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시다 세이지

최근 편집: 2019년 2월 28일 (목) 03:16

요시다 세이지(일본어: 吉田 清治, 1913년 10월 15일 - 2000년 7월 30일)는 일본 주고쿠 야마구치현 출신의 사회운동가이자 작가이다.

생애

1913년 10월 15일, 일본 주고쿠 야마구치현에서 태어났다.[주 1] 이후 일본 도쿄 대학 또는 호세이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였다.[주 2] 1942년 중화항공 상하이지점에서 근무하였고 이후 군법 회의에 회부되어 징역을 살았다. 1942년 9월, 야마구치현 노무보국회 시모노세키 지부에서 일하였다. 1947년, 공산당(일본)후보로 시모노세키 선거구에 입후보하였으나 낙선하였다. 2000년 7월 30일, 일본에서 사망하였다.

활동

요시다 세이지는 일본에서 전쟁범죄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크게 공론화시킨 인물이다. 1983년에 '나의 전쟁범죄'라는 책을 저술하였고 1982년에는 아사히 신문[주 3]에서 자신이 제주도에서 위안부 여성을 징집하였음을 증언하였다. 1983년에는 충청남도에 방한해 전쟁범죄를 사죄하였고 1992년 다시 한국을 찾아 위안부 피해자들에게 무릎 꿇고 사과하였다.

결말

이후 한국에선 제주도의 제주신문이 주민들을 상대로 취재를 진행하였으나 요시다의 증언을 뒷받침할 증거가 없음이 밝혀졌다. [주 4] 당시 제주도민은 "이러한 조그만 마을에서 그렇게 많은 인원이 연행되었다는 적은 없었다"라고 진술하였고 제주신문은 취재 결과에 따라 요시다의 증언이 허구라고 결론지었다. 1992년 일본의 전 치바 대학 교수 하타 이쿠히코가 제주신문의 기사를 통해 요시다의 증언이 허구임을 일본에 알렸다. 결국 일본 내의 비판을 맞닥뜨린 아사히신문은 2014년경 1달가량 제주도민 40명을 상대로 취재를 진행하였으나,허구였음이 명백히 밝혀지자 1면 칼럼과 사설에서 사과하였다.

후폭풍

2014년 9월, 아사히 신문 경영진은 기자회견을 열어 오보를 사죄하였으나 이후에 "일본의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여러 소송에 휘말리는 등 고초를 겼었다.

영향

요시다 증언은 한일 양국의 위안부 문제 조명의 시발점이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으나, 거짓이었다는 점에서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위안부 문제를 분석하는데에 있어 중대한 악영향을 끼쳤고 일본사회의 위안부 인식을 나쁘게 만드는데 기여하였으니 말이다. 그의 증언은 오늘날 "요시다 증언이 허구이니, 위안부도 허구이다"라는 논리를 전개하는 기반이 되어주고 있으니 일본 내 보수 세력의 반격의 불씨를 제공했던 셈이다.

활용 사례

  • 1992년 대한민국 정부 위안부 실태 조사 증거자료로 채택
  • 1996년 국제연합(UN)쿠마라스와미 보고서 증거자료로 채택

부연 설명

  1. 본인이 밝힌 주소지이다.
  2. 그의 정확한 학력은 불분명한 상태이나 두 대학이 유력하다.
  3. 일본 내의 대표적 진보 일간지
  4. https://www.bigkinds.or.kr/resources/BEFORE_90_IMG2/JJM/1989/08/17/19890817JJM04.PDF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