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당 합당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7일 (화) 02:25


3당 합당을 다룬 당시 뉴스보도.

하루 아침에 위대한 배신의 칼을 휘두르는 저 민주 인사와 함께

개요

1990년 1월 22일 전격적으로 발표된 한국 정치사를 뒤흔든 사건. 당시 신군부의 후계자였던 노태우를 맹렬히 비판하면서 대립하던 김영삼이 합당에 전격적으로 찬성하면서 거대한 여당인 민주자유당이 창당되었다.

배경

13대 대선에서 6월 항쟁 등 불리한 여론에도 불구하고 야당의 대표주자였던 김대중과 김영삼이 반목하면서 표가 분산되어 어부지리격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는 집권후 처음 치뤄진 13대 총선에서 여당이었던 민주정의당이 전체 의석의 34%에 해당하는 125석을 확보했다. 하지만 당시 야권이었던 김대중의 평화민주당이 70석,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이 59석,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이 35석을 확보, 여당 125대 야당 164라는 여소야대 정국에 직면하였다.

당연히 여당이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하는 상황에서 노태우 정권의 추진력은 힘을 잃었고, 야당은 힘을 모아 5공화국 인사들에 대한 비리 수사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진상조사를 요구하였고 급기야 5공화국의 수장인 전두환에 대한 국회 청문회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대통령이었던 노태우는 자신의 친구인 전두환을 국회에 증인으로 세우는 것을 원치 않았으나 야당이 계속하여 전두환 전 대통령이 증인으로 국회에 출석할 것과 5공화국 인사들에 대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노태우 정부 종식 투쟁'에 들어가겠다고 압력을 가하는 현실 때문에 대통령의 신분으로 이를 막지 못하고, 결국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여 5공화국 청문회가 열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런 현실을 받아들인 노태우는 이러한 여소야대 정국에서 자신의 의지대로 정국을 이끌기 어렵다는 판단하에 정치적 술수를 시전하게 되는데, 그것은 당시 야당의 대표들이었던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세 사람을 한명씩 청와대로 초청해 독대하면서 민주정의당과 당신의 정당이 합당을 하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했다.

이 파격적인 제안에 김대중 평민당 총재는 완강한 거부의사를 밝혔고, 김영삼 통민당 총재와 김종필 공화당 총재는 고민에 빠졌다.

역사적인3당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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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을 발표하는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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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자유당 창당의 주역들.
왼쪽부터 박태준, 김영삼, 노태우, 김종필

1990년 1월 22일, 노태우는 전격적으로 김영삼, 김종필을 배석시킨 자리에서 3당 합당을 발표했다. 이로서 125석의 민정당과 통일민주당의 59석, 신민주공화당의 35석이 합쳐진 공룡 여당이 탄생하였다. 합당된 당의 이름은 민주자유당으로 정해졌으며 하루아침에 여소야대 구도가 뒤집어진 정치사에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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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당 합당에 이의제기하는 노무현

이의 있습니다. 반대 토론을 해야 합니다

3당 합당을 선포하는 자리에서 대다수 의원들은 동조하는 가운데, 당시 통일민주당 소속 국회의원 노무현은 홀로 격렬히 반대의견을 표출했다. 비록 김영삼은 노무현을 발탁해 정계에 입문시켜준 정치적 스승같은 존재였으나, 민주화를 위해 롤모델로 삼았던 그가 정적인 노태우와 야합하여 합당하는 것을 민주화에 대한 배신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 사건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3당 합당에 반대하던 입장의 이기택, 김정길, 장석화, 김상현, 박찬종, 홍사덕, 이철, 노무현 등 8인이 3당 합당을 거부하며 김영삼을 따라가지 않고 민주당을 결성하였다.

3당 합당 당시 각 당의 속사정

민주정의당

여소야대 타파를 위한 절박한 몸부림

야당의 유력한 후보였던 김영삼과 김대중이 13대 대선을 앞두고 반목하면서 어부지리격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노태우와 그의 정당인 민정당은 13대 총선에서 5공 청산과 민주화를 염원하는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여당임에도 불구하고 과반석에 못미치는 참패를 겪었다.

고심끝에 당시 제1 야당이었던 평민당의 김대중에게 은밀한 제안을 했다. 5.18 민주화운동 문제 해결에 전권을 위임하겠다는 것을 골자로한 정치적 거래였다. 즉 김대중의 평민당을 흡수하여 호남지역의 민심도 얻고, 야당의 우두머리를 여당으로 돌림으로써 자연스럽게 김영삼이나 김종필을 견제하려는 속셈이었던 것. 하지만 끝내 김대중은 노태우의 제안에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고, 차선책으로 김영삼과 김종필에게 비슷한 합당 제안을 했는데 계산이 맞아 떨어져 하루아침에 거대 여당으로 탈바꿈했다.

통일민주당

강력한 라이벌을 견제하려는 궁여지책

당시 김영삼의 통일민주당은 평민당의 70석에 못미친 59석을 확보하는데 그쳤다. 13대 대선 과정에서 김대중과 심한 대립을 하면서 관계가 원수처럼 변해버린 두 사람이었고, 같은 야당의 처지지만 김대중의 평민당에 휘둘리다가 결국 대권에 실패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던 김영삼은 고심끝에 노태우의 제안을 수락했다. 특히 합당 직전 열렸던 1989년 동해시 재보궐 선거에서 자신의 측근이었던 서석재가 무소속 후보를 매수하여 부정선거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구속되는 악재가 발생하자 합당 제안에 결심을 굳혔다.

신민주공화당

박정희 정권의 실세이자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김종필은 12.12사태 이후 집권한 하나회 세력의 탄압으로 잠시 정계를 떠나있었다. 그 후 노태우가 6.29 선언으로 대통령 선거 직선제를 발표하자 출마를 결심, 직선제 개헌 이후 치루어진 1987년 제13대 대선에 출마하였으나 1,823,067표(8.1%)의 낮은 득표율로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이에 그는 애초에 꿈꾸던 대통령의 꿈을 포기하고 새롭게 창당될 정당(민주자유당)의 대표위원이 되어 대한민국의 정치 체제를 대통령중심제에서 내각책임제(의원내각제)로 개헌을 한 후에 총리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총리가 될 생각을 하게 되었고, 당시 야당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불만이 가득했던 당소속 의원들의 입장을 고려해 여당인 민정당의 합당 제의를 비교적 수월하게 받아들였다.

3당 합당 이후

3당 합당이 실현되면서 거대 여당이 집권을 하게 된다. 야당에서 유일하게 합당 거부를 선택한 김대중은 이후 정치적 입지가 상당히 좁아지게 되었으며, 자신의 정치기반인 호남을 제외하고 제대로 힘을 쓸 수 없는 상태에 직면했다. 노태우는 3당 합당으로 얻은 정국 주도권을 쥐고 마음껏 정권을 휘두르나 싶었는데, 1992년 14대 총선에서는 계파 간의 갈등으로 인해 낙천한 인사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하거나 통일국민당 공천을 받으면서 299석 중 149석에 그치는 참패를 당한다.

사실 민자당은 서로간의 이해관계가 다른 세 가족이 한 지붕에 억지로 끼워진 형국으로 내부적으론 엄청난 혼란과 정쟁이 벌어졌다. 우선 김영삼은 자신이 기득권을 쥐기 위해 자신의 뜻대로 당권을 운영할 수 있게 하지 않으면 탈당하여 독자세력을 갖추겠다면서 노태우를 협박압박했다. 이런 김영삼의 행보가 탐탁치 않았겠지만 어렵게 얻은 정국 주도권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 없었던 노태우는 결국 민자당의 실질적 수장을 맡길 수밖에 없었고 박태준과 김종필을 대표위원에 앉힘으로써 그들의 불만을 달래주는 모습을 보였다. 김종필 역시 애초에 합당 조건으로 약속했던 내각책임제 개헌을 철썩같이 믿고 있었으나...

민자당의 분열

14대 대선 과정에서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영남민심이 결집되면서 노태우를 경계하며 당내세력을 포섭했던 당의 후보였던 김영삼이 당선되고 이후 야당의원들을 대거 영입하여 다시 국회과반수의 거대 여당이 되었다. 14대 대선에서 당선된 김영삼은 취임 이후 작정했다는 듯 신군부 정치군인들과 하나회를 매몰차게 내몰았다. 역사 바로세우기 명목으로 전두환노태우를 법정에 세워 구속시켰으며, 금융실명제를 강력히 추진해 비자금의 흐름을 차단시키는 등 개혁정치를 단행했다. 애초에 3당 합당시 치밀한 정치적 계산을 깔아놓고 기회를 노리던 그에게 대통령직이 주어진 이상 과감한 과거 청산을 진행했다. 하지만 여전히 민주화 진영에서는 야합한 기회주의자와 배신자라는 비판을 완전히 떼어낼 수는 없었다.

김영삼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줄곧 민자당에 남아 내각책임제 개헌에 희망을 품었던 김종필은 결국 김영삼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실망한 나머지 15대 대선을 1년여 앞둔 1995년.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면서 김영삼과 결별했다. 그는 신뢰를 무너뜨린 김영삼에 깊은 반감을 표출하며 당시 유력한 야당의 대선후보였던 김대중과 연합[1]하여 차기 대권을 기약했다. 이후 실시된 1995년 지방선거에서 민자당이 참패하자 김영삼은 민정계를 대거 축출, 통일민주당의 혈통으로 민자당을 개편했다.

3당 합당 의의 및 비판

  • 3당 합당으로 결성된 민주자유당은 이후 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자유한국당미래통합당국민의힘으로 이름을 바꿔가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3당 합당에 반대를 하다가 소외된 김대중 및 평민당은 이후 철저히 호남지역에 국한된 지역정당의 이미지를 벗어나기 힘들었고, 영남 vs 호남이라는 지역구도가 더욱 굳어지면서 지역감정이 더욱 심해지는 결과를 초래했다.
  • 김영삼은 집권 후 과감한 5, 6공 청산을 추진했지만 여전히 민자당 내부에 남아 있던 민정계 의원들을 완전히 배재할 수 없었고, 이른바 TK 세력은 권력의 중심부에 남아 있을 수 있었다.
  • 애초에 너무나도 이질적이던 3개의 정당을 억지로 합쳐놓은 것이라서 당내 계파간 갈등이 심했고, 이를 효과적으로 제어하지 못한 노태우 정부는 이후 당을 장악한 김영삼의 힘을 이기지 못하며 정치력의 부재를 노출했다.
  • 노태우는 2011년, 뜬금없이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 과거사를 고백했는데 그 내용이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그것은 바로 1992년 대선 당시 김영삼 측에게 대선자금으로 3,000억원을 제공했다는 내용이었다.
  • 3당합당으로 인해 호남과 같이 야도로 불렸던 부산,경남 지방이 민주자유당,신한국당,한나라당,새누리당의 텃밭이 되어버렸고 이후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 이전까지는 민주계 정당의 득표율이 10% 후반을 넘지 못했다.
  1. 이른바 DJP(김대중을 의미하는 DJ와 김종필을 의미하는 JP의 합성어) 연합이라고 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