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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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실 어린 김지영 씨는 동생이 특별 대우를 받는다거나 그래서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도 못했다. 원래 그랬으니까. 가끔 뭔가 억울하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자신이 누나니까 양보하는 거고, 성별이 같은 언니와 물건을 공유하는 거라고 자발적으로 상황을 합리화하는 데에 익숙했다. 어머니는 터울이 져서 그런지 누나들이 샘도 없고, 동생을 잘 돌봐 준다고 항상 칭찬했는데, 자꾸 칭찬을 받으니까 정말 샘을 낼 수도 없었다. /1982년~1994년, 25~26쪽/
  • 정부에서 ‘가족계획’이라는 이름으로 산아제한 정책을 펼칠 때였다. 의학적 이유의 임신중절수술이 합법화된 게 이미 10년 전이었고, ‘딸’이라는 게 의학적인 이유라도 되는 것처럼 성 감별과 여아 낙태가 공공연했다(* 박재헌 외, <확률 가족>(마티, 2015). 57~58쪽 & <여성 혐오의 뿌리는?> <<시사인>> 417호 참고). 1980년대 내내 이런 분위기가 이어져서 성비 불균형의 정점을 찍었던 1990년대 초, 셋째아 이상 출생 성비는 남아가 여아의 두 배를 넘었다(** 출산 순위별 출생 성비>, 통계청). /1982년~1994년, 29쪽/
  • 어머니는 아버지처럼 정해진 직장을 가지고 출퇴근하지는 않았지만, 아이 셋을 돌보고, 노모를 모시고, 집안 살림을 온전하게 맡아 책임지면서 동시에 돈을 벌 수 있는 일을 쉼 없이 찾아 했다. 형편이 고만고만하던 동네의 아이 엄마들이 대부분 그랬다. 당시 보험 아줌마, 야쿠르트 아줌마, 화장품 아줌마처럼 ‘아줌마’라는 이름이 따라붙는 주부 특화 직종들이 붐이었는데, 대부분 회사에 직접 고용되지 않는 형태라 일터에서 분쟁이 생기거나 다쳐도 혼자 끌어안고 해결한다고들 했다(* 김시형 외, <기록되지 않은 노동>(삶창, 2016), 21~29쪽 참고). /1982년~1994년, 30쪽/
  • 어머니는 이 나이에 뭘 배우겠느냐고 손을 내저으며 웃었는데, 그때 어머니의 나이가 서른다섯이었다. /1982년~1994년, 3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