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위키:포크 프로젝트/리브레 위키/문예봉

최근 편집: 2021년 11월 14일 (일) 11:51
오른쪽 인물이 문예봉이다. 왼쪽 인물은 나운규이다.

문예봉(文藝峰, 1917년 1월 3일~1999년 3월 26일)은 일제 강점기북한의 영화 배우이다. 본명은 문정원(文丁元). 창씨개명한 이름은 하야시 데이켄(林丁元, 임정원)이다. 그녀는 친일 예술인으로 활동하다가, 광복 이후에는 남편인 임선규와 함께 친북 노선을 타서 친북 예술인으로 활동하여, 심영과 함께 친일, 친북 2연패를 달성한 인물이다.

생애

1917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출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고향은 함흥이되 출생지는 경성부라는 설도 있다. 어머니를 일찍 여의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어려운 유년 시절을 보낸 끝에, 배우였던 아버지 문수일을 따라 유랑극단에 흘러 들어가 연기를 시작했다.

13세 무렵에 이미 무대에 서서 아역 배우가 되었고, 처음 어른 역할을 맡은 것은 15세 때로 남자 역할이었다. 무성 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서 주인공 뱃사공의 딸 역을 맡아 나운규와 공연한 것을 계기로 일약 스타가 되었고, 이후 청초한 이미지로 '화형(花形)', '백합꽃'이라는 별명을 달고 193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로서 자리잡았다.

'임자 없는 나룻배' 이후 두 번째로 출연한 영화가 조선에서 최초로 제작된 발성영화 '춘향전'이었다. 문예봉은 춘향 역으로 인기를 얻은 뒤 경성촬영소에 입사하여 경성촬영소 제작 영화에 잇달아 출연했다. 당시 인기 배우였던 김연실의 연기와 비교한 평을 보면, 김연실은 능숙한 연기인 반면 문예봉은 관습화되지 않은 신선한 연기로 표현되고 있다. 주로 맡은 배역은 아담하고 깨끗하며 동정심을 불러 일으키는 농촌 여성의 이미지였다. 함경도 사투리가 배어 있는 억양과 청아하지 못한 목소리는 약점이었다.

남편인 극작가 임선규와는 1933년 결혼했다. 태평양 전쟁 시기에 임선규가 친일 활동을 하면서, 문예봉도 전쟁을 미화하거나 지원병으로 참전할 것을 선동하는 어용 영화에 대거 출연함으로써 친일 예술 행위에 가담했다. 이 때문에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영화 부문에 포함되었다. 문예봉은 친일 영화 단체인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연기과 사원이었고, 총 9편의 친일 영화에 출연했다.

1948년 월북하여 《내 고향》(1949)을 시작으로 《빨치산 처녀》, 《성장의 길에서》, 《다시 찾은 이름》 등 극영화에 출연했고, 한국 전쟁 때는 선무 공연으로 참전했다. 1952년 북한 최초의 공훈배우 칭호를 받았다.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 사이에는 외부에 드러난 활동이 전혀 없는데, 이 기간 동안 숙청당한 상태였다는 설이 있다. 1965년조선영화》 4월호에 게재한 수필에서 스승이자 동료 배우였던 나운규를 지나치게 찬양한 것이 빌미가 되어 지방의 협동농장으로 추방되었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복권되어 영화 《춘향전》(1980)에 '월매' 역으로 출연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1982년 인민배우 칭호를 받았으며, 1999년에 사망하였고, 묘지는 애국열사릉에 마련되어 있다.

야인시대의 문예봉

임선규의 아내로 나온다. 심영의 사회주의 연극에 동참하며 생을 이어오다가 김두한 패거리의 습격으로 아수라장이 되고, 중앙극장에서 나오면서 얼굴 도장을 한번 더 찍는다.

밈화 되긴 했는데 그다지 비중은 크지 않다. 고자라니의 여성 인원 및 개인 목소리가 있다는 것은 가치가 높지만 주인공이 심영과 김두한에 포커싱이 있다 보니까 자주 출현되진 않는다.

일부 네티즌은 '무뇌봉' 동무로 들으면서 문예봉이 아닌 무뇌봉으로 기억하는 네티즌도 더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