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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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세종이 창제한 문자 체계이자 이 내용과 원리를 담은 최초의 책이다.

오해

흔히 집현전 학자들과 세종이 함께 훈민정음을 창제했다고 알려져 있는데, 사실 집현전 학자들은 오히려 한글 창제를 반대하였고 이후 훈민정음을 편찬하는 데에 도움을 주었을 뿐이다. 세종과 함께 한글을 창제한 사람은 세종의 둘째딸인 정의공주와 그 외 세종의 아들들(대군들) 중 주로 수양대군안평대군이라고 역사에 남아 있다. 정의공주는 대군들도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였다.[1]

또한 '여자나 쓰는 글자'라는 뜻으로 '언문' 또는 '암클'로 불렸다고 알려져 있으나, '여자나 써서'가 아닌 '여자가 만들어서'라는 해석도 있다. 특히 '암클'이라는 비하어가 그렇다. 실제로 서민들이 많이 사용했음에도 서민이 아닌 여성에 집중한 것은 여성이 만들었기 때문이라는 추측이다.

정의공주 창제설에 대한 반박

우선 “世宗憫方言不能以文字相通 始製訓民正音 而變音吐着 猶未畢究 使諸大君解之 皆未能 遂下于公主 公主卽解究以進 世宗大加稱賞 特賜奴婢數百口”(세종이 우리말과 한자가 서로 통하지 못함을 딱하게 여겨 훈민정음을 만들었으나, 변음과 토착을 다 끝내지 못하여서 여러 대군에게 풀게 하였으나 모두 풀지 못하였다. 드디어 (정의)공주에게 내려 보내자 공주는 곧 풀어 바쳤다.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상으로 특별히 노비 수백을 하사하였다....... 하지만 이 기록에는 신빙성이 떨어진다. 그 이유는 출처부터가 조선시대도 아닌 1976년에 편찬된 집안 족보이며, 누군가에 의해 미화됐을 수 있기때문이다. 또 공주에게 수백 구의 노비를 하사하였다면, 분명 막대한 재정부담을 이유로 대간이나 유생의 반발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이 없다는 점 또 한소진<정의공주>는 소설이다. 소설은 현실에서 소재를 취해 이야기를 꾸미지만, 이는 작가의 상상력을 통하여 가공된 허구의 이야기, 즉 픽션(fiction)이다. 허구성은 소설의 가장 본질적인 특성이다......등 등 여러가지 신빙성이 떨어지는 자료가 있다.


정의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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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자녀 사이에서도 특별히 총명하여 세종이 아낀 이는 바로 정의공주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의공주 졸기>에는 "공주는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역산을 해득하여서 세종이 사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 정의공주죽산 안씨인 안맹담에게 시집을 갔으며 죽산안씨대동보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실려 있다고 한다.[1]

世宗憫(세종민)方言不能以文子相通(방언불능이문자상통)始製訓民正音(시제훈민정음)

而變音吐着猶未畢究(이변음토착요미필구)使諸大君(사제대군)解之皆未能(해지개미능)

遂下于公主(송하우공주)卽解究以(즉해구이)進世宗大加稱(진세종대가칭)賞特賜奴婢數百口(상특사노비수백구)
세종께서 소리(방언)가 문자(한글기호)와 서로 잘 통하지 않아 근심이 많으셨다. 그래서 훈민정음을 만들게 되었다.

소리의 변화원리(변음)와 소리의 토하는 소리(토착)를 완벽하게 해결하지 못하였다. 모든 대군들에게 시켜보았으나 모두 풀지를 못하였다.

공주에게 시키니 즉시 연구하여 풀어 내었다. 이에 세종대왕께서 크게 칭찬을 하시면서 특별히 노비 수백명을 상으로 주셨다.《죽산안씨대동보(竹山安氏大同譜)》

요약하면 세종과 수양대군, 그리고 안평대군을 비롯한 왕자들도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정의공주가 해결하여 한글 창제에 크게 공헌하였다는 내용이다. 이를 토대로 한글 기호(가름토)는 본래부터 있던 것이며 이 한글 원리의 핵심을 정의공주가 풀어 세종이 훈민정음으로 만들었다는 설이 있다. 보학은 정사가 아닌 야사이므로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주장하는 측도 있으나, 세종나신곳성역화국민위원회 사무총장인 김슬옹 교수는 보학의 엄격함을 따져보았을 때 상의 내용(노비 수백)에서 과장이 있었을지언정 상을 받은 구체적인 이유까지 허구라 보기는 어렵다고 반박하였다.[3]

소설 <정의공주>의 작가인 한소진은 역사적 진실 대신 알려진 '암클'이라는 단어에서 중요한 사실을 유추해내었는데, "'큰 글'이라는 뜻을 지닌 한글이 긴 세월 동안 암클이라 폄하된 것은 한글 창제에 여자가 개입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정의공주가 한글 창제에 큰 힘을 발휘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암시"한다고 말하였다.[4]

출처

  1. 1.0 1.1 신민수 (2013년 5월 29일). “훈민정음창제의 1등공신은 세종의 딸 '정의공주'. 
  2. “세종대왕과 정의 공주”. 《국립국어원 온라인 소식지 - 쉼표, 마침표.》. 2017년 11월 24일에 확인함. 
  3. “세종대왕과 정의 공주”. 《국립국어원 온라인 소식지 - 쉼표, 마침표.》. 2017년 11월 24일에 확인함. 족보를 다루는 학문을 ‘보학’이라고 하는데, 사실 보학도 정사 못지않은 엄격함이 있습니다. 집안의 ‘혈통’을 다루는 데 결코 허구가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리고 단순 야사라 치부하기에는 (정의 공주) 기록이 대단히 구체적이라는 점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노비 수백을 하사했다’는 내용이 과장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상이 얼마나 컸는지 그 규모에 대해서는 가문을 자랑하기 위해 살을 조금 붙일 수는 있을지언정, ‘변음과 토착의 문제를 풀어’ 세종으로부터 ‘상을 받았다’는 점은 지어냈다고 하기에는 조금 어려운 내용이므로 사실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4. http://blog.aladin.co.kr/ceo71ceo/469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