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봉길

최근 편집: 2023년 4월 26일 (수) 16:42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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훙커우 공원으로 떠나기 전, 왼손에 수류탄, 오른손에 권총을 들고 태극기 앞에서 절명사를 가슴에 붙인 채 촬영한 윤봉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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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1908년 6월 21일(1908-06-21)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 178번지 광현당
사망1932년 12월 19일 ()
일본, 가나자와 교오, 미쓰고시육군 공병작업장
사인총살
매장지효창공원 의사묘역
국적대한민국
학력덕산공원 보통학교 자퇴, 서당 오차서숙,
직업독립운동가
다른이름매헌(호)
정보 수정

윤봉길은 1918년 덕산공립보통학교를 입학하였으나, 1919년 3.1운동을 겪고 일제 식민지 교육을 거부하여 자퇴하였다. 서당 오치서숙을 졸업한뒤 야학을 설립하고 독서회 조직, 월례강연회, 수암체육회 및 구매조합 결성 등 등 농촌계몽운동에 앞장섰다.

1930년 독립투쟁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한 뒤 이듬해 상해 모자공장 '미리공사'에 직공으로 치직하여 한인공우회를 조직해 야학 및 노동운동을 실천했다.

상해임시정부 산하 한인애국단의 일원으로서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홍커우 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전승축하기념식장에 수통형 폭탄투척의거를 펼쳐 시라카와 대장 이하 2명 사망, 5명에게 큰 부상을 입혔다. 이 사건을 계기로 중국 국민당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게 된 상해임시정부는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을 마저 사용하기 전에 붙잡혀 일본군 상해파견군 헌병대 제1분대로 압송되었다. 5월 25일 상해파견군 제9사단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았고, 11월 18일 일본으로 호송되어 11월 20일 오사카 육군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2월 18일 가나자와 제9사단 위수구금소로 이감된 뒤 다음날 인근 공병작업장에서 총살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