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활동 7 (운동화와 똥가방)

최근 편집: 2019년 7월 8일 (월) 15:03

「범민련」과의 갈등

90년 봄에 남부조국 통일운동권에서 8월의 범민족대회 개최 계획을 발표하면서 해외 운동권에서도 적극 참여해 달라는 요청이 왔다. 그래서 한청련,한겨레는 우리들을 모함했던 지난날의 죄를 덮어둔 채 통일운동 단체 및 개인들과 함께 북미주 범민족대회 추진본부(북미주범추본)를 만들었다.

노태우 일당의 탄압 때문에 범민족대회는 한 곳에서 열리지 못하고 서울과 평양 두 곳에서 분산 개최되었다. 북미주 범추본 참여자들은 노태우 일당이 입국 허가를 해주지 않아 서울의 범민족대회 참가를 막고 나서자 거의가 다 평양의 범민족대회로 가게 되었다.

한청련,한겨레는 89년의 무리한 사업 활동으로 인한 심한 재정난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서울의 범민족대회에는 두 명의 회원을 파견했으나 평양의 범민족대회에는 대표를 파견하지 못하고 한겨레 회원 4명만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는 데 그쳤다.

나는 그때 몇 가지 징후로 보아 평양의 범민족대회에서 남북 및 해외동포를 망라한 무슨 조직체를 결성할 가능성이 높다고 예측했다. 그래서 출발을 앞둔 북미주 대표단 단장인 은호기 선생님께 개인적으로 범민족대회에서 무슨 조직을 결성하려고 하면 동의하지 말고 돌아와 함께 논의해서 결정하셔야 한다는 부탁의 말씀을 드렸다.

나는 남북 및 해외 동포를 망라한 어떤 조직체가 결성되면 남부조국의 통일운동이 어려움에 빠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그런 부탁을 했던 것이다. 우려했던 대로 평양의 범민족대회에서는 은호기 단장님을 비롯한 소수의 재미동포들을 제외한 참가자들이 찬성하여 범민련(조국통일 범민족연합)을 결성하고야 말았다.

우리는 범민족대회가 끝나자마자 평양의 범민족대회에 참가하고 돌아온 북미주범추본의 해체를 일방적으로 선언해버린 후 독자적으로 범민련 결성 준비를 해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범민련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 때문에 북미주뿐만 아니라 해외 각지의 범민련에 참여한 통일운동 세력들로부터 집중적인 비난과 모함을 당하기 시작했다. 우리들은 그런 속에서도 다음과 같은 우리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조건과 역량이 각기 다른 남북해외가 연합을 할 경우에는 남부조국 통일운동만 집중적인 피해를 보게 된다. 민족적 차원에서 볼 때 연합체로서의 범민련 결성은 통일운동의 강화 발전에 도움이 되기보다는 통일운동의 중심인 남부조국 통일 운동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전체 통일운동에 침체와 약화를 초래하게 된다. 통일운동의 강화 발전을 위해서는 남북,해외의 연대를 강화해 나가야 한다. 굳이 범민족적인 통일운동체를 만들려면 협의체 수준에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범민련에 참여하지 않은 채 남부조국 통일 운동권의 범민련 참여 여부를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런 중에 남부조국에서 조성우 씨가 나와 이런 내용의 간곡한 부탁을 해 왔다.

“남부조국 통일운동권의 범민련 참여가 확실시되고 있다. 나는 협의체 수준의 통일운동체를 기대했다. 범민련이 협의체가 되도록 계속 노력하겠다. 남,북, 해외 3자가 모인 범민련에서 해외의 역할이 크다. 범민련 내에서 남부조국 통일운동권의 입장에 서서 활동해 주는 해외 통일운동 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한청련,한겨레가 그 역할을 해주어야 한다. 남부조국 통일운동을 생각해서라도 제발 범민련에 참여해 달라.”

얼마 후에 베를린에서 범민련 결성을 마무리하기 위한 남, 북,해외 3자 회담이 열렸다. 회담을 끝내고 귀국길에 오른 조성우 씨가 “이름은 연합이지만 실제로는 협의체로 운영하기로 합의하였다. 믿고 간다. 최선을 다해 달라.”라는 내용의 전화를 했다. 베를린 3자 회담에 참석한 남부조국 대표 3명은 귀국하자 즉시 구속되었다.

우리들은 많은 논의를 거쳐 ‘남부조국 통일운동을 지키기 위해서 범민련에 참여한다. 조직적 참여는 않고 회원들 일부를 개인 자격으로 참여시킨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북미주범추본에 남아 있는 단체 및 개인들과 협의하여 북미주범추본을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12월 1일에 범민련 북미주본부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북미주범추본 해체를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독자적으로 범민련 결성을 추진하던 사람들이 12월 8일에 똑같은 이름인 범민련 북미주본부를 결성하는 바람에 두 범민련 북미주본부를 구별하기 위하여 ‘12월 1일생 범민련 북미주본부’와 ‘12월 8일생 범민련 북미주본부’로 나누어 부르게 되는 우스꽝스러운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그렇게 출발부터 곤혹스러웠던 12월 1일생 범민련 북미주본부에 참여했던 회원들은 참여 이후 계속된 해외 범민련의 상식을 벗어난 견제와 소외, 비민주적 운영과 그에 대한 항의의 묵살,12월 8일생 범민련 북미주본부의 끊임없는 음해를 견디지 못하고, 1년 2개월 만인 92년 2월에 범민련에서 전원 탈퇴하고 말았다. 그러나 한청련,한겨레가 범민련과의 관계를 정리해 버린 더 큰 이유는 남측 범민련 준비위가 우리들에게 너무 큰 실망감과 배신감을 안겨 주었고 범민련이 철저하게 연합체로 운영되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이 범민련과의 관계를 정리하고 나자 해외 범민련 참여자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모함을 해오기 시작하였다. 그 비방 중상의 강도는 내가 83년에 민족학교를 설립했을 때보다 훨씬 더 높았다. 반통일분자,조직 이기주의,종파분자,정세의 변화를 모르는 놈들이다,윤한봉과 한청련은 끝났다,한청련은 윤한봉의 사조직이다 등등의 온갖 비방 중상은 우리들로 하여금 통일운동에 대해 근본적인 회의를 하도록 만들었다.

여하튼 범민련이 결성된 89년 8월 이후부터 소련, 중국,호주를 제외한 해외 각 지역의 운동권은 범민련 참여 여부를 둘러싸고 예외 없이 심각한 분열과 갈등에 휩싸이게 되었다. 각 지역에서 나타난 공통된 현상은 ‘민족세력이고 통일세력인 범민련 참여자들’의 ‘반민족세력이고 반통일 세력인 범민련 불참자들’에 대한 집중적인 비방 중상이었고,범민련 참여자들의 ‘회의’와 매년 8월에 개최하는 ‘행사 와 ‘성명서 발표’ 중심의 변함없는 통일운동이었다.

남부조국의 통일운동권도 우리가 우려했던 대로 범민련 참여를 빌미로 한 지속적이고 집중적인 탄압을 받고 있었다. 당시에 나는 회원들에게 확신을 가지고 말했다.

“머지않아 범민련에 대한 재검토와 재평가가 시작될 것이다. 통일운동의 내용에 대한 재검토도 시작될 것이다.”

일본지역 운동과의 갈등

일본지역 운동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어 미국으로 온 나는 일본지역 운동에 관한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해 신문이나 기관지도 많이 보았고 일본지역 운동에 대해 잘 알고 계시는 선배 운동가들의 이야기도 많이 들었다. 그리고 미국을 방문한 재일동포들의 이야기도 여러 차례 들어 보았다. 물론 내가 만난 제일동포들은 소속은 거류민단이었지만 총련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민단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사람들이었다. 총련 소속 재일동포들은 아예 미국 입국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만나볼 수 없었다. 재일 한국민주통일연합(한통련. 한민통의 후신) 소속 동포들 또한 한통련의 간부로 활동하다가 탈퇴한 김광남씨를 제외하고는 만나볼 기회를 갖지 못했다. 여하튼 내가 확인한 것은 역대 독재정권들이 주장했던 것과 달리 한통련이 총련의 배후 조종을 받는다는 사실을 입증할 어떤 증거도 없다는 것이었고 일본지역 운동은 한통련을 중심으로 해서 해외 어느 지역보다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일본지역 운동을 포함한 장기적인 해외운동의 통일을 구상하게 되었고 조건이 허락하면 직접 일본을 방문할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이유로 한통련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바람에 모든 것이 백지화되어 버렸다. 77년에 일본의 한통련이 중심이 되고 미국의 미주민련과 유럽의 일부 운동 세력 (해외한민련구주 본부)이 참여한 최초의 해외운동 연합체인 진보적인 민주민족 통일 해외 한국인 연합(해외 한민련)이 결성되었는데 80년대 초에 미주민련이 탈퇴하는 바람에 미국지역 운동과의 조직적 연 결이 끊어진 한통련은 미주민련 대신 미국의 일부 통일운동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 통일운동가들 대부분 이 바로 나를 모함하고 민족학교와 재미한청련에 대한 방해공작을 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나와 한통련과의 관계가 미묘해져 버렸다. 그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두 번째 이유는 내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이곳저곳에서 하고 다녔는데 그 이야기가 미묘한 파장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70년대까지 해외운동의 중심은 일본지역 운동이었지만 앞으로는 미국지역 운동이 중심이 될 것이다. 84년을 분기점으로 해서 재미동포 수가 재일동포 수보다 많아졌고 5..18 이후 민족 민주운동의 과제가 민주 자주 통일 평화로 정리됨에 따라 자연스럽게 미국과의 관계 문제가 운동의 중심에 놓이게 되고 그에 따라 미국지역 운동의 중요성이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다. 또 한 앞으로 국제 연대운동의 중요성이 갈수록 높아지게 될텐데 여러 가지 조건을 비교해 볼 때 국제 외교 연대운동의 중심은 미국이 될 수밖에 없다. 또한 해외운동이 활성화되고 제 역할을 다 하려면 남부조국 운동과 긴밀한 연관을 가지고 해나가야 하는데 일본지역 운동은 여러 가지 제약 때문에 미국지역 운동 보다 남부조국 운동과의 관계를 갖기가 어렵다. 그런 만큼 미국지역 운동의 중요성을 생각해서라도 사명감을 가지고 더욱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

세 번째 이유는 87년 남부조국 대선 때 재미한청련과 한겨레는 이의 분열 행위를 통탄하고 비판적 지지론을 강력히 비판하는 입장이었는데 반해 한민통은 비판적 지지의 입장에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범민련에 대한 입장 차이와 그 후유증에 따른 오해였다. 재미한청련과 한겨레가 범민련 결성에 반대하여 조직적으로는 불참하고 일부 회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여하는 것만 허용하였다가, 91년 말에는 참여했던 회원들마저 탈퇴시켜 버린 데 반해,한통련은 범민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고,범민련 참여 문제를 놓고 한통련이 분열하는 과정에서 범민련 참여에 반대하여 한통련 소속 단체인 재일 한국인청년동맹 (한청동)을 탈퇴한 청년들이 우연히도 재미 한청련과 무슨 관계가 있는 것 같은 재일 한국청년연합(재일한 청련)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청년운동체를 만들자 한민통 측과 범민련 측이 나와 재미한청련이 재일한청련 결성을 뒤에서 조종한 것으로 오해하고 심한 비방 중상을 해왔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이유들로 인해 일본지역 운동을 포함한 해외운동 통일 구상은 백지화되었고,88년에 여행증명서를 발급받아 일본 여행이 가능해졌음에도 나는 일본 방문을 포기했던 것이다. (재미한청련과 한겨레는 일본의 오사카에 있는 민족교육 문화센터 하고만 우호적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5일간의 UN본부 앞 단식농성

 한청련,한겨레는 90년 2월 합동회의에서 10월에 조국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해외동포대회를 개최하고 10월 1일부터 15일 동안 UN 분리가입 저지와 평화협정체결 촉구를 위한 UN 본부 앞 단식농성을 추진하기로 의결하였다.

  우리들은 그 결정에 따라 UN 분리가입 저지와 평화협정 체결 촉구를 위한 단식농성 및 시위 준비위원회 (이하 준비위원회)를 꾸렸는데 거기에는 램지 클라크(전 미법무부 장관),토마스 검블톤(주교),폴 무어 (전 뉴욕 성공회 주교),노암 촘스키, 브루스 커밍스, 코넬 웨스트 등의 교수, 잭 오델(무지개연합 국 제국장),월든 벨로(식량개발정책연구소 선임 연구원),윌리암 쿤 슬러,스탠리 포크너 등의 변호사,벤 새배스, 거스 슐츠 목사, 다무 스미스(국제연대위 공동대표),안젤라 산브라노(엘살바도르 민중연대위원회 전국대표),데이비드 이스터(KSN대표),수베일 리,레슬리 바이스터(국제연대위 임원들) 등 30여 명에 달하는 저명한 각계의 타민족 형제들과 임창영 박사,이승만,함성국, 유태영 목사 등을 포함한 13명의 동포운동가들이 참여하였고 8개의 동포 단체와 72개의 타민족형제단체들이 후원했다.

  준비위원회는 89년 22일간의 단식농성 때와 마찬가지로 외교 연대 요원들과 단식 보호 요원들을 두고 활동을 시작했다. UN 본부 앞 평화공원에서 시작된 15일간의 단식농성은 89년 때보다 기간은 짧았지만 훨씬 더 많은 준비를 거친 알찬 단식 농성이었다. 단식농성은 같은 날 뉴욕에서 시작된 해외동포대회에 참가하고 준비위원회에 참여한 200여 명의 동포들과 타민 족 형제들이 함께 한 함마술트 광장에서의 집회와 시위로 시작되었다.

89년 때와는 달리 단식자도 타민족 형제 두 명과 유럽,일본, 호주,캐나다,미국 및 남부조국 동포들 을 포함 22명이나 되었. 외교 연대 요원도 국제위윈회의 레슬리 바이스터,수 베일리,그리고 한청련의 정민,정승은, 이진숙 회원 등 10명이나 되었다.

  외교 연대 요원들의 활동은 미국과 소련 대표부를 방문,면담한 것 외에는 89년과 비슷했다. 언론의 보도도 89년과 비슷했으며, 세계 곳곳에서 연대사를 보내온 것 또한 미 연방하원 의원 로날드 델럼스씨가 연대사를 보내온 것을 빼고는 89년과 비슷했다. 각 지역 회원들은 89년과 마찬가지로 지역동포 신문에 단식농성 사실을 광고하고 열심희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여하튼 90년의 대 UN 투쟁은 89년의 그것보다 모든 면에서 진일보한 활기찬 투쟁이었다. 단식 종료일인 10월 15일 오후 미국인 형제 Kathleen Rumpf와 독일인 형제 Kan Hansen, 남부조국 조성우 씨, 일본의 홍우공 씨,캐나다의 안윤식 회원,유럽의 정인옥 회원, 호주의 김대건 회원,미국의 김난원,김희정,김희상,김희숙,오상묵,문유성,이종국,윤창헌,장광민,최경선,황정아 회원 등의 단식자들과 유선모,김현관 회원 등의 단식보호 요원들은 비록 눈에 보이는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했다는 긍지를 안고 평화공원을 깨끗이 청소한 후 경건한 자세로 첫 사과즙을 마셨다.

  나는 두 차례의 UN본부 앞 단식농성 때 허리 상태가 안 좋아 단식은 못하고 대신 낮에는 단식 현장을 지키고 밤에는 단식자들과 같이 자고 단식이 끝난 후에는 단식자들의 복식을 돌보는 등 처음부터 끝까지 단식자들 곁을 지켰다. 따라서 나는 도합 37일간을 아침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단식장인 UN 본부 앞 평화공원에서 생활한 셈이었다.

  그런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 나는 많은 것을 느끼고 생각하게 되었다. 한번은 우리들이 단식하는 동안 티베트인들과 카슈미르인들이 30여 명씩 몰려와 중국과 인도를 규탄하는 시위를 했다. 그 두 차례의 시위 때는 단 한 명의 기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테러에 항의하는 유대인 20여명이 몰려와 시위를 할 때는 미국의 중요한 언론사 기자들이 빠짐없이 나와 취재하고 10여명의 경찰들까지 몰려와 보호하느라고 한바탕 소동을 일으켰다.

  유대인들의 시위가 끝나자마자 몰려왔던 기자들은 바로 곁에서 단식농성하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단 한마디도 안 묻고, 사진 한 장 안 찍은 채 돌아가 버렸다. 나는 막강한 경제력과 정치력과 각 분아의 고급 전문인력을 가진 미국 내 유대인들의 영향력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우리들보다 더 관심을 끌지 못한 채 고산족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로 UN 본부를 향해 악을 쓰고 있던 외로운 티베트인들과 카슈마르인들이 우리들에게 연대사를 부탁해 왔을 때 우리들은 못해주었다. 우리가 중국으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티베트인들의 편을 들었다가는 중국이 화가 나 조국의 UN 분리가입을 동의해 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대신 인도로부터 분리 독립을 주장하는 잠무카슈미르인들을 편드는 것은 인도가 안보리 상임이사국이 아니니까 별 문제가 없겠다고 생각해 연대사를 해주었다.

그때 나는 티베트인들에게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국제 외교라는 것이 얼마나 자국중심적이고 이해타산적인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한 줌도 안 되는 우리들조차 외교활동을 한답시고 원칙적 입장에서 연대를 못하고 조국의 이해를 기준으로 선별 연대를 하니 국제무대에서 벌어지는 각국 정부 간의 외교전은 얼마나 살벌한 이해 싸움이겠는가?

단식에 얽힌 잊지 못할 사연도 있다. 유달리 힘들어 하던 주부 회원 김희정씨가 단식 6일째 되던 날 탈진 상태가 되었다. 놀란 우리들은 즉시 그 회원의 단식을 중단시켰다. 그런데 단식을 끝내고 알아보니 그 회원은 임신 3개월째였다. 다음해에 김희정 씨가 아들을 낳자 나는 평화공원에서 조국의 평화를 위해 태중단식을 한 그녀에게 평화를 위해 살아가라는 뜻에서 화성(和成)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해외한국청년운동연합(해외한청련)’의 결성

87년부터 재미한청련은 해외 한국청년운동연합체(해외한청련)의 건설을 위한 노력을 시작하였다. 청년운동의 불모지인 캐나다에는 권혁범 회원을 파견하고 어느 정도 기초가 되어있는 유럽과 호주에는 내가 직접 갔다. 87년과 88년의 8월 대회에도 세 지역의 청년들을 초청하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노력의 결과 87년에 캐나다에 디딤돌이라는 청년운동체가 만들어져 재미한청련과 연대활동을 해오다가 90년 3월에 디딤돌은 재캐나다 한국청년연합(재가한청련)으로 발전하였다. 독자적으로 87년부터 한국민족자료실을 설립해 운영해오던 호주 청년들도 90년 3월에 재호주 한국청년연합(재호한청 련)을 결성하였다.

개인적 차원에서 운동에 참여했던 서독의 청년들도 90년 10월에 재유럽 한국청년회(재유한청)를 결성하였다. 그렇게 해외 각 지역에 청년운동체가 결성되자 미국을 포함한 4개 지역 청년운동체 대표들은 그동안의 준비를 토대로 해서 90년 10월에 뉴욕에서 열린 ‘조국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해외동포대회’에서 재미한청련,재호한청련,재가한청련,재유한청을 회원 단체로 하는,해외 운동 사상 최초의 청년운동 연합체인 해외한청련(공동의장: 정민,최문현,김나경,박희원)을 결성하게 되었다. 마침내 일본을 제외한 해외의 청년운동 단체 들을 하나로 묶는 결실을 보게 된 것이다.

해외 한청련의 목적도 재미 한청련의 목적과 대동소이하였고 사업 활동 내용 또한 동포사회 조건이 특수한 재유한청을 제외 하고는 거의 같았다. 나는 해외한청련을 결성함으로써 82년에 세운 해외운동 10년 계획 중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를 달성하였기 때문에 기뻐하면서도 일본지역 청년운동 단체를 참여시키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다. (재유한청은 94년에 해체되었다.)

제2차 국제 대행진의 포기

  91년 봄이 되자 한청련,한겨레와 국제연대위는 89년 7월에 국제평화대행진을 마치고 판문점에서 개최한 국제평화대회 때 2년마다 하겠다고 국제사회에 선포한 대로 제2차 국제평화대행진을 7월에 하기로 하고 준비에 들어갔다.

  국제연대위는 맨 먼저 남. 북부조국 정부와 주한 UN군 사령 부에 제2차 국제평화대행진을 협조해 주고 행진대의 판문점 통과를 허용해 달라는 서한을 보냈다. 그 서한에 대해 남부조국 당국에서는 회답을 보내오지 않았다. 주한 UN군사령부에서는 “남북 양 정부 당국이 동의하면 통과를 허용하겠다.”는 내용의 지극히 외교적인 회답을 보내왔다. 북부조국 당국에서는 비공식적으로 “89년 행진 때와 달리 지금은 범민련이 있다. 따라서 국제평화대행진은 범민련의 주최로 해야 한다.”는 내용의 회답을 했다.

  국제연대위는 많은 논의를 거쳐 대표 한 사람을 파견해 “국제평화대행진은 Korea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행사이고 국제연대운동이다. 범민련이 주최가 되면 민족 내부 행사,민족 내부와 운동이 되어 버린다. 그렇게 되면 국제평화대행진은 국제적 관심을 끌지 못할 뿐 아니라 행진에 참가한 타민족형제들의 의미도 민족내부 행사에 초대된 외국손님의 의미로 축소되어 버린다. 따라서 범민련이 후원한다면 몰라도 주최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다. 그러나 북부조국 당국은 범민련 주최로 해야 한다는 주장을 고수했다. 많은 고민 끝에 한청련,한겨레는 5월에 임시대표위원회와 중앙위원회를 긴급히 소집하여 그동안의 진행 경과를 검토한 후 안타까운 마음으로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


“범민련이 주최하는 국제평화대행진은 반대한다. 한청련,한겨레는 국제평화대행진에 참가하지 않는다. 대신 조국의 분단 문제,미군과 핵문제,휴전체제와 군사긴장 문제 등을 널리 알리기 위한 문화선전대를 만들어 서유럽과 호주에 파견한다. 문화선전대 활동은 국제연대위의 이름으로 하고 대내적으로는 해외한청련 연합사업으로 한다. 문화선전대는 호주,유럽,미국의 3개 지역 한청련 회원들로 구성하고 공연물 이름은 ‘해방의 소리’로 하며 모든 경비는 해외 한청련과 한겨레에서 부담한다.”

  그러한 결정을 내린 후 우리들은 국제연대위에 회의 결과를 설명하여 동의를 받았다. 국제연대위는 북부조국 당국에 행진 포기 결정을 공식 통고하고 ‘해방의 소리’ 순회공연 준비에 들어갔다. 국제연대위와 해외한청련은 3개월간의 준비 끝에 정승진 문화부장을 단장으로 하는 문화선전대를 파견했다. 문화선전대는 91년 9월-10월에 걸쳐 50일 동안 ‘해방의 소리’를 가지고 유럽의 룩셈부르크,독일,프랑스,네덜란드, 벨기에,아일랜드 등 6개국 10개 도시에서 17회, 호주의 멜버른과 시드니에서 4회의 공연을 했다. 밑반찬까지 야무지게 준비해 간 ‘해방의 소리’ 문화선전대원들은 현지에서 구입한 중고 밴을 타고 다니며 밥을 직접 해먹는 등 고생을 하면서 우리 문화운동사상 최초로 국제사회를 상대로 한 장기간의 문화선전 활동을 자랑스럽게 성공시켰다.

4.29 LA 폭동을 겪다

92년 4월 29일 흑인운전사 로드니 킹을 폭행했던 백인경찰관들에게 무죄가 선고되자 분노한 일부 흑인형제들이 곳곳에 모여 그에 대한 규탄을 시작했다. 날이 어두워지자 규탄의 움직임은 LA 빈민가 전역의 폭동으로 비화되었다. LA 민족학교는 가난한 흑인 형제들과 히스패닉 형제들이 모여 사는 빈민가에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은 불안에 떨기 시작하였다. 민족학교 부근에 사거리가 있고 그 사거리의 세 귀퉁이에 주유소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는 민족학교와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다. 구멍가게까지 딸린 그 주유소는 남김없이 털리고 방화 공격까지 당했으나 약탈자들이 음료수를 꺼내가는 과정에서 음료수 병들이 깨져 바닥이 젖어있었기 때문에 불이 붙지 않아 위기를 모면했다. 불이 붙으면 민족학교로 옮겨 붙을 가능성 이주 높았기 때문에 걱정했던 우리들은 주유소가 무사하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대각선상의 길 건너편 주유소는 완전히 불타고 말았다.

나는 걱정이 되어 달려온 회원들 중 여자 회원들은 모두 귀가시키고 남자 회원들과 함께 집안에 있는 모든 용기에 물을 가득 채워놓고 고무호스와 방어용 연장들을 준비하는 등 민족 학교의 약탈과 방화에 대비한 만반의 준비를 해놓고 어둠 속에서 밤을 새우며 라디오와 TV를 통해 폭동의 진행 상황을 지켜보았다.

3일간이나 지속된 폭동 과정에서 다행히 민족학교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으나 그렇지 않아도 심각한 경기 침체로 허덕이던 LA지역 동포사회는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경제적 피해를 입었다. 전체 피해 업소 수의 89%와 전체 피해 액수의 90%를 차지할 정도의 피해를 입었다. 그렇게 우리 동포들이 엄청난 피해를 당한 이유는 조국의 언론들이 떠들어댔던 인종 갈등,한흑 갈등 때문이 아니고 자본이 적은 우리 동포들이 폭동의 중심부인 가난한 흑인 형제들이나 히스패닉 형제들이 모여 사는 빈민 지역에서 술이나 식료품 잡화 등을 파는 가게를 주로 많이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동포상가가 밀집되어 있는 코리아타운 또한 소수의 가난한 타민족 형제들이 거주하는 곳이었고 평소에도 LA에서 가장 범죄가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큰 피해를 입었던 것이다. 물론 인종 갈등도 집중적인 피해 이유 중의 하나임에는 틀림없으나 그것은 부차적인 것이었다. 우리 동포들이 빈민 지역에서 업소를 운영하여 돈을 많이 벌었으면서도 그 지역사회에 이바지는 거의 하지 않고 거주도 그 지역이 아닌 살기 좋은 다른 지역에서 했으며 평소에 고객인 지역주민들과 고용한 타 민족 형제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는 등 잘못을 했기 때문에 더 큰 피해를 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가 아니었다.

4.29 LA 폭동은 가난한 흑인 형제들과 히스패닉 형제들이 일으킨 전형적인 도시빈민 폭동이었다. 당시 체포된 사람들은 50%가 흑인이고 43%가 히스패닉이었다. 백인도 4%나 차지하고 있었다. 또한 체포된 사람들의 대부분이 전과자(60%),무직(66%),저학력(60%가 고교중퇴자),남성(89%)인 빈민들이었다.

결국 미국의 심각한 빈부격차와 인종주의 때문에 신음하고 있던 도시 빈민들이 인종주의적인 재판 결과에 분노해서 시작한 시위가 흑인 사회와 히스패닉 사회의 정치의식 빈곤과 지도력 부재 때문에 항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폭동으로 변질되어 버렸던 것이다.

당시 폭동에 가담한 일부 폭력배들은 업소를 약탈한 후 업주들에게 보험 가입 여부를 물어 보험이 없다고 하면 거액을 요구했고 그에 불응하면 업주가 보는 앞에서 방화를 해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심지어 어떤 폭력배들은 규모가 큰 업소들에 전화를 걸어 거액을 요구하며 응하면 업소를 보호해 주고 불응하면 방화하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내가 그때 놀랐던 것은 그동안 우리와 연대해 왔던 진보적인 흑인 형제들 중에도 4.29 폭동을 폭동으로 인정하지 않고 봉기나 항쟁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고,우리 민족학교 식구들이나 회원들 중에도 흔히 말하는 인종 갈등,한흑 갈등의 표출로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놀란 나는 서둘러 회원들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 잡아주고 회원들과 의논하여 4.29 폭동을 한-흑 갈등에서 비롯된 흑인 폭동으로 보고 일단 ‘4.29 사태’로 부르기로 했다. 그것은 연대해 온 흑인 형제들의 입장도 고려하고 흑인 형제들에게 적대감을 갖고 있는 동포들과 한심한 언론도 고려했기 때문이다.

한청련과 한겨레는 호남향우회와 함께 5.18민중항쟁 12주년 기념식을 마치고 나서 제2부에서 4.29 사태에 대한 공개토론회를 열어 동포사회가 4.29 사태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갖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민족학교와 함께 폭동 피해 동포들이 보상과 장기저리 융자를 받을 수 있도록 법률상담을 하고 서류 작성을 도와주는 등의 활동을 해나갔다.

구호와 함성이 없는 침묵 속의 폭동,당당한 약탈과 방화,나는 4.29 LA 폭동을 겪으면서 미국의 일그러진 또 다른 얼굴을 보게 되었다. 5.18의 위대함과 항쟁참여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가난한 시민들의 고결한 도덕성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볼 기회를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