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광주 민주화 운동

최근 편집: 2023년 9월 21일 (목) 10:22
알랑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9월 21일 (목) 10:22 판
 1980년 5월 18일, 한반도 서남단의 아름다운 도시 광주와 그 인근 지역에서는 비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국토를 지켜야 할 군인들이 본분을 어기고 동족인 시민의 가슴에 총부리를 겨누고 무차별적인 살상 행위를 한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분노한 시민들은 물러서지 않고 무장을 하고 폭력적인 군부집단에 맞서서 용감하게 저항하였다. 시민들이 스스로 무장을 하고 불법적인 군인 집단에 저항한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한국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5월 27일까지 열흘 동안 이어진 이 항쟁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숨지고, 부상당하고, 고문을 당하고, 투옥되었다. 더 이상 있어서는 안 되는 이 비극의 피해 규모는 아직도 정확히 파악되지 않고 있다. 5월 18일에서 27일 사이에 최소 150명 이상의 민간인이 현장에서 사망하였고, 80명 이상이 현재까지도 실종 상태에 있으며, 수천 명이 부상을 당하고, 당시의 부상 후유증으로 1980년 이후에 사망한 사람도 백 명이 넘는다. 군인과 경찰도 26명이 사망했는데, 군사망자는 대부분 군부대 간의 오인 사격에 의한 사고였다. 

[518기념재단 홈페이지 내 '5‧18민주화운동의 성격' 中]


1980년 5월 18일부터 5월 27일까지 10일에 걸친 광주광역시 내에서 벌어진 항쟁과 국가 폭력을 이른다. 법적 명명으론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나, 광주 내에서는 단순 운동보다는 폭력에 저항했다는 의미를 담아 5·18 광주 민중 항쟁으로 불린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암살 이후 "서울의 봄"으로 불리는 민주화 운동이 벌어 졌다. 하지만 같은 해 12월 12일 전두환을 필두로한 신군부는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하고 이듬해 (1980년) 5월 17일 2차 쿠데타를 일으켜 사실상 정권을 장악하였다. 5월 17일 신군부는 전국에 비상 계엄령을 내리고 정치인, 재야인사 등을 감금하였다.

하지만 광주지역의 대학생과 시민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시위를 일으켰고 신군부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공수부대 등 계엄군을 투입시키며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하지만 폭력진압에 분노한 시민들과 청소년들이 동참하며 시위는 더욱 커졌다. 5월 20일에는 만 명의 시민이 시위에 동참하였고 시민군이 조직되었다. 5월 21일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무차별 발포를 한 후 외곽으로 철수하여 광주 봉쇄작전을 펼쳤다.

이후 5일간은 역사에서 보기 힘든 장면이 펼쳐졌다. '광주해방구'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는 이 기간 동안 시민들은 빼앗은 무기를 스스로 반납하는 등 자치질서를 만들었고 주먹밥 등 음식을 나누고 줄을 서서 헌혈을 하는 모습이 벌어 졌다. 치안 공백에도 불구하고 이 기간동안 상점, 은행, 백화점 등에는 한 건의 약탈도 없었다.

이 기간동안 광주시민들은 김대중 등 정치수 석방을 외치며 평화시위를 벌였고 또 미국이 도움의 손길을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군의 작전권을 가지고 있던 미국은 경기도 양평에 있는 20사단을 광주에 진압군으로 보내는 것을 허용했다.

5월 27일 새벽 계엄군은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 명으로 광주 시내의 당시 전라도 도청을 공격하여 남아서 항전하던 시민군들을 살상하며 광주항쟁은 막을 내렸다.

영향과 평가

당시 계엄군은 광주 시민들의 시위를 폭력으로 진압하였으며, 학살을 저지르기도 하였다. 한국 국군의 존재목적은 국토를 방위하고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호하는 것이다. 그런데 5월 광주에서는 군이 자신이 보호해야 할 시민에게 총을 겨누었다. 사건 당시 군부는 광주를 폐쇄하였고 이후 5.18을 간첩이 일으킨 폭동이라 날조하여 사회적으로 선전하였으나, 광주에서 벌어진 일들을 완전히 숨기는 데에는 실패하였다.

광주시민들은 미국이 한국의 민주화를 지켜줄 것으로 믿고 있었으나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양평 20사단의 투입을 승인한 것이 나중에 알려졌고, 또 레이건 대통령이 전두환 정권을 승인하면서 광주항쟁은 미국의 선의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고, 더 나아가서는 반미감정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5.18은 이후 한국 민주화 운동의 큰 불씨가 되었고 1987년의 6월항쟁을 거치는 한국의 민주화의 시작점이 되었다. 1997년(김영삼 정부)에는 '5.18 민주화운동'을 국가기념일로 제정하기에 이르렀다. 5.18 민주화 운동은 한국 뿐 아니라 1989년 천안문, 1999년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의 다른 민주화 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 규명은 40여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현재 진행형이다. 2018년에는 미투 운동의 일환으로 미성년자를 포함한 많은 광주의 여성들이 계엄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사실이 밝혀지기도 하였고 2019년에는 전두환이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중에 광주에 갔다는 증언이 나오기도 하였다.

이후 연세대, 고려대, 이대, 아주대,성공회대, 전남대, 한신대, 감리교신학대, 시립대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전형)으로 학생을 선발하기도 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