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신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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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와 해방 이후에 활동했던 한국의 기자, 정치인, 교육자이다. 황에스터와는 자매사이이다.

남조선과도입법의원에서 의원으로 활동했다.

황신덕
출생1989년 11월 6일 0
평안남도 평양부(현재의 평안남도 평양시)
사망1983년 11월 22일
학력1910년 평양 정진소학교

1915년 평양 숭의여학교 1920년 일본 지요다고등여학교

1926년 니혼여자대학교 사회사업과
정보 수정

활동

추계초등학교, 추계예술대학교, 중앙여자중학교, 중앙여자고등학교를 설립했다.

해방이전

1920년 일본 유학 중이던 시기, 3·1운동 1주년 기념으로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7일간 구류 처분을 받았다. 이후 도쿄여자유학생 친목단체였던 학흥회에서 서기를 맡았고, 1921년에는 도쿄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여자기독청년회 조직에도 참여했다. 1925년에는 이현경, 박순천, 권명범 등과 함께 여성 사상단체 삼월회를 만들고 위원으로 활동했다.

1926년 졸업 후 귀국해서 『시대일보』와 『중외일보』에서 기자로 일했고, 경성실천여학교 교사로도 활동했다. 조선여성동우회에 참여했으며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총회와 하령회 등에서 여성 문제 관련 강연을 진행했다. 1927년에는 직업부인회 조직 준비 과정에서 실행위원을 맡았고,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도 조직했다. 같은 해 김활란, 유영준, 이현경, 유각경, 현신덕, 최은희, 박원희, 정칠성 등과 함께 근우회를 창립해 집행위원과 교양부 상무로 활동했다. 이후 만주 지역을 방문해 동포들의 생활 상황을 조사했고, 재만동포동정음악대회 준비에도 참여했다.

1928년에는 신문 기고를 통해 근우회의 여성운동을 정리하고 앞으로의 방향을 이야기했다. 근우회 전국대회 준비 과정에도 참여했고,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9년 제2회 전국대회에서는 중앙상무위원과 근우회관 건축기성회 재경위원 등을 맡았다. 또 경성여자소비조합 창립과 운영에도 참여했으며, 1929년 임봉순과 결혼했다.

1934년에는 여자의학전문학교 설립 준비위원으로 활동했고, 황애시덕·황인덕 자매와 함께 중앙보육학원 운영에도 참여했다. 이후 가정부인협회와 직업부인협회 활동을 이어갔고, 『신가정』과 『동아일보』 기자로 일하면서 여성의 권리와 사회문제를 다룬 글을 발표했다.

중일전쟁 이후에는 여러 시국 관련 활동과 강연에 참여했다. 1937년 애국금차회에 금품을 기부했고, 1938년에는 여성단체 연합 시국강연회에서 ‘비상시국과 가정경제’를 주제로 강연했다. 또 여성단체 대표 자격으로 용산육군병원을 방문하기도 했다.

1940년에는 이우의 지원으로 경성가정여숙을 설립하고 교장으로 취임했다. 이후 임전대책협의회와 조선임전보국단 활동에 참여했으며, 평의원과 부인대 지도위원 등을 맡았다. 『매일신보』에는 가정생활, 근로, 자원 재활용 등을 주제로 한 글을 기고했고, 시국강연회와 순회강연에도 참여했다. 1942년에는 전시생활 관련 좌담회와 군복 수리 활동 등에 참석했다.

1943년에는 근로정신대 참여를 권유하는 강연 활동을 했고, 자신이 운영하던 학교 학생들이 여자근로정신대로 동원되는 과정에도 관여했다. 같은 해 국민총력조선연맹 후생부 후생위원으로 임명되었고, 청주·충주·영동 지역에서 강연 활동을 이어갔다. 1944년에는 국민동원총진회 중앙지도위원을 맡았으며, 1945년에는 경성가정여숙이 중앙여자상과학교로 인가되면서 교장으로 취임했다.

해방 이후

해방 이후인 1945년에는 건국부녀동맹 결성에 참여했으며, 이듬해인 1946년에는 독립촉성애국부인회 정치부장을 맡으면서 과도입법의원 관선의원으로 지명되었다. 한국전쟁 당시였던 1950년에는 납북되었으나 같은 해 10월 평양에서 탈출했다. 이후 1952년 여성문제연구회를 창립해 회장으로 활동했고, 1956년에는 가정법률상담소를 세워 이사장을 맡았다. 1958년에는 대한어머니회 창립에도 참여해 이사로 활동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는 중앙여자중·고등학교 교장으로 재직하며 여성교육에 힘썼다. 이후 1961년 추계학원 이사장에 취임했으며, 추계유치원부터 추계예술대학교까지 이어지는 종합학교법인으로 성장시켰다. 1970년에는 3·1여성동지회 부회장을 맡았고, 1973년에는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980년 12월 추계학원 이사장직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