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 바이에른 뮌헨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7일 (화) 09:13

틀:축구구단 정보 FC 바이에른 뮌헨독일 바이에른주뮌헨을 연고지로 하는, 분데스리가 소속의 명문 축구 팀이다. 독일을 넘어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축구단 중 하나다. 1900년 2월 27일 창단이라는 긴 역사를 자랑하는 구단.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편에 속하는 클럽이기도 하다. 한국에선 아니다.

참고로 'FC 바이에른 뮌헨'을 한국판으로 로컬라이징해본다면 대충 '경기도 고양시 축구단' 정도 된다. 참 깨끗한 이름 이다.

개요

FC 바이에른 뮌헨은 1900년 창단 후 100년이 넘는 역사 동안 레코드마이스터(Rekordmeister)라는 별칭으로 불릴 만큼 명실상부히 독일 최고의 클럽으로 군림해왔다.[1]

바이언의 최전성기는 3시즌 연속 유러피안컵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던 70년대이며, 2012-13시즌에는 유럽 축구사상 일곱번째, 독일 클럽 최초로 트레블을 이루었다. [1]2001-02 시즌 95,195명이던 소시오의 수는 2010-11시즌에는 171,345명으로 증가했으며 바이언의 재정적 견실함은 FIFA의 재정적 페어 플레이에 있어 롤모델로 불린다.[1]

캐치프레이즈

Mia San Mia 독일어 바이에른 지방 사투리로 '우리는 우리'(We are who we are)라는 뜻이다. 유니폼 목 부분에도 새겨져 있고, 그 외에도 바이에른 뮌헨과 관련된 물품이면 어디서든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는 문구.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 무대에서도 최강 클럽 중 하나로서, 특히 국내에선 다른 팀 팬의 질타를 받는 경우도 있지만, 그럴 때에도 '우리는 우리'일 뿐이라며 쿨하게 넘기는 팬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Pack ma's! 영어로 'Let's do it!'에 해당하는 바이에른 사투리다. 바이에른 뮌헨 선수들과 팬들 모두가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구호이다.[2]


별명

  • Der FCB (데어 에프체베)
FC Bayern의 이니셜이다.
  • Die Bayern (디 바이언)
바이에른 인이란 뜻. 독일어 표기법상 Bayern이 바이에른으로 표기되긴 하지만, 실제 독일어 발음은 '바이언'에 가깝다.
  • Stern des Südens (슈테른 데스 쥐덴스)
남부의 별이라는 뜻이다. 참고로 바이에른 주는 독일의 남부에 있다.
  • Die Roten (디 로텐)
영어의 The Reds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붉은악마?
  • FC Hollywood
이건 사실 좀 불명예스러운 별명이다. 90년대 말 트라파토니가 감독으로 있던 시절, 바이에른의 선수들이 매번 타블로이드지 메인을 장식했기 때문에 무슨 헐리우드 스타들 스캔들 나는 것 같다고 붙은 별명이기 때문이다.[3]

한국 팬덤에서는 보통 '뮌헨'이나 '바이언'이라고 부르는 편이다. 참고로 독일에서 '뮌헨'이라고만 하면 원칙적으로는 "TSV 1860 뮌헨"을 가리키기 때문에 오해의 여지가 있다. 실제로 독일 언론은 물론이고 영어권 언론에서도 바이에른 뮌헨을 '뮌헨'이라고만 지칭하는 경우는 없다. TSV 1860 뮌헨 역시 역사가 아주 오래된 명문 클럽이고, 심지어 수십년 전만 해도 바이에른 뮌헨보다도 더 잘 나가던 클럽이었기 때문에(1965-1966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팀이다.) 바이에른 뮌헨을 '뮌헨'이라고 부르는 것은 해당 팀 팬들에게 불쾌하게 여겨지기 쉽다. 따라서 이쪽에 관심있는 팬은 주로 '바이언'이라고 부르는 편. 참고로 '바이언'이 영어 형용사처럼 생겨서인지, 바이에른의 선수들을 '바이언'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자주 보인다. 초싸이언?

경기장

역사가 긴 클럽인만큼, 바이에른의 홈 구장 또한 시대에 따라 변해왔다. 바이언usw에서 정리한 것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 1901-1907: 슈바빙, 클레멘스 거리(Schwabing, Clemensstraße)
1900년 창단 후, 쉬렌 거리(Schyrenstraße)의 도시 경기장에서 바이언의 첫 연습경기가 열렸다. 이 경기에서 바이언은 5:2로 패했다. 바이언은 옥토버페스트를 위해 비워놓는 부지인 테레진비제(Theresienwiese)에서 첫 공식 경기를 치렀다. 창단 후 1년이 지난 1901년 바이언은 슈바빙의 클레멘스 거리에 처음으로 그들의 경기장을 갖게 된다. 1907년 봄까지 슈바빙에 머문 바이언은, 1906년 뮌히너 스포츠 클럽(Münchner Sport-Club)에 가입하며 1907년 5월 슈바빙을 떠나 레오폴트 거리의 뮌헤너 스포츠 클럽 경기장으로 홈구장을 옮겼다.
  • 1907-1925: 레오폴트 거리(Leopoldstraße), 뮌헨 곳곳
뮌히너 스포츠 클럽 경기장을 사용하던 바이언은 1920년대 초, 바이언의 경기를 보러오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하며 뮌헨 곳곳의 경기장을 전전하게 된다. 이 시기 바이언은 어느 경기장에도 오래 머물지 못했다.
  • 1925-1972: 그륀발터 슈타디온(Grünwalder Stadion)
정식 명칭은 그륀발터 거리 도시 경기장(The Städtisches Stadion an der Grünwalder Straße). 흔히 그륀발터 슈타디온 또는 젝츠어 슈타디온(Sechz'ger Stadion)이라고 불린다. Sechz'ger Stadion은 바이언과 경기장을 공유하는 TSV 1860 뮌헨의 별명 Die Sechz'ger에서 유래한 이름. TSV 1860 뮌헨은 1911년부터 그륀발터 슈타디온을 홈경기장으로 사용했으며, 바이언은 1925년부터 1860 뮌헨과 그륀발터 슈타디온을 공유하게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그륀발터 슈타디온은 심하게 손상되었고 이후 부분부분 재건되었다. 그륀발터 슈타디온에서 바이언이 세운 최다 관중 기록은 5만명 이상의 관중이 61/62 시즌 FC 뉘른베르크와의 홈경기를 보러 왔던 일이다.
현재 그륀발터 슈타디온은 바이에른 뮌헨 II팀과 TSV 1860 뮌헨 II팀의 홈경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1972-2005: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Olympiastadion München)
1972년 뮌헨 하계올림픽을 대비해 지어진 주경기장. 수용인원은 69,250명. 1974년 월드컵과 1988년 유로가 이 경기장에서 치러졌다.
1972년 6월 28일 오후 3시 30분, 바이언은 새 올림픽 경기장에서 샬케 04를 상대로 첫 경기를 치렀다. 분데스리가 71/72시즌 마지막 경기였으며, 분데스리가 사상 최초로 TV 생중계된 경기이기도 했다. 시즌 34라운드였던 이 경기에서 바이언은 샬케를 5:1로 이겼다. 당시 바이언에는 울리 회네스프란츠 베켄바우어, 게르트 뮐러, 게오르그 슈바르첸벡, 파울 브라이트너, 제프 마이어가 현역으로 뛰고 있었다.
바이언은 이후 33년간 올림피아 슈타디온에서 홈경기를 치른다. 2005년 5월 14일, 04/05시즌 33라운드 뉘른베르크와의 홈경기를 마지막으로 바이언은 올림피아 슈타디온을 떠나 알리안츠 아레나로 이사했다. 시즌 마지막 홈경기, 올림피아 슈타디온의 고별경기에서 6:3으로 승리한 바이언에는 클라우디오 피사로, 미하엘 발락, 로이 마카이, 세바스티안 다이슬러가 뛰고 있었다.

알리안츠 아레나

  • 2005- : 알리안츠 아레나(Alianz Ar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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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명칭은 푸스발 아레나 뮌헨(Fußball Arena München).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지어진 경기장이며 2005년 5월 30일에 문을 열었다. 알리안츠 그룹이 30년간의 명명권을 구입하며 알리안츠 아레나라 불리게 되었다. 정원은 71,137명. 원래 66,000석으로 지어졌고 국내 경기에서는 입석을 깔아 69,901명까지 수용 가능했으나 2012년 8월 좌석을 두 줄 더 까는 공사를 거쳐 71,000석 규모로 확장되었다. 이후 2014년 공사 및 시험 적용을 거쳐 75,000석 규모로 재확장되었다. (국제대회 수용인원 7만명)
바이언은 33년간 뛰던 올림피아 슈타디온을 뒤로 하고 05/06시즌을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시작했다. 이전의 그륀발터 슈타디온, 뮌헨 올림피아 슈타디온과 같이 알리안츠 아레나 역시 바이에른 뮌헨과 TSV 1860 뮌헨이 공동으로 사용하고 있다. 경기장 외부의 타일에는 바이언 홈경기 때는 붉은색, 1860 뮌헨의 홈 경기 때는 푸른색, 국가대표팀 경기 때는 흰색 조명이 켜진다. 한 가지 색뿐만 아니라 두 가지 이상의 색을 한꺼번에 낼 수도 있는데 뮌헨 더비 때에는 태극 문양붉은색과 푸른색이 같이[4], 2011-12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때는 이렇게 화려한 모습으로 변하기도 했다.

기타

파일:맥주맞는 슈슈.gif
슈슈한테 맥주 뿌리는 레반도프스키

맥주의 도시답게 경기중에 맥주를 정말 많이 마시며 우승시엔 맥주를 뿌린다.

역사

  • 이 부분의 내용은 국내 바이에른 뮌헨 팬사이트 바이언 usw클럽 역사 정보를 토대로 작성되었다.

1900 - 1945

바이에른 뮌헨은 1900년 2월 27일 프란츠 욘(Franz John)을 위시한 18인에 의해 창단되었다. 1907년 뮌헤너 스포츠 클럽에 가입해 레오폴트 거리로 경기장을 옮기면서부터 클럽은 점차 좋은 성적을 거두기 시작했으며, 1910년에는 남부 독일 리그 중 동부 지역 우승(Ostkreismeister)을 차지했다. 1920년에 이르자 FC 바이언의 소시오는 700명에 달하게 되었고 바이언은 뮌헨에서 가장 큰 축구 클럽이 된다. 1926년 바이언은 남부 지역 리그(Süddeutsche Meisterschaft)에서 우승했으며 1932년에는 아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2-0으로 꺾으며 독일 챔피언이 된다. 그러나 나치당의 집권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바이언은 침체기를 겪는다.

1946 - 1967

전쟁 후 독일 축구는 회복을 위한 시간을 필요로 했다. 바이언도 마찬가지였다. 1957년 DFB-포칼 결승에서 바이언은 아우크스부르크의 로제나우슈타디온에서 포르투나 뒤셀도르프를 1-0으로 이겼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도 잠시, 1963-64시즌 분데스리가가 출범할 때 바이언은 1.분데스리가에 합류하지 못하고 여전히 레기오날리가 쥐트에 남아있었다. 이는 당시 1도시 1클럽 원칙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뮌헨에서는 TSV 1860 뮌헨이 새로 출범하는 분데스리가에 이름을 올렸다. 요즘 1860은 1부는커녕 2부에서 허덕이고 있으니 안습. 바이에른은 트레블도 했는데

2년 후, 65-66시즌 바이언은 1.분데스리가에 합류했다. 이 시기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1860 뮌헨에서 바이언으로 이적했고, 제프 마이어가 바이언의 골문을 지키고 있었으며, 게르트 뮐러가 필드를 휘저었다. 공격수, 수비수, 골키퍼 모두 역대 최고 수준으로 꼽히는 전설들이 하나씩 자리잡고 있었던 가히 최강의 팀이었다. 분데스리가 합류 첫시즌 바이언은 3위를 한다.잉? 1966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독일잉글랜드에 패배하며 눈물을 삼켰지만, 베켄바우어와 마이어, 뮐러는 같은 해 클럽 역사상 두 번째로 DFB-포칼에서 우승했다. 다음 시즌 또다시 포칼에서 우승한 바이언은, UEFA 컵 위너스 컵에 참가해 연장 19분 프란츠 로트(Franz Roth)의 골로 글래스고 레인저스를 이기며 첫 유럽대회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1968 - 1976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중후반까지를 FC 바이언의 황금시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기 바이언은 분데스리가에서 4번, DFB-포칼에서 2번 우승했으며 유러피안 컵(챔피언스 리그의 전신)에서 3시즌 연속 우승했고 인터컨티넨탈 컵에서도 우승을 거머쥐었다. 브랑코 제베치 감독 부임 첫해였던 1969년 바이언은 알레마니아 아헨과 8포인트 차이로 리가에서 우승하고 DFB-포칼 결승전에서 샬케 04를 2-1로 꺾으며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처음으로 더블을 달성했다. 이전에 더블을 했던 클럽은 1937년의 샬케 04뿐이었다.

그러나 바이언에게는 강력한 라이벌이 있었다. 바로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묀헨글라트바흐에 밀려 바이언은 2년간 리가 우승을 놓쳤다. 하지만 1972년, 우도 라텍 감독과 함께 새로운 올림피아 슈타디온에서 다시금 분데스리가 우승팀이 된다. 게르트 뮐러는 이 시즌 분데스리가에서 40골을 넣으며 2015년까지도 깨지지 않은 기록을 세웠다. 더불어 FC 바이언이 이 시즌 리가에서 넣은 101골의 기록 역시 깨지지 않고 있다. 이 다음 시즌 바이언이 34경기 중 25경기에서 승리하며 한 시즌 최다 승리 기록도 세웠었지만, 이후 전설과도 같은 시즌이었던 2012-13 시즌, 바이언이 다시 34경기 중 무려 29경기를 승리하며 기록은 깨지고 만다. 다만 그와중에도 득점은 98점에 불과(?)했던 걸 본다면 당시 바이언의 위세가 얼마나 대단했는지 알 수 있다. 참고로 11-12시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도 34경기 25승을 기록하며 타이 기록을 세운 바 있다.

이후 바이언은 유러피안 컵에서 1974, 1975, 1976 세 시즌 연속으로 우승했으며 1976년 인터컨티넨탈 컵에서도 우승했다. 같은 시기 독일은 1972 서독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네덜란드와의 결승전은 뮌헨에서 열렸으며 필드에는 무려 여섯 명의 바이언 선수가[5] 나섰다. 원래 독일 대표팀은 절반이 바이에른이다.그리고 브라이트너가 페널티 골을, 게르트 뮐러가 놀라운 터닝 슛 골을 넣으며 독일은 네덜란드에 2-1로 승리했다.

1977 - 1990

1977년은 변화의 해였으며 우승컵 없이 마친 해였다.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클럽에 잠시간 안녕을 고했으며 다음 해에는 게르트 뮐러가 떠났다. 1979년 고작 27살이던 울리 회네스가 현역에서 은퇴하고 구단에 매니저로 합류했다. 감독과 보드진에 대대적인 변화가 있었고 클럽 내부는 혼란을 겪었다. 그러나 1980년 파울 브라이트너칼-하인츠 루메니게는 6년 만에 다시 바이언에 마이스터샬레를 안겼다. 1981년에도 바이언은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했다. 하지만 다음 4년 동안은 우승하지 못했다. 더구나 1982년 월드컵 결승전에서는 독일이 이탈리아에게 패배했다. 파울 브라이트너가 두 차례의 월드컵 결승전에서 골을 넣은 유일한 독일 선수가 되었음에도 말이다.

그래도 아주 희망이 없는 것만은 아니었다. 1965년부터 1981년까지 16년 동안 바이언은 11차례 독일 올해의 선수를 배출해냈다. 베켄바우어(4회), 마이어(3회), 뮐러(2회), 루메니게, 브라이트너. 1984년 묀헨 글라트바흐와의 DFB-포칼 결승전에서 승부차기로 글라트바흐를 꺾고 다시 한 번 포칼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이 경기에서 승부차기 실축을 범했던 로타 마테우스는 바이언으로 이적한다. 발롱도르를 두 번 받은 칼-하인츠 루메니게는 11m 유로의 이적료로 기록을 세우며 인터밀란으로 이적했다. 바이언은 1985, 1986, 1987 3시즌 연속으로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했으나 챔피언스 컵에서 FC 포르투에 패하며 팀이 흔들렸다. 결국 마테우스, 브레메, 에더, 휴즈, 미하엘 루메니게, 파프가 팀을 떠났다.

새로 부임한 유프 하인케스 감독은 팀을 재정비했다. 그와 함께 바이언은 1989년1990년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또 독일이 1990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우승할 때, 대표팀에는 여섯 명의 바이언 선수가 있었다. 아우겐탈러, 로이터, 톤, 콜러, 프뤼글러, 아우만.

1991 - 1999

90년대 초 3년 동안 바이언은 우승컵을 차지하지 못했다. 1991년 가을, 바이언은 프란츠 베켄바우어칼-하인츠 루메니게를 보드진에 영입한다. 1994년, 베켄바우어는 한 시즌 반만에 해임된 에리히 리벡을 대신해 바이언의 지휘봉을 잡았고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렸다. 지오바니 트라파토니 감독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고 바이언을 떠난 후 오토 레하겔 감독이 왔다. 그와 함께 바이언은 1996 UEFA 컵(유로파 리그의 전신) 4강에서 잊을 수 없는 두 경기를 치른다. 올림피아 슈타디온으로 FC 바르셀로나를 맞아들인 바이언은 2-2 무승부로 경기를 마쳤고, 캄프 누로 떠나 2-1 승리를 가져왔다. 그리고 보르도를 상대한 홈앤어웨이의 결승에서 바이언은 2승을 거두며 클럽 최초의 UEFA 컵 우승컵을 가져왔다. 1994년부터 바이언의 회장으로 있었던 베켄바우어는 당시 경기 내내 사이드라인 근처에 서 있었다.

레하겔이 떠난 후 트라파토니가 돌아왔다. 그는 2년 동안 바이언에 마이스터샬레와 포칼을 각각 하나씩 안겼다. 더구나 바이언이 DFB-포칼에서 우승한 것은 1986년 이후 12년만이었다. 덕분에 트라파토니가 바이언을 떠날 때 모두가 그에게 존경을 표했다. 오토 히츠펠트가 그 뒤를 이었고, 히츠펠트는 99-00시즌 바이언에게 다시 한 번의 더블을 선사했다. 이 시즌 바이언은 창단 100주년을 맞이했으므로 매우 뜻깊은 시즌이었다고 할 수 있다.

2000 - 2004

1998년부터 2004년까지는 바이언의 '히츠펠트 시대'였다. 그 중에서도 2000년부터 2003년까지의 4년은 최고의 시기였다. 2000년 바이언은 더블을 했고, 2001년에는 치열한 분데스리가 우승 경쟁 속에 단 4분 우승팀이 되었던 샬케 04를 제치고 도이처마이스터가 되었다. 또한 이 시즌 바이언은 25년 만에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했다. 발렌시아와의 극적인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올리버 칸이 무려 세 개의 승부차기를 막아낸 것이다. 2002-03시즌 바이언은 2위인 VfB 슈투트가르트를 16포인트 차로 따돌리며 분데스리가 우승을 차지했고, 포칼 결승에서는 카이저슬라우테른을 3-1로 이기며 클럽 사상 네 번째 더블을 했다.

2005 -

2004년 펠릭스 마가트가 바이언의 새 감독으로 부임했다. 2005년 바이언은 홈구장을 알리안츠 아레나로 이전했다. 이후 마가트, 다시 히츠펠트, 클린스만, 하인케스, 반 할에 이르기까지 바이언은 단 6년 만에 무려 네 차례의 더블을 이뤘다.

2005년, 2006년, 2008년, 15년간 바이언에서 뛰며 15개의 우승컵을 들어올렸던 메멧 숄이 2006-07시즌을 마지막으로 축구화를 벗었지만, 곧 유스팀과 2군 감독으로 클럽에 돌아왔다. 2008년에는 세 번 FIFA 올해의 골키퍼로 선정되었던 올리버 칸이 은퇴했다. 2007-08시즌 프랑크 리베리루카 토니, 미로슬라프 클로제를 영입한 바이언은 포칼 결승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2-1로 꺾었고, 베르더 브레멘과 10포인트 차로 리가 우승을 했다. 그러나 유로파 리그에서는 4강에서 제니트에 패하고 만다. 굴욕

2008-09시즌 역사스만 위르겐 클린스만이 새 감독으로 온다. 그러나 쓰디쓴 패배들[6]을 겪은 후 리가 28라운드에서 샬케에 1-0으로 지자 구단은 클린스만을 해임하고 하인케스 감독을 다시 부른다. 하인케스가 남은 시즌을 마무리하고 떠나자 루이 반 할이 왔다. 반 할 감독은 부임 첫 시즌 아르옌 로벤을 영입하고, 바이언을 더블과 더불어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까지 올려놓았다. 2009년에는 또한 30년간 바이언에 헌신해온 울리 회네스가 프란츠 베켄바우어의 뒤를 이어 회장이 되었다. 베켄바우어는 클럽의 명예 회장이 되었다.

반 할 감독은 바이언에서의 두 번째 시즌이 되자 첫 해와는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주다가 좋지 못한 모습으로 팀을 떠난다. 안드리스 욘커가 감독 대행으로 잔여 시즌을 치른 후, 유프 하인케스가 세 번째로 바이언의 감독이 되었다. 하인케스의 바이언은 2011-12시즌을 트리플 러너 업으로 마쳤으나, 2012-13시즌 수많은 기록을 세우며 분데스리가에서 우승한 것에 이어 챔피언스 리그에서 팀의 다섯 번째 우승을 이루고 DFB-포칼에서도 유종의 미를 거두며 독일 클럽 최초의 트레블에 성공했다. 70년대 중반 유럽 무대를 3년 연속으로 정복하던 시절과도 비교할 만하다고 평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정도로 역대급인 시즌이었다.

2013-14시즌에는 FC 바르셀로나에서 수많은 우승컵을 거머쥔 펩 과르디올라가 바이언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13-14시즌에는 포칼과 리가를 우승하며 더블, 거기에 레알 마드리드에 역대급 굴욕을 당하긴 했지만 챔피언스 리그 4강이라는 성과를 거두었다. 14-15시즌도 리가 우승과 챔스 4강, 포칼 4강이라는, 객관적으로 괜찮은 성적을 거뒀지만 12-13시즌의 전력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아쉽다는 평이 많다.

시즌

11-12 시즌

유프 하인케스가 부임하여 트레블의 목전까지 이르렀으나... 분데스리가DFB 포칼에서는 BVB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에게 우승을 뺏기고, 챔피언스 리그알리안츠 아레나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첼시에게 패배하면서 트리플 러너업을 달성. 분명 굉장히 잘한 시즌이지만 팬 입장에선 굉장히 아쉬웠던 시즌.

12-13 시즌

바이에른의 역대급 시즌

독일 클럽 최초의 트레블 달성

결론부터 말하면, 이 시즌 바이에른은 시즌 패배가 3패에 불과한, 그야말로 유럽 최강의 깡패 자리에 우뚝 올라섰다.

챔스 16강까지의 이야기

젠카이노 바이에른!

전반기에는 마리오 고메스홀거 바트슈투버가 부상으로 나가고, 후반기는 시작하자마자 챔스 16강 아스날과의 경기에서 토니 크로스가 부상으로 시즌아웃이 돼버리면서 불안한 부분이 없잖아 있었다. 하지만 홀거의 자리였던 좌측 풀백에서는 다비드 알라바가 월클급으로 각성하면서 향후 10년간 바이에른의 왼쪽 풀백 걱정을 없애버렸고하지만 결국 2014년 여름 후안 베르나트가 영입되면서 알라바는 중원으로 올라가게 되는데.., 크로스의 자리던 공미는 우측에 있던 토마스 뮐러가 메꾸고, 그 빈 자리는 다시 벤치였던 아르연 로벤이 완벽하게 메꿨다. 고메스의 자리 또한 마리오 만주키치가 훌륭하게 커버하면서 그렇게 바이에른은 유럽의 깡패로 발돋움할 준비를 하게 됨.

챔피언스리그

챔스 8강 유벤투스전에서 홈과 원정 모두 안드레아 피를로를 만주키치가 말끔하게 지워버리며피를로가 만주키치를 지운 것이 아니다! 2:0으로 제압, 합계 4:0의 완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는 바이에른을 무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했으니..

챔스 4강 대진은 바이에른 뮌헨 대 FC 바르셀로나, 그리고 BVB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로 결정이 됐고, 국내의 많은 축알못들은 'UEFA가 챔스 결승을 엘 클라시코라는 대박 흥행 보증수표로 만들 생각이구나!'하는 김칫국을 마시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망의 1차전의 날이 밝았다. 하인케스 감독은 경기 전 인터뷰에서 "바르셀로나는 내 손바닥 보듯이 훤히 알고 있다"며 자신감을 드러냈다. 그런데 그것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토마스 뮐러가 선제골을 비롯, 두 골을 터트리는 등, 그 바르셀로나가 4:0으로 대패를 당한 것이다. 바르셀로나는 슈팅조차 제대로 때리지 못했고, 특히 컨디션이 안 좋았다고는 하나 축구신 리오넬 메시조차 유효슈팅 한 개가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수준차이가 드러났다. 물론 4골 차는 충분히 뒤집을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이는 바르셀로나의 팬들도 많았다.(사실 강팀의 팬이라면 이정도 자신감은 당연한 것이다.) 하지만 바르샤에게는 애석하게도 2차전에서도 헤라르드 피케분데스리가 로고를 닮은 자책골을 비롯, 3:0이라는 완승을 거둔 바이에른이었다. 4강 1차전에서 도르트문트가 레알을 4:1로 꺾은 것과 함께 한국의 해축팬덤에 일대 파란을 불러온 사건이었다.

합계 7:0이라는 역대급 놀림감 스코어 차이로 결승에 진출한 바이에른의 상대가 합계 4:3으로 레알을 꺾은 도르트문트로 정해지면서, 이 시즌 챔스 결승은 엘 클라시코가 아닌 데어 클라시커[7]로 열리게 되었다.

한편 도르트문트의 4강 1차전을 하루 앞두고 마리오 괴체의 바이에른 이적 사실이 유출되어 엄청난 논란을 일으켰으며 결승전을 '괴체 더비'로 만들었다.[8][9] 한편 정작 장본인 괴체는 부상으로 결장.

그리고 다시 한번 대망의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의 날이 되었고, 영국 축구의 심장 웸블리는 빨갛고 노란 옷을 입은 독일인들로 가득 찼다. 전반에는 도르트문트가 엄청난 기세로 바이에른을 몰아붙였다. 상대적으로 우월한 전력의 바이에른을 일찍 기선제압하겠다는 의도로, 성공하면 빅이어지만 실패하면 2위의 서러움이 기다리고 있는 도박성의 전략이었다. 그리고 초반부터 도르트문트의 슈팅이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를 향해 빗발처럼 쏟아졌다. 하지만 노이어는 이듬해 발롱도르 3위를 차지할 골키퍼였으니.. 전반전에만 유효슈팅 5개를 기록한 도르트문트였지만 전부 노이어에게 막히며 도르트문트의 도박성 전략은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한편 바이에른도 빠른 역습을 선보이며 유효슈팅 3개를 비롯, 슈팅 총 5개를 시도했으나 로만 바이덴펠러의 무쌍난무에 똑같이 막혔다.[10]

후반전으로 들어서도 양 팀은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승부를 펼쳤다. 하지만 후반 14분, 프랑크 리베리의 스루패스를 받은 아르연 로벤이 골키퍼를 끌고 나오며 노마크 상태에 있던 마리오 만주키치에게 패스를 연결했고, 만주키치는 이를 깔끔하게 골로 연결시켰다. 그리고 경기장에 울려퍼지는 바이에른의 응원가와 바이에른의 장내 아나운서의 안내, 그리고 여기에 화답하는 바이에른 팬들의 목소리가 영국 축구의 심장에 크게 울려퍼졌다. 하지만 리드도 잠시, 66분 단테 본핌보루시아 묀헨글라드바흐 시절 동료였던 마르코 로이스급소를 걷어차며 페널티 킥을 내줬다. 단테는 이미 경고를 받은 상황이어서 퇴장이 가능한 상황이었는데, 심판은 이를 그냥 넘어갔다. 하여튼 도르트문트의 일카이 귄도간이 침착하게 페널티 킥을 성공시키며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참고로 이때 화면에 잡힌 괴체는 싱글벙글. 그리고 71분 토마스 뮐러로벤에게 골과 다름없는 택배 크로스를 연결했으나 순식간에 뒤따라온 네벤 수보티치가 골 라인 바로 앞에서 이를 걷어내며 골과 다름없는 선방을 보여줬다. 이렇게 양팀의 공방이 계속되며 경기는 연장전으로 접어들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89분, 제롬 보아텡이 리베리에게 롱패스를 연결, 다시 리베리가 쇄도하던 로벤에게 힐패스를 연결했다. 로벤이 동작 하나로 수비 네 명을 무력화시키며 찬 공은 느릿느릿하게 골문 구석으로 굴러갔고, 역동작에 걸린 바이덴펠러는 팀의 치명적인 실점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탐욕왕' 로벤이 바이에른의 영웅으로 등극하는 순간이었다. 연장을 준비하던 도르트문트는 다급해졌지만 시간이 부족했다. 양 골키퍼의 무쌍난무와 위협적인 역습, 흥미로운 스토리로 장식되었던 희대의 명경기는 그렇게 끝났고, 빅이어는 바이에른의 차지가 됐다. 바로 1년 전 자기들의 홈 구장에서 승부차기 끝에 영국의 클럽이 빅이어를 가져가는 모습을 속절없이 지켜봐야만 했던 바이에른의 선수들이, 특히 로벤과 승부차기를 실축했던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영국 축구의 심장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환호하는 모습에 팬들 또한 감동했다.

분데스리가

이 시즌 바이에른은 전반기 바이어 04 레버쿠젠에 한 골 차로 패배한 것을 제외하고는 리가에서 단 한 경기도 지지 않았다. 참고로 이 경기에서는 골키퍼 마누엘 노이어가 상대 진영에서 수비수들을 드리블로 제치는 어마어마한 모습을 보여주며 연결한 패스에 이은 크로스가 클라우디오 피사로의 헤딩까지 연결됐으나, 골대를 맞고 튕겨나와버렸다.

그걸 빼고는 그야말로 '외계에서 온 팀'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줬다. 오죽하면 분데스리가에서 바이에른 혼자 야구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겠는가. 아래는 '흔한 12/13 바이에른의 스코어'.

파일:Bayern score.jpg

함부르크 SV와의 경기에서는 클라우디오 피사로가 4골 2도움2타석 만루홈런, 2루타을 기록하며 9:2라는 역대급 스코어로 승리를 거뒀다. 그 외에도 6득점 경기가 심심하면 나왔다. 운좋게도 이 시즌부터 바이에른 경기를 챙겨보기 시작한 한 바이에른 팬은 축구가 원래 이렇게 쉬운 스포츠였나하고 자기의 눈을 의심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카더라.

한편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데어 클라시커로 결정된 후에 리가에서도 32라운드, 데어 클라시커가 열렸었는데일정 짠 사람 개이득, 이날 경기에서는 하피냐가 퇴장당하고 그 과정에서 바이에른의 마티아스 자머 단장이 도르트문트의 위르겐 클롭 감독과 설전을 펼치는 등 엄청나게 뜨거운 경기 끝에 1:1 무승부라는 결과가 나오며 전 세계의 축구팬의 기대감을 한껏 높였다. 빨리 챔스 결승전 보여주세요 현기증난단 말이에요.

물론 리가 우승은 28라운드에 이미 바이에른의 차지가 된 상황이었다. 바이에른을 버틸 수가 없다!

13-14 시즌

직전 시즌 바이에른의 트레블 달성으로 이 시즌의 관심사는 '과연 바이에른이 2연속 트레블, 혹은 챔스 우승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인가'로 모여졌다. 이는 새 감독으로 부임한 펩 과르디올라에게도 상당한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직전 시즌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며 유럽을 정복한 클럽에, 마리오 괴체라는 독일 최고의 유망주, 바르샤 출신의 티아고 알칸타라라는 자원까지 영입했으니 이런 기대도 일견 당연한 것이었다.

실제로 바이에른은 리가, 포칼, 챔스 모두에서 우월한 전력을 과시하며 승승장구하였다. 챔스 최다 연승 기록(10연승), 분데스리가 최장 기간 무패 행진 (52경기), 분데스리가 최초로 3월(27라운드)에 우승을 확정짓는 등 그야말로 기록 제조기가 무엇인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챔스 아스날 전이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전에서 삐걱거리는 모습이 불안요소였고, 이는 4월 5일 FC 아우크스부르크(!)에게 패배하면서 본격적으로 현실화되었다. 11-12 시즌의 콩레블을 만회하기 위한 전의로 불타던 지난 시즌과 달리, 이 시즌에는 선수들이 클럽 월드컵 우승을 포함하여 이룰 거라곤 모조리 다 이뤄버린 상황이었기 때문에 동기부여가 부족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펩 감독 또한 지나치게 자기식 축구만을 강조한 나머지, 바로 전 시즌 바이에른이 바르샤의 티키타카를 격파했던대로 자기들이 경기를 말아먹기 시작했다.

결국 챔스 4강 레알 마드리드와의 2차전 날에 바이에른 팬들로서는 가장 상상하기 싫은 일이 터지고야 말았다. 바이에른 홈에서 펼쳐진 경기에서, 무의미한 공돌리기 끝에 레알의 역습에 0:4으로 개망신을 당한 것이다. 1차전 스코어 0:1과 합하여 0:5라는 그야말로 굴욕 중의 굴욕. 이때의 충격은 가히 전 시즌 바르샤의 7:0과도 맞먹는다고 할 수 있다. 레알 팬들은 아직도 바이에른 얘기만 나오면 이 말을 꺼낸다. 바이에른 팬들은 속이 탈 뿐.. 심지어 레알은 독일 축구 팬덤 내에서 대표적인 '독일에 호구잡힌 팀'에 속하는 팀으로 간주되었기에 충격은 더 컸다. 급기야 한국 팬덤에선 첫 시즌부터 펩 경질론까지 대두되기 시작했으나, 그래도 신중론이 대세였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독일에서 이를 알 리도 없었다(물론 독일에서도 여론은 비슷했다.).

그래도 시즌 막바지, 특히 DFB 포칼 결승에서는 3-4-3을 기반으로 하여, 기존의 전술과는 다른 전술을 선보이며 BVB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연장 끝에 2:0으로 제압하고 더블에 성공하였다는 점이 위안거리였다.

다만 이 경기에선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마리오 만주키치가 감독과의 불화로 결장했다는 보도가 나왔고, 이는 만주키치가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하는 것으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바이에른의 넘버 9 자리도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에게 빼앗기고, 펩이 멀쩡히 자기 팀 소속으로 뛰고 있는 자신에게 '다음 클럽에서 잘하길 빈다'고 말해서 만주키치가 빡쳤다고 카더라.수비가담도 열심히 하는 등, 팀에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던 만주키치였기에 팬들의 아쉬움은 더욱 컸다. 그래도 다음 시즌은 명실공히 세계 최고수준의 스트라이커인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가 자유계약으로 바이에른에 입단할 것임이 1월에 이미 공식적으로 발표되었기에 팀 전력에 대한 걱정은 거의 없었다.

14-15 시즌

15-16 시즌

스쿼드

14-15 시즌

틀:숨기기

15-16 시즌

틀:축구단 선수 명단/표

역대 감독

이름 재임기간
즐라츠코 차이코프스키 (Zlatko Cajkovski) 1965. 07. 01 - 1968. 06. 30
브랑코 제베치 (Branko Zebec) 1968. 07. 01 - 1970. 03. 13
우도 라텍 (Udo Lattek) 1970. 03. 14 - 1975. 01. 02
데트마르 크라머 (Dettmar Cramer) 1975. 01. 16 - 1977. 11. 30
지울라 로란트 (Gyula Lorant) 1977. 12. 02 - 1979. 02. 28
팔 세르나이 (Pal Csernai) 1979. 03. 01 - 1983. 05. 16
라인하르트 자프티히 (Reinhard Saftig) 1983. 05. 17 - 1983. 06. 30
우도 라텍 (Udo Lattek) 1983. 07. 01 - 1987. 06. 30
유프 하인케스 (Jupp Heynckes) 1987. 07. 01 - 1991. 10. 08
쇠렌 러비 (Søren Lerby) 1991. 10. 09 - 1992. 03. 10
에리히 리벡 (Erich Ribbeck) 1992. 03. 11 - 1993. 12. 27
프란츠 베켄바우어 (Franz Beckenbauer) 1993. 12. 28 - 1994. 06. 30
지오바니 트라파토니 (Giovanni Trapattoni) 1994. 07. 01 - 1995. 06. 30
오토 레하겔 (Otto Rehhagel) 1995. 07. 01 - 1996. 04. 27
프란츠 베켄바우어 (Franz Beckenbauer) 1996. 04. 29 - 1996. 06. 30
지오바니 트라파토니 (Giovanni Trapattoni) 1996. 07. 01 - 1998. 06. 30
오토마르 히츠펠트 (Ottmar Hitzfeld) 1998. 07. 01 - 2004. 06. 30
펠릭스 마가트 (Felix Magath) 2004. 07. 01 - 2007. 01. 31
오토마르 히츠펠트 (Ottmar Hitzfeld) 2007. 02. 01 - 2008. 06. 30
위르겐 클린스만 (Jürgen Klinsmann) 2008. 07. 01 - 2009. 04. 27
유프 하인케스 (Jupp Heynckes) 2009. 04. 28 - 2009. 06. 30
루이 반 할 (Louis van Gaal) 2009. 07. 01 - 2011. 04. 09
안드리스 욘커 (Andries Jonker) 2011. 04. 10 - 2011. 06. 30
유프 하인케스 (Jupp Heynckes) 2011. 07. 01 - 2013. 06. 30
펩 과르디올라 (Pep Guardiola) 2013. 07. 01 -

[11][12]

역대 주장

이름 기간
베르너 올크 (Werner Olk) (DF) 1965 - 1970
프란츠 베켄바우어 (Franz Beckenbauer) (DF) 1970 - 1977
제프 마이어 (Sepp Maier) (GK) 1977 - 1979
게르트 뮐러 (Gerd Müller) (FW) 1979
게오르크 슈바르첸벡 (Georg Schwarzenbeck) (DF) 1979 - 1980
파울 브라이트너 (Paul Breitner) (MF) 1980 - 1983
칼-하인츠 루메니게 (Karl-Heinz Rummenigge) (FW) 1983 - 1984
클라우스 아우겐탈러 (Klaus Augenthaler) (DF) 1984 - 1991
라이몬트 아우만 (Raimond Aumann) (GK) 1991 - 1994
로타 마테우스 (Lothar Matthäus) (DF) 1994 - 1996
토마스 헬머 (Thomas Helmer) (DF) 1997 - 1999
슈테판 에펜베르크 (Stefan Effenberg) (MF) 1999 - 2002
올리버 칸 (Oliver Kahn) (GK) 2002 - 2008
마크 반 봄멜 (Mark van Bommel) (MF) 2008 - 2011
필립 람 Philipp Lahm (DF) 2011 -

[11][12]

각종 기록

  • 이하의 기록은 대부분 바이언 usw에서 정리한 것을 가져온 것이다.

우승 기록

  • 25 독일/분데스리가 우승

1932(분데스리가 출범 이전), 1969, 1972, 1973, 1974, 1980, 1981, 1985, 1986, 1987, 1989, 1990, 1994, 1997, 1999, 2000, 2001, 2003, 2005, 2006, 2008, 2010, 2013, 2014, 2015

  • 17 DFB-포칼 우승

1957, 1966, 1967, 1969, 1971, 1982, 1984, 1986, 1998, 2000, 2003, 2005, 2006, 2008, 2010, 2013, 2014

  • 11 수퍼컵 & 리가포칼 우승

1983, 1987, 1990, 1997, 1998, 1999, 2000, 2004, 2007, 2010, 2012

  • 5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안 컵 우승

1974, 1975, 1976, 2001, 2013

  • 3 인터컨티넨탈 컵/FIFA 클럽월드컵 우승

1976, 2001, 2013

  • 1 UEFA 컵/유로파 리그 우승

1996

  • 1 UEFA 컵 위너스 컵 우승

1967

분데스리가 기록

바이에른의 역대 분데스리가 성적(~12/13)
  • 분데스리가 최다 우승 : 24 회
  • 분데스리가 출범 이전을 포함해 독일 최다 우승 : 25 회
  • DFB-포칼 최다 우승 : 17회
  • 리가포칼 최다 우승 : 6회
  • 독일 클럽 최초이자 유일하게 트레블을 한 클럽 : 2012-13시즌
  • 가장 많이 더블(리가&포칼 동시 우승)을 한 클럽 : 10회
  • 2시즌 연속으로 더블을 한 유일한 클럽 (2회 / 2004-06시즌, 2012-14시즌)
  • 남자팀과 여자팀 모두 분데스리가와 포칼에서 우승한 유일한 클럽 (1975-76, 2014-15 여자팀 분데스리가 우승, 2011-12 포칼 우승)
  •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가장 빨리 우승한 클럽 : 3월 25일, 27라운드
  •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많이 승리한 클럽 : 960 경기
  • 매치데이마다 가장 많이 1위를 차지한 클럽 : 626 회
  • 한 시즌 매치데이 34번 모두 1위를 차지한 클럽 (2012-13시즌)
  • 분데스리가 첫 시즌에 가장 많은 승리를 거둔 클럽 : 20 승 (1965-66시즌)
  •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많이 연승한 클럽 : 15 연승 (2005년 3월 19일 - 9월 20일)
  • 분데스리가 시즌 시작부터 가장 많이 연승을 거둔 클럽 : 8 연승 (2012-13시즌)
  • 분데스리가 출점범이후 가장 많은 승점을 획득한 클럽 : 3262 포인트
  • 한 시즌에 가장 많은 승점을 획득한 클럽 : 91 포인트 (34경기)
  • 경기당 평균 획득 승점이 가장 많은 클럽 : 1.93 포인트
  • 승점 3포인트제 룰로 바뀐 후 가장 적은 승점으로 우승한 클럽 : 63 포인트 (2000-01시즌)
  • 2위와 가장 큰 승점차로 우승한 클럽 : 25 포인트 (2012-13시즌)
  • 한 시즌에 가장 많이 승리한 클럽 : 29 경기 (2012-13시즌)
  • 한 시즌에 가장 적게 패배한 클럽 : 1 경기 (1986-87, 2012-13시즌)
  • 한 시즌에 원정 경기에서 가장 많이 승리한 클럽 : 15승 (2012-13시즌)
  • 한 시즌에 원정 경기에서 가장 오래 연승한 클럽 : 9연승 (2012-13시즌)
  • 한 시즌에 원정 경기에서 가장 적게 패한 클럽 : 0패 (1986-87, 2012-13시즌)
  • 한 시즌에 원정 경기에서 가장 적게 실점한 클럽 : 7실점 (2012-13시즌)

시즌 개막 후 원정 경기 첫 5경기에서 패하지 않은 클럽 (2012-13시즌)

  • 한 시즌에 가장 많은 골을 넣은 클럽 : 101 골 (1971-72시즌)
  • 한 시즌 모든 경기에서 1골 이상 넣은 클럽 (2012-13시즌)
  • 36경기 연속으로 매경기 1골 이상 넣은 클럽 (2011-12시즌 32라운드부터)
  • 한 시즌에 가장 적게 실점한 클럽 : 18 실점 (2012-13시즌)
  • 한 시즌에 가장 많은 무실점 경기를 기록한 클럽 : 21경기 (2012-13시즌)
  • 가장 훌륭한 시즌 시작을 기록한 클럽 : 8연승 (2012-13시즌)
  • 가장 훌륭한 후반기 시작을 기록한 클럽 : 14연승 (2012-13시즌)
  • 가장 이른 헤업스트마이스터 : 14라운드 (2012-13시즌)
  • 전반기 최다 골득실 : +37 (2012-13시즌)
  • 전반기 최소 실점 : 7실점 (2012-13시즌)
  • 전반기 원정 최소 실점 : 1실점 (2012-13시즌)
  • 가장 훌륭한 후반기 성적을 거둔 클럽 : 승점 49 포인트 (2012-13시즌)
  • 한 시즌에 가장 좋은 골득실을 기록한 클럽 : +80 (2012-13시즌)
  • 7라운드에서 골득실 +20 (21:1) : 2011-12시즌
  • 8라운드에서 골득실 +24 (26:2) : 2012-13시즌
  • 10라운드에서 골득실 +26 (30:4) : 2012-13시즌
  • 11라운드에서 골득실 +28 (32:4) : 2012-13시즌

유럽 기록

  • 챔피언스 리그 최단시간 골 : 로이 마카이, 10초 v. 레알 마드리드 (2007년 3월 7일)
  •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안 컵에서 마지막으로 3시즌 연속 우승한 클럽 (1973-74, 74-75, 75-76)
  •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 경기에서 가장 많은 점수차로 승리한 클럽 : 7-0 v. FC 바젤 (2011년 3월 13일)
  • 챔피언스 리그 토너먼트에서 1, 2차전 합계 가장 많은 점수로 이긴 클럽 : 12-1 v. 스포르팅 CP (2009년 2월 24일 5-0 / 2009년 3월 11일 7-1)
  •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에서 1, 2차전 합계 가장 많은 점수로 이긴 클럽 : 7-0 v. FC 바르셀로나 (2013년 4월 23일 4-0 / 2013년 5월 1일 3-0)


개인 기록

  • 분데스리가 한 시즌에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 : 게르트 뮐러 (40골. 1971-72시즌)
  •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 : 게르트 뮐러 (365골)
  • 분데스리가 득점왕을 가장 많이 차지한 선수 : 게르트 뮐러 (7회)
  •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많이 연속 선발 출전한 선수 : 제프 마이어 (422경기. 1966 - 1977)

클럽 기록

  • 가장 좋은 시즌 시작 : 공식경기 9경기 연승 (1984-85, 2012-13시즌)
  • 분데스리가 경기에 가장 많이 출전한 선수 : 제프 마이어 (473경기)
  • 분데스리가에서 가장 많은 골을 넣은 선수 : 게르트 뮐러 (365골)
  •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안 컵에서 가장 크게 이긴 경기 : 10-0 v. Anorthosis Famagusta FC (1983년 9월 28일)
  •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안 컵에서 가장 크게 이긴 원정경기 : 5-0 v. 스포르팅 CP (2009년 2월 24일)
  •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안 컵에서 가장 크게 패배한 홈경기 : 0-2 v. FC Girondins de Bordeaux (2009년 11월 3일)
  •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안 컵에서 가장 크게 패배한 정경기 : 0-2 v. AC 밀란 (2007년 4월 11일)
  •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안 컵에서 가장 크게 패배한 원정경기 : 6-2 v. FC 코펜하겐 (1991년 10월 22일)
  •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안 컵에서 가장 크게 패배한 원정경기 : 5-1 v. 아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980년 4월 22일)
  • 챔피언스 리그/유러피안 컵에서 가장 크게 패배한 원정경기 : 4-0 v. FC 바르셀로나 (2009년 4월 8일)
  • 바이에른 뮌헨 최연소 데뷔 : 다비드 알라바 (17세 232일, DFB-포칼 對 그로이터 퓌어트)
  • 바이에른 뮌헨 최연소 분데스리가 데뷔 : 피에르-에밀 호이비에르 (17세 251일, 對 뉘른베르크)
  • 바이에른 뮌헨 최연소 챔피언스 리그 선발 출전 : 다비드 알라바 (17세 258일, 對 피오렌티나)
  • 분데스리가 홈경기 최다 관중 : 75,000명 (알리안츠 아레나)
  • 국제대회 홈경기 최다 관중 : 70,000명 (알리안츠 아레나)

최다 출장 및 최다 득점

출장
1 독일 제프 마이어(Sepp Maier) 1962–1979 699
2 독일 올리버 칸(Oliver Kahn) 1994–2008 632
3 독일 게르트 뮐러(Gerd Müller) 1964–1979 605
4 독일 프란츠 베켄바우어(Franz Beckenbauer) 1964–1977 582
5 독일 게오르크 슈바르첸벡(Georg Schwarzenbeck) 1966–1981 554
6 독일 클라우스 아우겐탈러(Klaus Augenthaler) 1976–1991 545
7 독일 베른트 뒤른베르거(Bernd Dürnberger) 1972–1985 505
8 독일 바스티안 슈바인슈타이거(Bastian Schweinsteiger) 2002–2015 502
9 독일 메멧 숄(Mehmet Scholl) 1992–2007 469
10 독일 프란츠 로트(Franz Roth) 1966–1978 440
11 독일 필립 람(Philipp Lahm) 2002–2003
2005–
434
12 독일 칼-하인츠 루메니게(Karl-Heinz Rummenigge) 1974–1984 422
13 독일 로타어 마테우스(Lothar Matthäus) 1984–1988
1992–2000
410
14 독일 한스 플뤼글러(Hans Pflügler) 1981–1995 371
15 틀:나라자료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하산 살리하미지치(Hasan Salihamidžić) 1998–2007 365
굵은 글씨는 아직 바이에른에서 뛰고 있는 선수
득점
1 독일 게르트 뮐러(Gerd Müller) 1964–1979 564
2 독일 칼-하인츠 루메니게(Karl-Heinz Rummenigge) 1974–1984 217
3 독일 롤란트 볼파르트(Roland Wohlfarth) 1984–1993 155
4 독일 디터 회네스(Dieter Hoeneß) 1979–1987 145
5 브라질 지오바니 에우베르(Giovane Élber) 1997–2003 138
6 틀:나라자료 페루 클라우디오 피사로(Claudio Pizarro) 2001–2007
2012–
125
7 독일| 토마스 뮐러(Thomas Müller) 2008– 120
8 독일 메멧 숄(Mehmet Scholl) 1992–2007 117
9 독일 마리오 고메스(Mario Gómez) 2009–2013 113
10 독일 울리 회네스(Uli Hoeneß) 1970–1978 111
11 독일 파울 브라이트너(Paul Breitner) 1970–1974
1978–1983
110
12 틀:나라자료 네덜란드 아르옌 로벤(Arjen Robben) 2009– 108
13 프랑스 프랑크 리베리(Franck Ribéry) 2007– 104
14 틀:나라자료 네덜란드 로이 마카이(Roy Makaay) 2003–2007 103
15 독일 로타어 마테우스(Lothar Matthäus) 1984–1988
1992–2000
99
굵은 글씨는 아직 바이에른에서 뛰고 있는 선수
  • 이 표는 독일어 위키피디아의 "FC Bayern München" 143971001판에서 분기한 것이다.

팬사이트

국내 바이에른 뮌헨 팬사이트는 크게 두 곳이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로그인을 해야 게시글을 열람할 수 있다. 바이언은 바이에른(Bayern)을 현지식 발음에 좀 더 가깝게 쓴 것이고, usw는 독일어로 '기타 등등(und so weiter)'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굳이 바이에른 뮌헨만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이야기가 오갈 수 있는 곳이 되길 바라는 뜻이 담긴 이름이라고 한다. 운영자 별에 따르면 "바이언, 그 외 기타등등 - 이라는 뜻으로 만든 이름이에요. 바이언을 중심으로 하면서 다른 이야기도 함께 하자는 의미입니다>_<"[13]헐 귀요미 '(바이언) 당사'라고도 부른다. 비교적 차분한 분위기.
네이버 카페로, 당사에 비해 활동 회원이 많고 그만큼 북적북적하다. 참고로 바레나는 "바이언 서포터스 아레나"를 줄인말이다. 네이버 카페인만큼 글 리젠도 많이 되고 경기영상 공유나 중계방 만들기도 활발한 편. 다만 당사에 비해서는 조금 더 감정적인 분위기가 없잖아 있다. 한편 도르트문트 팬카페 Echte Liebe와도 의외로 교류가 있는 편. 그 외에도 파울라너 맥주와 제휴를 맺는 등 위상(?)이 꽤 높다.

그 외에도 분데스리가 팬 사이트인 분데스매니아 역시 바이에른의 지분이 높은 편이다. 당사가 활성화되면서 지분이 꽤 낮아지긴 했지만 당사가 폐쇄되고 마땅한 근거지가 없었던 2010년대 초반에 유입된 팬들 때문에 여전히 높은 지분을 유지하는 편이다. 또한 국내 분데스 팬들 특성 상 독일 국대, 분데스리가 자체를 팬질하는 경향이 강해 라이벌팀 팬들 간이라 해도 거의 갈등이나 충돌이 없으므로[14] 자기 팀 당사와 이 곳을 함께 들락거리는 팬들이 많다.

출처

  1. 1.0 1.1 1.2 http://fcbayern.kr/xe/info
  2. http://fcbayern.kr/xe/song
  3. http://www.goal.com/en-us/news/174/uefa-champions-league/2010/04/08/1869197/cl-comment-van-gaals-bayern-give-new-meaning-to-fc-hollywood
  4. xfegeh0.jpg
  5. 마이어, 베켄바우어, 슈바르첸벡, 브라이트너, 회네스, 뮐러
  6. 4-2 v. 레버쿠젠. 포칼 4강 / 5-1 v. 볼프스부르크 / 4-0 v. 바르셀로나. 챔피언스 리그 4강
  7. Der Klassiker, 영어의 The Classic, 스페인어의 El Clasico에 해당. 바이에른 뮌헨과 BVB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경기를 이르는 말로, 사실 신조어다. 도르트문트와 바이에른의 경쟁구도는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 시즌 챔스 결승, 마리오 괴체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이적 등 순식간에 다양한 스토리가 생겨나며 독일 최고의 흥행 매치 중 하나로 자리매김했다. 참고로 독일 최고의 더비는 샬케 04과 도르트문트의 레비어 더비로,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라이벌 매치다.
  8. 최초 보도가 찌라시로 유명한 빌트에서 나왔기 때문에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비웃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아무리 찌라시를 남발하는 빌트라지만 특종만큼은 확실한 소스를 가지고 터트려왔기 때문에 결코 웃어넘길 이야기는 아니었고, 오랫동안 분데스리가를 봐왔던 극소수의 인원들만이 이 뉴스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결과는 뭐.. 아이러니한 건 이 사건으로 인해 국내 축구팬덤에서 빌트의 위상이 그 유명한 키커와 대등한 수준으로 급격하게 올라갔다는 것.속지마 찌라시야
  9. 또 다른 논쟁으로 클럽의 레전드이자 오랫동안 팀의 수뇌였던 회장 울리 회네스의 탈세사건을 덮기 위한 공작이라는 음모론이 있었다. 시기적으로 굉장히 공교로워 타 클럽의 관계자들이 비판하기도 했으며 실제로 메가딜로 인해 탈세스캔들이 쏙 들어가버렸다. 그러나 확실한 증거가 없었고 최초의 출처가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담당기자였다는 썰이 터져나오는 등 온갖 루머와 함께 미스테리로 남았다.
  10. 스탯 출처
  11. 11.0 11.1 분데스리가 창설 연도인 1965년 이후만 기재
  12. 12.0 12.1 자료 출처:바이언 usw 클럽 역사
  13. 바이언usw 자유게시판 글(회원만 열람 가능)
  14. 분데스매니아의 탄생 시기가 절묘하게 독일 국대와 분데스리가의 암흑기와 맞아떨어져서 국내에서 영 인기가 없던 리그를 팬질해왔다는 공통적인 특성 때문인지 더비팬 간에도 약간의 라이벌성이 드러나는 발언 이상은 잘 하지 않는 편이다. 현지에선 공공의 적 취급인 바이에른에 대한 취급도 타팀과 다를 바가 없다. 사실 독일 현지에서도 분데스리가 자체가 EPL이나 Serie A처럼 과격팬이나 훌리건이 많은 팀이 거의 없다. 사실 앞의 두 리그가 단순 스포츠 문제가 아니라 정치 경제적인 이유가 얽혀 과격팬이 많은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얌전하게 보이는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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