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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한국의 역사]] 중 원삼국 시대에 속하는 나라. 쑹화 강 유역의 평야 지대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농경과 목축을 주로 하고 말, 주옥, 모피를 수출하며 경제적으로 비교적 풍요로웠다. 1세기 초에는 왕호를 사용했고 중국과 외교 관계를 맺었다. 왕 아래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 우가, 저가, 구가와 대사자, 사자 등의 관리가 있었다. 가는 각자 사출도를 다스렸다. 가들을 왕을 선출하기도 하고 흉년이 들면 왕에게 책임을 묻기도 했다. 왕이 나온 대표 부족의 세력은 매우 강해서 궁궐, 창고, 감옥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왕이 죽으면 많은 껴묻거리와 함께 사람들을 순장했다.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다. 하늘을 숭배하고 제사를 지내는 의식으로 추수 감사제와 같은 성격이나, 12월에 개최된 점을 볼 때 수렵 사회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죄수를 풀기도 했다. 전쟁이 일어났을 때에도 제천 의식을 치렀고, 소를 죽여 굽으로 점을 치기도 했다. {{인용문|형벌은 엄하고 각박하여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집안 사람은 노비로 삼는다. 도둑질을 하면 물건의 12배를 변상하게 하였다. 간음한 자와 투기가 심한 부인은 모두 죽였다. 투기는 더욱 증오해서 죽인 후 시체를 나라의 남산 위에 버려서 썩게 한다. 친정집에서 시체를 가져가려면 소나 말을 바쳐야 한다.|"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조선의 법과 비슷한 4조목이 위와 같이 전해지고 있는데,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3세기 말 선비족의 침입으로 위축되었고 5세기 말에 결국 고구려에 흡수되었다. 한국 역사에서 고조선 다음으로 출현한 국가이며, 고구려나 백제의 건국 세력이 부여의 후예임을 자처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크다. [[분류:성격/국가]] [[분류:성격/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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