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틴 드 피장

최근 편집: 2019년 12월 21일 (토) 01:46
왹비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12월 21일 (토) 01:46 판 (생애)

크리스틴 드 피장 혹은 크리스틴 드 피잔(프랑스어: Christine de Pizan, 1364~1430)은 이탈리아 베네치아 출신의 프랑스 작가이자 철학자, 시인이다. 프랑스 최초의 직업적인 여성 문필가로 간주된다.[1] 유명한 저서로는 <여성들의 도시 Le Livre de la Cite des Dames>가 있다.

생애

1364 년 베니스에서 출생한 크리스틴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녀의 아버지가 프랑스 왕 샤를 5세의 점성사 겸 과학 고문으로 임명돼 파리로 떠났다. 크리스틴이 파리로 간 것은 서너 살 때로 추정되며 이후 그녀는 프그녀는 16세에 에티엔 뒤 카스텔이라는 피카르디 출신 집안의 전도양양한 젊은 공증인과 결혼했다.

그러나 행복한 결혼 생활은 결혼한 지 10년 되던 해, 갑작스럽게 닥친 남편 에티엔의 죽음과 함께 끝나고 말았다. 새로 등극한 샤를 6세를 수행해 파리를 떠나 각지를 여행하던 에티엔은 여행지에서 급서하고 말았는데 아마도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전염병에 걸린 것으로 추측된다. 졸지에 과부가 된 크리스틴은 혼자서 어린 자식 셋을 키우고 어머니를 봉양해야만 했다. 남동생들은 이탈리아에 있는 재산을 물려받기 위해 모두 그곳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이런 힘든 시기를 겪는 동안 그녀는 공부에서 위안을 찾았고 또한 자신의 슬픔을 표현하기 위해 시를 썼다. 그녀의 특이성은 이상화된 궁정의 사랑을 찬미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화려함의 이면에도 주의를 기울였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사랑의 신에게 보내는 편지(Epistre au Dieu d'Amour)>(1399)에서 그녀는 여성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성을 조롱하고 폄하하는 젊은 귀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페미니스트적 면모를 드러냈다.

그녀가 여성의 옹호자로 유명해진 것은 ≪장미 이야기≫에 반박해 쓴 <장미 이야기에 관한 편지(Epistre sur le Roman de la Rose)>(1401∼1403)를 통해서다. 1402년, 피장은 이 편지들을 프랑스 왕비인 이자보 드 바비에르에게 전달했으며 이 때문에 그들의 논쟁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오를레앙 공의 궁정을 떠나 샤를 6세의 삼촌인 부르고뉴 공작의 후원을 받게 된다.

피장이 오를레앙 공작의 궁정에서 부르고뉴 공작의 궁정으로 옮겨 간 것은 단순히 후원자를 바꾼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이 두 진영은 서로 적대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백년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국왕 샤를 6세가 광증의 발작을 일으키자 심각한 권력 공백 상태가 초래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왕의 동생과 삼촌은 각각 파당을 만들어 권력 획득을 위한 각축을 벌였고 거기에 영국이 가세해 정정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피장은 이 두 진영의 화해를 바랐으며 스스로도 그것에 일조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정치 상황은 더욱 어려워져만 갔다. 1407년, 오를레앙 공이 부르고뉴 공작의 지령에 의해 암살당하자 프랑스는 내전 상태에 들어갔으며 밖으로는 이 기회를 틈탄 영국의 공세에 시달렸다. 1415년, 프랑스군이 아쟁쿠르 전투에서 큰 피해를 보자 크리스틴은 이 전투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잃은 여성들을 위로하기 위해 ≪인생이라는 감옥에 대한 편지≫를 썼다.

이후에도 프랑스의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1419년, 부르고뉴 공작 장이 암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진다. 그러자 그의 아들 필립이 영국과 연합하는 바람에 전세는 프랑스에게 매우 불리해지고 1420년, 이자보 여왕은 영국과 트루아 조약을 맺어 영국 왕 헨리 5세를 프랑스의 섭정으로 임명한다. 이 때문에 황태자 샤를은 정통성을 빼앗기고 1422년 광증에 시달리던 샤를 6세가 사망한 이후에도 왕위를 계승하지 못한다.


피장은 1430년대 초에 그녀의 딸 마리가 수녀로 있던 푸아시의 수녀원에서 죽었고,≪잔 다르크 전≫은 결국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되고 말았다.[2]

저서 및 작품

여성들의 도시

많은 동시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여성 적대적인 관점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내용이다. 성경이나 역사에 등장하는 수많은 여성의 진가를 인정하며 여성이 자유롭고 남성과 똑같은 권리를 지닌 유토피아적 사회상을 그린다.[3]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의 권리 옹호>(1792)보다도 4세기나 앞선 페미니즘 저작의 효시라 볼 수 있다.

장미 이야기에 관한 편지

그녀가 여성의 옹호자로 유명해진 것은 ≪장미 이야기≫에 반박해 쓴 <장미 이야기에 관한 편지(Epistre sur le Roman de la Rose)>(1401∼1403)를 통해서다. 1402년, 피장은 이 편지들을 프랑스 왕비인 이자보 드 바비에르에게 전달했으며 이 때문에 그들의 논쟁은 전국적으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이후 그녀는 오를레앙 공의 궁정을 떠나 샤를 6세의 삼촌인 부르고뉴 공작의 후원을 받게 된다.[4]

사랑의 신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의 신에게 보내는 편지(Epistre au Dieu d'Amour)>(1399)에서 그녀는 여성을 숭배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여성을 조롱하고 폄하하는 젊은 귀족에 대해 비판함으로써 페미니스트적 면모를 드러냈다.[4]

발언

여성을 비방하는 사람들은 소인배다. 그들은 현명함과 기품 면에서 자신들을 뛰어넘는 여성을 많이 만났기 때문에 여성들을 모욕하고 화를 낸다. 이러한 시기 때문에 그들은 여성들을 뒤에서 욕한다.

출처

  1. “Christine de Pizan”. 《위키페디아》. 
  2. “크리스틴 드 피장 작가소개”. 《Yes24.com》. 2019년 12월 21일에 확인함. 
  3. 안체 슈룹. 《페미니즘의 작은 역사》. 숨쉬는 책공장. ISBN 979-11-86452-17-2. 
  4. 4.0 4.1 “Christine de Pizan”. 《예스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