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적공산주의자동맹(일본)

최근 편집: 2023년 6월 16일 (금) 12:45


革命的共産主義者同盟(かくめいてききょうさんしゅぎしゃどうめい); 카쿠메이테키쿄우산슈기샤도우메에.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20세기 중반부터 존재한 일본의 신좌익 당파. 약칭 "혁공동(카쿠쿄우도우)"이라고 불린다. 1957년 결성.

역사

1955년, 일본공산당일본 공산당 제 6회 전국 협의회(약칭 6전협)를 개최한다. 이 대회에서 일본 공산당은 이전의 일본 공산당 제 5회 전국 협의회(약칭 5전협)에서 결정되었던 무장투쟁 노선을 폐기하게 된다. 6전협은 이 전까지 일본에서 일어났던 무장투쟁 노선은 시기상조이자 극좌 모험주의로 평가했고, 이로서 분열되어 있던 당 내부 상황을 통합하기 위함이었다.[주 1] 그러나 이러한 결정은 당시 무장투쟁을 주로 담당하고 있던 급진파 학생들에게 심각한 동요와 반발을 불러 일으키게 된다.

또한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의 강력한 개인숭배 대상이었던 스탈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고(스탈린 격하운동), 같은 해에 소련이 사회주의의 국가에서 일어난 노동자들의 봉기를 잔인하게 진압한 1956년 헝가리 혁명이 일어난다. 이로 인해 일본의 공산주의자들은 충격에 빠진다. 결국 일본 공산주의자들 중 적지 않은 숫자가 스탈린주의 비판에 참여하게 되고, 일본 공산당의 독단적인 방식과 소련을 비판하기에 이른다. 애초부터 소련은 일본 공산당에게 무장투쟁을 재촉한 주체였지만, 무장투쟁이 실패로 끝났을 때 일본 공산당도, 소련도, 그 누구도 제대로 책임을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일본 공산당을 대체할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활동가들 사이에서 터져나왔고, 일본 공산당에서 이탈한 인원들이 모여서 1957년 1월 일본 트로츠키스트 연맹을 결성했고,[주 2] 같은해 12월 이를 모체로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일본)을 결성하게 된다.

혁공동은 맑스/레닌주의와 트로츠키주의, 반스탈린주의를 기반으로 결성되었지만, 트로츠키를 어느정도까지 받아들일 것이냐를 두고 처음부터 이견이 많았다. 이로 인해 혁공동은 처음부터 분열의 조짐이 보였다고 한다. 애초부터 제 4 인터내셔널 통일서기국(당시에는 제4인터 국제서기국)을 지지하는 트로츠키스트파(니시 쿄우지西京司, 오타 류太田竜)와 "트로츠키주의를 극복한다"고 주장하는 반스탈린주의파(구로다 간이치黒田寛一, 혼다 노부요시本多 延嘉)로 갈라져 있었고, 이들 사이의 내부 갈등은 계속되고 있었다. 초기 혁공동은 주로 학생 중심이었고, 소수의 노동자가 참여한 이념서클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또한 급진적인 학생 활동가들은 공산당에서 탈당 또는 제명된 뒤 공산주의자 동맹(일본)[주 3] 결성하고 전학련 집행부를 장악하는 방식으로 움직였다. 초기 혁공동이 급진적인 학생 멤버들을 확보하지 못했고 이는 결국 역량을 성장시키기 어려웠던 원인이 되었다.[주 4]

분열의 역사

혁공동 제1차 분열

1958년 7월, 제4 인터내셔널 5회 대회에 참석하고 귀국한 오타 류는 당시 제4 인터내셔널의 각국 지부가 행하고 있던 가입 전술일본 사회당에 시전하자고 제기했다. 그러나 이 안건은 거부당했고 오타 류는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도쿄 학예대학히비야 고등학교의 그룹을 이끌고 탈퇴한다. 이후 오타 류는 일본 트로츠키스트 동지회를 결성하여 활동한다. 그리고 이 조직은 원하던 대로 사회당에 가입 전술을 시행, 다수가 사회당에 입당한다.

혁공동 제2차 분열

1959년 1월, 반제국주의/반스탈린주의를 공식화 한 구로다 간이치는 스스로 경시청 공안부에 일본 민주청년 동맹(약칭 민청)의 정보를 제공하려다 미수에 그친 사건이 발각된다. 같은 해 8월 혁공동 제 1회 대회에서 "간첩행위라는 계급적 배신 행위"를 이유로, 구로다는 제명된다. 이 일이 있은 직후 구로다와 함께 혁공동에서 혁명적 맑스주의자 그룹(RMG)을 형성하고 있던 혼다 노부요시(本多 延嘉) 일파가 구로다를 따라서 혁공동을 탈퇴한다. 이후 구로다 일파와 혼다 일파는 새롭게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를 결성한다.[주 5]

혁공동 제3차 분열

1963년 2월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전국위원회에서 "당 건설"과 "노동운동"에 관한 정책을 두고 또다시 분열이 시작된다. 결국 구로다파는 혁공동 전국위원회를 탈퇴하여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혁명적 마르크스 주의파(약칭 혁마루, 카쿠마루파)를 결성하게 된다. 이후 혼다 노부요시를 위시한 세력은 혁공동 전국위원회의 조직을 계승하였기 때문에 중핵파라고 불리게 된다.

제4 인터내셔널

1965년 2월, 혁공동 중앙서기국 명의로 남아있던 니시 쿄우지파(혁공동 간사이파)는 오타 류의 파벌[주 6][주 7]과 통합하여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제4 인터내셔널 일본지부)를 결성한다. 그러나 오타 류는 얼마 지나지 않아 "타치카와 미군 기지 돌입 투쟁"과[주 8] "한일 조약 비준 반대 투쟁"을 독단적으로 지도한 것으로 인해 총괄을 하게 되고, 결국 탈퇴하게 된다.


특징

* 일본에서 트로츠키주의는 1950년대가 될 때까지 등장하지 않았다. 1922년 일본 공산당이 창당했고, 이후 트로츠키의 저작이 약간 번역되어 출간되기는 했지만, 당시 일본은 치안유지법군국주의로 인해 공산주의 운동 자체가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당시 일국 일당 원칙에 따라 일본의 공산주의 운동은 일본 공산당의 스탈린주의적 방식을 따르고 있었고, 이로 인해 일본에 트로츠키주의는 존재하지 않았다(이는 식민지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50년대가 되고,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회의 지도 실패가 계속되기 시작하면서, 또한 스탈린 격하운동이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스탈린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트로츠키주의가 급 부상한 면이 있다. 그래서 일본의 트로츠키주의는 시작부터 외국과는 사뭇 다른 양상을 보였다. 외국의 트로츠키주의는 대부분 반코민테른 투쟁을 통해 성장했는데, 일본은 그런거 없이 소규모 서클로부터 출발했다.
* 이렇게 사상적, 활동상의 전통이 빈약해서인지, 혁공동은 결성부터 지금까지 우치게바로 인한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았다. 우치게바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당시 일본은 정파간 대립이 상상을 초월했다. 처음에는 그냥 격렬한 논쟁으로 시작한 것이 차츰 커져서 60년대에는 정파간 패싸움으로 번졌고, 60년대 말에는 진짜 전쟁 상황까지 돌입한다. 70년대에는 심지어 상대편 정파의 간부나 지도자를 납치해 살해하는 일도 빈번했다! 특히 혁공동 카쿠마루파와 중핵파 사이의 우치게바가 심각한 수준이었다. 중핵파의 지도자인 혼다 노부요시는 실제로 자택에 침입한 카쿠마루파 행동대에게 살해당했다. 
* 특히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면서 적대 관계로 돌변한 카쿠마루파와 중핵파의 우치게바는 당시 일본 신좌익 내부의 우치게바 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다. 이는 애초에 노선투쟁으로 인해 구로다파와 혼다파가 갈라진데에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 중핵파는 일본 공산당 계열을 제외한 거의 모든 반체제 운동과 연대하고 가두 투쟁과 직접 행동을 중요시 했다. 그래서 중핵파는 심지어 이론을 떠나서 도시 게릴라 운동에까지 동참했다. 그러나 카쿠마루파는 "계급 투쟁 지상주의"를 내걸고 사상, 이론 학습과 조직 구축을 목표로 했으며, 조직의 유지 및 확대를 위한 활동을 중요시 했다. 결국 중핵파는 과격한 폭력투쟁으로 인해 조직원이 검거되면서 약화되었고, 카쿠마루파는 계속되는 우치게바와 공안의 단속으로 인해 차츰 약화되었다고 한다.
* 위에 쓰여진 대로, 카쿠마루파는 조직 유지를 상당히 중시했는데, 이로 인해 벌어진 사건이 하나 있었다. 1969년 도쿄대 야스다 강당 점거 투쟁에서 경찰 기동대가 돌입하기 하루 전 "병력 보존"을 이유로 연대 투쟁을 이탈했다. 이때 당시 강당에 남아있던 다양한 정파들(공산주의자 동맹, 혁공동 중핵파, 사청동 등등)로부터 "제2 민청", "기회주의"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로인해 카쿠마루파는 좌파 진영 내에서 한동안 고립된다. 이에 멈추지 않고 카쿠마루파는 "폭력적인 당파 투쟁에 의한 타 당파 해체와 세력 확대"를 천명하면서, 민청 및 신좌익은 물론이고 심지어 논 섹트 래디컬까지도 공격했다.
* 물론 그렇다고 다른 정파들이 가만히 있던 것은 아니고, 혁공동 중핵파, 사청동 해방파 등 다른 단체들도 부지기수로 서로서로 싸워댔다. 이런 계속되는 우치게바는 신좌익을 대중으로부터 멀어지게 한 큰 원인들 중 하나다. 우치게바는 2000년대 중반까지도 간혹 있었다. 심지어 민간인이나 전혀 엉뚱한 정파를 습격하는 "오폭"도 종종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정파는 이러한 오폭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다. 그러나, 딱 한번 사과한 적이 있었는데, 중핵파가 재일 조선인 여성을 공격하여 부상을 입히자, 대한민국 민단조총련이 조직적으로 항의를 했고, 이에 따라 공식적으로 사과를 표명 한 적이 있다(동포가 부상당하자 좌우를 뛰어넘어 민족 대단결이 이루어진 것도 굉장하지만 소수민족을 공격하는 상황이 되자 즉시 사과하는 모습도 굉장하다).
* 현재 중핵파는 과거 가두투쟁과 도시 게릴라전 일변도에서 많이 변화하여 노동운동에도 점점 세력을 뻗어나가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여전히 본부인 "전진사" 출판사를 중심으로 거점 학교의 서클을 통해 활동가들을 충원하고 있으며, 언론과 정부에 의해 극좌 폭력집단 또는 과격파로 분류되는 데 개의치 않고 타 정파와 연대 활동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주 9] 카쿠마루파는 현재 본부인 "해방사" 출판사를 중심으로 거점 학교를 통해 활동하고 있으며, 본래부터 계급투쟁을 강조했기 때문에 노동운동에 집중을 많이 했고, 그래서 국철때부터 JR의 노조들 중 상당수가 카쿠마루쪽이라고 한다.
* 하지만 어느쪽이든 이미 과거보다는 많이 세력이 약화되었고, 활동가들도 차츰 나이를 먹은 데다가 예전같은 과격 가두투쟁 자체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라 거의 활동을 못하고 있는 상황. 중핵파 본부나 아지트는 잊을만 하면 한번씩 경시청 공안부 수사관들이 압수수색을 하러 오고, 카쿠마루파 본부 앞에는 아예 경찰이 파출소를 지어버렸다. 다른 정파 본부도 마찬가지. 
* 혁공동이나 신좌익 당파들 중에 한국의 민주노총을 비롯해서 노동운동계와 어느정도 교류가 있는 곳이 꽤 있다. 이들 본부에는 한글로 써있는 플랜카드를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여담으로 한국의 사회단체가 모르고 서로 적대관계에 있는 일본 정파를 동시에 초대했다가 일본인 활동가들이 서로 뻘줌해 하며 황급히 자리를 뜨는 바람에 자리가 일찍 파하는 경우가 몇번 있었다고 한다.

부연 설명

  1. 당시 일본 공산당은 코민포름의 강력한 비판으로 인해 산촌 공작대, 중핵 자위대 같은 농촌 게릴라 조직과 도시 무장대가 폭력 투쟁을 일삼고 있었고, 내부에서 소감파와 국제파로 갈라져서 소모적인 노선투쟁을 일삼고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일본공산당 항목 참조.
  2. 일본 트로츠키스트 연맹은 1952년부터 트로츠키 연구를 시작했다고 하는 일본공산당 국제파 소속의 군마 현 노동자 우치다 히데요, 우치다 토미오 형제(内田英世, 内田富雄)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들은 1956년 "새로운 공산당을 만든다"면서 군마 현에서 신문 "반역자"를 창간하였고, 제4 인터내셔널 일본지부 설립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같은 해, 새로운 공산당을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들 외에도 또 있었다. 전 일본공산당 교토부 위원이었고 끝까지 트로츠키주의를 고수한 니시 쿄우지(西 京司)와 오카야 스스무(岡谷進)(이들은 훗날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제4 인터내셔널 일본지부)(약칭 제4인터)를 결성한다. 이 섹트는 굉장히 복잡한 이합집산을 걸쳐 지금까지 존재한다), 전 공산당원이었고 훗날 제4인터에 참여하게 되는 오타 류(太田 竜), 맑스주의를 독자적으로 연구하여 연구회를 조직하고 잡지를 발간하던 구로다 간이치(黒田 寛一)(이 인물은 훗날 일본 혁명적 공산주의자 동맹 혁명적 마르크스주의파(약칭 카쿠마루(革マル)파)의 지도자가 된다)등이 있었다. 이들은 서로 친분이 없었지만, 저술 활동을 통해 서로를 인지하고 공동 투쟁을 실현시킨다. 1957년 7월 우치다 히데요가 이탈하고, 같은 해 12월 단체 이름을 개칭하게 된다.
  3. 공산주의자 동맹(약칭 공산동)은 혁공동보다 결성이 1년 늦었지만, 공산당에서 직접적으로 분리한 조직이기 때문에 "세계 최초로 공산당에서 독립한 좌익"이라는 평가를 받지만, 혁공동은 처음부터 일본공산당과 별개인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조직으로 평가된다.
  4. 한국도 80년대까지 그러했지만, 일본도 대부분의 정치 조직이 거점 학교를 몇개 잡아두고, 학내 서클을 중심으로 새로운 활동가를 교육하고 노선에 대한 토론을 병행하며 개인을 성장시켰다. 이렇게 성장한 활동가 개개인은 향후 열성 멤버로 활동하거나 전업 활동가로 거듭나게 된다. 혁공동은 이러한 인재풀을 처음부터 확보하지 못하고 출발한 셈.
  5. 이 단체는 당시 연구파라고 불렸다. 중핵파(中核派. 츄우카쿠파)로 불리게 되는 것은 몇 해 뒤의 이야기다.
  6. 오타 류는 혁공동 이탈 후 일본 트로츠키스트 동지회를 발전시켜 국제주의 공산당(ICP)으로 발전시킨다. 이 조직은 한때 천명의 규모를 자랑하던 산타마 사회주의 청년동맹을 지도했다.
  7. 참고로 타마지역은 도쿄도에서 도서지역을 제외한 세 개의 타마 지역을 이야기한다. 소도시와 농지가 뒤섞인 전형적인 위성도시 지역이다.
  8. 당시 오타 류는 다치카와 미군기지에 자신의 영향력 하에 있던 산타마 사회주의 청년동맹 시위대를 돌진시켰다. 수십명이 사살되게끔 해서 전국적인 반미군기지 투쟁이 벌어지게 하려는 목적이었는데, 그냥 일본 경찰 기동대에게 곤봉 세례를 받고 밀려났을 뿐, 불발에 그쳤다. 오타는 그 이전에 국제주의 공산당 시절에도 1960년 안보 투쟁 기간에 단독으로 오챠노미즈 역에서 "대중은 무장봉기하라"는 전단을 뿌려서 "비 조직적인 도발자"로 평가받고 제명된 바 있다. 당시 국제주의 공산당은 가입 전술을 쓰며 온건 노선으로 암약하고 있던 시기였다.
  9. 물론 신좌익 진영 안에 한해서다. 다른 시민단체나 새로운 학생운동 조직(예를들면 실즈)의 경우, 이런 구식 좌파 운동권 정파와는 절대 엮이지 않으려 한다.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