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TERF의 토론 주제

1. 들어가기 페미니즘은 질문의 소실점에 거하는 것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계쟁의 도입부일 뿐이다. 다시 말해, 페미니즘은 최종적 선고의 장소가 아니며 다층적 논쟁의 터로서 가장 치열한 쟁점들을 공론장에 올리는 행위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페미니즘은 섣부른 화해와 평화의 수사, 고고한 윤리적 우월성의 현시가 아니라 존재론적 폭력이라는 새로운 사유의 터를 열어젖히는 각축의 장인 것이다. 여기서 “존재론적 폭력”2)이란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형이상학 입문』(Introduction to metaphysics)에서 도입하는 개념으로 “지금까지 들어보지도, 말해지지도, 생각되지도 않았던 것들을 드러내고 전개해나가는 쟁투”이자 “창조자들과 시인들, 사유하는 자들, 위대한 정치가들에 의해 지속되는 것”3)이다.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존재론적 폭력을 구사하는 이들은 사유(思惟)의 시작점을 여는 이며, 여기에는 페미니스트들이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페미니스트들은 새로운 세계의 문법을 발명하고자 하는 이들이자 기존의 남성 중심적 문법을 뒤틀어버리는 시인들이자 사유의 대전제와 공리들의 임계점을 드러내며 끝 간 데 없는 질문의 역량을 퍼 올려 철저히 사유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또한 페미니스트들은 정치적인 것의 의미가 지금껏 남성에 의한 공적/사적 영역, 합법/불법의 구분에 의존해왔음을 드러내고 이를 재정의하는 자이자 새롭게 정초된 정치적인 것의 도래를 촉진하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래디컬 페미니즘(radical feminism)과 퀴어 페미니즘(queer feminism)4)이라는 페미니즘 진영 간의 대립각이 펼쳐내는 뜨거운 쟁투의 현장들은 단지 눈앞에 있는 것을 포위 공격하는 전술이 아닌, 지금까지 제대로 논쟁의 장에 올려놓아지지 않았던 것들에 대한 초연(初演)이자 페미니즘의 세기가 열어젖힌 다른 세계에 대한 초안(草案)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페미니즘 대립각들이 끓어 올린 갈등의 비등점(沸騰點)들이 새로운 사유의 도전을 요청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미 다 끝난 것’, ‘이미 다 말해진 것’으로 마침표부터 찍으려는 손쉬운 단정이야말로 새로운 세계의 열림을 은폐하고자 하는 것이자 페미 니즘이라는 가장 철학적인 사유가 수반하는 균열점들을 황급히 봉합하고자 하는 행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단정행위는 주로 영미권 페미니즘의 논의구조에 대한 무비판적 참조를 통해 이루어진다. ‘영미권 페미니즘 논쟁사에서 이것은 이미 승패가 명확히 났다.’, ‘영미권 페미니즘 유행에서 이것은 이미 한물갔다.’라는 식의 사대주의적 관점의 반복을 통해, 지금, 여기의 한국 페미니즘이 쟁점화하고 있는 논의 구조의 맥락성과 문화적 차이의 세밀한 층위들이 모두 간과되고 만다. 그러나 페미니즘은 “촉각적 시간성”(haptic temporality)5)-과거, 현재, 미래가 뫼비우스의 띠처럼 맞닿아있는 새로운 시간성을 창조해내는 것이다. 즉 페미니즘의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 끝난 것이 아닌 현재의 사상적, 실천적 계보학의 이음점이자 절연선일 수 있으며 미래를 향한 상상의 토대이자 상상의 전회를 요청하는 지점이기도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단지 끝마쳐진 것으로 서둘러 선언하는 손쉬운 결론을 향한 태도야말로 페미니즘의 촉각적 시간성을 부인하는 것이자 새로운 이론적 진전을 위한 논쟁의 성실성은 물론 사상적 불화의 용기조차 결여되어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존재론적 폭력이란, “그들(창조자들, 시인들, 사유하는 자들)이 위압적 지배 앞에서 이에 대항하는 견제의 창6)을 내던지는 것이자 이렇게 열어젖혀진 한 세계를 그들의 작업 안에서 움켜잡고자 하는 것”7)이다. 다시 말해, 존재론적 폭력은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힌다는 점에서 비범한 혼란이며 에토스(Ethos)라는 개인적 습속과 집단적 관습에 대한 격렬한 요동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올바름과 평화, 선함, 배려와 조화 등이라는 에토스의 안온함과 입증 가능한 익숙함들을 사유의 참조점으로 소환하는 것은 “전수받은 자신들 현존재의 품위와 수준을 오직 지키기 위해서만 노력하는”8) 체제유지적 관성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성은 새로운 이론적, 실천적 토양의 생성 자체를 막고자 하는 지적 나태함의 산물이자 그토록 유지해보고자 하는 “그 수준의 침몰”9)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새로운 공동체의 토대를 짓기 위한 몸짓은 안전하고 우월한 것, 도덕적으로 입증된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언캐니(uncanny)라는 괴물적인 이질성의 불유쾌함과 반도덕(anti moral)으로서의 불온성에 수맥을 드리우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듣지도 보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았던 것들을 가청 범위와 가시화의 장, 사유의 지평 위에 올려놓는다는 것은 단순한 감각장의 확장과 사유대상의 전환이 아니라, 기존의 기반을 뒤집어엎는 발본적 제스츄어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언캐니의 낯섦과 반도덕의 이탈성이 새로운 공동체의 기반을 짓는 질료인 것은 창조적 초극이라는 넘어섬을 통해서만 새로움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미 축적된 것에 대한 보존이라는 퇴화된 에토스로서의 도덕론-착함을 올바름과 등치시키고 논쟁적 차이를 악이라는 피안의 것으로 실체화하고 이론과 실천의 간극에 대한 비판을 반지성주의로 치부해 공론장에서 몰아내고 정치적 올바름을 이미 결정되어진 공리로 전제해 강령화해 버리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적 맥락에서, 이 논문은 세 가지 층위에서 존재론적 폭력을 구사하는 방식이자 새로운 연대의 공동체를 열기 위한 쟁투의 언어가 될 것이다. 이 논문에서 첫 번째 존재론적 폭력이 거하는 지점은 페미니즘의 축이 개편되고 있음에 대한 논의이자 페미니즘 제 4물결 안에 한국 페미니즘이 어떻게 거하고 있는가에 대해 분석을 다룰 것이다. 극소수의 활동가들과 연구자 그룹에 의해 독점되던 전문가주의적 페미니즘에서 벗어나, 페미니스트 다중의 탄생이 어떻게 연구자-활동가-다중이라는 세 축으로 개편되고 있으며 이 세 요소들 간의 경합의 지점과 연계성, 상호 의존성의 측면이 무엇이 있는가를 살펴볼 것이다. 두 번째 존재론적 폭력은 페미니즘들의 대립각들을 페미니즘 판의 사적 분쟁이 아닌, 뜨거운 이론적 쟁점들로 치밀하게 접근하는 데에 있다. 이를 위해,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과 ‘모두가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한다.’라는 두 명제의 차이가 무엇인가를 드러낼 것이다. 또한 TERF(Trans-exclusionary Radical Feminist)-트랜스 배제적 래디컬 페미니스트라는 용어가 페미니즘 판에서 어떻게 낙인이자 혐오발화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낱낱이 분석함과 동시에 정치적 올바름의 축이 여전히 남성중심적으로 개편되어있는 현실을 비판할 것이다. 나아가 정치적 올바름을 너무도 손쉽게 착함과 조화, 배려 등으로 등치시켜온 단선적 이해방식에 서 벗어나, 보다 심층적이고 입체적 방식으로 정치적 올바름에 대한 개념의 재구성 작업을 시도할 것이다. 세 번째 존재론적 폭력은 서로가 처한 가장 취약한 현실을 서로에 대한 공포의 먹잇감으로 키우고 있는 공포정치와 죽음 공포 레토릭이 어떻게 두 페미니즘 진영에서 발발, 강화되고 있는지를 살펴볼 것이다. 즉 필자는 이를 페미니즘 레퀴엠(feminism requiem)이라 명명하며 이러한 메커니즘의 작동방식과 원인에 대해 상세히 분석할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페미니즘 레퀴엠이 어떻게 남성폭력(male violence)의 구조를 은폐하고 사회적 소수자들 간의 가해자성만을 상호적으로 강화함으로써 남성특권구조의 존속에 기여하게 되는가를 밝히고자 한다. 뿐만 아니라 트랜스 여성과 비트랜스 여성간의 상호적 환대의 정치가 성립하기 위한 조건들-비트랜스 여성의 일방적 희생과 양보, 포용의 방식이 아닌 이 두 그룹 간에 존재하는 상호 혐오적 요소들, 상호 적대적 요소들이 어떻게 적확하게 비판, 개선되어야하는가-을 철저히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페미니즘 레퀴엄을 대체하는 페미니즘 스펙큘라시옹의 장을 펼쳐볼 것이다. 왜냐하면 불어로 spéculation(스펙큘라시옹)은 "심사숙고하는 생각, 사색"의 의미를 가짐과 동시에 "도박, 내기"라는 정반대의 의미 또한 갖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깊이 사유함은 기존의주류적 의미망의 고고한 표면을 찢는 행위이자 남근적 의미경제에 대한 난입 자체이기에 가장 모험적 행위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즉 이 논문은 페미니즘 스펙큘라시옹이라는 과감성과 깊이라는 다면체를 지금, 여기의 쟁점들을 통해 정치하게 펼쳐내는 계기가 될 것이다.

1) 이 논문은 건국대 KU연구전임프로그램과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을 밝힙니다. (NRF-2017S1A5B8057457) 2)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폭력(ontological violence) 개념은 슬라보예 지젝의 Violence, six sideways of reflections 에서 재인용되어 설명된다. “『형이상학 입문』에서 하이데거는 존재론적 폭력이라는 개념을 전개하 는데, 이것은 시인들과 사색하는 이들, 정치가들에 의해 실현되는 새로운 공동체적 세계의 토대를 짓는 모든 몸짓에 관한 것이다.” (Slavoj Zizek, Violence, six sideways of reflections, NewYork, Picador, 2008, p. 68.) 3) Martin Heidegger, Introduction to metaphysics , New Haven: Yale University Press, 2000, p. 65. 4) 2015년 이후 급속도로 대중화된 페미니즘의 세기는 페미니즘의 두 갈래를 발생시키기에 이르렀다. 현재 한국 페미니즘 진영은 래디컬 페미니즘-여성해방운동이자 여성의제의 시급성과 중요성에 대한 부각과 남성중심사회에 대한 강력한 비판론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하는 쪽과 퀴어 페미니즘-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즉 모든 차별들에 대항하는 총체적 해방론이자 포괄적 인권운동으로 페미니즘을 정의하는 쪽으로 크게 나누어지게 되었다. 5) Chamberlain, Prudence(2016), "Affective temporality: towards a fourth wave", Gender and Education , 28(3), p. 460. “페미니즘은 촉각적 시간성-과거, 현재, 미래가 서로 맞닿는 시간성을 창조한다.” 6) counterweight는 무게 중심을 맞추기 위한 평형추라는 의미와 견제장치라는 의미도 가진다. 필자는 이것을 위압적 지배에 대항하는 견제장치임과 동시에, 술부에서 쓰인 throw(던지다)라는 동사적 맥락과의 대응구조를 강조하기 위해, ‘견제의 창’이라는 표현을 의역해서 썼다. 7) Martin Heidegger, Introduction to metaphysics , p. 65. 8) Martin Heidegger, Introduction to metaphysics , p. 67. 9) Martin Heidegger, Introduction to metaphysics , p. 67.

머릿말을 먼저 옮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