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병규" 문서에 대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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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시 제목최병규
기본 정렬 키최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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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작성 날짜2021년 8월 13일 (금) 2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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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에는 평강 출신 최병구는 없다. 최영섭은 <바다를 품은 백두산>에서 "아버지는 항일독립운동 공로로 대통령표창을 받았지만, 감옥생활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훈장은 받지 못하였다." 주장에 반하는 사실이다. 8.15 208명 독립유공자에도 평강 출신 최병규 이름은 없다. 대한민국 정부가 인정하는 독립유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재형 할아버지 최병규 선생은 강원도 평강 출신 독립운동가다. 춘천고보 3학년 재학 중 순종황제가 승하하자 상장 달기에 앞장섰다가 퇴학당하였다" 라고 정경희 의원이 포장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아니었다. 일본은 조선인들 조의를 표하는 행위를 막지 않았다. 갈등이 있었기는 하였다. 그래서 퇴학사건 원인은 아니라고 볼 수 있다. 최병규는 맹휴사건 으로 퇴학 처분을 받았는데, 도학무국에 탄원서를 제출하면서 교무주임 모리를 배척하는 맹휴를 단행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인 학생들을 멸시하고 구타, 폭언을 일삼는 일본인 교무주임 교사 배척을 위한 전교생 동맹휴학을 주도하였다. 일본은 아버지를 퇴학 처분하고 고향 강제 귀향시켜 금족령을 내렸다" 라고 과장하였다. "3년 근신이 끝난 뒤 가조고가 함께" 만주로 가서 독립운동하였다는 주장도 사실이 아니다. 최병규 목단강성 해림가로 건너간 이유가 독립운동을 위하서였을까. 3년 거주제한 조치도 감내한 후 평강에 면협의원도 하고, 도회의원을 도전하고 돈을 남겨 일제에 국방헌급까지 바쳤던 인물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주로 떠났다는 설명은 전혀 없다. 일제 식민정책에 충실히 복무하며, 면협의원까지 하였다. 이로 최병규가 독립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이유를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그러면서 친일 논란까지 붉어지는 상황이다. 3년 거주 제한도 있던 사람이 단순히 일제 명령을 따라 면협의원까지 할 수 있었을까? 라는 물음과 함께 말이다. 애초에 독립유공자 미담은 조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1] 이를 최재형 후보측은 미담으로 조성하였는데 21년 8월 6일, 독립유공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였지만 "그 시대를 살지 않았던 기자가 무슨 근거로 당시 상황을 마음대로 평가하냐. 깊은 유감" 이라고 주장하였고, 6일에는 "故 최병규 대통령 표장, 독립운동 행정, 유년 시절 퇴학은 사실" 이라고 주장하였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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