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진기

최근 편집: 2022년 12월 30일 (금) 09:41
홍진기
출생1917년 3월 13일
사망1986년 7월 13일
서울특별시 성동구 성북동
국적대한민국
본관남양 홍씨 당홍계
경력제7대 대한민국 법무부 차관 (1954년 2월 17일 ~ 1955년 10월 5일) 제2대 해무청장 (1955년 10월 5일 ~ 1958년 2월 20일) 제9대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 (1958년 2월 20일 ~ 1960년 3월 23일) 제19대 내무부 장관 (1960년 3월 23일 ~ 1960년 4월 24일)
직업법조인
정당
정보 수정

홍진기는 대한민국 남자 판사 출신 법조인이다. 대한민국 법무부 장관을 역임하였다. 하지만 친일파라는 비판이 많다. [1]

아호는 유민(維民)[2] 배우자는 김윤남(중추원 참의를 역임한 친일매국노 김신석의 딸)이다. 경기도 고양에서 출생하였고 지난날 한때 경기도 파주에서 잠시 유아기를 보낸 적이 있으며 훗날 경성부에서 성장한 그는 당시 천재라 불리었으며 일제 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문이 일본 학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하지만 조선인 차별정책에 의해 그의 꿈인 교수가 될 수 없게되었고 이후 법을 공부하고, 조선 양곡수탈 및 제국주의 일본으로의 공출 하던 본거지인 목포를 관할 구역으로 하는 전주에서 판사를 역임하였다.

해방 이후 홍진기는 미국과 일본의 주도로 진행되던 대일강화조약에서 조약이 한국에 불리하다고 파악하여 정부를 설득 '대일강화회의 준비위원회'가 구성되도록 하였다.[3] 이는 일본의 부당한 외교적 침탈을 저지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구보타 망언 사건에서도 한국 측 대표로 일본의 부당한 주장에 반박하여 미일조약에 한국 내에 있는 귀속재산의 처리와 일본에 있는 한국 국민에 대한 인권 등에 대해 명시될 수 있도록 하여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또한 독도에 대한 소유권이 미일간 협약에서 일본측으로 귀속되는 상황이 오자 이에 대한 국제법 논리로 대처하였으며 이후 독도에 접안시설과 태극기 계양을 건의하여 성사시켰다.

출처

  1. “싸이·이세돌도 받은 ‘홍진기 창조인상’, 친일파 기념상(賞) 논란”. 2017년 8월 25일. 2021년 10월 21일에 확인함. 
  2. 틀:한국민족문화대백과
  3. 유진오. 《한일회담-제1차 회담을 회고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