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최근 편집: 2023년 8월 13일 (일) 22:13
전태일
출생1948년 9월 28일
대한민국 대구광역시
사망1970년 11월 13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동대문구
국적대한민국
직업재봉사, 노동운동가
종교개신교 (감리회)
부모전상수, 이소선
친척여동생 전순옥·전순덕 남동생 전태삼
웹사이트(재) 전태일재단
정보 수정

전태일은 봉제 노동자, 노동운동가, 인권운동가이다. 1969년 6월 청계천 공장단지 노동자들의 노동운동 조직 바보회를 결성하고 바보회가 와해된 후 삼동친목회를 결성해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근로조건 개선과 노동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살했다. 이후 조영래가 《전태일 평전》을 썼다

생애

전태일은 1948년 9월 28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전상수 씨는 피복제조업 계통의 봉제 노동자로 일을 하다 사업에 실패를 거듭하며 폭음과 술주정을 일삼으며 아내와 자식들을 학대하였다. 어머니 이소선 씨는 의붓아버지가 낳은 자식들 틈에 끼어 구박을 당하면서 자라, 인간차별이라면 아주 치를 떨게 된 올곧은 심성을 가진 사람이었더.

1954년 전태일이 여섯 살 되던 해, 부산에서 소규모 제조업을 하던 아버지는 염색공장에다 염색을 맡긴 원단이 오랜 장마를 만나 다 상해버리는 바람에 재기할 수 없는 타격을 받고, 그해 여름 가족들을 이끌고 서울로 무작정 상경하였다. 전상수 씨는 2년 동안 그때그때 생기는 일거리를 찾아 평화시장, 중부시장 등을 떠돌아다니며 실업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고, 어머니는 동냥을 하다 태일의 아버지가 준 돈으로 채소행상, 팥죽장사, 비빔밥장사, 찹쌀떡장사 따위를 했다. 전태일이 여덟 살이 될 때 쯤에는 어느 정도 가계가 안정이 되어 태일은 남대문초등공민학교에 2학년으로 편입하여 짧은 학교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4.19혁명이 일어나면서 체육복 단체주문을 받아온 브로커가 학교에서 받은 옷값을 떼어먹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에 가족들은 큰 상심을 하였고 어머니는 정신이상자가 되다시피하여 전태일은 신문팔이를 하기 시작했다. 전태일은 수업이 파하고 남는 시간에 신문을 팔다가 학교와 병행하기도 힘들긴 물론이거니와 이것으로는 가족의 식비를 벌기가 어려워 4학년 초에 학교를 중퇴하였다. 전태일은 여섯 식구의 생계를 전적으로 떠맡게 되어 동대문시장아 나가 삼발이장사를 시작하였으나, 돈이 모자라 위탁판매소에 입금해야하는 돈으로 가족들 먹을 국수를 사는 일이 많아졌고 미수금이 늘어갔다. 1961년 전태일은 월말 계산일을 하루 앞두고 대구의 큰집으로 첫번째 가출을 떠났으나 달리 갈데가 없었던 태일은 며칠 있다가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집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던 태일은 1년여동안 구두닦이를 하며 방황을 하다가 1962년 여름 부산으로 내려가 과거에 살던 고향 영도섬으로 향했다. 배고픔과 피부병에 괴로워하던 태일은 바다에 있는 양배추 속고갱이를 발견하고 바다에 뛰어들었으나 의식을 잃고 어부에게 구출되었다. 그는 서울로 돌아가려 했으나 영천역으로 잘못 간 그는 대구의 외갓집으로 갔다. 외갓집에서 가족들이 대구에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태일은 가족들에게로 돌아가, 기쁜 마음으로 아버지의 재봉일을 도우며 살아갔다.

1963년 5월 열다섯 살이 된 태일은 청옥고등공민학교라는 야간학교에 입학하였다. 이것은 전태일이 "내 생애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회상하는 청옥 시절이다. 그러나 청옥에서의 꿈같은 학생생활이 1년도 채 되지 못한 1963년 겨울, 전상수 씨는 태일에게 학교를 그만두고 전적으로 재봉일만 돌보라는 명령을 내렸다.태일은 반항하였으나 아버지의 폭력에 하는 수가 없었다. 이에 태일은 서울에서 고학을 하기로 결심하고 2살 아래인 태삼이도 데리고 올라가서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작정하고 무작정 서울로 떠났다. 그러나 열다섯살의 태일을 서울은 받아주지 않았다. 집 떠난 지 사흘, 전태일의 '서울 고학'의 꿈은 패배하였고 형제는 대구행 야간열차를 타고 돌아갔다. 형제의 가출 이후 아버지의 폭음과 폭력은 더욱 심해졌고 가난 역시 마찬가지였다.

1964년 2월, 어머니는 식모살이를 가야겠다고 말을 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하였다. 태일의 아버지는 계속해서 부엌 살림을 부수었고, 태일은 버티다가 틈을 보아 작은 아버지의 손목시계를 훔쳐내어 식모살이 떠난 어머니를 찾아 막내 순덕이를 업고 서울로 떠났다. 서울에서 고된 노동과 참혹한 삶을 이어나가던 열여섯살의 태일은 동생을 미아보호소에 맡기고 구두닦이, 신문팔이, 담배꽁초 줍기, 아이스케이크 장사, 우산장사, 손수레 뒤밀이 등의 노동을 하였다. 1년 넘도록 이런 생활을 꿋꿋하게 견뎌내었다.

뿔뿔이 흩어졌던 가족들은 다시 서울에서 재회하였다.

전태일은 이후 평화시장에서 봉제노동자로 생활을 하며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