었다. 나는 그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세 곳은 다름 아닌 쿠바,베트남의 공산주의자 장악지역,Korea 공산주의자 장악지역(Communist Portions of Korea) 이었다. 내가 충격을 받은 까닭은 미국은 북부조국이나 베트남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공산주의자가 장악한 지역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나는 여행증명서를 발급 받은 후 독일과 스위스,호주에 두 번씩 다녀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여행증명서를 가진 망명자는 일반여권을 가진 사람들과 달리 여러 가지 제약을 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내가 비자신청을 하자 캐나다 정부는 아예 입국을 거부했고, 프랑스는 최소한 2개월을 기다리라는 차별 대우를 했다. 이유를 알아봤더니 어떤 나라는 정치 망명자는 테러나 납치 등을 하거나 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에,어떤 나라는 다른 이유를 대며 아예 입국을 거부하기도 하고,또 어떤 나라는 망명자의 신원을 망명자의 본국과 망명 허가국에 알아본 후에 입국 허용 여부를 결정하기도 하고,또 어떤 나라는 시간을 끌어서 입국 자체를 스스로 포기하게 만든다는 것이었다.

  나는 운동의 필요상 캐나다에 갈 일은 많은데 여행증명서를 가지고는 갈 수 없다는 걸 알고는 90년에 영주권을 신청했다. 영주권만 있으면 캐나다는 자유롭게 오갈 수 있기 때문이었다. 92년 3월에야 영주권을 취득하였다. 그러나 영주권을 가지고 캐나다의 토론토를 몇 차례 방문하는 등 영주권의 혜택을 누리기 시작한지 1년여 만에 나는 영주권을 반납하고 말았다. 내가 조국으로 귀국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핵무기 철거요청 10만 명 서명운동

  88년의 4월이 되자 한청련과 한겨레는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조국에 있는 미국 핵무기 철거 요청 서명운동을 하기로 결의했다. 미국 시민들은 미군철수 문제를 핵무기 철거 문제보다 더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미군철수를 위한 서명에는 잘 응하지 않으리라 판단했다. 먼저 핵무기 철거 서명운동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우리는 타민족 형제들과,우리에 대해 적대적이지 않은 동포 운동 단체들도 함께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하여 한국 지원연락망(KSN,KOM의 후신)에 제안하며 동의를 받아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나 타민족 형제들과 동포운동가들은 자신이 없다며 상당히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목표를 10만 명으로 하되 1단계에서는 3만 명을 목표를 하고 그 성과를 본 후 2단계 서명운동을 시작하자고 제안해서 동의를 받아 냈다.

  동포들을 상대로 한 서명운동 경험은 있었지만 타민족 형제들을 상대로 한 서명운동은 처음이었다. 또 고작해야 1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 본 경험밖에 없었다. 때문에 걱정도 되었지만 우리 회원들은 항시 하던 대로 최선을 다하자고 다짐하고 결사적으로 뛰어다니기 시작해 88년 5월부터 89년 6월까지 14개월 동안 기어코 10만여 명의 서명을 받아냈다. 함께 한 타민족 형 제 운동가들과 동포운동가들이 받은 것까지 합하면 서명 총계는 11만 명이 넘었다.

  우리 회원들이 서명을 받기 위해 쏟은 노력과 동원한 방법은 실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경험은 정말로 값진 것이었다. 서명을 요청하면 보통 네 명 중 한 명 정도가 해주었다. 때문에 우리 회원들은 14개월 동안에 약 40만 명의 미국 시민들과 동포들을 접촉한 셈이었다.

  미국에서는 사람들이 거의 자동차로 다니고 밤에는 아예 보행자가 없기 때문에 직장 근무를 마친 회원들이 서명을 받을 수 있는 시간이 짧았다. 낮에 시간이 있는 회원들도 사람이 모이는 곳을 찾아다니며 받아야 했기 때문에 서명접수 활동은 생각보다 힘이 들었다.

  회원들은 공연장,식료품 가게,행사장,대학 교정, 중고품 시장,공원,해수욕장 등지를 헤매고 다니며 서명을 받았다. 나성의 심인보 회원(현 한청련회장)은 야간에 대학 교정에 들어가 서명을 받다가 경찰에 쫓겨나자 오기로 어두운 대학 입구에 지켜 서서 밤늦도록 서명을 받는 등 이를 악물고 뛰어 다녔다. 그러더니 혼자서 4천 명의 서명을 받아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뉴욕 회원들은 공원에 나가 사물놀이를 한바탕하고 구경꾼들을 상대로 모자 대신 서명지를 돌리고 또 한바탕 치고 또 돌리고 하는 식으로 서명을 받기도 했다. 영어를 잘 못하는 어떤 회원은 해수욕장을 찾아가 수영복을 입고 앉거나 누워 쉬고 있는 해수욕객들을 상대로 서명을 받았다. 모래 위에 유선형의 미사일과 버섯구름을 그린 후 “쾅광” 하고 외치고 나서 미사일과 버섯구름 위에 힘차게 X표를 친 후 서명용지와 볼펜을 내밀어 서명을 받았다. 회원들은 이렇게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 기어코 목표를 초과 달성하고야 말았다.

  우리들의 서명운동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해 주는 사람들은 히스패닉 형제들이었다. 그 다음은 흑인 형제들, 그 다음은 백인 형제들 순이었다. 우리 동포들의 호응은 예상했던 대로 가장 적었다. 회원들은 못된 소수의 미국인 형제들이 서명을 거부하며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고 소리치고 손가락 고추를 치켜세우며 욕할 때보다 동포들이 공산당이니 뭐니 하며 욕할 때가 더 슬펐다고들 이야기했다.

  어떤 만성,초특급,고성능,폭발성 및 악취성 설사에나 걸릴 못된 동포 유학생 하나는 대학교 교정에 들어가 타민족 형제들의 서명을 받고 있는 우리 회원의 뒤를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NO SIGN!”을 외쳐 대기까지 했다.    여하튼 14개월 동안의 고생 끝에 받은 11만여 명의 서명지는 89년 7월 미주평화행진 때 행진대원들이 파란 보자기에 나눠 싸서 등에 짊어지고 가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기원하는 우리들의 절절한 마음과 함께 미국 의회에 전달했다.

  그때 일부 못된 동포운동가들은 우리들의 서명지를 접수하기로 약속한 모 하원의원에게 우리들에 대한 모함과 중상을 하며 못 나가게 해 의원 대신 보좌관이 나와 받아가기도 했다.

‘윤한봉 선생 귀국 추진위원회’의 결성

  88년 말이 되자 조국의 국회 내에 광주특위가 구성되고 5.18 학살 진상을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가 열렸다. 5.18 민중항쟁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어정쩡하게 규정되고 5.18 관련으로 투옥되었던 모든 분들이 사면,복권되고 피해자들에 대한 보상과 명예회복이 구체적으로 거론되기 시작했다. 학살원흉인 노태우 정권 하에서이긴 했지만 여소야대가 된 국회의 활동에 힘입어 5.18 문제가 조금씩 풀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한 정국변화에 발맞추어 그동안 광주의 옛 동지들에 의해 개인적 차원에서 조용히 진행되어 왔던 나의 귀국추진운동도 전국적 차원의 조직적 틀을 갖추고 전개되기 시작했다.

  11월에 광주에서 귀국대책준비위원회가 발족했고 12월 13일에는 서울에서 귀국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기자회견과 성명서 발표,그리고 나의 법적 신분확인을 위한 대정부 서면질의 등의 활동이 시작되었다. 고문으로는 강희남,계훈제,김규동,문익환,박형규,백기완,성내운,송건호,유시백, 윤공희,윤기석,이종하,조아라님이 추대되었고 공동추진위원장은 강신석,김승훈,문병란,유연창,이부영님이,사무국장은 김근태,정동년 님이 대변인은 홍성담 님이,추진위원에는 김용태 님을 포함한 약 300명이 참여해 주셨다. 소식을 들은 나는 그 분들께 감사드리며 한 분 한 분의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조국을 떠나온 지 벌써 8년이 다 되었다. 가고 싶었다. (귀국추진위원회의 활동은 89년 5월부터 시작된 소위 공안정국 때문에 활동을 중단하였다가 92년 3월에야 활동을 재개하게 되었다.)

‘광주 청문회’와 헛된 귀국의 꿈

88년 말에 광주의 옛 동지들이 날더러 광주청문회에 나가 증언할 의사가 있느냐고 물어와 그렇게 하겠다고 흔쾌히 응낙했다. 광주에서는 단순히 청문회의 증언만을 생각한 듯 했으나 나는 청문회 증언을 귀국 기회로 생각하고 속으로 흥분했다.

  “5.18 관련 수배자는 나밖에 없다. 투옥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사면 복권이 되었으며 5.18 민중항쟁을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까지 부르고 피해자 보상과 명예회복이 거론되고 있는 마당에 아무리 노태우 일당이 나를 미워하여 귀국 허용을 안 해주고 싶어도 여소야대 국회의 광주특위에서 나를 증인으로 채택하면 나에 대한 수배를 해제하거나 한시적으로라도 귀국을 허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내가 귀국하여 증언한 후 그대로 눌러 앉아 버려도 체포 투옥하기에는 너무 정치적 부담이 커서 어쩌지 못할 것이다. 설혹 투옥한다 할지라도 들어가 눌러 앉아버리자.”

  나는 그렇게 생각을 정리했다. 증인으로 채택되면 곧바로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차분히 인사하고 갈 겨를이 없을 것 같아 서둘러 각 지역을 돌며 귀국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에 나의 청문회 증언이 거부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했다.

  광주특위에서 틀림없이 나를 증인으로 채택할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다. 나는 5.18 관련 최후의 사법적 미처리자이고 수배 사유도 내란 주요 임무 종사와 계엄법 위반인 데다 범죄 내용도 내란을 일으키기 위해 DJ로부터 돈을 받은 정동년 씨가 그 돈 중 일부를 나에게 주었고 나는 그 돈을 학생시위 배후 조종에 썼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DJ와 5.18을 연결시킨 전.노 일 당의 조작 진상을 완전히 밝히기 위해서라도, 또 이와 정동년 씨의 증언과 마찬가지로 나의 증언도 들어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광주의 동지들도 들어올 준비를 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광주에서도 각 당에 나를 증인으로 채택해 달라고 요청했고 5.18 수괴로 몰렸던 정동년 씨도 청문회 증언을 하면서 나의 증언을 꼭 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국추진위원회에서도 성명서를 통해 나의 청문회 증언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광주로부터 어처구니없는 소식이 날아왔다. 평민당 소속 이모 위원이 내가 청문회 증언 때 DJ의 명예와 권위에 손상을 주는 발언은 안하겠다는 각서를 써주면 증인으로 채택되도록 노력하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마디로 거절해 버렸다. 나에게는 청문회에 나가 증언하면서 이를 모독하는 사적 발언을 할 필요도 생각도 없었지만 역사적 사건의 진상규명을 위한 청문회에 나가 증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사적 각서를 조건으로 제시하는 데 분노했기 때문이었다.

  그일 이후에도 나는 내가 증인으로 채택되리라 믿고 귀국 준비를 계속했다. 그러나 결국 증인으로 채택되지 못했다. 귀국의 꿈은 일장춘몽,헛된 꿈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때도,귀국한 지금도 내가 증인으로 채택되지 못한 정확한 이유를 아직 모르고 있다.)

 어머님이 찾아 오시다

89년 봄에 팔순이 다 되신 늙은 어머님이 오셨다. 그동안 몇 차례 전화를 통해서만 목소리를 들었던 어머님이었다. 80년 5`18 이전에 뵌 후 9년 만에 다시 뵙게 된 꿈에 그리던 늙은 어머님,내가 운동을 해도 한 번도 막지 않으시고 결혼하라는 조건만 다시던 어머님,80년 초에 마지막으로 뵈었을 때도 “4남 2녀 중 너만 남았다. 너를 결혼 못 시키고 죽으면 저승에 가서 네 아버지를 무슨 낯으로 뵙겠냐?”며 들들 볶으시던 어머님! 72년 박정희의 유신쿠데타에 충격을 받아 운동에 뛰어든 나는 74년 초에는 죽을 각오로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사전에 아버님께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해 긴급조치 4호가 내려지기 며칠 전인 3월 말경에 고향에 내려가 아버님께 말 씀드렸다.

“죽을 각오로 싸우겠습니다.”

“해라. 그러나 앞장은 서지마라.”

  예상했던 대로 아버님은 말씀하셨다. 공과 사가 분명하신 아버님은 공적 입장에서는 하라고 허락하셨고 사적인 입장에서는 자식의 피해를 걱정해 앞장은 서지 말라고 하신 것이었다. 그 후 내가 아버님을 다시 뵌 것은 대전교도소의 면회실이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75년 2월에 내가 형집행정지 처분을 받고 나와 보니 아버님은 20일 전에 돌아가시고 안 계셨다. 모든 사람들은 나 때문에 울화병으로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 뒤로 큰아들은 전두환이 욕했다가 반공법으로 감옥에 갔다 오고,5.18 때 감옥에 갔다 온 둘째 아들은 전교조 활동한 다고 뛰어다니고, 막내아들은 농민운동 한다고 뛰어다녔다. 민청학련 사건 때 감옥에 갔다 온 후 착실하게 사업을 하던 막내 사위도 5.18 때 감옥에 갔다 오고, 막내딸도 운동한다고 뛰어다니고, 큰손녀는 노동운동한다고 뛰어다녔다.

  셋째 아들놈은 감옥에 세 차례나 들락거리다가 5.18 이후 수배당해 애간장을 태우다 만리타향으로 도망가 나이 40이 넘도록 집도 절도 없이 장가도 안 간 채 운동화 신고 똥가방 하나 메고 천리사방을 떠돌아다닌다는 소식을 듣고도 모든 것을 속으로 삭이며 흐트러짐 없이 살아오신 장한 우리 어머님이 이 불효자식 얼굴 보시려고 둘째 사위 박형선을 따라 미국까지 오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나는 국제평화대행진 준비 때문에 바빠서 관광도 제대로 못시켜 드리고 주위 사람들 신세만 졌다. 내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어머님도 약해지실 것 같아 “장가나 가고 하라.”는 어머님 말씀에 “어머님도 욕심이 많군요. 5.18때 자녀를 잃은 부모님들 생각해서라도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내가 안 죽고 이렇게 살아서 뛰어다니는 것만으로 만족하십시오.”라고 단호하게 대답해 버렸다. 또 몇 달만 내 곁에 있다가 가고 싶다는 의향을 내비쳤을 때도 정신없이 바쁘니 빨리 돌아가시라고 해 버렸다.

  어머님은 막내사위와 함께 한 달도 못돼서 귀국길에 오르셨다. 나는 그때 LA에서 귀국하시는 어머님을 뉴욕에서 배웅해 드리고 말았다. 이제 어머님도 내 얼굴 보시고 가셨고 나도 어머님을 뵈었으니 살아생전에 다시는 서로 못 보게 되더라도 여한은 없으리라. 그래도 어머님,이 불효자식 귀국할 날이 언제 일지 모르지만 그때까지 돌아가시지 말고 내내 평안하시옵소서..

  91년 말에는 경심이 누님과 매제 형선이와 누이동생 경자가 외조카 찬이와 지웅이를 데리고 미국에 왔다. 형선이를 빼고는 11년만의 만남이었다. 그때는 시간이 좀 있어서 관광도 직접 안내하는 등 사람 노릇을 제법 했다. 특히 여동생 경자는 이 험한 오빠 때문에 내가 미국으로 나온 이후 치안본부와 안기부에 끌려가 고생을 많이 했다. 그리고 회원들과 후원자들,타민족 형제들이 조국을 방문할 때마다 대접하느라고 수고를 했다. 경자에게 보답한다는 뜻에서 회원들과 나는 열심히 대접했다. 그래서 제법 홀가분한 마음으로 누님과 동생과 조카들을 배웅할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