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리 뒤 샤틀레

최근 편집: 2019년 12월 3일 (화)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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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rianne Loir. 프랑스 보르도 미술관이 소장중인 에밀리의 초상화.[1]

개요

가브리엘 에밀리 르토넬리에 드 브르퇴유(Gabrielle Émilie Le Tonnelier de Breteuil, Emilie du Chatelet, 1706년 12월 17일 ~ 1749년 9월 10일)는 최초의 근대 여성 과학자이다. 통칭 샤틀레 부인.

생애

일찍이 그의 재능을 알아본 아버지 루이 니콜라스는 그가 남자 형제들과 동등한 교육을 받을 수 있게 후원했다. 스페인어, 영어, 이태리어, 라틴어, 그리스어, 독일어 뿐만 아니라 당대 여자들은 받을 수 없었던 수학, 문학, 과학, 펜싱, 승마 교육을 받았다.

1725년 18살의 나이에 당시 머스킷 총병이었던 샤틀레 후작이자 로몽 백작인 플로랑 클로드(프랑스어: Florent-Claude)과 결혼하여 아이 셋을 낳았다. 플로랑 클로드는 아내가 공부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지만 에밀리 뒤 샤틀레는 결혼과 출산 이후로 과학의 세계에 진입할 수 없었다.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인 피에르루이 모페르튀를 만나 고등수학을 함께 공부하면서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에밀리는 모페르튀에게 수학적 측면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나 나중에 모페르튀는 에밀리의 저서인 《물리학 입문》을 수학적 측면에서 비판한다. 후에 에밀리는 독일의 수학자 자무엘 쾨니히(Samuel König)에게 수학을 배우면서 더욱 심도 있게 공부하게 된다.

스물여덟 살 때 볼테르를 처음 알게 된 후 약 10여 년간 볼테르와 연인 관계였으며, 죽을 때까지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에밀리 뒤 샤틀레는 볼테르와 다양한 연구와 업적을 남겼다.

업적

에밀리가 라틴어로 쓰여진 아이작 뉴턴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2]를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주석을 달았기에, 뉴턴의 과학철학이 더 널리 알려졌다.

  • 운동하는 물체가 갖는 힘에 관한 연구
  • 불의 성질에 관한 연구
  • 뉴턴의 프린키피아 번역 및 주석

후세에 끼친 영향

에밀리 뒤 샤틀레의 분석과 연구는 이후 과학 발전에 매우 중요한 업적이 된다. 에밀리가 확립한 결코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양적 개념의 은 19세기에 이르러 패러데이와 같은 과학자들에 의해 모든 에너지의 보존 가능성 개념을 확립시키기 위해 채택된다. 아인슈타인의 의 '제곱' 개념에 영향을 주었다. 에밀리와 볼테르가 시레이 성에서 보여주었던 전통을 타파하는 독자적인 삶의 방식에 사람들은 강한 인상을 받았다. 두 사람은 불합리한 관습과 전통에 의문을 품었고, 다음 세대 계몽주의 사상의 선조 격 역할을 했다.

출처

  1. “Émilie du Châtelet”. 《Wikipedia》. 
  2. 원제목을 줄여서 프린키피아,라고 불렀다. 1687년에 나온 세 권짜리 저작으로, 서양의 과학 혁명을 불러일으킨 책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