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숙

최근 편집: 2023년 11월 14일 (화) 09:32
허정숙
許貞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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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상정보
국적 북한
출생일 1902년 7월 16일
출생지 종로구 관철동
사망일 1991년 6월 5일
사망지 북한 평양
거주지 북한 평양
중국 베이징시
학력 배화학당 난징 진링 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중퇴) 간사이 대학 전문 (졸업) 동방노력자공산대학교 (졸업)
경력 북한 내각 문화선전상 (1948년 9월 9일 ~ 1957년 9월 20일) 북한 내각 보건상 (1948년 12월 1일 ~ 1949년 9월 30일) 북한 내각 사법상 (1957년 8월 3일 ~ 1961년 10월 13일) 북한 최고재판소 소장 (!959년 10월 29일 ~ 1961년 11월 24일)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비서 (1981년 ~ 1991년), 동아일보 기자
종교 무신론
군사 경력
최종계급 대좌
참전 제2차 세계대전 지휘관 경력 팔로군 육군 제120사단 정치지도원

허정숙(許貞淑, 1902년 7월 16일 ~ 1991년 6월 5일)은 페미니스트이며 독립운동가이자, 사회주의자이다. 동아일보 최초의 여성 기자였다.[1] 광복 후 북한부수상 등을 지냈다.[2]

생애

일제 강점기에 변호사였던 어머니 정보영과 아버지 허헌의 딸로 1902년 태어났다.[3] 부친과 끈끈한 신뢰를 바탕으로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사회활동에서 아버지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어머니의 남편을 대신하여 가족에 헌신하는 모습을 보고 자라면서 봉건적인 가족구조의 폐단을 발견했다고 한다.[4] 특히 딸 하나만 낳고 가문의 대가 끊어질까 고통받는 어머니의 모습에 많은 연민을 느꼈다.[4][주 1]

신학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지만 전통적 여성의 미덕들로부터 스스로 거리를 두었다.[3] 1918년 아버지의 뜻에 의해 일본 고베 신학교로 유학을 갔다가 수녀원 같은 생활을 견디지 못해 1920년 중도에 뛰쳐나왔던 것도 그런 맥락에서였다.[3][4]

1924년 여성동우회 결성에 참여,[5] 주도했고 경성여자청년동맹 등의 사회주의 여성단체를 주도하고 신문과 잡지의 기자로 활동하면서 사회주의자로서 이론과 활동을 펼쳤다.[4] 1924년 8월 1일 같은 동아일보 기자인 임원근과 결혼식을 올렸다.[6]

동아일보의 기자, 잡지 «신여성»의 편집장 등으로 번 월급의 대부분을 활동비로 사용하였다. 그래도 모자라면 부친의 도움을 받거나 집안의 골동품을 팔아서 사회활동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고 전해진다.

1926년부터 1년 반 동안 미국 생활을 하였다.

근우회 운동의 가장 큰 의의가 한국여성의 대중적 참가라고 밝히면서 여학생의 조직화와 여성운동가의 양성에 주력했다.[4] 이런 고민을 담은 1930년 서울 여학생 만세운동으로 인해 허정숙은 투옥되고 근우회는 해소의 길을 걷고 말았다.[4]

국내에서 여러 차례에 걸친 투옥과 감시로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1936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조선의용대에서 총을 들기도 했다.[4][7]

해방 후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월북한 허정숙은 아버지의 경제적 사회적 뒷받침이 보태져서 동지들의 지지를 받아 북한에서 활동 기반을 다질 수 있었다고 한다.[8][7] 남로당이나 연안 출신들 대부분이 숙청당하는 와중에도 승승장구한 허정숙은 김일성 주석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을 정도였으며 문화선전상,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남북적십자회담 대표 등을 지냈다.[7]

1991년 6월 1일 숙환으로 사망하였으며 부주석 이종옥을 위원장으로 하여 박성철, 연형묵, 김영남, 계응태 등 모두 31명으로 장의위원회를 구성, 7일 국장으로 거행한다고 전해졌다.[9]

남성 지식인들의 조롱

당대 남성 지식인들은 허정숙의 민족적·사회적 활동보다 스캔들에 더 관심이 많았다.[10] 1932년 7월 잡지 별건곤에 발표된 '경성 명인물 신체 대검사'라는 글에는 허정숙이 이혼할 때 남편에게 맞아 얼굴에 큰 상처가 남게 되었다는 사실을 허○숙과 남편이 '서로 권투시합을 했다'고 희화화하고 그 상처를 '기념'이라 표현하는데, 당시 가장 선진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지식인조차 남편에게 폭행을 받는 것이 사회적으로 문제시되지 않았을 뿐더러 이를 조롱하는 것이 용인되는 분위기였다는 것을 증명한다.[10] 남편 임원근이 감옥에 간 사이 다른 남성 동지와 동거를 하게 되어 세간으로부터 비아냥을 받은 허정숙은 "성적 해방과 경제적 해방이 극히 적은 조선여성에게 사회가 일방적으로 수절을 요구하는 것은 여성의 본능을 무시하는 허위"라며 반박했다.[3]

연보

  • 1924년 5월 - 여성동우회 창립 발기인 및 집행위원[5]
  •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선전부장[3]
  • 1959년 최고재판소 소장[3]
  • 1972년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부의장[3]
  • 1984년 조국선전중앙위원회 의장[3]
  • 1991년 6월 5일 사망[9]

부연 설명

  1. 허헌은 재혼까지 합쳐 6남 4녀를 낳았으며 재혼 사이의 2남 1녀에 대해 아들 허근욱은 "아마 아버지가 아들을 낳기 위해서였던 것 같다"고 말했다.[2]

출처

  1. The Bigissue Korea 174, 2018 3월 1일 간행, 38p
  2. 2.0 2.1 “경수로 착공식 북한대표 허종은 허헌의 아들로 확인”. 《중앙일보》. 1997년 8월 27일. 
  3. 3.0 3.1 3.2 3.3 3.4 3.5 3.6 3.7 이상록/여성사연구모임 길밖세상 (2002년 1월 28일). “금욕·순정…전통적 여성성 반기”. 《한겨레》. 2019년 12월 24일에 확인함. 
  4. 4.0 4.1 4.2 4.3 4.4 4.5 4.6 “신여성이야기 허정숙”. 《한국콘텐츠진흥원》. 
  5. 5.0 5.1 “女性同友會 發起會 미구에”. 《동아일보》. 1924년 5월 5일. 
  6. “신랑신부”. 《동아일보》. 1924년 8월 1일. 
  7. 7.0 7.1 7.2 최용탁 (2019년 7월 21일). “[최용탁의 근대사 에세이 28] 젊은 그들 2”. 《한국농정》. 
  8. 김경애, "가부장제 사회에서 신여성의 삶과 남성들", 젠더연구/-(16), 2011., 131-150, 동덕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소
  9. 9.0 9.1 “북한 허정숙 사망”. 《중앙일보》. 1991년 6월 6일. 
  10. 10.0 10.1 이영아 명지대 방목기초교육대학 교수 (2012년 11월 26일). “[이영아의 여론 女論] 허정숙에게 남은 가정폭력의 상처”.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