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1947년 10월 8일~2016년 9월 25일)는 농민운동가, 사회운동가이다. 민중과 농민을 상징하는 '도라지'와 통일을 상징하는 '백두산', 그리고 '민주화'라는 이름을 가진 두 딸과 아들의 아버지였다.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대회 때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은 후 의식불명 상태에서 서울대병원에서 317일간 사투를 벌였다. 2016년 9월 25일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한 뒤 진상 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한 장례 투쟁을 진행했고, 농민들은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 때 꽃상여를 메고 시위에 참여하곤 했다. 2016년 11월 5일 명동성당에서 장례미사 및 광화문 광장의 영결식과 고향 보성에서의 노제 후 2016년 11월월 광주 금남로에서 노제를 치른 뒤 망월동 민족민주열사묘역에 안장되었다.
생애
그의 생애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한국 농업을 지키기 위한 활동으로 채워진 일생이었다.
- 1947년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출생
- 1963년 광주서중학교 졸업
- 1968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 1968년 중앙대 행정학과에 입학
-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 때 시위 도중 1차 제적
- 1973년 10월 교내 유신 철폐 시위 주도[1]
- 1974년~1975년 – 수배 중 명동성당에 피신
- 1975년 – 전국대학생연맹 가입 및 2차 제적, 갈멜 수녀원 잡부 1년, 일흥농원 포도원 1년, 갈멜 수도원 수도사 3년
- 1981년 귀향 [2]
- 1980년 3월 – 복교
- 1980년 – 어용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재건 총학생회 1기 부회장 역임
- 1980년 5월 8일 – ‘박정희 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 신현확)’ 장례식 주도
- 1980년 5월 15일 – 서울의 봄 때 의혈중앙 4000인 한강도하 주도 (흑석동 캠퍼스에서 서울역까지 도보 행진)
- 1980년 5월 17일 – 군부 계엄 확대 조치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 체포
- 1980년 7월 30일 – 중앙대학교 퇴학 처분(3차 제적)
- 1980년 8월 20일 – 수도군단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 선고
- 1981년 3월 3일 – 3‧1절특사로 가석방
- 1981년 – 고향 보성으로 귀향(수도작, 낙농업, 밭농사 등)
- 1981년 11월 – 박경숙(율리아나) 씨와 결혼
- 1983년 – 정치활동 규제자에서 해금 및 복권
- 1986년 – 가톨릭농민회 가입
- 1987년 – 가톨릭농민회 보성, 고흥협의회 회장
- 1989년~1991년 –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장
- 1992년~1993년 –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
- 1992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준) 주도
- 1994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
- 2014년 – 가톨릭농민회 전남 동지회 회장
- 2015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자문위원
- 2015년 11월 14일 –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의해 쓰러진 후 의식불명
- 2016년 9월 25일 오후 1시 58분 – 중환자실 입원 317일 끝에 사망
(따로 각주가 없는 이력의 출처는 가톨릭농민회)
활동
민주화 운동
농민 운동
물대포 사건
2015년 11월 14일에 있었던 민중총궐기에 참여했던 농민들을 대상으로 여러 차례 물대포 살수가 있었고, 그 중 네번째 살수가 백남기를 정조준하였다. 백남기는 응급실로 이송되었으나 의식불명 상태가 지속되다가 사건 발생 317일만인 2016년 9월 25일에 사망하였다. 경찰 물대포에 의한 시민 사망 사건
같이 보기
- 민중총궐기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 카톨릭농민회
- 강신명
-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 국가폭력의 희생자들
- 뉴스/백남기 - 백남기씨 관련 뉴스 모음
링크
출처
- ↑ “민주주의와 민족농업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고 백남기 농민의 삶”. 《민중의 소리》.
- ↑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 끝내 스러지다”. 《뉴스타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