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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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관순(柳寬順, 1902년 12월 16일 ~1920년 9월 28일)은 3.1만세운동에 참가한 독립운동가이다.[1]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병천면 용두리(옛지명: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에서 유중권과 이소제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1915년 미국인 선교사 S. Alise H. Sharp의 소개로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에 교비생[2]으로 편입하여, 1918년에 이화여자고등보통학교 1학년에 진학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유관순은 학생들과 함께 가두시위를 벌이다가 경무총감부에 붙잡혔고 외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3월 10일 학교에 임시휴교령이 내려지고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에 내려온 유관순은 병천,목천,천안,안성,청주,진천 등지의 학교와 교회 및 유림 등을 방문하여 총궐기하여 만세운동을 벌이도록 종용하고, 거사 하루전날엔 직접 봉화를 올리기도 하였다.

유관순은 거사일인 1919년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네 장터에서 3,000여 명의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며 시위를 지휘하다가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었다. 이때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를 비롯한 19명이 총격으로 죽고 3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체포 후 천안 헌병대를 거쳐 공주 검사국으로 이송되어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5년형을 언도받았다. 그 후 공소를 제기하여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서 복역하는 중에도 어윤희 등과 옥중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 9월 28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체포당시 입었던 상처와 계속되는 고문으로 인해 19의 나이로 순국하였다.

유관순의 시신은 이화학당에 인도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이 일대가 일제의 군용기지로 전환됨에 따라 미아리 공동묘지로 다시 이장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1989년 10월에 이르러 매봉산에 유관순의 초혼묘를 봉안하였다.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며, 2003년 4월 1일에는 탄신 100주년을 맞이하여 천안시 병천면에 유관순열사기념관을 개관하여 운영하고 있다.

참조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2년 12월 14일). 《6.25 전쟁 여군 참전사》. ISBN 978-89-89768-86-9. 
  2. 학교의 경비로 공부하는 학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