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운동

최근 편집: 2023년 6월 11일 (일) 10:53

1919년 3월 1일 자주 독립을 외치며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

삼일운동

배경

일제국권침탈조선총독부에 의한 헌병경찰통치토지조사사업에 의한 경제적 수탈이 극심한 중에도 우리 겨레는 국내의 항일결사조직, 국외의 독립운동기지건설 등으로 지속적인 항일운동을 펴고 있었다. 또,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8년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 러시아 레닌식민지민족 해방운동지원선언은 우리 겨레를 크게 고무시켰다. 한편, 1919년 1월 22일 고종 황제의 별세에 따른 독살설은 민심을 더욱 동요시켰으며, 우리 유학생들에 의한 도쿄에서의 2.8독립선언독립운동가들과 학생들을 크게 자극하였다. 그리고 국내에서 1918년 말부터 천도교, 기독교, 학생 대표 사이에서 개별적으로 진행되던 독립 운동 추진 계획이 통합과 단일화되고, 불교가 가담하면서 급속도로 진전되었다. 그 외에도 신한청년당의 외교활동(김규식파리강회회의에 파견), 만주에서의 무오독립선언 등 우리가 알지 못한 많은 노력이 숨어있었다.

경과

고종의 국장일이 3월 3일이었으므로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최남선이 작성한 기미독립선언서에 천도교 대표 손병희, 기독교 대표 이승훈, 불교 대표 한용운 등 33인의 민족대표가 서명하였다. 3월 1일 민족 대표 33인 중 29인은 인사동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한편, 시민학생들은 탑골공원에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 만세를 외친 후 대대적인 시위 행진을 전개하였다. 당일 평양, 진남포, 안주, 의주 등에서도 만세운동을 벌였으며,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학생은 운동의 전위역할을 담당하였으며, 상인 및 노동자층도 주체적으로 참가하였다. 3.1운동은 3월 1일 이후 4월 29일까지 전개되었으며, 참가 인원은 100만 명(당시 겨레의 수는 2,000만이라 겨우 5퍼센트라 생각하기 쉬우나, 당시는 3명만 모여도 잡아간다는 일제강점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목숨을 내놓고 만세를 외친 것이다.)이 넘었다. 한 곳에서 한 번만 일어난 것이 아니라 서울 13회, 해주읍 8회 등 모두 1,200회에 달했으며 전국 218개 군 가운데 212개 군이 참여했다.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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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 교문사의 '국사사전'
  • 설민석의 '한국사 능력 검정 개념 완성 중급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