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1947년 10월 8일~2016년 9월 25일)는 농민운동가, 사회운동가이다.
생애
그의 생애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우리 농업을 지키기 위한 활동으로 채워진 일생이었다.
- 1947년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출생
- 1963년 광주서중학교 졸업
- 1968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 1968년 중앙대 행정학과에 입학
-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 때 시위 도중 1차 제적
- 1973년 10월 교내 유신 철폐 시위 주도[1]
- 1974년~1975년 – 수배 중 명동성당에 피신
- 1975년 – 전국대학생연맹 가입 및 2차 제적, 갈멜 수녀원 잡부 1년, 일흥농원 포도원 1년, 갈멜 수도원 수도사 3년
- 1981년 귀향 [2]
- 1980년 3월 – 복교
- 1980년 – 어용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재건 총학생회 1기 부회장 역임
- 1980년 5월 8일 – ‘박정희 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 신현확)’ 장례식 주도
- 1980년 5월 15일 – 서울의 봄 때 의혈중앙 4000인 한강도하 주도 (흑석동 캠퍼스에서 서울역까지 도보 행진)
- 1980년 5월 17일 – 군부 계엄 확대 조치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 체포
- 1980년 7월 30일 – 중앙대학교 퇴학 처분(3차 제적)
- 1980년 8월 20일 – 수도군단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 선고
- 1981년 3월 3일 – 3‧1절특사로 가석방
- 1981년 – 고향 보성으로 귀향(수도작, 낙농업, 밭농사 등)
- 1981년 11월 – 박경숙(율리아나) 씨와 결혼
- 1983년 – 정치활동 규제자에서 해금 및 복권
- 1986년 – 가톨릭농민회 가입
- 1987년 – 가톨릭농민회 보성, 고흥협의회 회장
- 1989년~1991년 –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장
- 1992년~1993년 –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
- 1992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준) 주도
- 1994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
- 2014년 – 가톨릭농민회 전남 동지회 회장
- 2015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자문위원
- 2015년 11월 14일 –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의해 쓰러진 후 의식불명
- 2016년 9월 25일 오후 1시 58분 – 중환자실 입원 317일 끝에 사망
(따로 각주가 없는 이력의 출처는 가톨릭농민회)
활동
민주화 운동
농민 운동
물대포 사건
같이 보기
- 민중총궐기
-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 카톨릭농민회
- 강신명
- 우리밀살리기운동본부
- 국가폭력의 희생자들
- 뉴스/백남기 - 백남기씨 관련 뉴스 모음
바깥 고리
- ↑ “민주주의와 민족농업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고 백남기 농민의 삶”. 《민중의 소리》.
- ↑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 끝내 스러지다”. 《뉴스타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