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사람들에게 나혜석은 재능 있는 예술가라기보다 그저 ‘바람피우다 이혼당한’ ‘모성의 역할을 하찮게 여긴’ 죽을 때까지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정조를 팽개친 부도덕한 신여성일 뿐이었다.[1] 그러나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인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은 화가인 동시에 독립운동가, 문필가, 그리고 여성주의자였다.
- 출생 1896년 4월 28일
- 사망 1948년 12월 10일
본관은 나주(羅州). 호는 정월(晶月). 수원 출생.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화가이다. 서울의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학과 선과보통과에서 유학하였다.
- 1925년 제4회 조선미술전람회 3등
- 1926년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 1931년 제10회 조선미술전람회 특선
정조를 목숨보다 소중히 지켜야 한다며 여성을 짓눌렸던 조선 시대의 ‘정조 이데올로기’는 현대에도 여성이 끊임없이 성폭력 피해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고 있다.[1] 아직도 성폭력과 관련된 법 집행 과정에서 ‘처음이었느냐’의 여부를 묻는 경우도 많고, 과거의 성 경험 같은 모욕적 질문들, 꽃뱀으로의 색안경을 낀 발언들로 2차 피해를 보는 일이 많은데, 이는 정조관념에 따라 보호의 여부를 나누는 행위라 할 수 있다. [1]
“조선의 남성 심사는 이상하외다. 자기는 ‘정조(貞操) ’관념이 없으면서 처에게나 일반 여성에겐 정조를 요구하고, 또 남의 정조를 빼앗으려 합니다. 서양이나 동경 사람쯤 되더라도 내가 정조 관념이 없으면 남의 정조 관념 없는 것도 이해하고 존경합니다. 남에게 정조를 유린하는 이상 그 정조를 고수하도록 애호해 주는 것도 보통 인정이 아닌가. 자기가 직접 쾌락을 맛보면서 간접으로 말살시키고 저작시키는 일이 불소하외다.”[2]
1.1 생애 초반
나혜석은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부친이 군수를 지낸 부유한 집안에서 출생했다.[1]
1.2 청소년기
1910년 서울 진명여학교에 입학해 1913년 최우수로 졸업하였다.
1.3 일본 유학 시절
1914년 일본 도쿄 사립여자미술학교 서양화부에 입학한 후 유학 생활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고 에세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유학 시절 쓴 글 중 1914년 12월 <학지광> 제 3호에 발표한 <이상적 부인>은 근대적 페미니즘 사상을 담고있다. 이 글은 여성에게만 강요되는 양처현모론과 가부장제를 비판하고, 여성의 계몽을 중요하게 강조하였다. [3]
"남자는 부(夫)요, 부(父)라. 양부현부(良夫賢父)의 교육법은 아직도 듣지 못하였으니, 다만 여자에 한하여 부속물된 교육주의라. 정신 수양상으로 언하더라도 실로 재미없는 말이라. 또 부인의 온양유순으로만 이상이라 함도 필취(必取)할 바가 아닌가 하노니, 운(云)하면 여자를 노예 만들기 위하여 차(此) 주의로 부덕의 장려가 필요하였었도다."
- 이상적 부인 中
유학 중 시인 최승구를 만나 사랑했지만 1916년 그가 결핵으로 사망하였다.
1917년 동경여자유학생친목회를 조직하고 <여자계>를 발간했다. 여자계 2호에 사립여자미술학교를 졸업할 때 발표한 단편소설 '경희'는 당대 신여성의 모습을 그리는 소설로, 가부장제에 대한 비판과 여성해방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 그리고 여성의 사회적 주체성 확보를 강조하는 페미니즘 소설로 평가된다. [4]
1.4 독립 운동
나혜석은 1919년 3.1운동을 포함한 독립 운동에 열을 올렸으며, 이로 인해 5개월동안 감옥에 수감되기도 했다.
경기도 수원박물관이 23일 '경기도 독립운동 인물 발굴사회 결과 보고회'를 열어 나혜석이 3·1 운동에 관여된 사실은 확인됐지만 이후 행적에는 논란이 많았다고 밝혔다. "나혜석은 3·1 운동 다음 해 당시 외교관이던 김우영과 결혼했고 중국 단둥 부영사로 발령난 남편과 함께 단둥으로 가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시절 고위관료를 지낸 김우영은 친일반민족행위자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랐다. 또 나혜석이 조선총독부가 창설한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특선을 하는 등 작가 활동 경력에 대해서도 친일 논란이 제기되는 등 문제 제기가 이어졌다. 수원박물관 이동근 학예사는 “독립유공자 추천은 추론이나 추정이 아니라 독립운동에 참여한 활동에 대한 객관적 사실이 중요한데 나혜석의 경우 현재로서는 객관적 사실을 확정 짓기가 어려워 독립운동가에서 뺐다”고 말했다. 국가보훈처는 나혜석에 대한 독립운동가 심사에서 2차례 부결 결정을 내린 바 있다."[5]
1.5 결혼
1920년 변호사 김우영과 결혼했다. 당시 나혜석은 김우영에게 결혼 조건으로 네 가지 약속을 요구했는데 이 또한 당시로써는 파격적인 조건이었다. ‘일생을 두고 사랑해 줄 것’ ‘그림 그리는 것을 방해하지 말 것’ ‘시어머니와 전실의 딸과는 함께 살지 않도록 해줄 것’, 그리고 ‘첫사랑 최승구의 묘지에 비석을 세워줄 것’이었다. 이 요구를 모두 받아들인 김우영은 신혼여행 길에 실제로 최승구의 묘에 들러 비석을 세워주었다고 한다.[6]
1.6 개인전 개최
1921년 3월19일 양화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한국에서 두 번째로 유화 개인전이었다. 이틀 간의 전시회에 수천명이 몰릴 만큼 대성황하였다.[6] 이후 조선미술전람회에서도 수상하였으며 출판하는 에세이마다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1.7 유럽과 미국에서의 미술 공부
나혜석은 1927년부터 1929년까지 유럽과 미국에 체류하면서 그림과 여성운동을 공부했다. 일본 외교관이 된 김우영과 함께 시베리아 철도를 타고 유럽으로 해외연수를 가게 된 것이다. 당시 이미 고만고만한 어린 자식 셋을 둔 젊은 엄마였던 나혜석은 자식들을 나이 드신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용감하게 남편을 따라 나서는 파격적인 행동을 한다. 남편이 독일에서 근무할 동안 그는 혼자 파리에서 3개월간(자료에 따라 6개월로 기록되기도 했다) 머물게 된다. 당시 파리의 미술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7]
나혜석은 이 집에 머물면서 파리에 있는 화가 비시에르의 아틀리에를 드나들면서 서양미술을 공부했다. 당시 파리 화단에서는 중장년층의 피카소, 브라크, 마티스 등이 군림하고 있었다. [7]
나혜석은 아시아문제에 정통했던 아시아 학자이며 철학과 교수임과 동시에 약소국민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던 샬레 집에서 기거했는데 이 집에서 살면서 보고 느꼈던 프랑스 가정 이야기를 조선에 돌아온 이후 여러 잡지에 발표했다.[7]
"이 집은 파리 상라자르 정류장에서 전차로 25분 간밖에 아니 걸리는 파리 가까운 시외니 별장 많기로 유명한 레베지네하고 하는 곳에 있다. 시외니 만치 수목이 많고 이 집 정원도 꽤 넓다. 정원에는 높은 고목이 군데군데 서 있고 푸른 잔디 위에는 백색 화초가 피어있고 우거진 수풀, 엉켜 오르는 덩굴, 작약화, 월계화, 등꽃이 피어 있고 그 옆에는 채소밭이 있어 딸기, 감자, 상추, 파, 콩이 심겨 있다. 또 한편 마당에는 토끼, 비둘기, 밀봉(꿀벌)을 기른다. 그리하여 꽃 꺾어 방에 장치하고 채소 뜯어 반찬하고 가축 잡아 공물로 쓴다. 외형 차림차림만 보아도 얼마나 재미있는지!" [8]
"구미 만유기 1년 8개월간의 나의 생활은 이러하였다. 단발을 하고 양복을 입고, 빵이나 차를 먹고 침대에서 자고 스케치 박스를 들고 연구소(아카데미)를 다니고, 책상에서 프랑스말 단자(단어)를 외우고, 때로는 사랑의 꿈도 꾸어보고 장차 그림 대가가 될 공상도 해 보았다. 흥 나면 춤도 추어보고 시간 있으면 연극장에도 갔다. 왕전하와 각국 대신의 연회석상에도 참가해 보고 혁명가도 찾아보고, 여자 참정권론자도 만나 보았다. 프랑스 가정의 가족도 되어 보았다. 그 기분은 여성이요, 학생이요, 처녀로서이었다. 실상 조선여성으로서는 누리지 못할 경제상으로나 기분상 아무 장애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9]
이때 프랑스 파리에서 한때 3·1항쟁 당시 민족대표 33명 중 하나였으나 일찌감치 변절했던 천도교 지도자 최린을 만나고 나혜석은 잠시 그와 만남을 가진다.
1.8 귀국
귀국 이후 나혜석이 최린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이 알려지고 소문이 와전되며 ‘음탕한 여자’로 사회에서 고립됐고 곤궁함에 시달렸다. 나혜석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지만 불륜 상대였던 최린이나 이혼 전 기생을 집에 끌어들였던 김우영은 비난을 받지 않았다.[6]
그러나 나혜석은 꾸준한 작품활동을 지속했다. 전시회를 개최하고, 여행기를 포함한 글과 그림을 발표했다.
1.9 여자미술학자 설립
1933년에는 여자미술학자를 설립했다. 이후, 당시의 정조 유지에 대한 오랜 전통을 비판하는 '이혼 고백장'과 '신생활에 들면서'를 '삼천리'라는 잡지에 투고하여 독자들과 사회에, 지금까지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1935년 이후에도 나혜석은 지치지 않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1.10 사망
1948년 12월 10일. 서울 원효로 서울시립 자제원(慈濟院) 무연고자 병동에 한 여성 행려병자가 있었다. ‘신원미상, 무연고자’, 사망 원인은 ‘영양실조, 실어증, 중풍’, 추정 연령은 65~66세(사망 당시 실제 나이는 52세). 이 행려병자가 바로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 여권운동의 선구자, 독립운동가, 문필가였던 나혜석이었다. [1]
1.11 사후
이구열이라는 남성 미술평론가는 1974년‘나혜석 일대기: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를 발표하여 나혜석의 인생과 업적을 다시 빛나게 했다. 발간된 후, 나혜석에 관한 연구로 그의 업적이 정리되고, 새로운 업적들이 드러났으며, 나혜석에 관련한 서적들이 많이 출판되었다.[10]
2 현대
- 1999년부터 나혜석기념사업회의 '나혜석 바로 알기' 심포지엄 개최
- 2000년 '2월 문화인물' 선정
- 2005년 수원시 나혜석 거리 조성 :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에는 그를 기념하는 나혜석 거리가 있다.
- 2008년부터 나혜석 문화예술제 개최
- 2011년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 <나는 나혜석이다> : 12월 23일(금)부터 2012년 2월 26일(일)까지 수원박물관에서 '2011 수원박물관 특별기획전'인 '나는 나혜석이다'가 개최되었다. 혼탁한 시대를 살아갔던 신여성인 나혜석이라는 인물이, 자신을 1인칭의 시점으로 되돌아보는 자리로 마련되었다.[11] 나혜석 특별전은 모두 6개의 파트로 구분이 된다. 나혜석의 연보를 알아볼 수 있는 프롤로그를 시작으로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 '나는 신여성이다'로 이어진다. 나는 수원에서 살았다는 나혜석의 가족사진과 학창시절의 학적부 등을 소개하고 있으며, 나는 신여성이다 에는 나혜석 소개영상을 준비했다.[11] 다음으로 '나는 세상에 말하고 싶다'에서는 나혜석의 문학작품 및 유화 작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그리고 '나는 많은 인연을 맺었다'에는 구미와 프랑스의 여행기와 교류작가 자료 등을 전시했다. 다음으로는 '나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 존재한다'에서는 수원과 나혜석에 대한 자료 등을 만나볼 수가 있다.[11]
나는 1896년 수원에서 태어났다. 내가 태어난 지 115년. 사람들은 나를 신여성, 최초의 여성유화가, 문학가, 민족운동가, 여성해방론자라고 말한다. 나는 예술적 삶과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었고, '여자도 사람이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사실에 충실하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참담하며 슬프고도 노여운 시대에 살면서 나는 그림과 글을 통해 '나는 나혜석이다'라는 주장을 멈추지 않았을 뿐이다.(특별전시 팸플릿 중에서)[11]
- 연극 《불꽃의 여자, 나혜석》
- 연극 《모던걸 백년사 시즌1》, 《모던걸 백년사 시즌2》[12]
- 그가 한때 머무르던 충남 예산군 덕산면 수덕사 앞의 수덕여관은 충청남도 지방문화재 103호로 지정되었다.
3 저작
3.1 저서
- 《나혜석 전집(羅蕙錫全集)》
- 《네 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 나혜석에 대한 전기.
- 《첫사랑 무덤으로 신혼여행을 가다》: 나혜석 글 모음집.
- 《이혼 고백서》 (오상, 1999) : “상대자의 잘못을 논할 때 자기 자신이 청백할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남자라는 명목하에 이성과 놀고 자도 관계없다는 당당한 권리를 가졌으니 사회제도도 제도려니와 몰상식한 태도에는 웃음이 나왔습니다. (…) 아아. 남자는 평소 무사할 때는 여성이 바치는 애정을 충분히 누리다가 체면이나 법률 앞에 서면 어제까지의 방자하고 즐거움을 누리던 몸을 돌이켜 오늘의 군자(君子)가 돼 점잔을 빼는 비겁자요 난폭자가 아닙니까. 우리 여성은 모두 이런 남성을 저주합니다.”[2]
- 《나혜석 작품집》
- 나혜석 자서전(유고)
- 자유 연애
- 해인사 풍광(기행문)
3.2 논설
- 이상적 부인 (1914)
3.3 그림
- 자화상
- 파리 풍경
- 농촌 풍경
- 무희
- 나부 1
- 나부 2
- 선죽교
- 스페인 해수욕장
- 스페인 국경
- 해인사 홍류동
- 이화원 풍경
- 중국인 촌
- 수원 서호
- 수원성
- 염노장, 여승 초상화
- 인천풍경
- 저것이 무엇인고
- 김일엽의 하루
3.4 판화
- 조조, 목판
- 개척자, 목판
3.5 소설
- 경희(瓊嬉) (1918)
- 정순 (1918)
- 회생한 손녀에게 (1918)
- 규원(閨怨) (1921)
- 원한(怨恨) (1926)
- 현숙(玄淑) (1936)
3.6 수필
- 파리에서 본 것 늣긴 것 (1930)
- 구미 부인의 가정생활 (1934)
-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 (1936)
- 어머니와 딸 (1937)
- 이혼 고백장 (1939)
- 이혼 고백서(續) (1939) : <이혼 고백서>에서 그는 80여 년 전에 쓰인 글이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조선 사회의 가부장제가 갖는 차별적 모순을 날카롭게 비판했다.[1]
- 여인독거기 (1934)
3.7 시
- 시 냇물
- 시 사 (砂)
- 노라를 놓아주게
- 인형의 家
- 외로움과 싸우다 객사하다
4 같이 보기
- <a href="/dok/나혜석%20콤플렉스">나혜석 콤플렉스</a>
4.1 각주
- 손민원, <a rel="nofollow" href="https://news.joins.com/article/22785307">“여자보다 사람” 외친 나혜석, 80년 지난 지금 무엇이 달라졌나</a>, 중앙일보, 2018-07-09
- 나혜석, 이혼고백서 - 신생활에 들면서, 삼천리, 1930
- 송민성 기자, <a rel="nofollow" h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134527">'신여성' 나혜석을 다시 보다</a>, 오마이뉴스, 2003-07-21
- 김한영 기자, <a rel="nofollow" h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60658">나혜석 인생 뒤흔든 8개월간의 삶, 궁금했다</a>, 오마이뉴스, 2013-05-02
- 홍용덕 기자, <a rel="nofollow" href="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837417.html#csidx342c358ec096b098cfc4da15ad1b841">수원지역 독립운동가 명단에서 빠진 나혜석</a>, 한겨레신문, 2018-03-23
- 김형민 남PD, <a rel="nofollow" href="https://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0580">1934년 나혜석 “조선 남성 심사는 이상합니다”</a>, 시사IN, 2017-11-22
- 한경미 기자, <a rel="nofollow" h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83004">나혜석을 따라 파리를 보다</a>, 오마이뉴스, 2006-12-28
- '프랑스 가정은 얼마나 다를까' 중에서, 1936년 4월 <삼천리> 발표, 나혜석 전집 중, 태학사 2002
- '아아 자유의 파리가 그리워' 중에서. <삼천리> 1932년 11월 발표
- 김호기 대학교수, <a rel="nofollow" href="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1811241787740442">“에미는 선각자였느니라”... 여성해방의 꿈, 이제야 자리매김</a>, 한국일보, 2018-11-26
- 하주성 기자, <a rel="nofollow" href="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676247">"나는 나혜석이다" 나혜석이 말하는 나혜석</a>, 오마이뉴스, 2011-12-27
- 나혜석의 이름이 직접적으로 나오지는 않지만, 나혜석을 모티브로 한 '나경희'라는 인물이 등장하며 나혜석의 시 <인형의 가>가 극중 등장하고 인용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