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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정보 |이름 = 백기완 |원어이름 = 白基玩 |그림 = PGWinNPP.jpg |출생일 = {{출생일과 만나이|1932|1|24}} |언어 = 한국어, 일본어, 중국어 |배우자 = 김정숙 |자녀 = 슬하 1남 3녀 |출생지 = [[일제 강점기]] [[황해도]] [[은률군|은율]] |국적 = {{KOR}} |필명 = 호(號)는 민초(民草)· 부심이 |직업 = [[정치가]] <br /> [[사회운동|사회운동가]] <br /> 언론인 <br /> 작가 <br /> [[소설가]] |종교 = [[무신론]] |장르 = 시문학, 소설, 출판, 저술 |활동 기간 = 1956년 ~ 현재 |웹사이트 = [http://www.busimi.com/ 홈페이지 부심이 백기완] }} '''백기완'''(白基玩, [[1932년]] [[1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시민사회운동가, 통일운동가로, 정치인이자 작가이기도 하다. 황해도 은율 출신. [[1964년]] [[한일회담|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참여한 이래 반독재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 노동운동 등에 참여하였다. "장산곶매 이야기", "우리 겨레 위대한 이야기" 등을 써 왕성한 저술 활동을 하기도 했다.[[1987년]]의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제13대]]와 [[1992년]]의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제14대]]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대통령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해 중도사퇴하거나 낙선하기도 했다. == 생애 == === 정치 운동 === 백기완은 [[황해도]] [[은률군]] 장련면 동부리에서 태어났다. [[1946년]] 황해도 일도초등학교를 졸업했고 해방 이후 월남했다. 백기완은 초등학교 이외의 정규교육과정은 거치지 않았지만, 독학으로 공부하였다. 실향민 출신으로 일찍이 통일문제에 눈을 떠서 1964년 한일협정 반대운동에 참여하였고, [[1967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설립하여 [[백범]] 사상 연구와 보급에 힘썼고, 이와함께 민주화운동에도 뛰어들었다. [[1973년]] 유신헌법 개정 청원운동을 펼치다 긴급조치위반으로 옥고를 치렀다. [[1975년]] [[9월]]에는 [[양일동]], [[김동길]]과 함께 [[장준하]] 장례식을 주관하고 추도사를 낭독하였다. 이후 [[1979년]]에 [[YMCA 위장결혼식 사건]]으로 체포되어, 계엄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어 징역형을 선고 받아 복역하다가 [[1981년]]에 [[3·1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1983년부터 1988년까지 민족통일민중운동연합 부의장을 지냈다. [[1987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1987년 대통령 선거]]에 재야 운동권의 일부인 "[[제헌의회파]]" 그룹의 추대로 독자 민중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다. 대선후보직을 양보하여 군정종식을 위한 [[김영삼]] [[김대중]] 양김씨의 후보단일화를 호소하며 사퇴하였다. 그러나 [[1987년]] [[9월]] [[김영삼]]과 [[김대중]]은 후보단일화 협상에서 이견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 노태우가 36%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선거에서 군사정권이 연장되자, 실망한 그는 제도권 정치권과 타협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었으나 보수야당과 결별하였다. 1992년 독자 민중후보로 재야운동권의 추대를 받아 다시 [[12월]] [[1992년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대통령선거]]에 출마하였다. 2번의 대선 모두 별도의 정당이 없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특별히 백기완선거대책운동본부 약칭 백선본이 구성되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한 뒤 정치 일선에서는 물러났다. === 시민 사회 운동 === 이후에는 정치일선에서 물러났지만 자신이 설립한 통일문제연구소를 맡아 재야에서 계속 [[통일운동]]과 진보적 [[노동운동]]에 관여,진력해 오고있다. 한편, 독학으로 쌓은 해박한 지식으로 창작활동에도 힘써 《장산곶매 이야기》,《부심이의 엄마생각》등의 소설과 수필집을 펴내기도 하였다. 이후 장준하선생 암살진상규명위원회 공동대표, 민족문화대학설립위원회 대표 등을 역임하였고, [[1996년]] 고 장준하선생 21주기추도식 준비위원회 공동대표에 선출되었다. [[1999년]] [[11월]] 계간잡지 《노나메기》지를 창간하여 발행인이 되었다. === 2000년대 이후 === 2000년대 이후에도 그는 계속 시민사회 운동에 동참하였고, [[2000년]] [[5월]]에는 [[한양대학교]] 겸임 교수로 임용되었다. === 일화 === 백기완은 각별한 화법으로 대통령선거의 선거연설 녹화 때도 한번의 중단없이 주어진 시간을 채워 방송국 관계자들을 경탄시킨 일화가 있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에는 파주 대표팀 트레이닝센터(NFC)에서 축구협회의 요청으로 대표선수들에게 강연을 하면서 인연을 맺게 됐다. [[히딩크]]는 어깨동무를 한 채 포즈를 취하는 등 남다른 정을 표했다. 허진 대표팀 미디어담당관은 짧은 만남이었던데다 강연내용도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그의 열정적인 강연 모습, 한복차림의 독특한 카리스마, 통일운동에 헌신한 이력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고 출국에 앞서 꼭 한번 다시 만나고 싶어했다고 한다. 결국 [[히딩크]] 감독이 바쁜 일정 탓에 백 소장을 만날 시간을 잡지 못해 친필로 서명한 서신으로 마음을 대신하려 했지만 [[히딩크]] 감독이 자신을 만나기 원한다는 소식을 들은 백 소장이 이날 공항으로 나오면서 둘의 만남은 성사됐고 이 자리에서 히딩크 감독은 통역을 통해 "선수들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해 줘 고맙다. 당신을 보면 `한국사람'을 만나는 듯 하다"고 전했고 백 소장은 "사람은 만났다 헤어지지만 뜻과 뜻은 헤어지는게 아니라 역사와 함께 나아가는 것"이라며 화답했다.<ref>[http://www.sportsseoul.com/common/html/read.asp?ArticleID=364394 백기완 소장, 이색 주례 조건]{{깨진 링크|url=http://www.sportsseoul.com/common/html/read.asp?ArticleID=364394 }} 스포츠서울 2006. 9. 19</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01&aid=0000202285 <히딩크, 백기완 소장에 우애 표시>] [[연합뉴스]] 2002년 7월 7일 작성</ref><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7&oid=015&aid=0000526299 백기완소장 히딩크 환송 눈길] [[한국경제]] 2002년 7월 7일 작성</ref> [[신학자]] [[정승우]]박사에 의하면 백기완은 대중연설에서 "나는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기생오라비처럼 곱상한 예수는 당최 마음에 들지 않아. 내 생각에 그건 잘못된 그림이야. [[예수]]는 [[노동자]]였어. 예수의 [[직업]]이 [[목수]]가 아니가서. [[노동]]으로 단련된 몸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그리고 예수는 부당한 사회질서에 대항한 깡따구 있는 인물이었다구."라고 말함으로써 지배질서와 결탁함으로써 [[역사적 예수]]와 멀어진 [[기독교]]를 비평하였다.<ref>《예수 역사인가, 신화인가》/정승우 지음/책세상 p.28</ref> 또한 2009년 겨울 [[서울역]]광장에서 치뤄진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노제에서 연설가로 초대받아 "용산참사가 아니라 용산학살이야"라고 외쳤다. == 저서 및 작품 == === 저서 === *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ref>책 외에 같은 이름의 시는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의 가사가 되었다.</ref>》, 2009년 * 《부심이의 엄마생각》, 2005년 * 《백기완의 통일이야기》, 2003년 *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1999년 * 《장산곶매 이야기》, 1993년 * 《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 * 《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 * 《이심이 이야기》 * 《우리 겨레 위대한 이야기》 * 《그들이 대통령이 되면 누가 백성노릇을 할까》 * 《나도 한때 사랑을 해본 놈 아니요》 * 《버선발 이야기》, 2019년 === 논설 및 편저 === * 《항일 민족론》 * 《통일이냐 반통일이냐》 * 《백범어록》 (김구 저, 편저) === 시집 === * 이제 때는 왔다 * 젊은 날 * 백두산 천지 * 아! 나에게도 === 기타 === * 대륙, 영화 시나리오 * 단돈 만원, 영화 시나리오 * 쾌지나 칭칭 나네, 영화 시나리오 == 기타 == 그가 지은 시 '묏비나리'에 나오는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가사로 한 가곡 [[임을 위한 행진곡]]은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사망한 [[윤상원 (민주화운동가)|윤상원]]과 78년 노동운동 중 사망한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에 연주된 후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1980년]]대와 [[1990년]]대의 학생,노동운동의 대표 애창곡이 되었다. == 가족 관계 == * 처: 김정숙, [[초등학교]] 교사 역임 ** 딸: 백원담, 교육자, [[성공회대학교|성공회대]] 중어중국학과 전임교수 ** 아들: 백일, [[중앙대학교|중앙대]] 경제학과 강사 ** 딸: 백미담, 화가 ** 딸: 백현담 == 같이 보기 == * [[임을 위한 행진곡]] * [[광주 민주화 운동]] * [[백기완선거대책본부]] * [[청년진보당]] * [[계훈제]] * [[김동길 (1928년)|김동길]] * [[김영삼]] * [[김대중]] * [[노무현]] * [[문익환]] * [[김영규 (1946년)|김영규]] * [[금민]] * [[민중 민주]] * [[문동환 (목회자)|문동환]] * [[공덕귀]] * [[이태영]] * [[전태일]] * [[윤보선]] * [[장면]] * [[장준하]] * [[함석헌]] * [[이재오]] * [[이우정]] * [[양일동]] * [[오세철]] * [[오종렬]] * [[김수행]] * [[함세웅]] {{col-end}} == 역대 선거 결과 == {| class="wikitable" |-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 |[[대한민국 제5대 국회의원 선거|제5대 총선]]||[[서울 용산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용산구 을)]]||5대||[[무소속]]||{{막대|무|0|1|7|3}} 1.73%||700표||5위||낙선 |-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제7대 총선]]||[[서울 영등포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영등포구 갑)]]||7대||[[민주당 (1967년)|민주당]]||{{막대|녹|0|1|8|5}} 1.85%||2,234표||3위||낙선 |-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제13대 대선]]||[[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13대||[[무소속]]||-||-||-||사퇴 |-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제14대 대선]]||[[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14대||[[무소속]]||{{막대|무|0|1|0|0}} 1.00%||238,648표||5위||낙선 |} == 각주 == ==출처== <references /> {{분류:분류수정중}} == 참고 자료 == * [http://www.busimi.com/ 홈페이지 부심이 백기완] == 출처 == <references /> [[분류:출생/1932년]] [[분류:생일/1월 24일]] [[분류:직업/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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