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활동 6 (운동화와 똥가방)

최근 편집: 2019년 7월 8일 (월) 15:01

노태우 일당의 악랄한 중상모략

  내가 한청련,한겨레 회원들과 함께 미국 핵무기 철거를 위한 10만 서명 작업과 두 곳의 행진 준비에 정신없이 매달려 있을 때였다. 조국에서는 서경원 의원의 방북사실이 밝혀져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문익환 목사님과 황석영 형님의 방북 사건을 겪어보았기 때문에 조금 놀랐을 뿐 큰 관심을 갖지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해 나갔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노태우 일당은 서의원의 방북 사건이 마치 나와 한청련,민족학교에 무슨 관련이나 있는 것처럼 몰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은 88년 8월에서 의원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LA 민족학교에 들러 8월 대회에 참가한 후 그 길로 북부조국을 방문하였고 그 방북 주선을 한청련 회원인 성모 목사가 했다고 발표를 했다.

  나와 회원들은 펄쩍 뛰었다. 서의원이 LA 민족학교에 들렀을 때 나는 8월 대회 준비 차 뉴욕에 가 있었다. 8월 대회에 참가한 서 의원과는 시간이 없어 방북에 관한 이야기는커녕 8년 만에 만났으면서도 회포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헤어졌을 뿐이다. 그런데도 노태우 일당은 아무런 증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서의원이 나와 사이도 안 좋은 DJ의 친서를 가지고 민족학교에 들렀느니 어쩌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그런가 하면 성모 목사는 유럽의 모 운동단체 간부라고 하는 등 횡설수설하며 성모 목사와 한청련을 연결지으려고 기를 썼다.

  성모 목사는 진보적인 민족주의자로서 한청련 초기에 유학생 회원으로 활동하다가 84년에 독일로 유학을 떠나면서 탈퇴했던 사람이다. 84년 초에 LA에 거주하고 있는 시민권을 가진 부모님의 초청으로 미국 영주권을 받기 위해 나에 돌아와 있었으나 한청련에 가입하지 않고 8월로 예정된 영주권 인터뷰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당시 성모 목사는 노태우 일당이 자신을 북의 공작원으로 몰고 서 의원 방북을 주선했다고 한 데 대해 중상모략이라며 펄쩍 뛰었고 8월에 인터뷰를 마친 미국정부도 아무 말 없이 그에게 영주권을 내주었다.

  그 후 노태우 일당은 서의원 방북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평민당 총재인 DJ를 구인하여 심문하는 과정에서 DJ가 나를 중상하자 DJ의 진술 내용을 가지고 신이 나서 나와 민족학교와 한청련을 또다시 공격하기 시작했다. 화가 난 나는 노태우 일당에게 공개질의서를 보내 정면 반박하고 DJ에 대해서는 최종적인 X표를 치고야 말았다.

  그렇게 한창 우리를 중상하던 노태우 일당은 임수경 학생이 방북하여 평양축전과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하고 문규현 신부님이 방북하여 임수경 학생과 함께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자 두 사람의 방북을 나와 한청련이 배후에서 조종했다고 또다시 광적인 공격을 해왔다.

  노태우 일당은 나와 한청련이 북부조국 조평통의 지시를 받아 국제평화대행진을 추진했고 마찬가지로 지시를 받은 내가 한청련 외교 연대부장인 이지훈씨를 호주로 보내 김승일씨를 만나도록 했고 이지훈씨로부터 밀명을 받은 김승일씨는 남부조국으로 들어가,호주에서 살다가 부산의 모 병원에 선교사로 나가 일하고 있는 자신의 남자 친구인 치과의사 김진엽씨를 만나 밀명을 전한 후, 김승일씨외 김진엽씨 두 사람이 함께 전대협 간부들을 만나 임수경 학생을 평양축전에 보내는 공작을 했다고 조작해 발표했다. 또 내가 조평통의 지시를 받아 문규현 신부의 방북을 배후조종해 성사시켰다고 하면서 한청련을 이적 단체로 몰았다. 더 나아가 군 입대를 위해 귀국한 한청련 회원이었던 유학생 박태훈 씨를 이적단체 가입 및 활동이라는 죄목으로 구속까지 했다.

  나와 회원들은 분통을 터뜨리고 말았다. 국제평화대행진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고 한청련 스스로가 5월 말에 참가를 포기해 버린 평양축전에 전대협을 참가시키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도 말이 안 된다. 게다가 잘 알지도 못한 조평통으로부터 내가 지령을 받았다는 것도,서로 알지도 못한 호주의 김승일 씨를 통해 공작을 했다는 것도,김승일 씨가 만나보지도 못한 이지훈 씨로부터 밀명을 받고 남부조국에 들어갔다는 것도 도무지 말이 안 되는 잠꼬대였다.

  노태우 일당의 조작이 얼마나 황당한 것인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하겠다. 행진 준비에 여념이 없던 6월 하순 어느 날,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할 타민족 형제들을 모집하기 위해 필리핀을 거쳐 호주에 들어간 이지훈 씨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접니다. 민족자료실에 와 있습니다.”

“그래? 일은 잘 되가나?”

“네. 다른 지역은 어떻습니까?”

“그런 대로 잘 되어가고 있어.”

“그래요? 그런데 여기 와보니 애들이 일 저지른 것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야?”

“김승일이 알아요?”

“김승일? 모르겠는데.”

“나도 처음 본 여잔데 진엽이 애인인 모양이에요.”

“그래? 그런데 무슨 일을 저질렀다는 거야?”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김승일이가 남부조국에 갔다가 엊그제 돌아왔는데 그 친구가 거기서 진엽이랑 전대협 윗대가리들을 만난 모양이에요.”

“그래서 어떻다는 거야?”

“그냥 만난 것이 아니라 여학생 같은데 전대협 대표를 평양에 보내기로 한 모양이에요. 그 일에 끼어서 엉뚱한 짓을 한 것 같요.”

“골치 아픈 일에 신경 쓰지 말고 우리 일이나 열심히 해.”

“알았습니다. 다시 보고 드리겠습니다.”

  김승일 씨는 5월 22일에 남부조국에 들어갔다가 6월 22일에 호주에 돌아와 있었고 이지훈 씨는 6월 14일에 호주에 들어갔다가 6월 24일 경에 민족자료실에 들러 김승일 씨를 처음 만난 것 이다. 김승일 씨가 남부조국에 간 이후에 이지훈 씨가 호주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뒷받침해주는 결정적 증거는 호주 시드니 공항의 입출국 확인 도장이 선명히 찍혀있는 이지훈 씨의 여권이다. 그 결정적 증거 때문에 그랬는지 모르지만 노태우 일당은 그렇게 여론을 통해 요란하게 떠들었던 조평통 → 윤한봉 →이지훈 →김승일 →임수경으로 이어지는 지령 전달 경로를 막상 임수경 학생의 기소장에서는 빼버렸다. 그리고 대신 북의 조선학생위원회一>전대협一>임수경으로 이어지는 지령 전달 경로를 집어넣었다.

임수경양 밀입북사건 체계도(안기부 발표, 중앙일보 89.9.8) 누락

  그리고 임수경 학생의 기소장에서 빼버린 조평통 → 윤한봉 →이지훈 →김승일 →임수경으로 이어지는 지령 전달 경로를 구속된 김진엽씨의 기소장에 범죄사실이 아니라 모두(冒頭)사실로 슬며시 끼워 넣어 기정사실화하는 간교한 짓을 저질렀다. 우리는 이지훈 씨의 호주 입출국 일자에 관한 호주 외무부의 공식 확인서까지 받아 이지훈 씨의 호주 입출국 확인 도장이 찍힌 여권사진과 함께 재판부에 제출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조작된 모든 사실에 눈을 감았다. 노태우 일당이 나와 한청련이 문규현 신부님을 배후에서 조종해 방북시켰다고 한 것도 포복 절도할 일이었다. 노태우 일당이 얼마나 엉터리로 사건을 조작했는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를 제시해 보겠다.

  두 곳의 행진이 한창 진행 중이던 7월 22일 경에 내가 뉴욕의 마당집 청년학교에서 행진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바삐 움직이고 있을 때 LA에서 왔다는 낯선 동포 신부 한 분과 함께 문규현 신부님이 불쑥 찾아오셨다. 후에 들은 바로는 그 낯선 신부님이 정의구현사제단의 방북 요청을 문 신부님에게 전달한 분이었다.

“합수! 나 북에 또 가게 되었소.”

“무슨 일로요?”

“날더러 임수경이 데리고 같이 내려오래.”

“누가요?”

“정의구현사제단에서. 그나저나 허락을 안 해주면 어찐다?”

“누구 허락을 받는데요?”

“일본에 계신 주교님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주교가 일본에 갔나요?”

“아니 일본인 주교. 내가 그 주교님 밑에 소속돼 있거든.”

“그래요? 천주교 조직은 복잡해서 뭐가 뭔지 원.”

“그나저나 합수가 좀 도와줘야겠소.”

“무얼 도와드릴까요? 돈은 없습니다.”

“나 돈 많아. 비행기 표나 끊게 해줘요. 일본 거쳐 북경으로 가야하니까.”

“그 주교가 허락 안 해주면 어쩌려고 북경까지 끊어요?”

“그래도 일단 끊어놓고 사정해야지.”

나는 곁에 있던 여자 회원들에게 도와드리라고 부탁했다.

“그나저나 신부님은 복도 많습니다. 가보고 싶어도 못 가는 사람들이 많은데 신부님은 지난달에도 갔다 오시고 이번에 또 가시게 되었으니.”

“이번 일은 달라요. 책임이 크다고. 그리고 감옥에도 가고.”

“그렇기는 하네요. 사제단이 어려운 결정을 했군요. 시끄럽네요.”

  나는 전화가 온 바람에 대화를 중단했고 통화를 끝냈을 때는 문 신부님이 볼일이 많다며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서둘러 떠나가셨다. 문 신부님은 다음날 다시 오셔서 회원들이 끊어놓은 비행기 표를 받자마자 바로 떠나가셨다. 우리는 서로의 건강을 빌며 헤어졌다.

  당시에 나는 문 신부님의 방북에 대해 별로 놀라지 않았다. 왜냐하면 문 신부님이 한 달 전인 6월에 미국인 신부 한 분과 함께 북부조국을 다녀오셨는데 그때 노태우 일당은 문 신부님이 영주권자이고 영사관에 통고를 하고 갔으니까 문제 삼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 또 문 신부님은 일본인 주교의 허락을 받지 못하면 갈 수가 없다고 했고 만약 허락을 받으면 영사관에 통고를 하고 가시겠다고 말씀했기 때문이다. 내가 그 뒤로 문 신부님을 다시 만난 것은 8월 초순이었다.

  국제평화대행진단의 통일각 단식농성이 끝난 이틀 후 느닷없이 문 신부님이 뉴욕에 오셔서 만나자는 연락을 해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 만나보니 문 신부님은 임수경 학생과 단둘이서 판문점을 통과하는 것보다는 미국의 영향력 있는 각계 인사들과 함께 통과하는 것이 정치적으로나 운동적으로 효과가 더 클 것으로 생각하시고 그런 인물들을 동원하기 위해 급히 돌아오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최소한 두 세 달 정도의 시간이 있다면 몰라도 그렇게 갑자기 동원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말씀드리고 그동안 모아두었던 임수경 학생과 문규현 신부님 방북사건 관련 신문기사들을 보여드렸다. 문 신부님은 다른 종교계 인사들과도 상의해 보신 후 나와 같은 의견을 들으셨는지 서둘러 다시 북부조국으로 떠나가셨다.

  사실이 그러함에도 노태우 일당은 나와 한청련이 문 신부님의 방북을 배후조종했다고 계속 모략했다. 심지어는 사제단회의에서 문 신부님 파북 결정을 주도한 세 분과 신부님들이 자신들이 했다고 당당하게 밝히고 나오기까지 했는데도 막무가내로 나와 한청련을 공격해왔다. 그렇게 언론을 통해 악랄한 중상모략을 하던 노태우 일당은 막상 문 신부님을 기소할 때는 공소유지가 불가능하니까 임수경 학생을 기소할 때와 똑같이 문 신부님 기소장에서 나와 한청련 관련 부분을 슬며시 빼버리는 간교한 짓을 또 한번 되풀이했던 것이다.

  89년 들어 몇 달간 계속된 나와 한청련과 민족학교에 대한 노태우 일당의 중상모략이 전 회원이었던 박태훈씨의 구속으로 까지 이어지자 한청련은 9월에 대표위원회를 소집하여 노태우 일당의 탄압에 정면대응하기로 결정하고 즉각 실천에 옮겼다.

  먼저 강력한 규탄성명을 조국의『말』지를 통해 발표하고 각 지역에서 국제평화대행진과 미주평화행진 보고대회 및 노태우 일당의 중상모략 폭로대회를 개최하였다. 10월 초부터 22일 동 안 뉴욕 UN 본부 앞에서 ‘’평화협정 체결 촉구와 유엔 분리가입 저지 그리고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의 석방을 위한 단식농성과 외교활동을 결연한 자세로 전개해 나갔다.

DJ의 추악한 중상모략

  서경원 의원 방북 사건을 기화로 노태우 일당의 교활한 중상모략이 계속되는 바람에 그렇지 않아도 큰 피해를 보고 있던 나와 민족학교와 한청련 회원들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그것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훨씬 더 큰 타격을 주는 모함을 당했다.

  서의원 방북 사건에 관한 수사를 받기 위해 8월 3일 안기부에 구인된 평민당 총재 DJ가 나와 민족학교를 터무니없이 공격을 했던 것이다. 안기부 수사관과 DJ 사이에 오간 문답 내용 중 해당 부분을 그대로 옮겨 본다. 이 자료는 8월 4일자 각 신문들에 실린 안기부 발표 전문에서 나온 것이다.

수사관: 윤한봉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DJ: 서경원 사건이 문제된 후 미국 LA에 살고 있는 강대양 (55세. 주유소 경영)이 최근 본인에게 연락하기를 서경원이 지난번 미국 왔을 때 민족학교 윤한봉하고만 만나고 인권위원회 하고는 연락도 없었다고 하여 왜 지금까지 그런 말을 안 했는가라고 하니까 중상모략 하는 것 같아서 그때 말을 못했다고 하면서 서경원은 뉴욕에서도 인권위원회에 들르지 않고 한청련 하고만 접촉했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82년 12월 미국에 갔을 때도 윤한봉은 나를 가리켜 친미주의자,사대주의자라는 등의 유인물을 만들어 비난했기 때문에 우리와는 담을 쌓고 있는 형편이며 현재까지 한 번도 접촉한 사실이 없다. 윤한봉은 민족학교의 리더 격으로 활동하며 한국인 2세들로부터 인정을 받아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인물로 북한도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으며 친북 성향이 제일 강한 인물로 알고 있다.

수사관: 윤한봉의 구체적 반한 활동에 대해 아는 바가 있는가?

DJ: 윤한봉의 연설 내용이 실린 유인물에서 미국은 제국주의자고 한국은 식민지라는 등의 북한 주장과 동일한 것을 본 일이 있다. 윤한봉은 북한 찬양을 일삼고 있고 또 윤한봉이 북한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교포가 있다. 민족학교의 설립 목적은 자세히 모르겠으나 관여하는 사람들은 친북인물이다.

수사관: 민족학교의 성향을 어디에서 들었나?

DJ: LA에 거주하는 인권문제연구소 강대양,황재선 등으로부터 들었다.

수사관: 윤한봉이 북한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 얘기는 누구로부터 들었나?

DJ: 84년 LA 올림픽 당시 성명은 기억할 수 없으나 재미교포로부터 들었다.

수사관: 윤한봉의 민족학교와 반한 단체들에 대한 관계를 아는 바가 있는가?

DJ: 미국에 있는 친북단체들이 관련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총련까지 관련돼 84년 LA 올림픽 때 조총련이 응원단까지 파견하려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수사관: 평민당 소속 권노갑,정상용 의원이 윤한봉의 입국을 추진한 것은 진술인의 지시에 의한 것인가?

DJ: 윤한봉은 북한에도 다녀오는 등 친북 성향이 강한 인물로 5공청산 증인으로 청문회에 부르기 위해 입국을 추진했으나 나는 그가 입국하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수사관: 진술인을 모략하던 윤한봉을 소속의원들이 입국을 추진한 이유는?

DJ: 윤한봉이 압국하면 나의 지역 토대인 광주에서 나를 비난할 테니 나로서는 불리한 입장이며 안기부가 윤한봉의 친북성을 가장 잘 알 테니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안기부에 문의토록 한 것이다.

같은 날 안기부에 구인되어 심문을 받은 평민당 부총재인 문동환 목사와 안기부 수사관 사이에 오고간 문답 내용 중 나에 관련된 부분을 그대로 옮겨본다.

수사관: LA 민족학교 윤한봉을 아는가?

문 목사: 광주사태 시 밀항해서 미국에 간 사람으로 교민들을 설득해서 민족주의자로 만들고 있으며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이틀간 나의 집에 체류시키면서 이야기했다.

  수사관들은 문 목사님께 나에 관해 물었다가 이용할 가치가 없는 답변이 나오자 더 이상 묻지 않고 단 한 번의 물음으로 끝내 버렸다. 문 목사님은 나를 집에서 재워주셨을 뿐만 아니라 민족학교를 방문하시는 등 나를 몇 차례 만나보시기라도 했으나,이는 자기 말 그대로 나를 만나본 적도 없고 나와 전화 한 통화 한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DJ는 수사관이 나에 관해 물었을 때 잘 모른다고 했으면 문동환 목사님의 경우처럼 더 이상 묻지도 않았을 것을,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물어주어서 고맙다는 듯이 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묻지도 않은 민족학교에 대해서까지 그것도 자신이 직접 들은 것들도 아니고 소문으로 들은 것들을 가지고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놓아 수사관들로 하여금 신이 나서 계속 묻게 만들고 자신 또한 계속 대답했던 것이다.

  DJ는 안기부가 자신을 구인하여 심문하는 까닭이 서의원의 방북을 지시했는가,서의원 방북 사실을 사전에 알았는가,서의원 방북사실을 사후에 보고 받아 알고 있었는가,서의원 편에 북에 메시지나 친서를 보냈는가 등을 확인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도 어처구니없게 사건과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와 민족학교에 대해서 그렇게 황당무계한 진술을 계속했던 것이다.

  나는 83년에 미국에 온 DJ가 84년에 LA에서 강연회를 할 때까지 강연회 준비를 적극 돕는 등 협조적인 입장에 있었다. 그러나 DJ가 5,18을 자기가 체포되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주장하는가 하면 주한미군철수를 반대하는 등 미국에 아부하는 발언을 하고 다니고 통일을 주장하면서도 동포들의 혈육상봉을 위한 방북마저 반대하는 것에 분개해서 친미 사대주의자,기회주의자로 비난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유인물을 만들어서 비난한 적은 없었다.

  DJ는 자신이 미국에 있을 때 내가 비난했던 것과 87년 대선 당시의 분열 행위에 대해 내가 강력하게 비판했던 것 때문에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아무리 사적인 감정이 있다손 치더라도 제1야당 총재의 신분으로서,노태우 일당으로부터 당장 억울한 탄압과 중상모략을 당하고 있으면서 낯선 땅을 헤매고 있는 이 별 볼 일 없는 사람을 정적이나 원수를 향해서 하듯 안기부 요원들 앞에서 그렇게까지 터무니없는 공격을 하다니 …

나는 DJ에게 공개적인 항의를 할 것을 고려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 자체가 노태우 일당의 이간, 분열 공작에 놀아나는 꼴이 되기 때문에 여러 차례 망설였다. 그렇지만 참고 침묵하면 나와 민족학교에 대한 DJ의 비난을 시인하는 꼴이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한겨레신문의 광고를 통해 해내외 동포들에게 억울함을 호소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한 공개질의를 하기로 결심하고 문안까지 작성했다.

  그러나 결국 광고비 1만 불(800만원) 정도가 있어야 광고가 가능하다는 걸 알고 한숨을 쉬고는 포기해 버렸다. 수천 불의 빚을 지고 있던 당시의 나에게 1만 불은 너무나 큰돈이었다. 그래서 대신 한겨레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인터뷰를 자청해서 DJ의 공격을 반박하고,나와 민족학교에 대한 해명을 했다. 그러나 그런 정도의 반박과 해명을 가지고 명예를 회복시키기에는 나와 민족학교와 한청련,한겨레가 받은 피해와 상처는 너무 컸다.

  DJ의 그런 진술 내용이 보도된 뒤로 회원들은 가족과 자주 충돌하게 되었고 일부 후원자들은 우리를 기피했으며 일반 동포들은 나와 민족학교와 한청련에 대해 친북이니,북의 앞잡이니 빨갱이니 하며 완전히 등을 돌렸다.

  이로 인해 내가 입은 피해는 해외에서만이 아니었다. 노태우 일당은 DJ의 진술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이러저러한 혐의로 구속되어 수사를 받고 있던 김현장-김영애 씨 부부와 홍성담 씨,고현주 씨 등을 DJ까지 윤한봉이 친북 빨갱이라고 했는데 왜 너희들은 시인하지 않느냐며 두들겨 팼다. 나의 여동생 경자와 매제 박형선을 안기부로 연행해 신문하고 나의 옛 동지들까지도 참고인 조사 형식으로 차례차례 호텔로 불러 신문하는 교활한 탄압을 자행했다.

  여하튼 이의 공격과 노태우 일당의 탄압 때문에 나와 민족학교와 한청련은 상당 기간 후원자가 줄어들었고 동포사회로부터 고립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동안 불안감에 휩싸인 남부조국 운동권 인사들과의 관계마저 끊기는 심대한 피해를 입었다.

끝으로 당시 써 놓았던 김대중 평민당 총재에게 드리는 공개 질의서 중 일부를 그대로 실어본다.

_ 전략_

3. 귀하는 윤한봉이가 북한에 다녀온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방북 의사는 가지고 있으나 방북은 한 적이 없습니다. 방북했다는 증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영주권도 없고 또 밀항해 왔기 때문에 여권도 없습니다. 다만 망명 허가를 받은 후인 88년 초에야 미국 정부에서 발급해 준 1년마다 갱신해야 하는 여행증명서를 가지고 있는데 그 여행증명서로는 쿠바,베트남,북한을 갈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만약 불법적으로 북을 방문하면 망명 허가가 취소되어 추방을 당하게 됩니다.

4. 귀하는 터무니없이 저와 민족학교가 일본의 조총련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말했습니다.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여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저와 민족학교는 조총련과 어떠한 관계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5. 귀하는 몇몇 재미동포들로부터 들은 일방적인 이야기들을 확인도 하지 않은 채 인용 답변했습니다. “윤한봉이가 북한에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고,또 “민족학교에 관여하는 사람들은 친북인물이다.”고. 분명한 증거를 제시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습니다. 민족학교에 관여하는 분들도 친북인물들이 아니라 민족주의자들입니다 .

6. 귀하는 저를 친북 인물,친북 성향이 제일 강한 인물,북한 찬양을 일삼는 인물로 평가했습니다. 친북과 찬양의 의미,저와 비교한 사람들의 성격과 범위,제일 강한 친북 성항을 가졌다고 판단한 근거를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귀하와 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고 전화 통화 한 번 한 적이 없습니다.

7. 귀하의 답변 내용들을 보면 83년 초 민족학교 설립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저와 민족학교에 대해 공관원, 정보원,하수인,사이비 언론 등을 통해 자행한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중상모략의 내용들,그리고 일부 반공,반북 성향이 있는 운동가들의 음해 내용과 거의 일치하고 있습니다. 귀하는 그것이 우연의 일치라고 생각하십니까?

8. 귀하는 조국의 자주,통일을 위해서 싸워왔고 그로 인해 수많은 중상모략과 육체적 고통을 당해 왔습니다. 지금도 귀하는 귀하와 평민당뿐만 아니라 노 정권의 탄압과 음해를 당하고 있는 운동단체와 운동가들을 위해서 노 정권과 싸워야 하는 정치적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귀하는 저와 민족학교, 한청련에 대한 노 정권의 중상모략을 막고 싸우기는커녕,아니 방관 침묵이라도 하기는커녕 도리어 유도 조장하거나 적극 협조하는 듯한 발언을 하였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아니만 본의 아닌 실수였습니까?

9. 제1야당 총재인 귀하의 발언은 정치 사회적 영향이 매우 크기 때문에 한 마디를 하더라도 신중을 기해서 책임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귀하는 무책임하게도 저와 민족 학교에 대한 전 정권,노 정권의 모략선전이나 일부 재미동포들의 일방적인 이야기만을 듣고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수사관들에게 옮김으로써 노 정권보다 더 심한 중상모략과 음해를 했습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본의 아닌 실수였습니까?귀하는 이번에 저를 귀하와 평민당이 개정을 주장하고 있는 악법인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노 정권에게 공개적으로 조작,밀고한 셈이 되었습니다. ‘고무동조찬양,‘잠입 탈출’,‘회합통신’ 등으로 말입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본의 아닌 실수였습니까?

10. 귀하는 제가 귀국하는 것을 귀하의 지지 기반을 허물까 보아 싫어하신다고 밝혔지만 저는 꿈에도 그리는 조국,부모 형제와 친구,동지들이 있는 사랑하는 조국으로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가고야 말 것입니다.

1989. 8. 5 윤한봉

22일간의 UN본부 앞 단식농성

한청련,한겨레는 88년에 뉴욕에서 개최한 8월 대회 중에 UN 앞 함마슐트 광장에서 2시간 동안 시위를 했었다. 조국의 분단고통과 군사긴장,전쟁위험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40년이 다 된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고 미국으로부터 군사주권을 되찾으며 미군을 철수시키고 핵무기를 철거시키기 위해서는 전술적으로 UN을 상대로 싸울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최초의 대(對) UN 투쟁인 그 시위는 미국의 들러리가 된 UN이 우리 조국의 분단과 장기간의 휴전체제와 군사긴장을 유지시키는 데 어떤 죄를 졌는가를 폭로하고 규탄하는 것이었다.

  89년 10월에는 UN 본부 정문 건너편 평화공원에서 22일간의 단식농성을 진행했다. 우리들의 두 번째 대 UN 투쟁이었다. 단식농성은 평화협정 체결 촉구와 UN 분리가입 저지를 위한 것이었고,동시에 노태우 정권의 악랄한 탄압과 이의 모함을 무력화시키고 회원들의 동요와 그에 따른 조직의 위축을 예방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또한 문 신부님과 임수경 씨의 구명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그 동안 10만 명 서명운동과 두 곳에서 동시에 진행한 행진,그리고 행진 보고대회 겸 노태우 일당의 중상모략 폭로규탄대회 등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회원들은 다시 한 번 떨쳐 일어섰다.

  우리들은 연대활동을 해온 타민족 형제들과 우호적인 동포 운동가들과 함께 ‘평화협정 체결촉구 및 UN분리가입 저지 대책위원화’를 꾸리고 그 밑에 외교 연대 요원들과 단식 보호 요원들을 두었다. 후원에는 8개 동포 단체와 몇개 타민족 형제 단체가 참여하였다.

  UN 총회 기간 중인 10월 3일부터 시작된 우리들의 단식농성은 UN 창립 이래 최장기간의 단식농성으로 기록되었다. 물론 천안문 사태에 항의하는 중국인 형제들의 두 달간의 천막 단식 농성이 있기는 했지만 그때는 UN총회 기간이 아닌 6, 7월이었고 장소도 UN 정문 앞이 아니라 조금 외진 곳에 있는 함마슐트 광장이었다. 또 그들은 식사만 안했을 뿐 우유나 주스 같은 음료수를 마시며 하는 단식이었기 때문에 물과 소금만으로 버티는 우리들의 단식과는 비교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의 단식농성장인 평화공원은 말이 공원이지 실제로는 비좁고 유달리 바람이 많은 곳이었다. 단식농성에는 애로도 많았다. 장소 사용 기간도 한 단체에 1주일밖에 허용해 주지 않았다. 우리는 연대하는 타민족 형제 단체들의 이름으로 잇달아 신청하여 22일간을 계속해서 사용했다. 밤에는 그곳에서 잠을 못 자게 했기 때문에 단식자들은 침구를 싸들고 미국 여성의류노조 건물로 가서 잤고 다음날 아침 출근시간에 맞춰 이동해 와 농성을 시작하곤 했다. 또 주변에 화장실이 없어서 200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모 여성단체 건물의 화장실을 사용해야만 했다.

  경찰들의 단속도 우리를 괴롭혔다. 농기나 걸개 그림,가로글막 등을 철책이 파손된다며 묶지 못하게 했다. 그러면 단식자용 깔판에 직접 구호를 써서 철책에 기대어 놓거나 길바닥에 펴놓거나 합판에 붙여 탑에 기대 놓는 식으로 해 나갔다. 비가 쏟아져도 천막을 못 치게 해서 비가 올 때는 탑 기단에 비스듬히 비닐을 걸쳐 눌러놓고 단식자들이 그 밑에 누워 비를 피하는 소동을 벌이곤 했다.

  단식자들은 소음과 매연 차가운 바람과 따가운 햇살 속에서 때로는 비바람을 맞아가며 22일간의 노천단식을 정신력 하나로 버텨나갔다. 나를 포함한 단식 보호 요원들은 열과 성의를 다해 단식자들을 보호하고 온갖 뒤치다꺼리를 묵묵히 해나갔다.

  외교연대 요원들은 UN을 상대로 한 외교활동을 처음 해보기 때문에 외교서한 작성방법도 잘 모르고 UN 사무국의 구성이나 우리가 접촉해야 할 안보리 관련 부처 각국 대표부의 위치나 방문 절차도 몰랐다. 하지만 항시 하던 대로 최선을 다하자는 다짐 아래 이곳저곳 기웃거리고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는 등 기초적인 노력부터 해 나갔다.

  물과 소금으로만 버틴다는 우리들의 장기 노천단식 소문이 UN 외교가에 참신한 충격을 주어 화제가 되었다. 시간이 흐르자 외교관들이 단식 현장을 방문해 위로와 격려를 해주었고, 찾아와 이것저것 묻고 홍보물을 받아가는 UN 사무국 요원들도 점차 수가 늘어났다.

  단식 5일째 되는 날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실로 의외의 인물이 나타나 우리를 도와주었다. 익명의 UN 사무국 요원이 우리에게 전화를 걸어 은밀한 곳에서 만나고 싶다고 했다. 외교연대 요원 한 사람이 그를 만났는데 그가 UN 사무국과 안전보장 이사회 관계기구 연락처 등 우리들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정보를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우리 외교 연대 요원들은 자체 노력과 그 사람의 도움으로 총 20개국의 대표부를 방문하여 직접 면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 소속 5개국 대표부와 비상임이사국 10개국 대표부,신임 비상임 이사국 5개국 대표부, 코리아 중립국 감시위원회 소속 4개국 대표부,코리아 전쟁 참전 16개국 대표부뿐만 아니라 모든 UN 회원국 상임대표부와 상임 옵서버국 대표부,UN 사무국 관계부처,안보리 관계부처,미 의회 내 관계부처 및 주요 책임자들 49명,UN 사무총장 등에게 홍보 문건 6종과 공식 서한 7종을 발송하고 세계 각국의 500여 주요 운동단체 및 개인들에게도 같은 내용의 문건과 서한을 발송하였다.

  한편 각 지역 회원들은 단식농성 사실을 지역신문 광고를 통 해 동포사회에 알리고,단식농성과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 석방을 촉구하는 광고를 워싱턴포스트지에 내기 위해 필요한 2만 5천불 정도의 모금을 하느라고 쉴틈이 없이 뛰어다녔다.

  워싱턴 DC와 뉴욕의 회원들은 단식농성 뒷바라지를 하는 한편 외교서한 및 홍보자료를 만들어 발송하느라고 잠을 제대로 못잤다. 단식농성 사실이 국제사회와 동포사회에 널리 알려지면서 우리들은 일부 못된 동포들의 협박 전화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조국의 전민련과 세계 각지의 타민족 형제 단체들이 보내온 연대사도 많이 받았다. 또한 언론들의 관심도 꽤 많이 불러 일으켰다. 모든 동포사회 신문들,조국의 한겨레신문과 중앙일 보,뉴욕 타임스지를 비롯한 5개의 미국 신문,AP 통신과 신화사 통신을 비롯한 4개 통신사 New Yorker라는 미국 잡지 등 에서 우리들의 단식농성 사실을 기사화해 주었다.

  UN 창립 기념일인 10월 24일 22일간의 단식을 끝마쳤다. 단식을 끝마친 김갑송,백태형,안동현,심인보,정기열,허준 회원과 10일 안팎의 부분 단식을 한 김미혜,장맹단, 서혁교 회원을 비롯한 10여 명의 회원들, 그리고 눈부신 활동을 한 외교 연대 요원 이성옥,홍정화,정승은,이지훈 회원,단식 보호 요원으로 활동한 신경희, 정귀상,이창재 회원,사무요원으로 활 동한 강완모,한호석 회원 등은 그날 오후에 최선을 다했다는 뿌듯한 자긍심 속에서 모여든 회원들과 후원해준 동포 및 타민 족 형제들과 함께 UN 창립 이래 최장기 단식농성의 기록을 남기고 뜻 깊은 단식 종료식을 했다.

  한청련,한겨레 회원들은 단식농성을 끝내자마자 쉬지도 않고 89년의 각종 사업 활동으로 인해 진 빚을 갚기 위해 또다시 소득증대,소비절약의 구호 아래 뛰기 시작하였다. 일부 회원들은 11월 24일부터 12월 24일까지 한 달 동안 눈보라치는 뉴욕의 맨하탄 거리에서 나무 판매 사업을 했다. 그 사업으로 번 돈 1만 5천 불을 세어 보는 것으로 생후 가장 바빴던 89년 한 해를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