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4일 (토) 1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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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Marcus Tullius Cicero, BC 106 ~ BC 43.12.7)는 고대 로마 공화정정치인이자 변호인이다.

생애

신인(Homo Nobus)

키케로는 이탈리아 반도아르피눔이라는 고장에서 태어났다. 시골 유지의 아들이었으며, 로마 시민파트리키 귀족도 아니었다. 톰 홀랜드는 그를 "비쩍 마르고 내성적이며 목은 길고 여윈"[1] 소년이었다고 묘사하며, 군인이 되기에는 무리였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영리했고 학문적으로 뛰어났다. 플루타르코스는 "많은 사람들이 키케로라는 소년이 도대체 어떻게 생긴 아이인가, 정말 소문난 대로 사물에 대한 이해가 그렇게 빠른가 확인하기 위하여 직접 학교로 찾아올 정도"[2]라고 전한다.

그의 총명함은 출세의 밑바탕이 되었으나, 젊은 시절 키케로의 발자취를 보자면 그는 출셋길을 성큼성큼 걸었다기보다는, 선혈이 낭자한 벌판에서 최대한 옷자락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피해 가고 있었다.

기원전 80년대 내내 공화국 로마는 부의 불균형에 시달리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내전의 화염 속에 휩싸여 있었다. 군웅인 마리우스술라가 자리를 놓고 다투었고, 키케로의 후원자였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마리우스의 숙청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는 목이 잘렸고 그의 시체는 들짐승의 먹이로 버려졌다.

이 시대에 독재자였던 술라의 해방노예 크리소고누스와 법적 분쟁이 붙은 로스키우스라는 청년이 있었다. 로스키우스는 키케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키케로는 그를 변호했고 무죄 판결을 받아냈다. 그 뒤 키케로는 혹시 모를 술라의 위협을 피해 그리스로 떠났다. 그는 그리스에서 학문에만 몰두했고 건강이 회복되었을 때 로마로 돌아왔다. 그는 정치에 다시 투신하려 생각했으나 한동안은 관직에도 나아가지 않았고, 주변의 권유로 변호사 일을 시작했다. 그는 "교묘한 풍자와 재치 있는 말"[3]을 이용해 변호사로서 화려하게 데뷔했다.

키케로는 웅변가로서만 뛰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흉년이 들었을 때 시칠리아 섬재무관으로 파견되었는데, 거기에서 공정하고 청렴결백한 정치를 펼쳐 큰 신임을 얻었다. 그는 시칠리아 총독을 지냈던 베레스의 비리에 대하여 고발하였고, 당대의 또 다른 유명 웅변가 호르텐시우스를 꺾어버렸다. 키케로는 정치인으로서도 웅변가로서도 당대의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정치인 키케로는 시칠리아 섬 주민들이 준 선물을 가지고 식료품 물가를 안정시키는 데 사용했다.

키케로는 웅변이 좋은 일에 대하여 큰 매력을 줄 수 있으며, 또 정의가 교묘한 웅변의 힘을 빌리면 굉장한 힘을 지닐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뿐만 아니라 훌륭하게 국가를 통치하려는 사람은, 항상 시민들이 듣기 좋은 말만을 가려서 할 것이 아니라 언제나 성실하고 공정한 정의를 부르짖어야 하며, 바르고 유익한 말로 설명하되 감정을 상하지 않는 말을 해야 된다는 것을 로마 사람들에게 뼈저리게 느끼도록 했다.[4]

그는 마침내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신인'으로서 원로원에 입성하게 되었다. 아르피눔 출신, 기사 계급이라는 약점을 안고 있었으나 그를 돌파한 것이다. 거기다 그는 난세에 군인이 아닌 문관으로서 출세했다.

이렇게 보면 그의 출세는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그가 집정관에 선출된 이유를 카틸리나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카틸리나 탄핵 사건과 '국부' 칭호를 받게 되기까지

루키우스 세르길리우스 카틸리나는 여러 모로 키케로와 퍽 다른 인물이었다. 키케로는 혈통적으로 우수하다고 할 수 없었고 검소했지만 가난하지도 않았다. 반면 카틸리나는 오래된 귀족인 파트리키였고, 돈을 펑펑 써가며 스스로를 과시하고 건달들을 모아 조직을 만들었으나 사실 빚더미 위에 올라앉아 있는 가난뱅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살인 혐의와 각종 나쁜 평판까지 그를 따라다녔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를 두고 "자기 딸의 순결을 범하고, 동생까지 죽였던 악한이었다. 그는 동생을 죽인 죄로 벌을 받는 것이 두려워서, 술라에게 부탁하여 자기 동생을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사람처럼 꾸미고 추방명령에 의하여 사형에 처할 사람들의 명단에 넣도록 하였다"[5]고 한다.

기원전 63년 그는 키케로와 함께 집정관 선거에 출마하여 경쟁하였는데, 처참할 정도로 패배하였고, 반란을 일으켜 권력을 손에 쥘 것을 획책하였다. 그는 빈민들과 건달들을 선동하여 자기 편으로 끌어들였고 그들의 대변인이 되겠다며 말했다.

그리고 어느 날 밤, 키케로의 집에 불청객이 찾아왔다. 그는 카틸리나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마르쿠스 크라수스였다. 그의 이야기인즉슨, 그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서 여러 통의 편지를 받았다. 그가 한 통을 뜯었을 때 거기에는 카틸리나가 로마에서 대규모 학살을 계획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크라수스는 자신과 카틸리나의 친분 때문에 자신에게도 불똥이 튈 것이 두려워 이것을 얼른 키케로에게 알린 것이었다.

키케로는 날이 밝자마자 바로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으며, 카틸리나의 음모와 관련된 군사적 움직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1월 8일, 키케로가 소집한 원로원 회의에는 장본인인 카틸리나가 참석해 있었다. 둘은 격렬한 공방을 벌였고 집정관이었던 키케로는 카틸리나에게 로마에서 나갈 것을 명령했다.

카틸리나는 삼백 명의 병력을 끌고 로마에서 나가면서 집정관의 곤봉과 도끼를 들고 은제 독수리 깃발까지 가지고 갔다. 원로원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비상체제를 선언하여 집정관에게 모든 권한을 위임했으며, 카틸리나를 '국가의 공적'으로 선포했다.

로마 안에서는 그의 동지인 코르넬리우스 렌툴루스가 움직이고 있었다. 렌툴루스는 원로원 의원들을 전부 살해한 뒤 로마 시민들을 학살하고 시내에 불을 지르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갈리아 속주의 알로브로게스 족을 이용하려고 했다. 그는 로마의 억압 때문에 궁핍해진 알로브로게스의 사절들을 선동했고, 음모에 가담시키려고 했으나 키케로는 이미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정보원들을 풀어놓고 있었다. 그 알로브로게스의 사절들마저도 키케로와 몰래 손잡고 있었고, 키케로가 렌툴루스의 음모에 대한 증거를 잡아내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이제 그에게는 반역자들을 어떻게 처벌할 것인지가 문제로 주어졌다. 온순한 성품의 키케로는 반역자들에게 극형을 주는 것을 망설이고 있었다. 가혹한 처벌을 내렸다가 권력을 남용한다는 비난을 받기도 싫었고, 그렇다고 솜방망이 처벌을 가했다가 기백이 없고 무르다는 비난을 받기도 싫었다. 때마침 그의 집에서는 부인들이 모여 보나 여신에게 바치는 비밀제례를 치르고 있었는데, 화로에서 불기둥이 솟으며 어떠한 계시를 그에게 내려주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키케로는 강경하게 나섰다.

원로원 회의에서 카이사르는 반역자들에게 재산몰수와 금고형을 내리자고 제안했고, 키케로도 이에 마음이 동했다. 그러나 카툴루스 루타티우스의 연설 이후 원로원은 반역자들에게 극형을 내리자는 데 동의했고, 키케로는 이 뜻을 받아들였다. 렌툴루스는 사형에 처해졌고 카틸리나의 반란군은 와해되고 전멸했다.

키케로는 이것을 계기로 나라를 구한 영웅으로 칭송받았다. 호민관 카토는 키케로가 집정관으로서 쌓은 공적을 칭찬했고 여러 가지 최대의 영예를 주기로 의결했으며 그를 두고 '국부' 라고 선언했다. 로마의 역사를 통틀어 이 칭호를 받은 사람은 키케로가 최초였다.

군대보다 위협적이었던 웅변

키케로에게서 가장 특징적인 면을 고르라면 역시 그의 웅변가적인 면모를 고를 수 있다. 그는 웅변가였고 철학자였으며, 또한 독설가였다. 그는 세 치 혀와 오른손에 든 펜으로 누군가를 거침없이 박살낼 수 있었고, 그 중 하나가 바로 상술한 카틸리나였다. 그 외에도 그는 스스로의 웅변력으로 진실을 드러낼 수도 있었고 가릴 수도 있었다.

언젠가 그는 연단 위에서 크라수스에 대한 칭찬을 하여 박수를 받았는데, 며칠 뒤 같은 장소에서 이번에는 크라수스를 비난했다. 크라수스는 이에 대하여 키케로에게 "같은 장소에서 나를 칭찬한 것이 바로 며칠 전이 아닙니까?" 라고 물었다. 그러자 키케로는 "나쁜 일을 좋게 연설할 때의 내 웅변 역량을 시험해본 것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변호인으로서 사람을 구하기보다는 증인으로서 사람을 파멸시킨 일이 더 많다" 는 비난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웅변보다 진실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고 대꾸하였으며, "키케로의 연설을 알아듣지 못하겠다" 는 자에게는 "당신에게는 귓구멍이 있지 않느냐" 고 응수했다.[6]

그의 독설은 그에게도 독이 되었는데, 플루타르코스는 클로디우스 일당이 그 때문에 키케로를 해치려고 했다고 전한다.[7] 때문에 키케로는 망명을 가야 했다. 또한,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들어오고 내전이 일어났을 때 키케로는 폼페이우스 측으로 갔는데, 예의 그 독설로 아군에게 수없이 비판을 퍼부어대는 바람에 은근한 따돌림을 당했다.

하지만 반대로 폼페이우스가 패퇴하고 카이사르가 정권을 잡았을 때, 그는 자신의 웅변 능력 때문에 카이사르에게 대접받을 수 있었다. 카이사르는 키케로를 웅변가로서 존중했으며, 그의 웅변에 압도되기도 했다.

유감스럽게도 키케로는 카이사르 개인은 좋아했을지언정 카이사르의 체제는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당시의 정치계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으며, 옛날의 정치로 되돌아가기를 바라고 있었다."[8]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독재 동안 정치계에서 떠나 있었으나, 카이사르가 죽은 이후 다시 혼란 속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여기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비난하는 연설을 개시했다. 이는 "중도적 입장을 유지해온 모든 사람들을 신중하게 겨냥"[9]한 것이었고, 안토니우스가 카이사르 체제를 연장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왕에 대한 아테네 웅변가 데모스테네스의 연설 제목을 따 <필리피카이(필리포스를 공격한다)> 라는 이름을 붙였다. 안토니우스는 여기에 격렬하게 반론을 펼쳤으나, 키케로는 몰래 그를 조롱했을 뿐이었다. "모두 그가 연설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토하고 있다고 생각했소."[10]

그러다 그는 카이사르의 양자로 지목된 아우구스투스의 제안을 받아 그와 함께 집정관직에 출마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를 두고 "키케로의 안토니우스에 대한 증오감과, 명예에 저항하지 못하는 그의 기질 때문" 이라고 한탄했다.[11]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주인을 구한다"[12]는 브루투스의 말을 인용했고, "그 어느 때보다 강할 나이의 노인이면서도 나이 어린 한 소년의 달콤한 말에 넘어"[13] 갔다고도 말했다. 이때는 아직 옥타비아누스라고 불렸던 아우구스투스는 겨우 열아홉 살이었다. 키케로는 그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나는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전면적인 영예와 호의로 그를 쉽게 다루고 장악하는 데 성공하게 되기를 바랄 뿐이오. 이 일은 사실 더 어려운 일이겠지만 나는 절망하지 않소.

안토니 애버릿은 그의 이 말을 인용한 뒤에 덧붙이기를, "아주 위험한 일이었지만, 키케로의 전략은 주효했다. 공화정이 회복된 것이다."라고 평했다.[14]

이 위험한 일이 끝까지 성공적이었다면, 이미 노인이었던 그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고 영광스러운 여생을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옥타비아누스는 공동 집정관에 함께 선출되자 키케로를 배제하기 시작했으며 군대를 자신의 손에 넣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카이사르가 만들었던 1차 삼두정치에 이어 2차 삼두정치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만의 비밀 회동에서 제거할 자들을 지목하며 서로의 벗과 혈육들을 희생시켰다. 옥타비아누스는 키케로를 제거하자는 안토니우스와 레피두스의 말에 반대했으나 결국 뜻을 꺾었다. 키케로의 이름은 '처벌 대상자 명단' 에 올랐다.

키케로는 마케도니아로 도피하다 중간에 밀고와 배신으로 인하여 따라잡히고 말았다. 안토니우스는 <필리피카이> 를 썼던 키케로의 손을 증오했으며, 그의 목을 베는 것과 함께 손목까지 잘라 오라고 명령했다.

키케로는 목과 손이 잘린 채로 죽었다. 그의 오른손은 그의 목만큼이나 중요했으며, 그의 펜은 칼처럼 공격적이었기 때문이었다.


평가

키케로의 이력에는 몇 가지 특이한 점이 보인다. 먼저 그는 시골 출신에다 혈통이 우수하지 않았으며, 자기 집안에서 처음으로 원로원에 입성한 '신인' 이었다. 그런데도 상당히 보수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옛 공화정을 복구하고 싶어 했다. 그에게 공화정이란 자신이 살았던 난세와는 다른 평화로운 옛 시대였다. 그는 난세에 살았으면서도, 난세에 출세한 다른 영웅들처럼 군대를 이용하지 않았다. 그와 동향 출신이었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군인으로서 전쟁에 나가 자신의 기반을 만들었고 출세에 성공했다. 술라도 마찬가지였고, 키케로와 동시대를 살았던 폼페이우스나 카이사르도 군대를 이용했다. 그런데 키케로는 당대를 살았던 인물들 중 유일하게 군대를 이용하지 않고도 권력의 정점에 올랐고 명예와 칭송을 얻었다. 카틸리나의 음모를 저지한 것도 군사력보다는 키케로 스스로의 정보 수집력과 정치력, 웅변 능력을 통해서였다. 그는 피를 보는 것을 최소화하며 일을 마쳤다. 무력이나 군사력에 의지하지 않는 것은 그가 군인이 되지 못해서였으며, 군인이 되지 못했던 것은 그가 몸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실상 키케로는 몸이 약했고 마음도 약했다. 그는 카틸리나 반역 사건 당시 반역자들을 어떻게 처벌해야 할지 놓고 우유부단하게 망설였다. 그 카틸리나와 경쟁했던 선거날에는 폭행이나 암살을 당할 것을 우려해 토가 아래 갑옷을 받쳐 입기도 했다. 밀로의 변호를 하기 위해 공회장으로 왔을 때, 폼페이우스의 위풍당당한 모습과 무장한 군대를 보고 떨었다는 이야기도 있다.[15] 플루타르코스는 아우구스투스가 키케로를 배신한 이후 키케로는 망명을 시도했으나 계속 망설이고 주저하며 우유부단하게 행동했다고 기록하고 있다.[16]

그러나 키케로의 이런 약한 몸과 마음은 끊임없이 자기 수신을 위해 노력하는 동기가 되기도 했다. 키케로는 몸이 약했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게 되었다. "가령 평소에 산책을 즐긴다거나 안마를 하는 횟수를 미리 정하여 정확하게 행하는 따위였다. 이렇게 자기 건강에 세심하게 신경을 썼으므로, 그는 큰 병을 앓는 일이 없이 심한 피로와 시련을 견뎌 낼 수 있었다."[17]

또한 그는 명예욕에 약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명예욕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젊은 시절 그는 시칠리아에서 재무관으로서 맡은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로마로 돌아왔고, 근사한 찬사를 들을 생각에 부풀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친구는 그가 어디에 가 있었는지도 모르던 상황이었다. "키케로는, 이 일을 통해 자기가 전력을 다해 찾고 있는 명예라는 것이 저 멀리 있으며, 또 이것을 추구하기에는 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명예에 대해서 스스로 삼가고 조심하게 되었다."[18]

카이사르와 키케로는 둘 다 명예욕과 허영을 가지고 있었다. 스스로를 아낌없이 과시했던 카이사르와는 달리, 키케로는 명예욕과 허영을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 키케로의 생애를 살펴보면, 그 자기 수신의 노력과 명예욕이 합쳐져 그의 명성과 애국적 행동이 되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을 다스리려고 노력하는 동시에 명예욕을 채우고 싶어 했고, 때문에 명예로운 일들을 해낼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명예를 위해 했던 일들, 시칠리아 재무관으로 청렴하게 행정을 맡아보았던 것, 전임 총독 베레스를 고발했던 것, 카틸리나의 음모를 밝혀내고 그것을 낱낱이 드러냈던 것, 그리고 그가 옥타비아누스와 함께 집정관직에 출마하고 짧게나마 공화정을 복구한 것까지도 전부 명예욕이 그의 동인이 되어 일어난 일이었다. 이것은 그가 추구했던, 로마인다운 명예를 위해 한 일들이었다.

출처

  1. 톰 홀랜드, 김병화 옮김, <<공화국의 몰락>>, 웅진닷컴, 2004, p 157
  2.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9
  3.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14
  4.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24
  5.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21
  6.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p 40-42
  7.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45
  8.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64
  9. 안토니 애버릿, <<키케로>>, 서해문집, 2003, p 441
  10. 안토니 애버릿, <<키케로>>, 서해문집, 2003, p 441
  11.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68
  12.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68
  13.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69
  14. 안토니 애버릿, <<키케로>>, 서해문집, 2003, p 472
  15.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35
  16.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71
  17.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18
  18. 플루타르코스, 김병철 옮김, <<플루타르크 영웅전>> 7, 범우사, 1994, p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