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29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7일 (화) 09:05

B-29 슈퍼포트리스(B-29 Superfortress)는 미국 육군항공대(1948년 이후 공군) 및 영국 공군에서 운용한 4발 장거리 전략폭격기다. 1942년에 초도비행에 들어가 1960년에 퇴역했으며, 그 기간동안 있었던 태평양 전쟁과 한국 전쟁에서 혁혁한 기여를 하였다.

개발 및 생산

개발이 시작된 것은 1938년이다. 이때 미국은 이미 B-17 플라잉포트리스 폭격기를 개발, 양산을 진행중이었지만 보다 먼 거리에 있는 목표를 타격하기 위한 장거리 전략폭격을 위해 새로운 폭격기 개발을 요구했다. 미 육군항공대는 4,290km 떨어진 목표까지 평균 640km/h의 속도의 비행한 후 2만파운드, 약 9,100kg의 폭탄을 투하하고 돌아올 수 있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엄청난 사양을 요구했다. 이에 록히드(XB-30)와 더글러스(XB-31)는 얼마 안 가 포기했고, 최종적으로 보잉만이 남아 1940년 8월에 2기의 프로토타입 기체, 2기의 XB-29를 내놓았다.

미 육군항공대는 XB-29의 비행테스트 끝에 최종적으로 보잉과 계약, 1941년 5월에 250기의 B-29를 주문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 미국은 유럽대륙의 전쟁에서 독일이 전면적인 승리에 직면했다고 보고 독일과의 전쟁에 대비하고 있었기에, 미군이 확보할 수 있는 기지에서 독일 본토를 폭격할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B-29는 당시로선 유래가 없는 초대형 항공기였고, 때문에 제작 및 생산도 특정지역이 아닌 미국 본토 각지에 분산된 공장에서 개별적으로 이루어졌다. 당장 핵심 공장만 해도 네브래스카, 워싱턴, 캔자스, 조지아 4개 주에 분산되어 있었고, 수천여 개의 공장에서 온갖 부품을 개별적으로 제작해 위 4개의 공장에 보냈다.

미국이 전쟁에 참전하자 B-29의 생산은 더더욱 독촉받았고, 1943년부터 대대적인 생산에 돌입해, 1943년에 이미 100여 기를 미 육군항공대에 납품했고, 44년 3월에서 4월의 1달동안 150기를 추가로 생산해냈다. 이러한 B-29의 생산을 캔자스의 전투(Battle of Kansas)라 통칭한다.

B-29의 생산은 전쟁이 끝난 1946년에 종료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총 3,960기(XB-29 3기, YB-29 14기, B-29 2513기, B-29A 1119기, B-29B 311기)가 생산되었다.

성능

폭격기로서 가장 중요한 폭장량에 있어 B-29는 B-17에 비해 2,400파운드(1,200kg)가 더 많은 20,000파운드에 달했는데, 이는 대전기에 등장한 그 어느 폭격기도 범접하지 못한 규모이다. 아울러 항속거리 3,250마일(5,230km), 최대작전반경 5,600마일(9,000km)은 그 어느 나라도 상상하지 못한 것으로, 미국의 전략폭격 능력을 단숨에 배가시켜준 셈이다.

단순히 폭장능력이나 항속거리만이 우수한 것이 아니다. 최고속도는 574km/h로 처음 미군이 제기한 ROC에는 못미치지만 초대형폭격기임을 감안하면 빠른 편이다. 그리고 느려진 속도를 대신하여 최고상승고도 31,850피트(9,710m)를 기록했는데, 이는 일본 전투기로는 상승조차 불가능한 고도이다. 실제 이 비행고도 문제로 일본군은 1944년에 B-29의 요격에 전혀 나설 수 없었다.

방호력을 높이기 위해 상당한 중장갑을 채택하여, 당시 독일군 전투기의 주무장 중 하나인 20mm 기관포에 대한 내탄성을 가져서 20mm 기관포탄 몇 발정도로는 제대로 타격을 주지 못했다. 당시 일본군 전투기의 7.7mm 기총에 대한 방호력은 말할 것도 없다. 추가로, 2문의 20mm 기관포 및 10문의 12.7mm 중기관총이 방호무장으로 탑재되었는데 이중 20mm 기관포는 후기형에서 제거되었지만 12.7mm 중기관총은 중앙통제식 자동사격체계를 운용하여 사수가 효과적으로 적기들을 요격할 수 있게끔 도와주웠다.

그리고 위의 모든 성능을 구현해내기 위한 조건으로 2,200마력에 달하는 Wright R-3350-23/-51/-57 사이클론 18-실린더 레이디얼 엔진 4기를 장착했다. 이 엔진은 성능만큼은 확실했지만 워낙 무거운 기체의 비행을 책임지다보니 엔진 수명이 타 항공기에 비해 매우 짧은 편이었다. 다만, 미군은 이를 대량의 예비 엔진을 공급하여 전선 정비소에서 엔진을 교체하는 방식으로 해결했다.

그밖에도 여압장치가 잘 되어 있어, 동시기 폭격기들과 달리 고고도 비행중에도 승무원들은 방한외투 없이 평상시 근무복만으로도 비행이 가능했다.

전과

제2차 세계대전

본격적으로 양산, 배치되는 시점은 1944년인데 이 시기 독일은 이미 패색이 짙어진 데다, 영국을 기지로 한 B-17만으로도 독일 본토 폭격이 가능했기에 양산되는 모든 B-29는 아시아 태평양 전선으로 돌려졌다.

1944년 4월에는 인도 기지에 배치되어 당시 일본의 동맹국이던 태국 및 점령지였던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 각지를 산발적으로 폭격했다.(마터호른 작전) 이후 7월경부터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중국 기지에 배치되어 만주와 일본 서부 큐슈 등을 목표로 폭격에 나섰으나 전과는 적었다. 같은 해 11월에는, 마리아나 제도에 전개되어 도쿄에 대한 폭격을 개시했다.

1945년 3월부터는 커티스 르메이의 지휘하에 본격적으로 일본 본토 공습에 나섰다. 그 유명한 도쿄대공습을 시작으로 일본의 주요 대도시들에 소이탄 폭격을 감행, 초토화시키고 덤으로 체스터 니미츠의 명령으로 일본 연안에 대규모로 기뢰를 살포해 일본을 말려죽이는데도 큰 공훈을 세웠다. B-29의 일본 전략폭격은 전쟁이 끝나는 날까지 계속되어 일본의 도시 대부분을 잿더미로 만들고 전쟁수행능력과 의지를 없앴다. 아울러, 히로시마나가사키에 대한 핵공격도 B-29가 실시했다.

이러한 B-29의 전략폭격일본 제국의 패망에 쐐기를 박는데, 이미 산업 생산력에서 미국을 따라잡을 수 없는 일본제국은 그나마 눈물겹게 유지하던 산업생산량의 상당부분을 손실함은 물론이고, 일본 본토를 공격함에 따라 일본 국민들의 전의를 상실케하는 일등 공신이 되었다. 이오지마섬 점령 이후 B-29의 활동은 그야말로 사신과 같아서, 그나마 요격기를 띄우는 흉내라도 낼 수 있었던 일본 제국은 완전히 요격기를 생산할 능력마저 상실해 버렸다.

한국전쟁

한국전쟁에서도 개전 초부터 폭격에 나서, 1950년 겨울이 되면 북한 지역에 더 이상 남아 있는 산업시설이 없는 지경이었다. 그러나 중국군이 참전하면서 청천강 이북 지역에서 MiG-15기들이 출현, B-29들의 안전이 보장받지 못하게 되자 B-29는 주간폭격을 중단하고 야간폭격에만 나서게 되었으며, 이후로는 청천강 이북지역(미그앨리)에서의 폭격활동을 자제하게 된다.

퇴역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B-29는 제트전투기의 요격에 취약성을 보인다는 것이 입증되었고, 대부분의 전투용 군용기가 제트기로 교체되는 시대의 흐름에 뒤처지게 되었다. 아울러 제2차 세계대전당시부터 개발하던 B-36의 개발을 거쳐서 최종적으로 보잉이 1952년에 후계기인 B-52 스트라토포트리스를 개발하면서 일선에서 밀려나기 시작했고, 1960년에 마지막 기체가 퇴역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