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한봉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6일 (월) 01:45

윤한봉한국미국 두 지역에서 민주화, 통일, 인권 운동을 이끈 활동가이다. 1948년생으로, 전남대 재학 중 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되고 민주화 운동을 펼치다 5·18 광주민중항쟁의 주동인물으로 현상수배 되자 운동을 보호하려는 동료들의 설득에 미국으로 밀항하였다. 미국에서 민족학교, 한국청년연합 등의 단체를 조직하고 10년 동안 해외 최대 규모의 민주화·통일·인권 운동을 이끌었다.

윤한봉

문민정부의 수배 해제 후 귀국했다. 조국에서 5·18 기념재단의 설립을 주도하고 민족미래연구소·박정희 기념관 건립반대 국민연대·들불 열사 기념사업회 등의 활동을 펼쳤다. 장기 밀항의 후유증으로 계속 건강이 악화되자 2007년에 폐이식 수술을 받았으나 부작용으로 사망하였다.

운동의 생활화, 꾸준한 학습, 커뮤니티에 뿌리내리는 것을 강조했던 그의 정신은 오늘날 5·18 기념재단, 민족학교 및 각 지역 마당집, 나카섹, 한청련/한겨레가 이어나가고 있다.

한청련의 소개 글

2007년 6월 26일, 1980년 5·18 광주 민중항쟁 최후의 수배자이자 진보적인 코리안 아메리칸 풀뿌리 운동의 창시자로 알려진 윤한봉 선생은 향년 58세를 일기로 삶을 마쳤습니다. 윤한봉 선생은 날카로운 분석력과 통찰력, 그리고 설득력을 지닌 운동가이자 지도자로, 해외 코리안 아메리칸 운동과 한국의 인권과 사회 정의 운동을 이끈 점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윤한봉 선생은 로스앤젤레스 및 미 전역의 많은 코리안 아메리칸 청년들에게 도전의식을 심어주고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그들이 조직, 교육, 운동의 건설을 통해 그들의 열정과 부당한 현실인식을 실천에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청년 활동가들과의 학습 때마다, 항상 지역적 차원, 전국적 차원, 국제적 차원에서의 폭넓고 정확한 정세분석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학습을 통해, 코리안 아메리칸 커뮤니티가 우리 활동의 본거지이자 조직 강화의 핵심이어야 한다는 점과, 사회 정의라는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다른 커뮤니티 단체들과 의미있는 연합체를 건설해야 한다는 점을 후배들에게 가르쳤습니다. 이를 본보기로, 한청련은 정치적 신념을 우리의 일상에 결합시키는 운동의 생활화로 순수하고 참된 사회변화 활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점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국내 활동

윤한봉 선생은 1948년 전남 강진에서 출생했습니다. 전남대 재학 중 "민주청년학생연합" 활동으로 제적, 1978년부터 이듬해까지 그 당시 군부독재에 반대하는 운동(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차례 수감되었습니다. 다음 해인 1980년에는 5·18 광주민중항쟁 주동인물로 현상수배되었습니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한국 운동 역사에 있어, 한국 현대 민주주의 운동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으며, 국제적으로 군부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기여했습니다.) 1981년 4월에는 40여 일 동안 무역선을 타고 미국으로 밀항하여 정치망명을 허가받았습니다.

윤한봉의 활동 (합수 윤한봉 기념사업회 제작)

다큐멘터리 "밀항"

광주 MBC는 1997년에 윤항봉의 망명 탈출을 다룬 다큐멘터리 드라마 "밀항"을 제작했다.

다큐멘터리 밀항 1부
다큐멘터리 밀항 2부
다큐멘터리 밀항의 7분 축약본 (민족학교 제작; 영어 자막 있음)

해외 활동

그는 미국에 도착하여 한국의 민주주의 운동 지지를 위한 해외 연대 운동 건설에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결과, 1983년에 민족학교, 1984년에는 한국청년연합, 1987년에는 재미한겨례동포연합을 설립하였습니다. 특히, 한국청년연합은 전국적인 풀뿌리 커뮤니티 기반 조직 설립의 모태로, 이후 시카고 한인교육문화마당집, 뉴욕 청년학교, 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의 설립에 주축 역할을 하였습니다. 다음을 참고할 것 한국청년연합

  • 1980년 5․18민중항쟁 관련 핵심 주동인물로 현상수배, 1년여의 도피생활 끝에 경남 마산에서 미국으로 35일간의 밀항 탈출, 정치망명을 신청하다.
  • 1982년 6월 광주의 유가족과 부상자들에게 생활비와 치료비를 보내고 5․18진상을 미주 동포사회에 알리고자 「광주수난자돕기회」를 만들어 모금활동, 자료집 발간, 5․18기념행사 후원활동을 하다. 「광주수난자돕기회」는 1988년 6월 해체될 때까지 3만불 이상을 광주로 송금했다.
  • 1982년 10월 박관현 옥사 소식을 접하고 「미국 친우봉사회」사무실을 빌려 10일간의 항의 단식농성을 하다.
  • 1983년 2월 5일 미주동포사회 최초의 민족교육기관이자 미주운동권 최초의 마당집이 될 청년운동체인 「민족학교」를 설립하고 자청하여 소사직분으로 살다.[주 1]
  • 1983년 5월 하순 LA프레스클럽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 밀입국 배경과 정치망명신청사실을 밝히고, 5․18민중항쟁의 진상과 밀항탈출 과정을 밝히다.
  • 1984년 1월 1일 조국의 자주 민주 통일 평화를 위해 일하고 동포사회를 위해 일할 해외동포 청년운동조직인 「재미한청련」결성하고, 각 지역에 「한청련」조직 및 마당집 설립활동을 하다.[주 2]
  • 「민족학교」, 「청년학교」, 「민족교육봉사원」을 중심으로 탈춤 강습과 우리 노래를 보급하고 운동가요 테이프와 “조국의 노래”라 이름 지은 운동가요집 보급․판매, 판화 보급, 풍물 강습 등 문화운동 전개
  • 「한청련」과 「한겨레」의 국제 외교 연대운동: 1986년 워싱턴 D.C에 외교 홍보활동을 위한 전문 마당집인 「한겨레 미주홍보원」을 설립하고 영문기관지 및 영문자료집 발행, 보급․판매; 1989년 「코리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국제 연대위원회」를 결성하고 워싱턴 D.C에 본부 사무실을 마련, 1990년 「국제연대위미주지역위원회」를 결성
  • 1987년 4월 17일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국정부로부터 정치망명 허가판결을 받다
  • 1987년 8월 LA에서 「한청련」주최로 열린 “민족의 통일과 단결을 위한 해외동포대회” 때 「한겨레운동 재미동포연합」(한겨레) 결성(재미한청련을 졸업한 훈련되고 경험이 많은 그리고 지도력이 있는 36세 이상의 동포들을 회원으로 하는 장년, 중년, 노년층의 조직체), 결성 초기부터 「한겨레」의 평회원으로 활동
  • 1988년 「미주 한겨레신문 발간준비위원회」결성; 전두환․노태우 방미 규탄시위
  • 1989년 「5월제 추진위원회」라는 상설기구를 만들어 5․18기념행사 개최; 「한청련」과 「한겨레」를 통한 조국운동에 대한 연대활동과 지원활동을 헌신적으로 하다; 「5․18광주민중혁명 기념사업 및 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5추위)를 결성 모금운동을 전개하여 2천 8백만원을 송금
  • 1986년 조국의 ‘직선제 개헌을 위한 서명운동’에 연대해 뜻있는 동포들과 함께 7개 지역에 「민주개헌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서명 접수활동; ‘박종철열사 고문치사 규탄투쟁’에 연대해 뉴욕에서 5일간의 단식농성 전개; ‘전두환 정권 영구집권 음모분쇄를 위한 투쟁’에 연대해서 LA에서 10일간의 단식농성을 전개
  • 1988년 백기완 선생 주도의 ‘민족통일 마당집 한돌쌓기운동’에 응하여 뜻을 같이 하는 동포들과 함께 캐나다 토론토를 포함한 10개 지역에 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약 1년 동안 모금운동을 전개해 미주운동 사상 최대 액수인 약 7천만원을 송금; 조국의 ‘국토순례대행진’과 ‘8․15 남북청년학생회담’, ‘제1차 범민족대회’와 ‘ 「한총련」출범식’에는 각각 두 명씩의 대표를 파견; 「피코코리아」노조 대표단 투쟁 때 농성과 시위, 대표단 지원을 위한 모금활동; 「US Magnetics」사의 노조투쟁에 연대하여 LA본사 앞에서 시위; 「전교조」대표단의 북미주 방문활동을 다각도로 지원; 조국의 정치범들에 대한 옥바라지 지원,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 학생의 석방을 촉구하기 위해 「워싱턴포스트」지에 광고를 게재하고 김근태씨, 김현장 김영애씨 부부, 고현주씨, 홍성담씨 등의 석방을 위해 두 차례에 걸쳐 10여 명의 미국 상 하의원들과 수십 명의 각계 지도자들에게 호소하여 석방탄원서를 노태우정권에게 보내는 등 정치범 석방운동을 전개; 조국의 ‘국가보안법 철폐와 장기수 석방을 위한 운동’에 연대하여 뜻을 같이하는 동포들과 함께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을 위한 미주본부」를 결성한 후 연대 단식과 시위활동을 전개
  • 1988년 4월 「한청련」과 「한겨레」를 통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운동의 일환으로 조국에 있는 미국 핵무기 철거 서명운동을 결의하고, 1988년 5월부터 1989년 6월까지 10만여 명 이상의 서명을 받아냄
  • 최초의 대(對) UN 투쟁시위: 조국의 분단고통과 군사긴장, 전쟁위험을 국제사회에 널리 알리고 40년이 다 된 휴전체제를 평화체제로 바꾸고 미국으로부터 군사주권을 되찾으며 미군을 철수시키고 핵무기를 철거시키기 위해 「한청련」, 「한겨레」는 1988년 뉴욕에서 개최한 “8월대회” 중에 UN 앞 함마슐트 광장에서 2시간 동안 시위
  • 1989년 10월 3일부터 “평화협정 체결 촉구와 UN 분리가입 저지”를 위한 UN본부 정문 건너편 평화공원에서 22일간의 단식농성 투쟁 : 그동안 연대활동을  해 온 타민족 형제들과 우호적인 동포운동가들과 함께 「평화협정 체결촉구 및 UN분리가입 저지 대책위원회」를 꾸리고 그 밑에 외교 연대 요원들과 단식보호 요원들을 둠, 이 때 동포단체 8개와 타민족 형제단체 23개가 참여(UN창립 이래 최장기간의 단식농성으로 기록)
  • 1990년 2월 「한청련」과 「한겨레」합동회의에서 1990년 10월에 “조국의 평화와 자주통일을 위한 해외동포대회”를 개최하고 10월 1일부터 15일 동안 UN분리가입 저지와 평화협정 체결 촉구를 위한 UN본부 앞 단식농성을 추진-13명의 동포운동가들이 참여하였고 8개의 동포단체와 72개의 타민족 형제단체들이 후원을 함
  • 1990년 10월 뉴욕에서 해외 각 지역의 청년운동체를 규합하여 해외운동 사상 최초의 청년운동연합체인 「해외한국청년운동연합」(해외한청련) 결성
  • 1992년 7월 「국가보안법 철폐와 양심수 석방을 위한 미국운동본부」를 결성하고 전 지역에서 시위와 6일간의 단식농성을 벌이다
  • 1992년 10월 「민족학교」와 「징검다리」“올바른 2세운동의 방향에 대한 심포지엄”을 개최하고 「한겨레」와 「해외한청련」은 “10월대회”(“해외운동강화 발전을 위한 해외동포대회”)와 총회를 개최하여 변화된 내외 정세를 집중 분석한 후 「한겨레」, 「한청련」모두 정세전망에 맞게 강령과 규약을 개정
  • 1993년 1월 평화군축운동 차원에서 백악관에 미군철수를 촉구하는 전보치기 운동을 시작 : 동포 6백 50명과 타민족 형제 2백 50여 명의 참여를 이끌어 내 백악관에 905통의 전보를 침
  • 1993년 5월 한반도에 조성된 전쟁위기 상황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의 비핵화와 영구적인 평화정착을 촉구하는 의견 광고를 「워싱턴 포스트지」에 게재하고, UN본부 앞 단식농성(광고게재운동에 동참할 개인과 단체들의 모집과 필요한 광고료 모금을 위해 조직역량을 총 동원)을 결의
  • 1993년 5월 12일 민족학교에서 유엔본부 앞 단식 준비와 5․18 제13주기 기념행사 준비상황을 점검하고 있던 중 귀국 허용 통보 받음
  • 1993년 5월 19일 일시 귀국방문 후 망명생활 청산과 영구 귀국준비를 위해 미국으로 다시 돌아 감
  • 1993년 8월 18일 12년간의 미국 망명생활을 정리하고 정든 회원들 곁을 떠나 조국으로 돌아 옴

귀국 후 활동

1993년에는 오랜 군사 독재 정권을 마무리 한 후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그 해 5월, 윤한봉 선생은 12년 간의 미국 정치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하였다.

귀국

귀국 이후 그는 민족미래연구소(한국 미래에 대한 분석 연구와 계획 수립 기관)를 설립하였고, 아시아 태평양 전역에 민주주의와 인권 보호의 정신을 물려주는 역할을 하게 되는 5.18 기념재단 설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90년대 중후반에 그가 설립했던 민족학교를 비롯해 각 지역 마당집 및 한국청년연합에서 당시 중대한 운동의 방향 전환(기존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을 떠나 새롭게 미국 지역 사회 이슈로의 전환)을 둘러싸고 격렬한 찬반 논쟁과 조직 분열이 일어났다. 분열이 심화되자 윤한봉은 미국 지역 사회 이슈에 집중하는 것이 옳다고 편을 들어주었다. 통일 운동을 주장하던 이들은 조직을 떠났다.

통일 운동을 주장하다 쫓겨난 이들은 이 사태에 평생의 상처를 입은 모양이다. 2019년에도 민족학교 등이 미국 정부 기금을 받기 위해 지역 이슈를 선택했다느니, 한청련이 떠나버려 통일운동의 역량이 가라앉아버렸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민족학교의 2019년 역대 최대 규모의 분열이[1] 1990년대 분열의 연장 선상에 있거나 관련이 있다는 망상까지 주장한다.[주 3] 한청련이 당시 최대 규모의 조직이었으니 한청련의 이탈이 통일운동에 치명적이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지역 이슈는 주로 미국 정부를 비판하며 법 개정등을 요구하는 활동에 집중이 되는데, 정부가 정부 자신을 비판하는 활동에 기금을 주는 일은 없다. 애초에 대부분의 원로 통일 운동가들이 미국 지역 사회 현안과 지역 이슈 운동의 방법론에 대한 이해가 거의 없어 말이 통하는 것 자체가 힘들다.

오늘날 해외 통일 운동의 모습을 보면 이때 한청련의 선택이 올바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해외 통일 운동 모임은 주로 60대-80대 "원로"로 이루어져 있으며, 가끔 20대 청년이 조금 참여하다가 떠나는 모습을 볼 수 있고 30대-40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주 4] 조직 활동을 게을리하다 명맥이 끊긴 것이다. 그리고 통일 운동의 특징상 의식화가 진행됨에 따라 더 많은 참여를 꾀하는 소위 "참여의 계단 이론"에서 중간 부분에 해당되는 활동 유형을 찾아보기 어렵다. 현지 한인들이 직면한 문제 - 이민, 노동, 언어 소통, 인종 차별 등의 이슈에 집중하여 조직의 외연을 넓히는 것이 정답이었다는 것이다. 거기서 역량을 쌓아 통일운동이든 뭐든 참여를 할수도 있었으나, 이 사건을 계기로 민족학교를 비롯한 단체들은 한국 국내 이슈를 다루지 않는 방침을 가지게 되었다. 애초에 통일 운동 측에서 끼워주지도 않고.. 이들은 위키백과의 윤한봉 항목에도 다음과 같은 비난의 내용을 올리는 등 뒤끝이 만만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수년후에 미국을 방문한 그는 자신이 설립한 단체의 구성원들의 주도권 다툼에 개입해 그의 오랜 활동에 오점을 남겼다."

강좌

윤한봉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박정희 기념관 건립반대 국민연대"의 상임공동대표를 맡았고, 2004년에는 5.18 광주민중항쟁의 풀뿌리 지도자들을 기리는 "들불 열사 기념사업회"의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다.

사망

젊은 시절, 윤한봉 선생은 정부의 억압에 맞서는 활동으로 인해 건강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는 15년 동안 폐기종으로 투병하였고, 2007년 6월 23일에는 폐이식 수술 을 받았으며, 수술 3일 후 사망하였습니다. 윤한봉 선생의 유족으로는 전 한국청년연합 회원이자, 민족학교의 총무로 재직했던 부인 신소하씨가 있습니다.

윤한봉 영걸식 민주사회장 (5.18 기념재단 제작)
윤한봉 장례식
미국 LA 민족학교의 추모식 (2007)

사진

동영상

민족학교 방문 한국 정세 강연 (2006)
DJ 김대중 회고
합수윤한봉 10주기 추모문화제
미국 LA 민족학교의 추모식 (2014)
[귤까는방송] 12회 5.18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첫번째 이야기

참고

문헌

  • 운동화와 똥가방. 윤한봉, 1996.
  • 미주 한인 사회의 정치적 각성, 2005, 이은숙,  Koreans in the Windy City: 100 Years of Korean Americans in the Chicago Area. Pp. 337-350
  • 임을 위한 행진: 윤한봉 전기, 황광우, 오월의봄, 2017
  • 윤한봉: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안재성, 창비, 2017
    oh!다방 Ep.75. 5.18 민주화운동 마지막 수배자, 윤한봉
    • 민족운동가 합수 윤한봉 선생 추모문집, 문규현, 임재경, 유홍준 공편, 한마당, 2010
      민주화 운동가 합수 윤한봉 (1947~2007)

      출처

      부연 설명

      1. 민족학교는 전두환․노태우 정권의 음해와 모략으로 통일운동세력으로부터는 안기부 앞잡이로, 영사관으로부터는 빨갱이로 몰렸다
      2. 1986년 8월까지 서부의 시에틀과 LA지역, 중부의 시카고, 덴버, 달라스지역 그리고 동부의 뉴잉글랜드, 뉴욕, 필라델피아, 워싱턴 D.C지역의「한청련」을 결성하는데 성공 -「한청련」은 뜻을 같이하는 그 지역 동포 선배들과 함께 LA의「민족학교」와 같은 민족사교육, 민족문화 보급, 동포사회의 봉사 및 자선을 목적으로 하는 마당집을 설립하여 그 마당집을 근거로 활동(각 지역 마당집들은 1994년에「미주한인봉사교육단체협의회」를 결성해서 전국적 차원의 연합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함-1995년에는 동포들과 다른 이민소수민족들의 반이민법 제정 저지투쟁을 조직, 주도하여 동포사회와 다른 소수민족들로부터 커다란 신뢰를 받음)
      3. 2019년 분열의 주역이 된 시민참여 팀은 90년대 분열에서 지역이슈파의 주장을 계승 및 발전시켜나간 차세대 활동가들로, 90년대의 논란과 어떠한 관련도 있을수가 없다.
      4. 그런데 윤한봉 선생이 활동을 시작한 1980년대 초에도 상황이 똑같았던 것으로 보인다: 미주운동의 역사와 현황, 사면팔방의 중상모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