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활동 8 (운동화와 똥가방)

최근 편집: 2022년 12월 13일 (화) 10:39

남-북 UN 분리가입과 눈물

90년부터 동구권과 소련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그 가능성이 한층 높아졌던 남부조국 UN 단독 가입이 91년 7월에 북부조국도 UN 가입을 신청함으로써 남북 동시 UN 분리 가입으로 확정되어 버렸다.

불가항력적인 UN 분리 가입이라고 해서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우리들은 만약 남.북부조국 동포들이 침묵해 버리는 마당에 해외 동포들까지 침묵해 버리면 국제사회는 코리언들 모두가 다 자기 조국이 분리 가입하는 것을 동의,지지하는 것으로, 심지어 통일을 포기해 버린 것으로 간주할 수 있으니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UN 분리 가입 이후의 새롭고 올바른 통일운동을 전개하는 데 필요한 정당성 확보를 위해서도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의견을 모은 후,조국의 UN 분리 가입일인 8월 17일에 UN 본부 앞 평화공원에서 ‘UN 분리 가입 항의 침묵농성’을 하기로 결정했다.

동부지역 회원들과 나는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세 개의 걸개그림을 세워놓고 침묵농성을 시작했다. 걸개그림은 89년 단식 농성 때 미국과 UN이 우리 조국을 톱질하여 두 토막내는 ‘어제’라는 제목의 그림과 90년 단식농성 때 미국과 UN이 남,북부 조국을 찢어서 떼어놓는 ‘오늘’이라는 제목의 그림,그리고 새로 그린 ‘내일’이라는 제목의 그림이었다. 새 걸개그림은 남북이 통일되어 환희의 춤을 추고 있고 우리민족에게 미국과 UN이 꽃을 들고 축하하는 내용이었다.

경찰들의 저지 목책에 둘러싸여 농성하고 있던 회원들은 UN 총회에서 분리 가입이 통과되고 남, 북부 조국의 깃발을 게양하는 시간이 되자 모조리 그곳으로 몰려갔다. 나는 두 깃발이 나란히 올라가는 광경을 차마 볼 수가 없어 참담한 심경으로 농성장에 남아 있었다.

회원들은 깃발 게양대 건너편 인도에 서서 ‘우리의 소원’을 부르고 ‘Korea is one’을 목 놓아 외쳤다. 그러다가 두 개의 깃발이 천천히 올라가자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환영하기 위해 태극기를 들고 몰려왔던 동포들도 분위기에 눌려 감히 태극기를 흔들며 환호하거나 박수를 치지 못하고 조용히 서 있다가 떠나갔다.

각국의 언론들은 같은 날 리투아니아인들이 자기 조국이 독립하여 UN에 가입한 것을 축하하며 환호하는 모습과 우리 회원들의 흐느끼는 모습을 함께 집중 취재했다.

한편 LA에서는 UN 가입을 축하하는 행사로 넋 빠진 남부조국의 연예인들이 출연한 ‘소리여,천년의 소리여!’라는 공연이 있었는데 LA 회원들은 그 공연장 입구에서 ‘소리여,분단의 소리여!’,‘소리여,분열의 소리여!’라는 가로 글막을 들고 침묵시위를 했다.

정세변화와 강령 개정

한편 남, 북부 조국의 UN 분리 가입에 항의하는 UN본부 앞 침묵 농성과 ‘해방의 소리’ 유럽 호주 순회공연을 마치고 범민련과의 관계를 정리해 버린 우리들은 92년 봄부터 오래된 과제였던 2세 운동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우선 나성에서 징검다리라는 이름의 2세 운동체를 결성하고 가능한 몇 개 지역에서 2세 대상의 대화와 학습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92년 7월이 되자 우리들은 조국에서 국가보안법 철폐를 위한 범국민투쟁본부가 결성되고 5개 도시에서 단식농성이 시작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우리들은 서둘러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을 위한 미국운동본부(국보철 미국본부)를 결성하고 전 지역에서 시위와 6일간의 연대 단식농성을 벌였다. 10월에는 민족학교와 징검다리가 ‘올바른 2세운동의 방향에 대한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겨레와 해외한청련은 10월 대회(해외운동 강화 발전을 위한 해외동포대회)와 총회를 개최하여 변화된 내외 정세를 집중 분석한 후 한겨레,한청련 모두 정세전망에 맞게 강령과 규약을 개정하였다. 그때 당시 우리들의 정세인식 내용은 이랬다.

“냉전의 시대는 끝났다. 세계적으로 혁명은 불가능해졌다. 조국에서의 변혁운동도 끝났다. 북부조국이 UN에 가입한 것은 통일보다는 체제유지가 급선무라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북부 조국과 미일의 관계도 개선될 것이다. 남북관계는 이제 대결에서 경쟁으로 바뀌게 되었다. 통일은 장기적 과제가 되었다. 냉전의 시대가 감에 따라 통일문제에 대한 국제연대운동과 해외 운동의 의미는 크게 축소되었다. 해외에서의 통일운동은 조국의 평화군축운동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것이 장기적으로 통일에 이바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세인식을 토대로 한청련,한겨례는 ‘남부조국의 자주 민주를 실현하고 조국의 통일과 평화에 이바지한다와 같이 강령개정을 했다. 그리고 남부조국의 자주 민주를 위한 운동과 함께 조국의 통일과 평화에 이바지하기 위한 평화 군축운동과 동포사회 권익신장 및 옹호운동을 펴나가기로 했다. 나는 10월 대회장에서 정세분석을 하면서 회원들에게 다음과 같은 부탁을 했다.

“혁명의 시대는 갔다.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운동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운동과 생활을 통일시켜 나가야 한다. 모든 회원이 생활 속의 장기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 살아가야 한다. 사업을 하는 사람은 장기적인 뚜렷한 목표를 세워 해 나가고 전문기술과 전문지식이 있는 사람은 해당 분야에서 훌륭한 전문가가 되고 학업을 중단한 사람들도 목표를 세운 후 학업을 다시 시작해 훌륭한 학자나 훌륭한 전문 직업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철저한 운동의 생활화가 아루어져야 한다. 운동의 생활화는 조직 생활뿐만 아니라 가정 생활,직장 생활, 사회 생활의 세세한 면에서까지 운동가로서의 원칙과 자세를 철저히 지켜나갈 때만이,그리고 꾸준한 학습이 뒷받침될 때만 이 가능해진다. 학습을 등한시하면 의식이 흐트러져 운동은 증발해 버리고 생활만 남게 된다. 운동의 생활화와 꾸준한 학습을 구호 삼아 열심히 살고 열심히 운동해야 한다. 또 동포사회에 뿌리를 깊이 내려야 한다. 장기적 안목을 가지고 동포사회에 뿌리내리기 위한 다양한 노력을 강화해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운동을 생활화하고 꾸준한 학습을 해도 의식 있는 소수 집단,자족적 운동집단으로 화석화되어 버린다. 마지막으로 우리들은 각 지역 마당집을 큰 뿌리 삼아 동포사회에 대한 봉사활동과 권익 신장,권익옹호 활동을 더욱 강화해 동포 사회에 더 깊고 넓은 뿌리를 내려야 한다.”

재미한국청년연합 강령

  1. 재미한국청년연합은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고 인류의 정의와 평화를 추구하는,미국에 사는 동포 청년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2. 재미한국청년연합은 남부조국의 자주 민주를 실현하고 조국의 통일과 평화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3. 재미한국 청년연합은 해외운동을 남부조국 민족민주운동의 특수지역운동으로 규정한다.
  4. 재미한국청년연합은 미국지역의 특성을 정확히 인식,전체 운동을 확충 강화하는 방향에서 지역운동으로서의 특수성과 전문성을 키워나간다.
  5. 재미한국청년연합은 7-4 남북공동성명’과 ‘남북 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 협력에 관한 합의’ 정신에 따라서 남과 북을 하나로 보는 통일된 조국관을 가진다.
  6. 재미한국청년연합은 남북부조국의 정부에 대해 주체적인 입장에 서서 활동한다.
  7. 재미한국청년연합은 공개 합법적으로 활동한다.
  8. 재미한국청년연합은 필요한 운동자금을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한다.
  9. 재미한국청년연합은 미국지역 운동의 강화 발전이 재미동포들의 지지와 참여 속에서만 가능하다는 철저한 인식을 가지고 동포 대중들 속에서 활동한다.
  10. 재미한국청년연합은 운동의 강화 발전을 위해 독자성을 유지하는 범위 내에서 남부조국 운동과 해외 다른 지역운동 그리고 미국 안 다른 운동단체들과 연합 연대 제휴하여 활동한다.
  11. 재미한국청년연합은 올바른 국제질서 수립과 세계평 화를 위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민족해방운동,평화운동,인권운동,환경운동,여성해방운동을 비롯한 모든 진보운동 과 연대한다.
  12. 재미한국청년연합은 정의로운 미국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미국 내의 다른 소수민족들과 연대한다.
  13. 재미 한국청년연합은 조국과 미국의 대등한 관계 정립을 추구하며 그러한 목적으로 활동하는 다른 민족,개인 또는 단체들과 연대한다.
  14. 재미한국청년연합은 자랑스러운 재미동포사회 건설과 재미동포들의 권익신장 및 옹호를 위해 힘쓴다.

정만수 이주영 장학금

나는 82년에 퀘이커의 미국친우봉사회에 약 6개월간 나간 적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만난 분들 중에 정만수 할아버지와 이주영 할머니 부부가 있었다.

항상 두루마기를 입고 다니시는 정만수 할아버지는 일제 때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다가 감옥살이를 하신 경력도 있는 좀 특이한 분이셨다. 정만수 할아버지는 평생을 이발사로 살아오셨고 이주영 할머니 또한 평생을 바느질 등 노동으로 살아오셨다. 두 분은 열심히 노동해서 모은 돈으로 가난한 학생들 학비를 대주거나 고 함석헌 선생의 민족교육운동을 돕는 등의 장한 일들을 하시며 사시다가 칠십 고령이 되자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이민 오셔서 노인 아파트에서 검소하게 생활하고 계셨다.

두 분은 민족학교에서 운영자금 마련을 위해 깡통과 중고품을 수집판매 한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시고는 매일 새벽에 길거리로 나가 쓰레기통을 뒤져 깡통과 중고품을 주워 모아 민족학교로 보내주셨다. 심지어 이주영 할머니는 주워 모은 것들 중 에서 더러운 옷들은 직접 세탁을 하고 찢어진 옷은 꿰매기까지 해서 보내주시곤 했다.

한번은 우리들이 깡통을 싣고 오기 위해 아파트로 찾아갔는 데 정만수 할아버지가 2불을 내놓으시기에 웬 돈이냐고 물었더니 새벽에 길거리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으니까 지나가던 백인 한 사람이 거지로 알고 돈을 주기에 안 받을까 하다가 민족학교에 주려고 받아왔다고 대답하셔서 아무 말도 못하고 받아온 적이 있었다.

두 분은 민족학교에 음식물과 기부금도 꾸준히 보내주셨다. 한겨레가 결성되자 함께 회원으로 가입하신 후 80세 고령에도 불구하고 학습과 회의에 열심히 참석하셔서 주위를 놀라게 했다.

또 두 분은 89년의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평화 대행진’에 참가하여 젊은이들도 힘들어 하는 백두산에서 판문점까지의 행진을 끝까지 끝마치셨다. 당시 정만수 할아버지는 수술로 인해 항문 기능을 잃고 옆구리에 대변주머니를 차고 다니셨는데 행진단 최고령자였기 때문에 백두산 정상에서 출정식을 할 때 출정 선언문을 낭독하시기도 했다.

그렇게 계속 우리들에게 교훈과 감동을 주시고 흐트러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던 정만수 할아버지는 91년에 암으로 돌아가셨고 이주영 할머니는 변함없이 민족학교를 보살펴 주시는 우리들의 할머니로 남아 계신다.

민족학교에서는 정만수 할아버지의 영정을 녹두장군과 맞보도록 모셔놓았다. 민족학교는 또 두 분의 조국과 민족에 대한 소박한 사랑과 헌신적 실천을 이어받기 위해 깡통과 중고품 판매 수익금 전액을 매년 민족의식이 투철한 학생들에게 장학금으로 주기로 결정하고 그 장학금 이름을 ‘정만수,이주영 장학금’이라 부르기로 했다. 다음을 참고할 것 깡통 줍는 할머니, 이주영 할머니(1993)

재미 동포사회의 문제점

미국 전체 인구의 0,4%도 못되는 약 90만 명으로 이루어진 재미 동포사회는 조국 동포사회와 마찬가지로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다. 중요한 문제점 몇 가지만 지적해 보겠다.

첫째,잘못된 인종관과 그로 인한 터무니없는 인종주의이다. 미국에는 백인(74%), 흑인(12%), 히스패닉(8%)을 포함한 58개 인종집단이 모여 살고 있다. 미국인들의 평가에 따르면 우대 순위에서 우리 동포들은 일본인(19위),중국인(30위),필리핀인(39위),흑인(42위)들보다 낮은 43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92년). 그런데도 우리 동포들은 스스로가 백인들 다음의 대우와 평가를 받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다른 유색인종들을,특히 수 백 년 동안 피와 땀으로 미국을 개척하고 민권을 쟁취해 놓은 대선배인 흑인 형제들을 터무니없이 멸시하고 천대하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우리 동포들은 인종감정에 기인한 폭행이나 낙서같은 혐오범죄의 피해를 아시아계 중에서 제일 많이 당하고 있었다.(92년)

둘째,형편없이 낮은 정치 참여도와 기가 막힐 정도의 보수성이다. 재미동포들은 이민 온 소수민족들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할 정도로 특출하게 학력이 높았다. 88년 통계에 의하면 -동포이민자들의 78%가 고졸 이상이고(미국평균은 66%), 남자 이민동포의 52%가 대졸 이상이며 (미국평균은 20%), 여자 이민동포의 22%가 대졸 이상이다(미국평균은 13%). 그렇게 학력이 높으면서도 우리 동포들은 유권자의 1%만이 투표에 참가할 정도로(92년) 미국 정치에 무관심했다. 그러한 우리 동포들의 정치적 무관심 때문에 미국의 정치인들 또한 우리 동포사회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을 갖지 않았다. 재미 동포들의 보수성에 대해서는 상상에 맡기겠다.

셋째,조급하고 무리한 경제적 성취욕이다. 우리 동포들이 타민족들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열심히 일해서 소수민족들 가운데 가장 빠른 경제적 성취를 하고 있다는 것은 미국 사회에서 모르는 사람아 없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렇게 지독하게 일한 덕분에 우리 동포들이 돈은 빨리 벌었는지 몰라도 그로 인한 건강악화와 자녀와의 대화 부족,부부간의 갈등 때문에 고통을 겪고 심지어 정신건강까지 망치고 있었다. 통계를 보면 재미동포들의 정신질환 발생률은 뉴욕의 경우 타 소수민족의 2.3배나 높고, LA의 경우에도 아시아계 중 가장 높았다(90년). 또 마약을 복용하는 동포들이 전체 아시아계의 60%를 차지하고(92년), 가정폭력과 가정폭력의 강도(피해정도)에 있어서도 전체 소수민족 중에서 단연 1위를 차지했으며 이혼율도 남부조국 보다 5배나 많았다(88년). 음주운전도 소수민족들 중에서 1위를 차지하고(92년) 자녀를 때려 아동학대죄로 법정에 서는 동포도 아시아계 중 1위를 차지했으며 (92년), 구속 또는 수감 중인 동포 청소년들도 아시아계 중 또 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가슴 아프게도 72%의 동포 아동들이 집 열쇠를 가지고 다니는 소위 ‘열쇠아동’이었다.

넷째,낮은 범죄 신고율과 허위진술이다. 우리 동포들은 범죄 신고도 잘 안하지만 신고를 해놓고도 가해자가 재판을 받을 때 법정증언을 안 하거나,한다 해도 보복이 두려워 신고할 때와 다르게 진술을 번복해버려 40% 정도의 재판이 기각되고 있었다(91년). 그래서 경찰관들은 코리언 관련 사건을 기피하고 교도소 내 범법자들 사이에서도 ‘코리언은 봉이다.’는 인식이 팽배해 있어 동포를 상대로 한 범죄는 계속 늘어만 가고 있다.

다섯째,민족교육에 대한 무관심아다. 재미 동포사회에는 제대로 된 민족교육 기관이 하나도 없었다. 동포사회 자체 모금과 남부조국 정부의 지원금으로 세운 LA 한국아카데미라는 정규 초등학교가 하나 있긴 하다. 그 학교 학생들의 90%가 동포 소년 소녀들이지만 교육내용은 1주일에 3시간씩 우리말과 태권도 등을 가르치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미국 초등학교와 하등 다를 바가 없었다.

우리말을 가르치는 한글학교는 미국 전역에 6백 15개가 있었으나(92년) 순수한 한글학교는 그중 10%도 안되고 나머지는 모두 교회 부설 한글학교였다. 순수한 한글학교에서도 1주일에 두세 시간 정도만 초보적인 우리말과 글을 가르치고 있을 뿐이었다.

재미 동포사회는 우리말을 못하는 2세들이 전체 2세들의 63%나 되고 타민족 형제들과 결혼하는 비율이 1세들은 8,5%인데 비해 2세들은 47,9%나 되고 3세들은 무려 84,2%나 될 정도로, 뿌리교육을 등한시해 일부 뜻있는 동포사이에 민족정체성 유지가능성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 동포들은 만약 조국동포들의 미국 이민이 중단되면 재미동포사회는 앞으로 30년을 못 넘기고 소멸해버릴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까지 하고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심각한데도 남부조국 정부는 민족교육을 지원해 주기는커녕 여전히 재미 동포사회에 대해 민족적 차원이 아닌 정권 안보적,남북 대결적 차원에서 접근했다. 민족학교를 비롯한 각 지역 마당집의 민족사 교육,민족문화 교육,동포 사회 봉사 및 권익옹호를 통한 민족의식 고취활동을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 방해 탄압했다.

재미동포들의 조국현실에 대한 소박한 관심과 걱정을 부담스럽게 여겨 자기 뿌리도 잘 모르는 1,5세나 2세들에게 ‘미국에 이민 간 이상 조국에 신경 쓰지 말고 미국 주류사회에 파고들어가 성공하라고 종용할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동포사회와 소수민족들을 철저하게 외면하고 보수적인 미국인들의 편에 서 있는 모 연방하원의원을 미국 주류사회에 파고들어 성공한 재미동포의 상징이나 되는 양 추켜세우는 등 한심한 짓을 계속하고 있었다.

재미 동포사회의 문제들은 이민동포들에 의해 이식된 조국 동포사회 문제들과 재미동포들이 미국 사회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현지 문제들이 겹친 것이다. 다시 말해 재미동포들이 아직 주인의식을 갖지 못한 데 기인한 낮은 정치 참여도와 문화적 갈등 때문에 발생한 문제들을 제외하고는 재미 동포 사회의 거의 모든 문제점들의 뿌리는 조국에 있다는 것이다.

세계를 미국으로 압축하면 조국 동포사회가 곧 재미 동포사회가 되고 미국을 세계로 확대하면 재미 동포사회가 곧 조국 동포사회가 된다. 조국 동포들은 재미 동포사회가 조국 동포사회의 압축판이라는 인식을 갖고 스스로의 모습을 한번쯤 재미 동포사회를 거울삼아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재미동포들보다 나은가?”

그리고 조국 동포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비록 가난하기 때문에 조국동포들로부터 ‘똥포’라는 소리를 듣고는 있지만 재미동포들을 비롯한 해외동포들이 조국동포들 보다 훨씬 더 성실하고 검소하게 살아가고 훨씬 소박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끝으로 타민족형제들을 당황하게 하거나 놀라게 하는 우리 동포들의 특이한 생활문화와 습성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덧붙여 보겠다. 다양한 민족들이 뒤섞여 살고 있는 미국에서 살다보니 우리 동포들의 문화와 습성은 다른 민족들의 그것들과 확연하게 대비되어 자주 물의를 빚거나 화젯거리가 되곤 했다. 가장 확연하게 드러난 특성은 우리 동포들이 모든 면에서 유별나게 극성스럽다는 것이었다. 재미동포들은 223명당 교회 하나씩을 갖고 있어 인구비율로 본 교회숫자에서 모든 민족을 제치고 단연 1위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92년), 세계에서 유일하게 우리나라에서만 하고 있다는 새벽기도를 미국에 와서도 열심히 하고 가끔 산꼭대기에 올라가 처절한 통성기도를 하여 타민족 형제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한번은 우리 동포들 몇 명이 동부 지역 어느 산꼭대기에 올라가 통성기도를 하고 있는데 캄캄한 밤중에 산 위에서 들려오는 괴이한 고함소리에 놀라 잠이 깬 산기슭 마을 타민족 형제들이 다투어 경찰에 신고를 했다. 신고를 받은 경찰은 조난사고로 알고 허겁지겁 개와 헬리콥터까지 동원한 구조대를 출동시키는 소동을 벌여 인근지역의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휴거 소동이 일어났을 때도 지하철이나 큰 길목에서 회개하라고 악을 쓰는 사람들 중에서 유별나게 목이 쉰 채로 악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언제나 우리 동포들이었다. 라스베이거스 같은 곳에 가서 도박을 하다 돈이 떨어져도 일어나지 않고 악성 단기 고리대금까지 빌려 쓰며 끝까지 계속해 하룻밤사이에 패가망신하는 사람들 대부분도 언제나 우리 동포들이었다. 또한 우리 동포들은 곳곳에서 새끼 전복까지 다 잡아먹을 뿐만 아니라 탐스럽고 굵은 미국의 고사리를 꺾으려고 산야를 떼지어 다니며 보호 식물들을 짓밟아 대고 자주 길을 잃고 헤매는 사고를 일으켜 결국 지방자치단체들로 하여금 전복과 고사리 채취 규제법까지 제정하게 만들어 버렸다.

또 노인아파트에 입주한 우리 할머니,할아버지들은 이웃들을 의식하지 않은 채 청국장까지 그것도 문까지 활짝 열어놓고 사정없이 끓여 먹음으로써 타민족 노인들이 모두 다 코를 싸쥐고  이사 가게 만들어 버렸다.

우리 동포들이 영어를 잘 못해 일어나는 우스운 일도 많았다.

할머니,할아버지들은 주로 노인회에 나가 영어를 배웠는데 몇 년을 다녀도 실력은 항상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분들의 영어 실력은 누가 아파트 문을 두드리면 안에서 “Who 여?”하고 묻고,두드린 분은 “Me 여〜”라고 대답하는 정도의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젊은 사람들도 영어 때문에 곤욕을 치르기는 마찬가지였다. 、

미국에 온 지 1년밖에 안된 우리회원 한사람은 F 발음을 P로 할 때마다 하도 많이 당해 신경과민이 되어 있었다. 어느 때 부터인가 F발음은 말할 것도 없고 P발음까지도 F로 하게 되었다. 하루는 그 회원이 일을 보러 갔다가 어느 텅 빈 주차장에 주차하려고 차를 세우자 경찰 두 명이 탄 경찰차가 바로 옆에 와 섰다. 순간적으로 그 회원은 그곳에 주차를 해서는 안 되는 가 싶어 그 경찰관들에게 물어본 후 주차하려고 “May I park here?”(여기에 주차해도 될까요?)라고 물었다. 그 회원은 자기도 모르게 PARK(주차하다)를 ‘FUCK’ (X하다)로 발음해버린 것이다.

황당한 질문에 경찰들은 당황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동양계가 발음을 잘못했다는 것을 얼른 눈치 채고 기지를 발휘해 “Sure, but not with me.”라고 대답한 후 배를 잡고 웃어대기 시작했다. 그 회원은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어대다 그냥 돌아와 버렸던 것이다.

민족적 수치

조국에 있을 때는 별로 느껴본 적이 없었고 또 느꼈다 해도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던 민족적 차원의 수치를 나는 미국에서 살면서 뼈저리게 경험하게 되었다. 그 까닭은 여러 가지 있었으나 그 중 몇 가지만 이야기해 보겠다.

첫째,우리나라의 해외 진출 기업들이 자행하는 현지 노동자들에 대한 악독한 취급 문제다. 우리들과 연대운동을 해오던 필리핀과 중남미 형제운동가들이 조심스럽게 그러나 날카롭게 그 문제를 따져 왔을 때 나는 고개도 못 들고 대답도 못했다. 쥐구멍에라도 들어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수치스러웠다.

“너희들도 미국이나 일본의 다국적 기업들에게 그렇게 당했으면서 어떻게 그런 악랄한 짓을 할 수가 있느냐? 너희 조국 (Korea) 도 제국주의 국가다.”

둘째,국제결혼의 후유증 문제다. 미군기지촌에서 살다가 미군들과 결혼하는 이른바 국제결혼을 통해 미국에 오는 우리들의 누이와 딸들은 90년에 3천 9백 82명,91년에 3천 1백 96명 , 92년에 3천 3백 1명으로 매년 평 균 3천명 이상이 된다. 그렇게 미국에 온 분들은 대개가 3년 안에 이혼하는데 이혼율은 84%에 이른다.

이혼한 분들은 가진 것도 없고 배운 것도 없고 기술도 없고 영어도 잘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이 가난에 허덕이고 가난을 이기지 못한 절반 정도는 가슴 아프게도 매춘으로 생활해 나갔다 (88년). 매춘 생활을 하는 분들의 수가 정확히 얼마나 되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미국 10개 도시의 매춘 여성 중 우리 동포 여성들의 수가 제일 많고 뉴욕시 퇴폐 안마소에서 매춘을 하는 우리 동포 여성들의 수가 뉴욕시 안마소 매춘 여성 전체의 75%에 이른다는 충격적인 사실이 미국 언론들에 의해 확인되었다(89년). 부끄럽게도 미국 언론들은 가끔 우리 동포 여성들의 매춘에 대한 특집을 만들어 적나라하게 보도하곤 했다.

셋째,관광객들의 추태 문제다. 80년대 말부터 조국에서 미국으로 떼지어 관광오는 동포들의 추태는 정말해도 너무했다. 정말로 돈이 많았다. 떼지어서 쫓기듯 바삐 다니며 남들은 아예 무시하고 제멋대로 하고,사정없이 떠들고 기념사진은 빠짐없이 찍고 박물관에는 잘 안 들어가고 고급상가나 백화점에 들어가 경쟁이나 하듯 고가품을 싹쓸이했다. 재미동포들의 가난과 고생과 똥차의 허술한 옷차림을 비웃으며 관광을 마친 그들은 마지막 공항에서마저 사정없이 떠들다가 조국으로 돌아가곤 했다.

그 부끄러움을 모르는 돈 많은 관광객들은 고급상가나 백화점들로 하여금 우리말과 영어를 잘하는 판매원들을 서둘러 고용하게 만들어 놓았고 황태자 같고 중동의 토호 같은 우리 동포 관광객들을 안내해 오면 판매액이 15% 정도를 커미션으로 주겠다는 선언을 하게 만들어 놓았다. 고아수출 연속 1위,미국 내 매춘 여성 수 1위인 코리아와 돈을 쓰레기 버리듯 쓰고 가는 코리언 관광객의 극명한 대비는 의식 있는 타민족 형제들로 하여금 인식의 혼란을 느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어 놓았다. 그들은 땀 흘려 살아가는 동포들에게 허탈감을 안겨준 채 당당하게 돌아가곤 했다. 그들은 미국 사회에 빨리빨리 신화,큰손 신화,싹쓸이 신화,안하무인 신화,저질 신화를 남겨 놓고 흐뭇한 표정으로 돌아가곤 했다.

나는 정말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 민족적 수치를 어떻게 없앨까? 국제사회에서 코리아가 부자나라로 널리 알려져 있고 조국동포들 또한 알려진 것보다 더 부자라는 것을 과시나 하듯 세계 곳곳을 휩쓸고 다니는데 고아수출 1위,미국 내 매춘여성 1위라는 이 민족적 수치를…” 그러나 조국동포들은 그런 것들에 대해 별로 수치스럽게 생각하지 않고 신경도 쓰지 않은 채 살아가는 것 같았다. 91년 봄 어느 날,강경대 열사 장례식 소식을 들어 알고 있는 타민족 형제 한 사람과 만나서 나눈 이야기 중 일부다.

“그 학생이 지도자인가?”

“아니다. 평범한 학생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장례식이 요란한가?”

“우리 민족은 인간의 생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나는 그에 대해 동학의 인내천 사상까지 예로 들어가며 한참을 설명했다. 내 설명은 들은 그가 이렇게 물었다.

“그렇게 너희 민족이 인간의 생명을 중요시한다면 왜 고아들을 너희 나라에서 안 키우고 외국으로 입양시키는가?”

나는 대답 대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말았다.

마지막으로 입양아 문제다. 우리나라가 서방 선진국들에 우리 아동들을 많이 입양시키고 있다는 것은 조국에 있을 때부터 알고는 있었으나 막상 미 국에서 살다보니 해도 너무할 정도로 입앙을 많이 시키고 있었다. 우리나라는 83년부터 92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미국 입양아 수에서 1위를 차지하였고 그러한 사실이 자주 미국의 언론을 통해 상세히 보도 되었다.

85년의 경우를 보면,우리나라에서 미국에 입양시킨 아동의 수는 두 번째로 많이 입양시킨 콜롬비아의 6백 24명과 세 번째로 많이 시킨 인도의 4백 96명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인 5천 7백 34명이었다. 그 해에 미국이 받아들인 입양아 전체의 67%나 되었다. 미국인들도 점차 입양을 줄여가기 때문에 우리나라로부터의 입양도 점차 줄고는 있지만 여전히 우리나라는 고아 수출 1위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 가정에 입양된 아동들은 양부모를 잘못 만나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훌륭한 양부모를 만났을 경우에도 가정과 사회에서의 이질감과 소외감,가족 구성원간의 불일치,성격적 갈등,사춘기의 감정적 혼란 때문에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었다, 그들의 심리적 고통이 얼마나 심한가는 미국 전역에서 정신과 치료를 받는 환자의 4분의 1을 입양아들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 봐도 쉽게 알 수 있다. 해외 입양에 얽힌 이야기가 하나 생각나 소개하겠다.

90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자동차 정비업을 하고 있던 회원이 스위스에서 왔다는 20대 동포 청년 두 사람을 민족학교로 데리고 왔다. 우리 회원은 그 두 청년이 중고차를 끌고 정비소에 찾아왔는데 스위스에서 왔다는 말을 듣고 순간적으로 제네바에 설립하기로 한 외교연대 마당집의 후원자로 끌어들여야겠다고 생각해서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두 청년은 독일어를 쓰고 우리말을 전혀 못했으며 영어는 약간만 할 줄 알았다. 독일어를 잘하는 회원의 통역을 통해 들은 그 두 청년의 사연은 기구했다.

두 청년은 찢어지게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란성 쌍생아였는데 다섯 살 때 유럽으로 입양을 가게 되어 어느 공항에서 헤어졌다. 스위스의 어느 산골짜기 마을로 입양된 동생은 출발 전에 어머니가 주신 3남매가 함께 찍은 사진 한 장을 고이 간직한 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요리사가 되었다. 그 동생은 철이 들자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유럽 어느 나라인가로 입양되어 간 쌍둥이 형을 찾기 시작했다.

약 2년 동안 신문에 광고도 내고 관계기관에 부탁도 하는 등의 노력을 한 끝에 엉뚱하게도 같은 스위스의 다른 산골짜기 마을로 입양되어 목수가 되어 살고 있던 형을 만나게 되었다. 둘은 서로가 간직하고 있던 사진을 통해 형제임을 확인했다.

감격적인 상봉을 한 형제는 부모님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 끝에 부모님의 주소를 알아내 조국에 영어로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용케 두 형제의 어머니 손에 들어갔으나 영어를 모르는 어머니는 그 편지를 서랍에 넣어둔 채 잊어버리고 있었다. 몇 달 후 미국 LA에 살고 있던 두 형제의 외삼촌이 조국을 방문했을 때 그 형제의 어머니는 잊고 있었던 영어 편지를 내 보였다. 그렇게 하여 두 형제는 외삼촌을 통해서 어머니와 소식을 주고받게 되었는데 놀랍게도 막내 여동생 또한 미국 어딘가로 입양되어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두 형제는 미국의 여동생을 찾아 3남매가 함께 어머니를 찾아보기로 약속하고 부지런히 일을 해 돈도 마련하고 기초적인 영어공부도 했다. 미국 도착 후 두 형제는 동생을 찾아 미국 전역으로 돌아다닐 계획을 세우고 중고차 한 대를 산 뒤 사전 정비를 위해 정비소에 들렀다가 우리 회원을 따라 민족학교로 오게 되었던 것이다.

동생은 우리말을 한 마디도 기억하지 못했으나 형은 “떴다. 비행기”라는 말만 기억하고 있었다. 눈시울을 적시며 두 형제의 사연을 듣고 난 우리들은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때 둘 다 박사이자 교수인 부모님 밑에서 하버드대를 졸업한 완전 2세 여자 회원이 자기가 도맡아 돕겠다고 나섰다.

그 회원과 두 형제는 두 달 동안의 온갖 노력 끝에 천행으로 뉴욕에 살고 있는 여동생을 찾았다. 그 여동생도 우리말은 못 했으나 오빠들처럼 사진 한 장을 고이 간직하고 있었다.

세 남매는 우리 회원들로부터 어머니께 큰절하는 법을 배운 후 꿈에도 볼 수 없었던 어머니를 찾아뵙기 위해 조국으로 떠 나갔다. 그 후 여동생을 찾는 과정에서 사랑이 싹튼 동생 쌍둥이와 우리 2세 회원은 결혼했다.

우리는 해외 입양아들을 민족적 차원에서 감싸 안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55년부터 84년까지 해외에 입양시킨 우리 아이들의 수가 13만 2천 명이 넘는다는 부끄러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우리 아이들을 다른 나라로 보내지 않고 우리들 손에서 키울 수 있도록,더 이상 우리들의 누이와 딸들이 다른 나라에서 손가락질 받으며 살지 않도록,더 이상 우리 동 포 관광객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지 않도록,더 이상 우리나라 기업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 증오와 저주를 받지 않도록 뼈를 깎는 자세로 노력해 나가야 할 것이다.

마음 고생

87년 여름 어느 날이었다. 방미 중이던 유홍준 교수가 이곳저곳 다니며 이런저런 이야 기를 들은 후 민족학교로 나를 찾아와 측은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국내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마음고생이 심하겠더라. 술도 못 먹으면서 어떻게 버텨 내냐?”

“담배로 버텨 내지.”

조국에서 운동할 때도 마음고생을 하긴 했지만 망명 생활중 나의 마음고생은 강도도 높고 내용도 좀 색다른 것이었다. 제일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조국으로부터 내가 조국에 있을 때 나를 도와주었거나 만났거나 나와 가까웠다는 이유로,그리고 내가 망명한 후 나와 만났거나 연락을 취했다는 이유 때문에 전-노 일당에 의해 고통받는 분들의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듣고 분노만 할 뿐 아무런 대응도 할 수 없어 느끼는 죄책감과 미안함과 무력감이었다. 그리고 요랜 망명생활 동안 끊이지 않고 계속된 나와 회원들에 대한 중상모략과 훼방에 따른 분노와 배신감과 환멸과 슬픔과 인간에 대한 회의였다.

나는 그런 마음고생을 겪으면서 사람들 중에는 건설적이고 창조적인 역량이 아니라 파괴적인 역량,그 중에서도 남의 일을 훼방 놓고 남을 괴롭히는 데 탁월한 역랑올 가진 자들이 있다는 걸 온몸으로 깨달았다. 허울뿐인 민주화운동이나 인권운동을 한답시고 떠들고 다니는 DJ 지자들과 일부 교회 쪽 사람들은 나와 한청련,한겨레와 각 지역 마당집에 대해 내가 귀국하는 그날까지 줄기차게 모함을 계속했다. 친북이니 빨갱이니 북에 갔다 왔다느니,돈이 어디서 나서 저렇게 활동하겠냐느니,FBI가 뒷조사를 하고 있으니 곧 끝장날 것이라느니,국내에서 운동할 때도 중심부에 있지 않고 변두리에 있었던 별 볼일 없는 놈이라느니,국내 운동권에서도 구제불능이라고 판단하여 제명처리해 버렸다느니,안기부가 곧 국내와 해외를 묶어 간첩단 사건을 하나 터뜨릴 것인데 그때는 윤한봉이 해외 총책이 될 것이라느니, 국내 운동권에서도 윤한봉과 한청련은 위험하다고 판단하여 일체의 관계를 끊었고 운동권 자료도 못 보내게 하여 고립되었다느니,광주 운동권에서도 피해를 많이 입어 아예 죽은 사람 취급하고 연락도 안한다느니 등등.

나를 안기부 끄나풀로 몰다가 한동안 잠잠하던 일부 통일운동권 사람들도 범민련 문제를 둘러싸고 우리들과 갈등이 생기자 90년 후반기부터 또다시 반북이니,반통일이니, 국내 운동이 얼마나 발전했는가를 모르는 한심한 놈이라느니,대세를 모르는 놈이라느니 하며 비열한 공격을 해댔다.

내가 귀국하게 되자 그들은 또 안기부와 타협하고 들어간다느니,들어가면 설자리가 없을 것이라느니,잘해야 재교육 대상이 될 것이라느니,들어가자마자 한청련은 모래성처럼 무너질 것이라는 등의 중상모략과 간절한 소망이 담긴 예언을 나에게 귀국 선물로 안겨주었다. 또 한청련에서 탈퇴(총 120명)하거나 문제를 일으켜 제명당한 사람들(총 21명) 중의 일부도 우리에 대한 해코지가 삶의 전부인 양 집요하게 비민주적이라느니,독선적이라느니,윤한봉의 사조직이라느니,X도 아니라느니 하며 욕하고 다녔다.

조국에서 활동 중이거나 미국을 방문한 운동가들 중 일부도 미주운동 상황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한청련에서 탈퇴하거나 제명당한 사람들과 우리들에 대한 중상모략과 비방이 중요한 사업 활동 중의 하나인 사람들의 이야기만 듣고 그들에 동조하여 한청련을 비방하고 다녔다. 또 다른 일부 조국의 운동가들은 너무 청교도적이라느니 금욕주의자들 모임같다느니 너무 경직되었다느니 하며 비아냥거리고 다녔다.

마음고생에는 아픔뿐만 아니라 슬픔도 있었다. 한청련,한겨레 회원들 중에는 하버드,예일,MIT, 콜롬비아, 버클리 등의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들과 휴학한 사람들 그리고 석,박사 과정을 밟고 있다가 운동을 위해 중단해 버린 유학생들도 있었다. 또 부부 형제 남매 자매 회원들뿐만 아니라 3남매 4남매 회원도 있었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의사 변호사 목사 전문가 사업가들도 있었다.

내가 미국에 나타나지 않았거나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학업을 마치고 잘 살 수 있었을 그런 자녀와 형제자매와 남편을 회원으로 둔 가족들 중 일부는 나를 증오하고 저주하고 심지어 가정파괴범으로까지 몰았다. 그럴 때는 정말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것은 고통이 아닌 슬픔이었다.

“5.18 때 죽어 버리지 왜 죽지 않고 나와서 내 자식을 망쳐 놓느냐?”

“왜 소련으로 가지 미국으로 와가지고 괴롭히냐?”

“문선명이보다 더 무서운 세뇌가다.”

“김일성보다 더 무서운 놈이다.”

“네가 미국 욕하는 것을 들었다. FBI에 고발해 버리겠다.”

“미친 촌놈 새끼가 와가지고 집안을 망쳐 놓았다’ 등등.

색다른 마음고생 중에는 고독감도 있었다. 12년 동안 해외운동을 하면서 나는 조국에서 운동할 때는 느껴 보지 못했던 고독감을 여러 차례 느꼈다. 가끔 어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경우 어쩔 수 없이 나 혼자서 궁리하여 결정할 수밖에 없을 때가 있었다. 물론 의식 수준도 높고 경험도 많이 쌓은 헌신적인 한청련,한겨레의 간부들도 있었지만 조국에서 운동해 본 경험이나 직접적인 탄압을 받아본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한계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혼자서 모든 책임을 지고 올바른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중압감과 고독감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그렇지만 조국의 운동가들처럼 고문, 투옥 등의 몸 고생을 하기는커녕 뺨 하나 안 맞고 편하게 지내고 있는데 대한 벌,도망쳐 나온 데 대한 벌이라 생각하며 그 모든 마음고생을 이겨냈다.

나는 마음이 아프고 괴로운 일이 생길 때마다 민족학교의 공터 이곳저곳을 일구어 만들어 놓은 채소밭과 꽃밭에 나가 일을 하곤 했다. 조국을 생각하며 취미삼아 가꾸기 시작한 채소와 꽃들은 나의 그리움과 외로움과 슬픔과 울분을 달래주고 녹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식사시간을 즐겁게 만들어주고 마당집 분위기도 밝게 해주었다. 시금치,상추,고추, 호박, 부추,오이, 쪽파 등의 채소들과 분꽃,봉선화,코스모스, 채송화 같은 꽃들은 내가 잡초를 뽑아 주고 퇴비를 주고 물을 줄 때마다 한결같이 날더러 운동을 그만두고 한적한 농촌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마음 편히 살라고 권하곤 했다.

위로, 격려해주신 방미 인사들

만리타국에 홀로 나와 활동하고 있는 나와 한청련,한겨례 회원들과 마당집 식구들에게도 남다른 외로움이 있었다. 미국을 방문한 조국 동포들이 전화나 인편을 통해서 또는 마당집 방문을 통해서 위로와 격려를 해주거나 우리들의 사업 활동에 직접 참여해주거나 용돈이나 기부금을 내놓고 가면 나나 회원 들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내가 미국에 도착한 81년부터 완전 귀국한 93년 8월까지 그 동안 격려해 주거나 도움을 주셨던 고마운 분들의 이름을 써 보겠다.

고 성래운 교수님,고 황인철 변호사,광주 YMCA의 조아라 장로님과 김경천 총장님,김승균 선생님, 한완상 박사님,문동환 목사님,박형규 목사님,백기완 선생님,언론계의 김태홍 선생님, 김종철 선생님,김성 선생님,혜진 스님,법륜 스님,여연 스님,문정현 신부님,홍근수 목사님 내외분,양길승 의사님,김용태 선생님,유연복 선생님, 홍선웅 선생님,안치환 선생님,정태춘 선생님,임진택 선생님,문병란 선생님,송기숙 교수님,고 은 선생님,황석영 선생님, 윤정모 선생님,원동석 교수님,유홍준 교수님,이애주 교수님, 전홍준 교수님,김동원 교수님,이영희 교수님,백낙청 교수님,윤석두 교수님,김남선 선생님,김현준 선생님,최열 선생님,차준엽 선생님,김현 선생님,정찬용 선생님,유미옥 선생님,황인성 선생님,조성우 선생님,최병상 선생님,민상흥 선생님,문국주 선생님, 이대훈 선생님, 장기표 선생님,이명준선생님,김근태 선생님,이미경 선생님,박귀현 선생님,서상섭 선생님,김민석 선생님,김상현 의원님,서경원 의원님,이부영 의원님,박석무 의원님, 박계동 의원님,한승헌 변호사님, 김광일 변호사님,박원순 변호사님, 조용환 변호사 님….

조국의 전쟁 위기에 대응하다

10월 대회와 총회를 마친 우리들은 조국의 대통령 선거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갖지 않은 채 ‘국보철 미국본부’ 이름으로 미국 캐나다 호주에서 양심수 돕기 운동을 전개해 장기수를 포함한 131명의 양심수들에게 1만 불에 해당하는 내의와 양말을 보내고 방미 중이던 가수 안치환씨의 북미주 순회공연을 추진해 7개 지역의 공연을 성황리에 마쳤다.

92년 12월 당시 우리는 87년 대선 때 깊숙이 뿌리내린 지역주의 때문에 DJ가 패배하고 YS가 승리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었기 때문에 지역주의의 광풍에 휩싸인 조국의 대선 과정을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93년 1월이 되자 우리들은 냉전체제도 무너졌고 남,북부조국 사이에 남북불가침 부속합의서까지 발효된 마당에 미군의 계속된 주둔을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평화군축운동 차원에서 백악관에 미군 철수를 촉구하는 전보치기 운동을 시작하였다.

우리들은 동서남북으로 뛰어다니고 밤낮으로 전화를 걸어 동포 6백 50명과 타민족 형제 2백 50명의 참여를 이끌어 내 백악관에 905통의 전보를 몰아쳤다. 전보치기가 끝났을 때는 북부조국의 핵개발 문제를 둘러싼 조국에서의 군사긴장이 한층 더 고조되어 있었다. 팀스피리트 군사훈련 재개,국제원자력기구의 북부조국에 대한 압력 강화,북부조국의 핵확산 금지조약 탈퇴,북부조국 핵문제의 UN 안보리 상정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태는 우리들을 극도의 긴장 속으로 몰아넣었다.

우리들은 조국에서 전쟁이 발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여 3월의 한청련,한겨레의 합동회의에서 조국에 조성된 전쟁 위기 상황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의 비핵화와 영구적인 평화 정착을 촉구하는 의견 광고를 한겨레와 해외한청련 이름으로 워싱턴포스트지에 게재하고 UN 본부 앞에서 단식농성을 하기로 긴급 결정했다. 한청련과 한겨레는 광고 게재 운동에 동참할 개인과 단체들의 모집과 필요한 광고료 모금을 위해 조직 역량을 총동원했다.

우리들은 50일 동안을 조국을 전쟁 위기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마음 하나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그 결과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국제평화기구를 비롯해서 화해를 위한 국제 신앙인회,평화와 자유를 위한 국제여성연맹 등의 전국적 단체, 캐나다 성공회,호주 연합교회 총회,미국의 메리놀 신부회,콜롬반 신부회 등의 종교단체와 유럽의회 의원 7명과 호주의 전 현직 의원 2명,뉴질랜드 국회의원 2명, 11명의 대학교수,5명의 변호사,1명의 주교를 포함한 15명의 목사와 신부,12명의 저명인사와 지도적 운동가 등 타민족 형제 단체 20개를 포함한 78개 단체와 타민족 형제 377명을 포함한 849명의 개인을 참여시켰다. 모금도 1만9천 달러를 해냈다. 모든 준비를 마친 우리들은 준비된 광고를 5월 12일자 워싱턴포스트지에 실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갔다.

첫째,국제원자력기구와 유엔은 핵확산금지 원칙을 공정하고 일관성 있게 적용할 것.

둘째,국제원자력기구와 유엔은 남북 간에 맺어진 ‘한반도의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을 존중하고 코리아의 핵문제를 코리언들 스스로 해결하게 놓아둘 것.

셋째, 현재의 위기 상황을 완화하기 위해 미국은 팀스피리트 훈련을 영구 중단하고 북에 대해 핵무기를 쓰지 않겠다는 선언을 할 것. 그리고 N. Korea는 핵확산 금지조약 탈퇴 선언을 철회할 것.

넷째,한국전쟁의 공식적인 종결과 지난 40년간 Korea에서 지속된 위기 상황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유엔과 N.Korea(북부조국)는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미국은 주한 미군을 철수할 것.

나는 그 때 워싱턴포스트지 광고 게재 운동이 내가 미국에서 한 마지막 활동이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다.

(광고가 나간 93년 5월 12일 그날 오후 늦게 민족학교에서 유엔본부 앞 단식 준비와 제13주기 기념행사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있던 나는 조국의 모 신문사로부터 대통령 특별담화 내용 중 나의 수배해제와 귀국 허용 조치가 발표되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5월 19일에 꿈에 그리던 조국을 일시 방문한 후 망명생활 청산과 영구 귀국 준비를 위해 2주만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