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다 칼로

최근 편집: 2019년 12월 22일 (일) 16:32
낙엽1124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12월 22일 (일) 16:32 판
프리다 칼로의 자화상. 「10. 부서진 척추」

프리다 칼로 데 리베라(스페인어: Frida Kahlo de Rivera, 1907년 7월 6일 ~ 1954년 7월 13일)는 20세기 멕시코 미술계의 초현실주의 화가이다.

작품 활동

칼로는 총 143점의 회화 작품을 남겼는데 이중 55점이 자화상이다.[1]

작풍

프리다 칼로의 초현실주의 미술은 유럽의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 '멕시코적인 것'에 뿌리를 두었다.

"나는 너무나 혼자이기에, 또 내가 가장 잘아는 주제이기에 나를 그린다"고 말했다.[1]

페미니즘

프리다 칼로는 항상 화려한 멕시코의 전통 의상과 액세서리를 착용하였으나 여성의 자유를 외치고 여성이 억압되는 것을 거부하여 페미니스트들에게 20세기의 우상에의 여성, 인간으로 상징되기도 한다. 프리다 칼로의 생애, 작품이 페미니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스스로를 그렇게 정체화하지 않았기도 하고 프리다 칼로는 평생을 페미니즘 운동을 하는 데 쓰거나 하지는 않았기에 페미니스트라고 부르기에는 어폐가 있다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프리다 칼로의 인생을 설명할 때에는 페미니즘과 연관해서 이야기하기도 한다.

생애

프리다 칼로는 1907년 멕시코시티의 교외 코요아칸의 가난한 집안에 사진사인 헝가리계 독일인 이민자 아버지와 스페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프리다'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는데, 단어의 의미는 독일어로 평화를 뜻한다.

프리다 칼로는 1913년인 6살 때 소아마비에 걸려 다리가 약해져 고통을 겪었다. 프리다 칼로는 의사가 되기 위해 1921년 국립예비학교에 다녔다. 당시 학교에 벽화를 그리던 멕시코의 국민 화가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를 보고 큰 영향을 받았다. 그 이후로 그를 흠모하여 열성적인 구애를 하게 된다.

1925년 프리다 칼로는 18세 때 참혹한 교통사고로 척추뼈, 질과 포궁 등 온 몸을 심하게 다쳐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프리다 칼로는 고통에 곧 절망하게 된다. 그러나 사고로 인한 정신적·육체적 고통은 훗날 그가 화가가 된 후 작품의 주요 주제가 됐다. 사고 이후 침대에 누워 거울을 보며 자화상을 그리는 데에서 프리다 칼로의 작품활동이 시작되었다.

칼로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12년만인 1938년 멕시코시티 대학 갤러리 그룹전에 처음으로 출품했다가 프랑스 초현실주의 화가 앙드레 브르통의 찬사를 받으며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1]

1929년 연인이었던 디에고 리베라와 21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하였다. 그러나 결혼 이후 여러 가지 충돌로 인한 잦은 싸움으로 결국 이혼을 하지만 디에고 리베라가 프리다 칼로를 잊을 수 없어 섹스를 하지 않는 조건으로 재결합 하게 된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칼로는 의사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리베라와 함께 과테말라 대통령 지지 시위에 참가했다가 페렴에 걸리고 말았다. 이후 프리다 칼로는 마지막 일기에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이라는 말을 남기고 10일 후인 1954년 7월 13일 마흔일곱살에 숨을 거두었다.

기타

  • 1938년 루브르 미술관이 프리다의 자화상을 구입하면서 루브르에 입성한 최초의 중남미 여성 작가가 되었다.[1]
  • 일생 동안 척추수술 7번을 포함 총 32번의 수술을 받았다.[1]

같이 보기

전시

출처

  1. 1.0 1.1 1.2 1.3 1.4 임재언 코리아넷 기자 (2015년 5월 28일). “한국서 처음으로 열리는 프리다 칼로전”. 《해외문화홍보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