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난설헌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4일 (토) 13:22
허난설헌
허난설헌 표준영정(보물)
본명허초희(許玉惠) · 허옥혜(許玉惠)
출생1563년
조선 조선 강원도 강릉부 초당동
사망1589년 3월 19일 (27세)
조선 조선 한성부
국적조선
별칭호:난설헌(蘭雪軒)·난설재(蘭雪齋)
자:경번(景樊)
학력한학 수학
직업문인, 시인, 작가, 화가
배우자안동김씨 김성립
자녀1남 1녀(요절)
부모허엽(부), 강릉 김씨 부인(모)
친척형제 허균, 허성, 허봉, 이복 언니 허씨, 형부 박순원, 이복 언니 허씨, 형부 우성전, 삼촌 허구, 허준(11촌숙)
웹사이트강릉 홍길동 재단
정보 수정
1997년 손연칠이 그린 영정.
내게는 세 가지 한이 있다. 첫째는 여자로 태어난 것이요, 둘째는 조선 땅에 태어난 것이요, 셋째는 김성립의 아내가 된 것이다.[1]

허난설헌(許蘭雪軒)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시인이다. 본명은 허초희(許楚姬), 자는 경번(景樊)이다.[2] 난설헌은 부모에게 받은 이름이 아닌, 스스로 지은 호이다. 213수의 시를 남겼으며 동생인 허균이 명나라의 시인 주지번에게 시를 넘겨주어 난설헌집이 간행된 이후 중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격찬을 받아 명성을 떨지게 되었다.[2]

생애

생애 초반

가계(家戒) 배경

강릉 초당동에 취치한 허난설헌 생가

1563년 강원도 강릉에서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엽(許曄)과 그의 부인 강릉 김씨(江陵金氏) 김광철(金光轍)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양천(陽川)으로 본명은 초희(楚姬)이고 자는 경번(景樊)이며 호는 난설헌이다. 허성은 이복 오빠였고, 이복 언니 2명과, 친오빠 허봉(許篈)이 있었다. 또한 홍길동전의 저자 교산 허균(許筠)은 그의 친 남동생이었다. 후일 동생인 허균명나라에 난설헌의 시고를 편찬할 때 기록되어 이름과 자가 전하는 여성으로, 당시 여성 중 이름과 자가 전하는 몇안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명은 초희이고, 다른 이름은 허옥혜(許玉惠)였다. 난설헌은 그의 호인데 여자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조선시대의 관례에 따라 그는 허난설헌, 허난설재, 난설헌 허씨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버지 허엽이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허성(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 다시 강릉김씨 김광철(金光轍)의 딸을 재취로 삼아 처가가 있던 강원도 강릉에서 허봉, 초희, 허균 3남매를 두었다.

그밖에 선조 때의 유명한 의관인 어의 허준이 그의 먼 친족으로 11촌 아저씨뻘이었다.

유년기와 수학

일찍부터 그녀는 신동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으며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났다.[3]

어릴 때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허난설헌은 기억력이 좋고 어린 나이에도 을 잘 써서 가족들을 놀라게 했다. 그녀의 나이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짓는 등 신동이라는 평을 들었다. 딸의 재주를 아깝게 여긴 허엽은 직접 글을 가르치고 서예와 그림도 가르쳤다. 허엽서경덕이황의 문인으로 그가 서경덕의 문하에서 배운 도학적 사상이 난설헌과 허균 남매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여동생의 재능을 아깝게 여긴 오빠 허봉의 주선으로 남동생 허균이 허성, 허봉과 평소 친교가 있었던 중인 시인 손곡 이달(李達)에게 와 글을 배울 때 그녀도 함께 글과 시를 배울 수 있었다. 또한 그림에도 뛰어나 여러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자호를 난설헌 또는 난설재라 하였다.

불행한 결혼 생활

결혼 생활 초반

허난설헌 작 묵조도

1577년 15세 무렵 집안의 주선으로 안동김씨(安東金氏) 김성립(金誠立)과 혼인하였는데,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그녀의 시재주와 글재주가 뛰어나자 남편 김성립은 그녀를 피하였고 시어머니의 구박에 시달렸다. 그 뒤 남편은 급제한 뒤 관직에 나갔으나, 종9품 홍문관 저작에 머물렀고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4]

남편 김성립과 친구들이 서당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이때 친구 중 누군가가 난설헌에게 김성립이 기생집에서 술을 먹고 있다고 난설헌에게 전했다. 이에 난설헌은 안주와 술을 보내면서 시(詩)를 한 구절 써보냈다. "낭군자시무심자, 동접하인종반간 (郎君自是無心者,同接何人縱半間)" 이는 '낭군께선 이렇듯 다른 마음 없으신데, 같이 공부하는 이는 어찌된 사람이길레 이간질을 시키는가.'라고 했던 것이다. 편지를 본 김성립의 친구들은 그녀의 글재주에 탄복했다 한다.

한번은 남편 김성립이 서당 학생들이나 과거에 응시하는 유생들이 모여 이룬 동아리인 접(接) 모임에 간다 하고 기생집에 갔다. 허난설헌은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古之接有才(고지접유재) / 옛날의 접(接)은 재주(才)가 있었는데

今之接無才(금지접무재) / 오늘의 접(接)은 재주(才)가 없다.

이 편지에서 오늘의 접(接)에는 재(才)가 없다, 즉 재가 빠진 결과 첩(妾, 여자)만 남아 있다며 남편을 조롱했던 것이다.

시집살이와 갈등

남편의 바람기 외에도 시어머니와의 계속된 갈등 역시 그녀를 괴롭혔다. 고부간에 불화로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으며, 1580년(선조 13년) 아버지 허엽이 객사한 이후 아들과 딸을 연이어 병으로 잃었다.

哭子(곡자)
(아들 딸 여의고서)

去年喪愛女(거년상애녀) 今年喪愛子(금년상애자) (지난해 귀여운 딸애 여의고 올해는 사랑스런 아들 잃다니)
哀哀廣陵土(애애광능토) 雙墳相對起(쌍분상대기) (서러워라 서러워라 광릉땅이여 두 무덤 나란히 앞에 있구나)
蕭蕭白楊風(소소백양풍) 鬼火明松楸(귀화명송추) (사시나무 가지엔 쓸쓸한 바람 도깨비불 무덤에 어리비치네)
紙錢招汝魄(지전소여백) 玄酒奠汝丘(현주전여구) (소지 올려 너희들 넋을 부르며 무덤에 냉수를 부어놓으니)
應知弟兄魂(응지제형혼) 夜夜相追遊(야야상추유) (알고말고 너희 넋이야 밤마다 서로서로 얼려놀 테지)
縱有腹中孩(종유복중해) 安可冀長成(안가기장성) (아무리 아해를 가졌다 한들 이 또한 잘 자라길 바라겠는가)
浪吟黃臺詞(랑음황대사) 血泣悲呑聲(혈읍비탄성) (부질없이 황대사 읊조리면서 애끊는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불행한 자신의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다.[3] 그러나 불행은 계속되어 곧 임신중이던 뱃속의 아이까지 사산하였다. 그리고 남편 김성립은 계속 밖으로 겉돌았다. 또한 어머니 김씨 역시 객사하였고, 동생 허균도 귀양가고 말았다. 시 재주와 문명은 당대에도 알려졌으나 남편을 기다리는 시 조차도 음란하다며 저평가받았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잇달은 가정의 참화로, 그의 시 213수 가운데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되었다.

생애 후반

오빠 허봉이 율곡 이이를 비방하다가 변방으로 귀양가고, 동생인 허균마저 귀양가는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으로 시름을 달랬다. 1589년 초 그녀의 나이 27세에 아무런 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 사람들에게 유언과 비슷한 시를 남겼다 한다.

今年乃三九之數 / 금년이 바로 3·9수에 해당되니
今日霜墮紅 / 오늘 연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

또한 이런 시를 남기기도 했다.

碧海浸瑤海 / 푸른 바닷물이 구슬 바다에 스며들고

靑鸞倚彩鸞 / 푸른 난새는 채색 난새에게 기대었구나.
芙蓉三九朶 / 부용꽃 스물 일곱 송이가 붉게 떨어지니

紅墮月霜寒 / 달빛 서리 위에서 차갑기만 해라.

그림에도 능하여 풍경화와 수묵담채화, 난초화 등을 남겼다.

허난설헌은 죽기 직전 방 안에 가득했던 자신의 작품들을 모두 소각시켰다.[5] 그의 시와 작품들은 친정집에 있었는데, 자신의 작품을 소각하라 명했으나 그의 시재를 아깝게 여긴 허균이 이를 보관했다고도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허난설헌의 작품 대부분은 그녀가 죽고 난 후 허균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5]

1589년(선조 22년) 3월 19일한성 자택에서 시름시름 앓다가 사망한다. 사인은 미상이었다. 그가 죽자 남동생 허균은 그를 그리워하며 추모하는 시 한수를 남겼다.

옥(玉)이 깨지고 별이 떨어지니 그대의 한 평생 불행하였다.

하늘이 줄 때에는 재색을 넘치게 하였으면서도
어찌 그토록 가혹하게 벌주고, 속히 빼앗아 가는가?

거문고는 멀리 든 채 켜지도 못하고
좋은 음식 있어도 맛보지 못하였네
난설헌의 침실은 고독만이 넘치고
난초도 싹이 났건만 서리 맞아 꺾였네

하늘로 돌아가 편히 쉬기를
뜬 세상 한순간 왔던 것이 슬프기만 하다.
홀연히 왔다가 바람처럼 떠나가니

한 세월 오랫동안 머물지 못했구나

저서로는 《난설헌집》이 있고, 국한문가사 규원가(閨怨歌)와 봉선화가(鳳仙花歌)가 있다. 후일 그의 남편 김성립임진왜란 때 전사하고 가선대부 이조참판추증되면서 그 역시 추증 예겸에 따라 정부인(貞夫人)으로 추증된다. 사망당시 그의 나이 향년 27세였다.

시문집 간행

작품으로는 시에 '유선시', '빈녀음', '곡자', '망선요', '동선요', '견흥' 등 142수가 있고, 가사에 '원부사', '봉선화가' 등이 현재 전한다. 사후 시신은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지월리 산29의 5번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일 현 하남시로 이장되었다. 그의 작품은 1608년 동생 허균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명나라 작가들에게 보인 뒤, 그 재주에 탄복한 명나라 관리들의 주선으로 비용을 지원받아 출간하여 조선에 들어오게 되었다.

또한 작품 일부를 동생 허균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알려지면서 격찬을 받았다.[3] 한편 1711년에는 일본에도 소개되어 분다이(文台屋次郎)가 그녀의 시를 간행, 한때 애송되기도 하였다.

고부 갈등과 남편과의 불화로 당대의 평가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서도 재평가되어 그녀를 규방의 유일한 시인이자 뛰어난 천재로 인정하기 시작했으며, 영조, 정조 이후에 중인과 평민 등도 문학과 시조 작시 등의 활동에 참여하면서 작품성과 천재성에 대한 평가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가족 관계

부친은 허엽, 오빠는 허성허봉, 남동생은 허균이다.

연보 및 작품

허난설헌 문집 (1608년 간행본)
  • 1563년 명종 18년 강릉 초당 생가에서 당대의 석학인 초당 허엽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 1570년 선조 3년, 8세 때 '광한전백옥루 상량문'을 지었다.
  • 1577년 선조 10년, 15세 때 안동김씨 가문의 김성립에게 출가를 하게 된다.
  • 1580년 선조 13년, 18세 때 아버지 허엽이 상주에서 객사했다.
  • 1582년 선조 15년, 20세 때 전 해 1579년 딸을 잃고나서 또한 아들 희윤을 잃는다. 곡자를 자식을 잃은 슬픔을 애닳게 그린 시이다.
  • 1583년 선조 16년, 21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10만양병설을 주장한 이이를 탄핵했다가 귀양을 가게 된다.
  • 1588년 선조 21년, 26세 때 둘째 오빠 허봉이 금강산에서 객사한다.
  • 1589년 선조 22년, 2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경기도 광주 초월면 지월리 경수산에 묻히게 된다.
  • 1589년 선조 22년, 남편 김성립이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남양 홍씨와 재혼한다.
  • 1590년 선조 23년, 동생 허균이 친정에 있던 난설헌의 시를 모아 《난설헌집》 초고를 만들고 류성룡에게 서문을 받았다.
  • 1592년 선조 25년, 남편 김성립이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전사한다.
  • 1598년 선조 31년, 허균이 정유재란 때 원정나온 명나라 오명제에게 난설헌의 시 200여편을 전해주어 이 시가 명나라에서 편찬한 《조선시선》, 《열조시선》 등에 실렸다 .
  • 1606년 선조 39년, 허균이 명나라 사신 주지번, 양유년 등에게 난설헌의 시를 전해주어 《난설헌집》이 명나라에서 간행되었다.
  • 1607년 선조 40년, 4월 허균이 《난설헌집》을 목판본으로 출판하였다.
  • 1711년 일본에서 분다이야 지로베이에 의해 《난설헌집》간행.[6]


부연 설명

  1. 다른 버전도 있다. "첫째, 왜 조선에 태어났을까? 둘째, 왜 여자로 태어나서... 아이를 갖지 못하는 서러움을 지녔을까? 셋째, 왜 하필이면 김성립의 아내가 되었을까?", 정경숙, 허난설헌의 시집살이를 통해본 여성의 삶

출처

  1. 김신명숙, 불꽃의 자유혼 - 허난설헌, 경향신문사, 1998.
  2. 2.0 2.1 김경목 (2004년 7월 9일). “허난설헌을 통해 여성주의를 말한다”. 《오마이뉴스》. 
  3. 3.0 3.1 3.2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parkchc0380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4. 이조참판은 후일 김성립이 임진왜란 때에 전사하였으므로 그 공로로 증직으로 추서된 직책이다.
  5. 5.0 5.1 박찬희, 《한권으로 재미있게 읽는 에세이 조선왕조 오백년 야사》 (꿈과희망, 2009) 379페이지
  6. “허난설헌의 생애”. 허균,허난설헌선양사업회. 2008년 10월 25일에 확인함. 깨진 링크

[[분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