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島 橘花 / 나카지마 킷카, J9Y 킷카 / J9N-1/J9Y Kikka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말, 일본은 B-29의 전략폭격에 의해 막대한 피해를 받았지만 당시 일본군 전투기의 성능이 워낙 떨어지는 관계로 B-29의 요격은커녕 10,500m에 달하는 B-29의 작전고도에 도달해 제대로 된 공격행동을 펼치기도 어려워 그냥 B-29가 때리는 대로 얻어맞고 있었다.[1]
연료는 해상수송선이 미 해군에 의해 거의 완벽에 가깝게 차단되어 늘 부족에 시달렸고 윤활유도 이에 영향을 받아 품질이 악화되어갔다.[2]엔진의 신뢰성은 날이 갈수록 급격히 늘어가는 격전과 품질이 악화되어가는 부품들, 그리고 이것이 겹쳐지면서 제대로 정비하기 힘들어짐에 따라, 악화되었고, 차라리 살고 싶으면 신형보다 구형 비행기를 타라는 말이 전해질 정도였으며, 전투비행대가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하야테나 시덴 카이, 라이덴 등의 신형기들은 산업력 저하 등으로 배급받기 어려웠다.
이런 까닭에 일본은 독일에서 넘어온 몇 가지 자료[3]를 이용하여 전황을 타개하기 위한 각종 무기 개발 등을 하는데, 이 중 하나가 바로 J9Y 킷카이다.[4]
개발과정
일본도 일찍부터 제트엔진을 연구하였고, Ne-10, Ne-10改, Ne-12, Ne-12B 등의 제트엔진[5]을 개발하며 실험에 실험을 거듭하고 있었다. 하지만 Ne-12B(추력 320kgf)까지 와서도 충분한 추력을 얻지 못한 일본은 결국 Me-262의 BMW 003A 엔진(추력 800kgf)과 유모 004B엔진(추력 900kgf)을 독일에 요청하기로 결정하고 1943년 12월 16일 일본해군 잠수함 I-29에 각종 원자재를 실어[6] 프랑스 로리엥에 파견한다.
I-29는 무사히 연합군을 따돌리고 로리엔에 도착하여 화물을 하역한 뒤 003A 엔진의 실물 샘플과 많은 설계자료들을 선적[7]하고 일본으로 출항한다. 그러나 I-29는 싱가폴에 기항했다 출항 직후 기뢰에 걸려 침몰[8], 엔진 샘플과 설계자료를 포함한 기타 화물은 그대로 바다에 가라앉았으며 싱가폴에서 따로 하역된 003A 엔진의 단면도와 004B 엔진 실물 보고서 등 극히 일부의 기술자료만이 남아 항공기편으로 일본에 전달되었다.
닭 쫓던 개꼴이 난 일본은 BMW 003A의 엔진 기술자료를 참고로 하여 Ne-12B 이후의 신형 제트엔진 개발을 계속 진행하되 일단 Ne-12B를 탑재한 제트전투기를 개발하여 띄워보기로 결정되고, 이 전투기는 날이 갈수록 막장이 되어가는 일본을 구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개발이 되어야 하는 무기라 하여 황국 2호병기로 지정된다.[9] 그렇게 하여 개발된 시험기가 J9Y 킷카이다.
킷카의 생김새는 Me-262와 많이 닮아 있으나 실제로는 주 엔진으로 선정된 Ne-12B가 추력이 부족한 관계로 전투기 자체도 소형경량화할 것이 요구된 관계로 Me-262보다 작고 가벼우며 주익형상도 테이퍼익을 채용했다. 워낙 미군이 일본군 활주로만 보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었기 때문에 동굴진지 같은 데 짱박을 때 편하도록 육상전투기임에도 불구하고 주익을 접을 수 있는 등[10] Me-262와 다른 독자적인 설계의 전투기이다. 개발기간도 단축하고 비용도 줄일 겸 기존 전투기와의 부품공유도 추진되어 노즈기어는 요코스카 P1Y 깅가의 테일기어를, 메인기어는 제로센의 것을 그대로 가져다 쓰게 된다.
기체의 제작은 나카지마 공장에서 진행되었지만 당연히 전투기 생산 공장을 돌아가게 놔둘리 없는 B-29가 나카지마 공장을 폭격으로 날려버린다. 킷카가 들어가 있던 격납고도 폭탄을 얻어맞아 파괴되었지만 킷카는 손상되지 않았고, 이후 제작은 시골 농가로 분산 이전되어 진행되었다. 킷카 시제기 제작도중인 45년 4월 BMW 003A를 참고하여 Ne-12B보다 좀 더 추력이 올라간 Ne-20[11]엔진이 완성, 기존의 Ne-12B 대신 이 엔진을 사용하기로 결정이 내려진다. 킷카 시제기의 조립은 45년 6월 완료되고 테스트 비행을 위해 기사라즈 기지로 이송된다. 기사라즈 기지에서 별도로 옮겨진 Ne-20엔진을 탑재 후 최종 테스트를 거쳐 시험비행은 8월로 결정난다.
비행시험
45년 8월 7일, 킷카는 대용연료를 주유 후 이륙하여 12분간의 첫 비행에 성공한다. 이때의 킷카는 이륙중량을 줄이기 위해 노즈기어 커버와 라디오, 라디오 안테나를 뗀 상태였고 최초의 비행 테스트이므로 랜딩 기어는 내린 상태였다. 여하간 첫 비행에 성공한 킷카는 다음으로 연료를 만재한 완비중량으로의 비행시험을 실시하게 된다. 완비중량의 킷카는 약 3.5톤으로 Ne-20엔진으로는 킷카가 이륙하기 힘들어 이륙시에는 보조로켓(JATO)을 달도록 되어 있었다.
10일로 예정된 두 번째 비행테스트는 공습으로 연기, 11일에는 우천취소, 그리고 12일 킷카의 완비중량 이륙시험이 실시되었다. 엔진 최대출력에 JATO를 점화하여 이륙 활주를 시작했지만 JATO의 연소가 종료되며 가속도가 떨어지자 테스트 파일럿[12]은 이것을 엔진 트러블에 의한 출력저하로 오판, 이륙을 단념하고 브레이크를 걸었다. 그러나 킷카에 쓰인 제로센의 메인기어와 거기에 부착된 브레이크 시스템은 제로센보다 몇 배는 빠른 킷카를 제대로 멈춰 세울 수 없었고 킷카는 그대로 활주로를 오버런하며 전복, 기체가 파손된다.
킷카를 수리하여 다시 테스트를 재개하기로 했지만 아시다시피 3일 후인 45년 8월 15일 일본은 무조건 항복. 그때까지 생산된 시제기 두 대는 미군에게 접수되지만 벌써 YP-80 슈팅스타를 띄우고 있었으며 훨씬 뛰어난 독일의 Me-262도 테스트해본 미군은 킷카에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미군은 킷카를 메릴랜드 해군공창으로 옮겨 조사 후 해체 폐기하려 하였으나 그중 한 대가 스미소니언 박물관으로 옮겨져 복원 전시되는 것으로 킷카의 역할은 끝났다.
참고로, 육군에서 Me-262의 설계를 베이스로 개발하던 제트전투기인 Ki-201과 킷카의 개발 정황을 볼 때, 킷카는 Ki-201의 기술실증기적 성격도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당시 이 병기를 '특공병기'로 부른 것과 이름에 花자가 들어간 것, 오카의 뒤를 이어 황국 2호 병기로 지정된 것을 보면 아마 이 놈도 자살병기로 사용하려 했던 것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하나, 킷카는 '특별공격기'가 아닌 '특수공격기'이므로, 비행기의 육탄 공격을 목적으로 하는 가미카제와는 성격이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
출처
- ↑ 커티스 르 메이가 착임한 이후 고고도 정밀폭격에서 저고도 지역폭격으로 폭격작전이 전환됨에 따라 그나마 B-29에 대한 타격이 가능해졌지만, 조기경보망의 효율성 문제와 어마어마한 B-29의 물량, 그리고 거기에 달라붙은 P-51 머스탱의 근접호위로 인하여 초반이나 후반이나 얻어맞기는 큰 차이는 없었다.
- ↑ 이러고서도 45년까지 전쟁을 끌고 간 게 용할 지경이다. 아참 미국은 양면전쟁 벌이고 있었지.
- ↑ 잠수함으로 자료를 운송하던 도중에 자료가 전부 소실될 것을 우려하여 항공편으로 일부 자료를 부쳤는데, 중요 자료를 가장 많이 싣고있던 잠수함이 침몰하면서 항공편으로 부친 자료만 일본으로 넘어가게된다
- ↑ 하지만 일본 측이 최종적으로 받은 자료들은 상세한 정보가 매우 적었기에 개발진들은 사실상 맨 땅에 헤딩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 ↑ 참고로 일본 제트엔진 형식명의 Ne(일본어로는 ネ)는 연소로켓(燃焼(ネンショウ)ロケッ)의 앞글자이다.
- ↑ 고무, 텅스텐, 주석, 아연 같은 원자재에 키니네와 아편 같은 의약품 원재료에다 커피까지 실려 있었다.
- ↑ 문제는 이때 선적된 화물 중에 무려 우라늄 산화물까지 있었다는 점이다. 정련하면 원폭의 재료가 되니 일본 외무부 암호 해독을 통해 I-29의 화물 선적목록을 알아낸 미군은 이 잠수함을 미친 듯이 찾았다고 전해진다.
- ↑ 이외에도 미군이 암호해독을 통해 I-29의 항로를 파악, 항로상에 잠수함을 매복시켰다가 격침시켰다는 설도 있다.
- ↑ 참고로 황국 1호 병기는 그 이름도 유명하신 MXY-7 오우카
유인유도미사일되시겠다. - ↑ 물론 유압 같은 우아한 방식이 아니라 그냥 사람 손으로 접었다 폈다 하는 인력 근성 설계이다.
- ↑ 추력은 472kgf로 향상되었으나 10시간 가동 후 완전분해하여 오버홀이 필요한 극강의 내구성을 가지게 되었다.
- ↑ 다카오카 스스무 소좌. 패전 후에는 항공자위대에 입대하여 최초의 일본제 제트연습기 T-1A의 테스트 파일럿을 맡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