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한국의 교육가이자 독립운동가이며, 현 덕성여자대학교의 설립자이다.
2 생애
2.1 생애 초반
1879년 10월 6일 그는 '섭섭이'라는 이름을 받고 세상에 나온다.
2.2 청소년기
17세에 출가하고, 19세에 어린 딸과 남게된 그는 고모에게 예배당을 권유받아 다니게 된다. 상동교회에서 '미리사<button data-placement="auto bottom" data-content="%EB%8B%B9%EC%8B%9C%20%EC%97%AC%EC%84%B1%EB%93%A4%EC%9D%80%20%EC%A1%B1%EB%B3%B4%EC%97%90%20%EC%9D%B4%EB%A6%84%EC%9D%B4%20%EB%93%B1%EC%9E%AC%EB%90%98%EC%A7%80%20%EC%95%8A%EC%95%98%EC%9C%BC%EB%82%98%2C%20%EC%A0%90%EC%B0%A8%20%EB%93%B1%EC%9E%AC%EA%B0%80%20%EC%9A%94%EA%B5%AC%EB%90%98%EB%A9%B4%EC%84%9C%EB%8F%84%20%EC%9D%B5%EB%AA%85%EC%9C%BC%EB%A1%9C%20%EC%A0%81%ED%98%80%EC%A1%8C%EB%8B%A4.%20%ED%95%98%EC%97%AC%20%EC%9D%B4%EB%A6%84%EC%9D%84%20%EA%B0%80%EC%A7%84%EB%8B%A4%EB%8A%94%20%EA%B2%83%EC%9D%B4%20%EC%97%AC%EC%84%B1%EB%93%A4%EC%97%90%EA%B2%8C%20%ED%81%B0%20%EC%9D%98%EB%AF%B8%EA%B0%80%20%EC%9E%88%EC%97%88%EB%8B%A4%EA%B3%A0%20%ED%95%9C%EB%8B%A4." data-container=".wiki-fnote">1</button> '라는 세례명을 받고, 교회 관습에 의거하여 남편의 성을 따와 '김미리사'가 되었다.
2.3 유학 생활
박에스더의 모습을 보고 큰 결심을 한 그는 23세에 중국으로 넘어가 4년간 신학 공부를 하였다. 그 이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머물면서 약 8년 동안 학업과 사회운동을 병행했다. 그는 1905년 12월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교육구국운동단체인 대동교육회를 창립하고 발기인으로서 함께하였다. 그 곳에서 최초의 재미 한인 여성단체인 한국부인회를 창립해 떠돌이 한인노동자를 위한 사회 활동에 전념하였다.
2.4 독립 운동
1912년 8월 조국으로 귀국한 그는 배화학당에 교사 겸 선교인으로 선임되어 10여년간 재직하였다. 그는 학교생활을 하면서도 시내에 나가 여성계몽운동을 펼쳤다. 배화학당에서 일어난 3.1운동 1주년 기념 만세시위를 계기로 그는 독자적인 여성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심한다.
2.5 학교 설립과 운영
그는 여성교육의 필요성을 국권 회복과 여성의 권익신장이라는 두 가지 관점에서 제기하였다. 무엇보다 그는 엘리트를 위한 교육이 아닌 대중을 위한 교육을 하려 했다는 점에 의미가 크다. 1920년 예배당에서 부인야학강습소를 시작으로 다른 신여성들과 함께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회의 인기가 높아짐에 따라 이름을 새로 정하게 되었는데, 무궁화의 근槿자를 따서 근화학원이 되었다. 그는 지속적인 자금난에 시달렸음에도 학교 공연 수익들을 모아 1925년 비정규교육기관인 근화학원을 정규교육기관인 근화여학교로 전환하는데에 성공한다.
근화 여학교는 배움의 기회를 잃은 여성들에게 기회를 주는 소중한 교육기관이었기에 힘겹게 나마 운영이 될 수 있었고, 1934년 거금을 들여 근화여학교를 근화여자실업학교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이 일을 계기로 그는 본래의 성으로 복귀하여 '차미리사'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1938년 총독부의 압력으로 인해 근화여자실업학교는 덕성여자실업학교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그는 '조선여성에게 필요한 것은 여성이 사회에 나갈 수 있는 기술교육이다.'라고 생각했으며, 여성들의 독립 의욕을 자극하고 자립 능력을 향상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2.6 노년
그는 총독부의 압력으로 그의 나이 62세인 1940년 8월 교육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독립을 위해 활동하던 그는 해방 후 통일 민족국가 수립 운동을 이어갔다. 그는 분단정부 수립을 저지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할 것을 호소하는 문화인 108인 성명에 동참하였다. 그리고 1955년 6월 1일, 7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2.7 현대
그는 사후 47년만인 2002년, 독립유공자(건국훈장 애족장)에 이름을 올렸다.
2020년, 덕성여자대학교는 창학 100주년을 맞이한다.
3 업적
- 조선여자교육회 결성 (1920.2.20)
- 최초의 부인야학 창시(교회 예배당) (1920.4.19)
- 염정동 새문안교회 (1920.9.18)
- 근화학원 설립 (1923.3.11)
- 근화여학교로 승격 (1925.8.29)
- 재단법인 근화여자실업학교 인가 (1934.2.8)
- 재단법인 덕성여자실업학교로 개명 (1938.10.14)
- 덕성여자대학교로 승격 (1950.5.17)
4 여성주의적 평가
" 살되, 네 생명을 살아라
생각하되, 네 생각으로 하여라
알되, 네가 깨달아 알아라"
5 여담
6 참고 문헌
한상권, <차미리사 평전>, 푸른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