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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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 교회의 역사적 맥락

하와이 이민

미국의 남북 전쟁을 전후하여 하와이의 사탕수수산업은 그 중요성을 더 해가고, 이에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주들은 이 산업을 확대하기 위해 처음에는 유럽에서 노동력을 수입하려 했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그래서 제일 먼저 중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880년대 부터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오기 시작했다. 그후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 정부와 지속적인 접촉을 가졌고, 드디어 1902년 11월 고종이 노동 이민을 허락 한 것이 한인 이민의 첫 시작이었다.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의 항구 도시 거리마다 하와이의 풍물, 작업내용, 미국 달러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포스터를 붙이고 노동자를 모집했다. 1개월에 16달러를 지급한다는 광고는 당시 대기근으로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던 조선 노동자에게는 일확천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최초로 121명이 인천항을 떠나, 1903년 1월 13일 개릭(Gaelic)호를 타고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였다. 그 후 1905년 까지 65차에 걸쳐 7천명이 넘는 한국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이주했다.

미국 최초의 한인 이민교회

(하와이 한인 상공회의소 편 ‘하와이 이민사’ 중에서 일부 발췌)

1903년 11월 10일, 하와이 오하우섬에서 미국 최초의 한인 이민교회가 탄생 했다. 현재 ‘그리스도 연합감리교회’의 효시인 ‘한인감리교선교회’(Korean Methodist Church)가 이날 첫 주일 예배를 드렸다. 교회 설립은 안정수 윤병구씨 등 항일운동의 구심점인 ‘신민회’ 설립자들이 주도했다. 하와이 감리교회 선교부 조지 피어슨(George L. Pearson) 목사도 선교회 조직에 힘을 보탰다.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이 처음 미국령을 밟은 사탕수수 한인 이민자들이다. 최초의 한인 이민단은 전부 121명이었다. 대부분이 인천 내리교회 신도들이었던 이들은 1902년 12월 22일 신천지를 향해 인천항을 떠난다. 당시는 한국에서 하와이로 직접 갈 수가 없어서 일본 고베항을 경유한다. 이곳에서 종합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20명이 탈락하고 101명만이 고베항을 출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15명이 탈락하고, 최종적으로 86명만이 상륙 허가를 받아 이들이 최초 미국 이민단이 된다.

1903년 1월13일 호놀룰루 항에 도착한 초기 사탕수수 이민자 중 절반 이상이 첫 예배에 참석했다고 한다. 이듬해에는 하와이에만 한인교회가 14개나 생겨났다. 당시 한인 교인 수는 402명. 그로부터 10년 후인1914년에는 하와이 교회 수가 39개로 늘었고 교인 수는 2,800명에 이르렀다.

한편, 하와이에서 군사력을 키우며 일제로 부터 무력으로 독립을 계획하던 박용만 선생은, 미국 유학후 L.A.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 박사를 하와이로 초청한다. 이후 이들은 동지회를 조직하여 한국의 독립 운동과 한국인의 교육, 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한다. 동지회는 미주 각 여러 지역에 지부를 설치 하였고, 이를 통해 상해 임시 정부를 재정적으로 도왔으며, 일제 식민의 부당함을 알리는데 노력 하였으며, 이승만 박사가 설립한 한인 기독학원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동지회의 활발한 활동은 우리의 선조 이민자들이 사탕수수밭에서 피땀을 흘려 모은 돈으로 이루어졌으며, 당시 이민자들은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2세의 교육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했다.

하와이 한인 노동자들의 미국 본토 유입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70년사’ 중에서 일부 발췌)

하와이 이민역사가 시작된지 불과 5년후인 1910 대한인 국민회 인구조사를 보면 그동안 한국으로 돌아간 남자가 964명, 여자가 19명이고, 미국으로 이주한 남자가 1,999명, 여자가 12명, 사망자가 45명이니 하와이에 남아있는 동포의 수는 이민이 4,187명이고 하와이에서 출생한 아이들이 107명 이었다.특히 1905년과 1907년 사이에만 무려 1,003명의 노동자들이 하와이 사탕 재배 농장을 탈출 하여 캘리포니아로 유입됬다. 1907년 에는 무려 1,000명이 넘는 한국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탈출을 감행했다.

하와이 한인 이민자들이 사탕수수 농장을 떠나서 캘리포니아로 유입되게 된 주 원인으로는 고된 노동과 노예에 가까운 처우를 들 수 있다.

하지만 또다른 요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사실은 본래 하와이에 온 중국인 이민자나 일본 이민자들은 농부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한국 이민자들의 직업적 배경은 매우 복잡한 것이었다.한국인 이민의 대부분은 도시의 일상 노동자들이었으며, 그밖에 구 한국 군인, 하급관리, 정치 망명자, 학생, 광부, 가정 사용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와 같이 농민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 극소수이고 도시적 직업을 가진 잡다한 사회적 배경의 사람들로 구성되었기 때문에 사탕농사와 같이 끈질긴 육체노동을 필요로 하는 곳에서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을 거라고 생각된다.

이렇게 1907년 까지는 1,000명이, 1910년 까지는 2,000명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을 떠나서 미국 본토인 캘리포니아주로 유입되었다. 이렇게 미국 본토에 들어온 한국인들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와 샌 프란시스코(San Francisco)를 중심으로 정착하여 새로운 환경에서 살아가기 시작했다.

미국 본토 한인 교회의 역사

하와이에서 첫 주일 예배가 열린 지 꼭 4개월만인 1904년 3월 11일 미국 본토에 최초의 한인교회인 ‘나성한인 감리교회’(현재의 LA연합감리교회)가 세워진다. 그 다음 해인 1905년에는 샌프란시스코에 ‘상항 한국인연합감리교회’가 설립됐고, 1906년에는 제퍼슨장로교회로 불리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1914년에는 오클랜드한인감리교회, 1919년 시카고한인감리교회, 1921년 뉴욕감리교회 순으로 세워졌다.

이 당시 한국은 1905년 11월 17일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강압에 의한 을사늑약 이라는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면서 더욱 더 깊은 일제 식민지의 늪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었다.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의 탄생

1904년 3월 11일 미국 본토에 최초의 한인교회인 ‘나성한인 감리교회’(현재의 LA연합감리교회)가 세워진지 2년 후인 1906년 5월 10일 에는 미국 본토에 세워진 세번째 한인 교회이며 미국내 최초의 한인 장로교회인 제퍼슨장로교회(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가 로스앤젤레스에 세워진다.

당시 한인들은 주로 1904년부터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이나 파인애플 농장에서 이탈하여 미국 본토로 유입된 사람들과 로스앤젤레스나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여러 지역에 살고 있던 교포들이었으며, 특히 하와이로부터 이민온 사람들 중에는 고국에서부터 기독교를 믿던 사람들이 있었으나 로스엔젤레스에는 아직 교포들이 모여 예배하는 곳이 없었다.

1906년초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방화중(고향은 평양이고 하와이를 거쳐서 미주로 건너왔다)전도사가 로스엔젤레스에 머물던중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평양신학교 교장으로 있던 마포삼열(Samuel A. Moffett)목사가 그때 마침 안식년으로 귀국해 있다가 서로 만나게 되었다. 마포삼열 목사는 로스앤젤레스에 한인교포들을 위한 교회가 필요하다고 말하고 장로교회를 세우기로 마음을 정한후 미 북장로교 나성노회(Presbytery of Los Angeles)에 뜻을 전달한다. 노회에서는 한인을 위한 교회 창립을 위해 프리챠드(Augustus B. Pritchard)목사로 하여금 교회를 조직하고 인도하도록 하였다.

방화중 전도사는 시내 벙커힐(Bunker Hill)에 사가를 얻어 프리챠드목사의 인도 하에1906년 5월 10일 18명의 교인들이 모여 창립 예배를 드리면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의 100년이 넘는 역사가 시작 된다.

창립후 4년 뒤 한국에서는 1910년 8월 29일 발효된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이루어진 양국 합병조약이 체결된다. 이 조약은 대한민국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의 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8월 22일에 체결되어 8월 29일로 공식 발표된다. 이로써 을사늑약 이후 실질적인 통치권을 잃었던 대한제국은 일본제국에 편입되어 암울한 일본 강점기가 시작된다.

그리고 창립 후 32년이 지난 1938년 5월 4일에 현재 위치인 1374 W Jefferson Blvd. Los Angeles, CA 90007로 이전하게 된다.

한인 담임목사와 당회구성

미국에 한인을 위한 최초의 장로교회가 창립 되었으나 노회에서는 아직도 장로도 없이 교회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한국인 장로교 미션(Korean Presbyterian Mission)으로 허락을 하여 모든 사무적 관할을 하게 되었다. 방화 중 전도사는 주일마다 설교를 담당하며 프리챠드목사를 도와 충실한 전도인의 역활을 하고 있었다. 교회는 미 북장로 산하의 지역노회에 속하고 프리챠드목사의 지도하에 운영되어 왔으나 제반 활동은 한국인 전도사들의 희생적인 인도로 이어져 나갔다.

1926년에는 프리챠드목사의 사회하에 노회대표가 참관하는 가운데 세명의 장로와 세명의 집사를 선출하여 당회를 구성 하였으나 교회를 전담할 한인목사를 구하지는 못하였다. 이러하던 때에 1928년 로스엔젤레스의 Coliseum 에서 열린 세계 주일학교 대회(World Sunday School Convention)에서 한국교회의 대표단으로 입국한 20명중에는 4명의 목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이때 이 대회의 환영준비위원으로 참석했던 교회의 임원들은 한국교회의 대표단으로 입국한 4명의 목사중에서 김중수목사를 교섭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김중수목사는 1928년 11월 4일 담임목사로 시무하면서 이 교회의 한인 담임목사 시대가 아래와 같이 이어 진다.

  • 1대 담임목사 김중수 1928.11.4~1936.8.1
  • 2대 담임목사 김성락 1937.2.16~1958.5.31
  • 3대 담임목사 권희상 1959.7.1~1967.12.1
  • 임시 담임목사 김형일 1968.3.1~1969.5.31
  • 4대 담임목사 백리언 1969.7.1~1972.6.18
  • 5대 담임목사 우상범 1972.9.19~1985

백리언 목사의 부임

나성연합장로교회의 3대 담임목사인 권희상 목사의 시무기간 중에 장로들이 1967년 1월 16일 ‘목사 사면 권고안’을 제출 하면서 담임목사와 장로들간에 갈등이 표면화 되기 시작한다.

갈등이 본격화 되자 노회는 교회 분규 해결을 위해 노회는 ‘행정위원회’(Administrative Commission)를 구성하여 중재 하려 노력 했지만 결국 권희상 목사를 1967년 12월 1일 부로 해직하고 다음 해 2월 1일부로 당회를 해산 시킨다. 그리고 노회에서 5인, 교회측 장로 2인 추가된 총 7명으로 구성된 새 행정위원회를 구성한다.

교회의 운영를 맡게된7인 행정위원회는 김형일 목사를 임시 담임목사로 1968년 3월 1일부터 시무하도록 한다. 7인의 행정위원회가 교회를 운영 한 후 교회가 안정되어지자 새 당회를 조직하기로 하고 1968년 5월 4일 7인의 장로 임직식을 가진다. 또한 안승화 장로를 위원장으로 한 청빙위원회를 구성하여 새 담임목사를 선정하는 일에 힘쓰게 된다.

마침내 서울에 있는 연세대 교목실장으로 재직하고 있던 백리언 목사를 교섭하면서 백목사로부터 부임할 뜻이 있음을 전달 받는다. 백목사 위임투표를 위해 노회에서 나온 버레이목사의 사회로 1969년 2월 9일 공동의회를 소집 하였는데 투표결과 찬성 60표, 반대 10표, 기권1표, 무효1표로 위임목사 청빙건이 가결 되었고 청빙 가결된지 5개월이 지난 7월 1일부터 부임하게 되었다.

목회와 교육의 경험이 풍부한 백목사가 부임 하면서 교회는 모든 면에서 생동감 있고 희망적인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백목사는 우선 주일학교 교육을 강화 하기 의해 조직을 재정비 하면서 학생수가 매주 늘어났으며, 한국으로 부터 오는 이민자 수가 증가 하여 매 주일마다 새로온 교인의 소개가 끊임없이 이어졌고 교인수 증가에 대비해서 교회 기구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70년도 부터는 12인의 장로 가 당회원으로 시무 하였다. 또한 교회 규칙(By-Law)을 수정하여 1970년 2월 15일 공동회의에서 새로운 규칙을 통과 시켰다. 이 규칙은 미 연합 장로교 헌장과 함께 교회 운영의 기본적 법이 되었다. 그리고 과거 1938년도에 입당하여 사용중인 건물이 증가하는 교인들을 수용하기에는 부족할 것 같아서 ‘교회 확장 헌금’을 모으기로 하여 $9,000의 헌금 약속을 받고 교인들의 정성을 교회 증축에 집중 시켰다.

당회의 분규와 백목사의 사임

백리언목사가 부임한지 1년 7개월이 넘은 1971년 2월 22일 당회에서 다수의 결정에 따라 “이제부터는 장로가 대 예배시에 기도와 광고를 하기로 하고 3월 첫 주일부터 실행하기로 한다”고 결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목사는 이를 수용하고 더 이상의 충돌을 피했다.

그러던 중 그 해 6월 27일 백목사는 ‘교회 건물 확장 계획’이 부진한 가운데 있음을 알고 다음과 같은 제의를 하였다. “교인의 증가로 예배 장소가 문제가 되니 지금의 사교실을 없애고 긴 의자를 비치하여 예배당으로 하고 사교관계의 모임은 주일 학교실을 쓰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로부터 3개월 후 9월 19일 당회안에 구성된 ‘교회확장연구위원회’(위원장 오영균 장로)는 건축법상의 문제를 이유로 불가하다는 의견을 제시하면서 당회도 백목사의 제안을 부결시킨다.

당회의 부결에 실망한 백목사가 당회에 사표를 제출하자 장로들의 만류로 사표가 철회되지만 그 여파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이듬해 1972년 2월 5일에는 백목사가 제의한 ‘목사를 돕고 심방을 위한 부목사(임시)를 초빙 하는 일’이 예산상의 어려움 문제로 당회에서 부결된다. 이처럼 백목사가 소신을 가지고 목회하기 어려운 일들이 당회에서 일어나는 상황에서 3월 16일 ‘시무 사면서’를 당회에 제출했다. 이 소식이 바로 집사들에게 알려지면서 3월 18일 ‘집사회’는 이번 ‘시무 사면서’ 사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의서를 회장 문영조, 서기 김희선 집사 이름으로 당회장에 제출한다.

“첫째, 당회는 백리언 목사의 사표에 관한 결정을 연기해 줄 것. 둘째, 사표수리 여부는 제직회나 공동의회에서 처리해 줄 것.”

이 같은 집사회의 결의서는 장로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였고 4월1일 당회에서는 백목사의 사표를 반려하게 만든다. 사표가 반려되면서 백목사도 “더 열심히 교회를 위하여 일하겠다”고 장로들에게 전하며 교회의 어려움을 해소하려 노력했다. 그러나 이 사건 이후로 장로들의 사표와 당회 불출석 등의 파행이 시작되고 각종 교회 행사가 분규 이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했다. 이 같은 과정을 바라보던 백목사는 1972년 6월 18일 주일 아침예배를 마친후 임시당회를 소집하고 ‘시무 사면서’를 노회에 제출하였음을 통보한다.

백목사가 사표를 제출하고 교회를 떠나자 교인들은 불안해 했고, 사면서를 접수한 노회의 목회 인사 위원회 (Ministerial Relations Committee)는 긴급회의를 열고 교회문제를 파악 하기 위해 휴브러(Kenneth L. Hubler)목사를 노회를 대표해서 파견하여 6월 29일 장로들과 연석회의를 열었다. 사태의 내용을 파악한 휴브러목사는 이 문제를 공동회의를 통하여 결정하기로 하였다. 그당시 교인들은 이미 “장로들이 목사의 활동을 심하게 제약하였다”는 의견과 “백목사의 사임은 교회의 미래를 위해 잘 된 것이다” 라는 두가지 의견으로 갈라지고 있었다.

드디어 노회의 주관으로 진행된 7월 16일 공동회의에서 홰니엘(Leon E. Fanniel)목사는 백목사의 사표수리를 표결에 붙여 47대 46표 1표차로 사표를 수리 하였고 이화목, 노서환, 홍순건, 오영균 네장로의 사표를 일괄 접수하여 표결에 부친 결과 70 대 22표로 네 장로의 사표가 수리 되었다.

분규의 해결과 새 당회 구성

주일 초청목사들 중 우상범목사는 교회의 분규를 해결해 보기로 자청했다. 그래서 우목사는 우선 자신이 임시 목사로 부임 할것과, 둘째로 당회에 남은 장로들의 사표를 책임지고 받아 내기로, 셋째로는 당회 해산후에 새 당회를 구성 한다는 중재안을 제시하였고 이 제안은 1972년 9월 19일 노회의 승인을 받게 된다.

노회의 결정에 따라 우목사는 임시 목사로 시무하게 되고 당회가 해산된 후 새 당회를 다시 세워야 했다. 그래서 1973년 1월 21일 노회의 모리슨 목사의 사회로 인사위원회 7인이 배석한 가운데 새 당회를 구성하기 위한 공동회의를 열었다. 장로 추천 위원으로는 7명이 선출되었는데 인사 추천 위원회가 11명의 장로 후보를 추천 하는 과정에서 이화목 장로는 후보들 중 문영조와 차경수 집사를 후보군에서 제외해 달라고 요구 했지만 받아 들여지지는 않았다. 이화목 장로는 마지막으로 문영조 집사만은 장로 후보에서 제외해 줄것을 재차 요청 했으나 이 또한 거절되고 다수의 투표 결과를 따르도록 하였다. 투표결과 김치은, 김희선, 로스 백, 문영조, 안정옥, 유진형, 이대수, 조규환, 조석현, 차경수, 최옥엽등 11명이 장로 후보로 선정 되었다. 2월 11일 장로 6인을 선출하기 위한 공동회의를 개최 하였다. 이날 173명의 회원이 참가한 가운데 3차 까지 가는 투표결과 김치은, 문영조, 안정옥, 이대수, 조규환, 차경수 6명이 장로로 선출 되었는데 1차 투표에서 김치은, 문영조, 이대수, 차경수 4명이 당선되자 이화목 장로가 일어나서 퇴장하고 이어서 20여명이 퇴장 하였다. 2월 25일 오전에 취임식을 하고 오후에는 당회장 그린리(Max E. Greenlee)목사의 사회로 새 당회 첫 모임을 가졌다. 이후 노회에서 새 당회장으로 베어드(John S. Baird)목사를 임명 하였으며 새 당회를 구성한 이후 교회는 화평을 되찾고 각 부서의 활동도 활발하게 회복 되어 갔다.

교인의 이탈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70년사’ 중에서 일부 발췌)

새 당회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투표 결과에 불만을 가졌던 장로들과 교인들이 교회를 이탈하여 한달이 채 못되서 일부는 한인 남가주 교회(이화목, 박리근, 한소제, 오영균, 조명섭, 이향근, 김희선, 유진형, 유의영, 김세담)를, 그리고 또 다른 일부 교인들은 나성 영락교회(백보경, 조석현, 이광혁, 강윤만, 홍순건, 노서환)를 시작한다. 한편 1973년 4월 1일 공동회의에서 김치은 장로를 위원장으로 하고, 강영옥, 공성린, 이대수, 문영조, 정문섭, 명재휘, 김종근, 박종갑, 민원식 등 모두 10명으로 “목사 청빙 위원회”를 구성 하기로 가결 하였다.

이후 일년이 넘게 담임목사 청빙 문제를 토의 하던중 사임후 서울 종암교회에서 시무하던 백리언 목사가 미국에 다시 온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교회는 다시 술렁이기 시작한다. 마침내 백목사가 1974년 7월 1일 로스엔젤레스에 도착 하였고 당시 임시목사로 재직중인 우상범 목사는 7월 7일 설교를 부탁 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담임목사 청빙위원회 내에서 현재 임시목사인 우목사가 위기의 교회를 안정시킨 공로가 있으니 담임목사로 적합하다는 의견과 백목사를 다시 담임으로 세우자는 의견이 대립되기 시작했다.

이 같은 의견 대립으로 목사 청빙 문제가 지연되자 백리언목사는 1975년 1월 5일 첫 주일 오후 2시에 창립예배를 드린다고 통보해 온다. 당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교인들 중 약 10가정이 해람장로교회로 합류 하고 얼마 후 얼마 후 장로 2명과 집사2명이 추가로 해람장로교회로 합류한다.

해람장로교회 창립

1975년 1월 첫주일인 5일 오후 2시8가와 Crenshaw Blvd.가 만나는 사거리에 위치한 헝거리언 개혁교회 (Hungarian Reformed Church: 751 Crenshaw Blvd. LA, CA)에서 창립목사 백리언과 31명의 신도가 모여 해람장로교회 역사적인 첫 예배를 드린다.

박양원씨의 연주를 시작으로 백리언 목사는 시편 34편 ”내가 여호와를 항상 송축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 주를 찬양하리이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한 자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으로 예배 선언을 하고 ‘그리스도의 편지”라는 제목의 첫 설교를 한다.

교회 창립은 LA지역의 여러 교회들로부터 많은 관심속에 이루어졌으며 특히 백리언 목사가 4대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로부터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창립 당시 국내외 정세

창립당시 한국은 일본 제국주의 강점기가 끝난지 30년이 지난시점 이며, 한국전쟁 (1950.6.25~19537.27)이 발발하고 종전이 된지 22년이 지난 시점으로 당시 초대목사를 비롯한 장년층 신도들 대부분이 한국의 두 비극적인 시대를 겪으며 성장한 세대들이었다.

또 당시의 한국은 남북으로 분단된 상황에서 북측은 김일성공산 독재 체제하 있었으며, 남한은 1961년 5월 16일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부(1961.5.16~1979.10.26)가 3공화극 체제에서 1972년 10월 17일 헌법을 개정하여 유신독재(1972.10.17~1979.10.26) 로 전환 한다.

미국을 보면 1964년 가을 버클리 대학으로부터 시작된 미국 대학의 반전운동은 베트남전이 한창이던 1970년 미국이 캄보디아 내전에 개입하면서 절정에 이르지만 1973년들어 베트남으로부터 미군이 철수하면서 시위도 잠잠해 졌다.

미국내에서는 1964년 7월2일 존슨 대통령은 공공장소, 고용, 선거에서 인종차별을 금지한다는 행정명령을 내렸다. 해람장로교회 창립당시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 법으로 금지된지11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사회 곳곳에 흑인뿐만 아니라 한인들을 포함한 소수민족 이민자들 에게도 차별이 여전히 남아있던 시절이었다.

1965년에는 미국 이민법이 크게 개정되면서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개정된 이민법에 의해 유학생, 객원 간호사와 의사의 신분으로 미국에 건너 온 한인들이 영주권을 취득하게 되었고 이들이 1965년부터 1970년 사이의 한인 이민을 주도하였다. 이들은 후에 국제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함께 한국에 남은 가족을 초청하면서 1970년대에 들어서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한 한인 이민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창립목사 백리언

백리언해람장로교회 창립목사로 모신 백리언목사의 호는 해람(海籃)으로 평안북도 의주출신으로 일찍 만주 봉천에 가서 살았다. 일본 동경 신학교에서 수학한후 일제 말엽에 다시 봉천에 돌아기서 봉천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6년 2월 14일 목사 안수를 받고 봉천 서탑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다. 해방후 귀국하여 전라남도 광주의 전방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연세대학교 교목으로 재직한다. 1956년에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 유학하여 신학석사(S.T.M.)학위를 받고 귀국 후에는 연동교회 목사를 역임(1962~1966)하고 1968년 3월부터 다시 연세대학교 교목실장으로 봉직하고있었다. 그러던중 미국에 있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로부터의 청빙을 수락 하면서 1969년 7월 1일부터 4대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하지만 서 오래된 교회 갈등으로 빚어진 시련끝에 3년이 채 안된 1972년 6월 18일 노회에 시무 사면서를 제출하고 그해 7월 4일 한국으로 돌아간다. 1974년 서울 종암교회에서 시무하던 백리언 목사는 다시 미국에 입국하여 7월 7일 나성한인영합장로교회 초청설교를 한후 1975년 1월 5일 자신의 호를 교회명으로 하여 해람장로교회 창립목사를 역임하게 된다.

나성연합장로교회에서 많은 싸움을 경험한 우리들은 싸우지 않으려면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논리적으로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가능하면 목회자도 설교도 좀더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분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래서 좀더 이성적으로 서로 싸우지 않고 교회를 이끌어 가 보자는 분위기로 백리언 목사를 모시게 되었습니다.

<창립40주년 기념 대담 / 문영조장로 편 중에서 >

해람 장로 교회의 의미

해람은 바다해(海) 바구니람(籃)이 합쳐진 백리언 초대목사의 호이며 정확한 의미는 알 수 없다. 동일 단어를 사전상에서 찾아보면 동음이의어인 풀해(解) 닻줄람(纜)자가 합쳐저 ‘닻줄을 풀어 배를 출발시킨다’는 출범이라는다른 의미를 띈 한자조합의 보통명사가 나타난다.

그렇지만 ‘요람에서 무덤까지’에서의 요람은 흔들 요(搖),바구니 람(籃)을 사용 하였다면 이를 통해 대략 그 의미를 추측을 할 수 있다.

요람은 젖먹이 어린애를 잘 놀게 하거나 재우기 위하여, 위에 눕히거나 앉히어 놓고 흔들게 만든 바구니로 만든 물건으로 ‘포근하고 아늑한 보금자리’, ‘어떤 일의 발생지나 근원지’,’어떤 일이 발전하는 실마리’ 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그렇다면 해람(海籃)은 ‘바다를 품을 수 있는 큰 바구니’, ‘바다처럼 큰 근원지’, 등의 의미를 띄고 있다고 볼 수 있다.

20년전 백리언 목사의 자부인 백혜옥씨는 글을통해 해람이 교회명으로 채택되게 된 동기를 전해주고있다.

이렇게 명명된 ‘해람장로교회’는 의미에 대한 의문과 작명동기에 대한 논란의 여지를 안고 24년간을 유지하다가 1998년 9월 1일 제 3대 담임목사로 김기대목사가 부임한 직후인 1999년 1월 3일 현재의 이름인 ‘평화의교회’(Church of Peace)로 바뀐다.

창립 당시, 제 곁에 누가 같이 있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아버님께서는 “이제 마지막으로 죽을 힘을 다해 이 교회에 봉사 하고자 합니다. 선친께서, 네가 이 다음에 커서 큰 일을 하게 되면 이 이름을 쓰라. 하시며 해람(海籃)이라는 호를 지어 주셨는데, 교회 이름을 ‘해람 장로 교회’라고 하면 어떻겠습니까?” 라고 물으니 모두들 “그렇게 하시지요” 하고 찬성 하였습니다. <20주년기념지 ‘카이로스’ 백리언 목사의 자부 백혜옥 글중에서>

첫 당회 구성

창립예배를 드린 지 3개월이 지난 1975년 4월 9일 당회장 백리언 목사와 이대수, 문영조, 방미철, 김종근 네 장로로 첫 당회가 구성 되었다.

네 장로들은 모두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출신 이었다. 백리언 목사가 이 교회의4대 담임목사직을 사퇴하기 전후 이 교회 당회 의원들과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후 당회원 모두 담임목사를 사퇴에 이르게 한 분쟁에 대한 책임을 지고 해산 되었다. 그리고 새 당회를 선출하게 되었는데 이때 새로 선츨된 장로는 김치은, 문영조, 안정옥, 이대수, 조규환, 차경수 6명이었다. 이중 문영조 장로, 이대수 장로, 당시 이교회에 함께 재직중이던 김종근 집사와 방미철 집사 총 4명이 이교회를 떠나 백리언 목사를 중심으로 해람장로교회 창립을 주도하게 되었다.

백리언목사의 교통사고와 장기입원

수많은 인근지역 교회, 그리고 창립당시 초기 교인들의 기대와 지대한 관심속에 속에 출발한 해람장로교회에 뜻밖의 불행한 시련을 맞게된다. 새 교회를 시작한지 불과 얼마되지 않은 1975년 6월 초 교통사고를 당하여 병상에 누워 목회를 할 수 없는 사태가 발생했다. 창립 후 얼마 되지 않아 지도자를 설교단에서 볼 수 없는 초기 신도들, 그리고 당회장이 없이 당회를 이끌어야하는 젊은 4명의 장로들에게 첫걸음부터 재앙과 같은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창립 20주년 기념지 카이로스의 ‘단편회고’를 통해 “네 젊은 장로들은 마치 고아가된 심정”이었다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제 1대 이창식 목사와 교회의 성장

이창식 목사 부임 – 교회의 기틀을 놓다

교회를 창립한지 5개월밖에 안된 시기에 뜻밖의 교통사고로 백리언 창립목사가 목회를 할 수 없게된 상황에서 매주 주일마다 네 장로가 번갈아 사회를 보는가운데 새로운 목사를 초청하여 설교를 부탁하면서 담임목사가 공석인 예배를 이어 가야만 했다.

이렇게 8개월이 넘게 예배를 진행하다 1976년 2월 8일 이창식 목사의 초청이 이루어지고 이날 이대수 장로의 사회와 이창식목사의 ‘제 이름은 레귀온 입니다’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해람장로교회와 긴 인연이 시작된다. 당시 교회는 장년 40명 유년부 30명 을 합쳐 70명 정도가 꾸준히 예배에 출석하고 있었다. 예배시간은 2월1일부로 오전 9시로 변경되었다.

1976년 3월 7일 이대수장로의 사회로 이창식목사는 ‘잡힌바 된 그것을 잡는 사람’이란 제목으로 담임목사 부임설교를 하게 되는데 이날 교회는 주일학교 38명 장년 33명 모두 71명이 출석했다.

이창식 목사는 만주 북간도 용정에서 출생하여 1953년 한국신학대학(한신대)을 졸업하여 1965년에는 육군 군목 (소령)을 거쳐 1966년에는 기독교장로교단 교육담당 총무를 지냈으며 1969년에는 경동교회 부목사로 사역하였다. 1976년에 훌러신학대학(석사)을 졸업하고, 같은해 해람장로교회 1대 담임목사로 부임한다. 1978년 담임목사 취임후 1982년 남가주 KPC회장을 역임하고 1983년에는 클레어몬트신학교(목회학 박사)를 졸업한 후 1993년 교회에서 은퇴하기까지 17년간을 사역했다. 은퇴 후에는 어려운 교회를 돕는 Interim 사역을 하였다. 그리고 2005년 10월 15일 오후 8시 78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창립목사께서 병상에 누우신 후 주일 예배는 드려야 하고, 옛날처럼 장로들이 설교를 할 수도 없고 해서 여러 목사님들을 초청하기 시작했습니다. 설교를 부탁드린 목사님을 두번째 초대하게 된경우 초청 목사로 부터 장로들에게 문의 전화가 옵니다. 두번이나 초청해서 설교 기회를 드리게 되면 본인에게 담임목사 기회가 주워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열이면 열분의 목사님들이 이같이 접근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창식 목사님께도 설교 부탁을 드렸을 때, 그분은 참 특이했습니다. 한국사회에서는 물론이고 미국사회에서 조차 보기 힘들게 특이했을 것입니다. 이분은 설교를 마치시면 식사나 디저트를 준비했음에도 일절 안드시고, 인사도 나누지 않고 곧장 차를 몰고 사모님과 함께 떠나셨습니다. 설교가 끝나면 교인들과 인사를 나누는 시간을 갖지 않으시고 바로 떠나셨습니다. 두번 세번 설교를 부탁 드려도 이창식 목사님은 부담을 주지 안았습니다. 즉 본인의 담임목사 초청 여부도 묻지 않으시고, 눈치도 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 모습에서 장로들은 다른 목사님들과 구별되는 특이한 면을 발견 했습니다.

<창립40주년 기념 대담 / 문영조장로 편 중에서 >

천주교 평신도 회관으로 교회 이전

1976년 11월 21일(감사주일)이 시작되는 주일부터 예배시간이 오전 9시에서 오후 2시로 변경해야 했다. 이에 대한 불편으로 전 교인이 기도하면서 새로은 예배 처소를 찾게 된다.

한편, 이창식 목사가 부임한 이후 조금씩 증가하던 교인수가 연말쯤에는 주일예배 66명과 주일학교(어린이)3 5명을 합쳐서 101명 정도로 성장했다.

온 교인들이 기도하는 가운데 찾고있던 새로운 예배장소가 ‘천주교 평신도 회관’ (Knight of Columbus Council 621 Building Club : 850 S. Bonnie Brae Ave, Los Angeles, CA)으로 결정 되면서 드디어 크리스마스 다음 날인 12월 26일부터 오전 11시 예배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새 예배처가 결정 되면서 당시로는 $3,000 예산의 오르간을 사기 위해 특별헌금이 12월 12일 주일예배 시간을 통해 공지 되고 모든 교우들의 정성어린 헌금을 모아 구입하게 되면서 이사후 첫 예배에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1977년 1월2일 신년 주일 예배 에서는 교회를 창립하고 초창기를 희생적으로 이끌어준 백리언 목사의 업적을 기리는 공로패를 증정했다.

5월 22일 주일 예배에는 ‘북미 한국 기독교 학자회’ 제 11년차 대회 참석차 방문중이던 장공 김재준 목사의 설교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셋방 살이 설움1>

두 번째 예배처였던 천주교 평신도 회관에서 2년반을 무사히 지내던 어느날, 꼭 황소같이 생긴 천주교 평신도 회의 회장으로 새로 선출됬다는 사나이가 씩씩거리며 나타나서 ”당신들 다음 주일 까지만 있고, 나가 주시오. 그리고 오늘부터 사교실은 우리가 써야 하니 본당만 쓰도록 하시오.”  다음 주일이 목사 위임식인데, 왠 마른 하늘에 날벼락? 셋방살이 설움이라. 하는 수 없이 다음 주일 목사 위임식을 마치고 좁은 본당에서 식사까지 하느라 복작거리는데, 때는 9월 인디언 써머의 꼭지점이다. 고개만 움직여도 땀이 주르르, 찐득찐득. 아 어찌 우리 잊으리요, 그 날을. 그 고통의 찌름을…

<해람장로교회 20주년 기념지 카이로스 ‘단편회고’ 중에서>

여전도회 창립

‘해람 장로 교회 여 전도회’가1977년 1월 21일 문명미 집사댁에서 창립 준비 모임을 가진 후 1월 30일 예배후 본당에서 창립 총회를 열었다. 임시 회장에 백시옥 임시 서기에 김성희를 선출하여 시작된 회의 결과 제1대 회장에 황명숙 집사가 선출 되었다.

이 때 시작된 여전도회는 1995년 1월에 ‘여 신도회’로 명칭을 변경 하였으며 동년 5월에는 ‘권사회’가 ‘여 신도회’에 합류 하게 된다. 조수경 목사는 여전도회 대신 한국 기독교 장로회에서 사용하는 여신도회라는 명칭을 도입한 것이다.

1978년부터 1995년까지 봉사, 선교, 구제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오면서 회의를 이끌어온 역대 회장은 다음과 같다.

초대회장 황명숙, 1대 회장 이정선, 2대 회장 김성희, 3대 회장 백시옥, 4대 회장 안영희, 5대 회장 양경옥, 6대 회장 김선심, 7대 회장 문명미, 8대 회장 이수옥, 9대 회장 정선옥, 10대 회장 구전묘, 11대 회장 민양주, 12대 회장 신영자, 13대 회장 박선영, 14대 회장 신은옥, 15대 회장 김정화, 16대 회장 이정성, 17대 회장 송혜숙, 18대 회장 안상미

여신도회 사업 개요

  • 1979
  • 한국의 수재민을 위한 구호금 전달(한국일보 미국 지사를 통해) $265
  • 한국의 수재민을 위한 구호품(의류를 남가주 한인회를 통해) 전달
  • 교회건축헌금을 위한 바자회 수익금 헌납 $1,414.81
  • 1979 교회 건축헌금 $5,286.95
  • 1980 불우 여성 돕기 사업 $400
  • 1981 교회 주방기구 설치 $900
  • 1983 YMCA 청소년 전도 사업(신학생 장학금) $500
  • 1984 UNITED WAY $500
  • 1987 AFRICA KENYA 선교헌금 2회
  • 1988 한국 아동 복지회 지원 $430
  • AFRICA KENYA 선교부에 양수기 기증 $600
  • 1989 남녀 전도회 합동 AFRICA선교 기금
  • 1990 나성 신체 장애자(물댄동산) 지원 $387
  • 한국 맹인 선교회 성금 $1,000
  • 한국 아동 복지회 $500
  • 베다니의 집(은퇴 전도사의 집) 지원 $500
  • KENYA 선교회 건축 기금 헌금 $500
  • EL SALVADOR 난민 구호금 $1,000
  • 1991 KENYA 장학금 지급 $1,000
  • 맹인 선교회 개안 수술비 지원 $500
  • 전라도 나눔교회 지원 $500
  • 복음의 전령 헌금 $100
  • 1992 실로암 안과병원 지원 $716
  • 소련 선교 신약성경 지원 240권
  • KENYA 신학생 학비 보조 $1,000
  • UNION RESQUE MISSION $500
  • 한국 맹인 선교회 선교 지원 $300
  • 모스크바 성경학교 지원 $300
  • 여성 보호센터 지원 $300
  • 1993 실로암 개안 수술 지원
  • 시온 복음 선교 교회 선교 후원 $200
  • 교회 옆 기술학교 후원 $100
  • 1994 AFRICA선교 후원 $951
  • 중서부 수재민 의연금 $625
  • 11월 바자회 수익금으로
  • 주방시설 확장 및 비품 구입
  • 1995 실로암 병원 개안 수술비 지원 $1,000
  • 교회 학교 교육 재료 및 활동비 지원 $616
  • 예배실 수리비 헌금 $1,500
  • 전국 여성 선교회(NKPW) 2세 교육 개척 기금 $200
  • 인도 선교 선교비 지원(선교사 1인 1년분 지원금) $600
  • 모퉁이 선교회를 통하여 북한에 성경책 30권 보냄
  • 권사회 기금 $2,500으로 교회에 새 복사기 기증
  • 자원봉사자 시스템을 조직하여 주 중 2회 봉사
  • 전 교인에게 전도지 ‘오늘의 양식’ 배부
  • 폐품 수집을 통한 자연환경 보호에 참여

그 외에도 친교실의 주방시설이 완공된 1994년 부터는 예배후 친교 시간에 전 교인의 점심식사를 준비해 왔다.

제 1차 건축 위원회 구성

1977년 에 들어서 교회 자체 건물을 마련하기 위하여 4월 10일 교회는 부활절을 계기로 교회 건축 위원회를 조직하고 건축위원으로는 이대수, 문영조, 김종근, 방미철 네 장로와 백형설, 신영한, 최병권 집사 모두 7명으로 하고, 자문의원으로는 성가대장, 여전도회장을 임명 하였다. 그리고 다음 주일인 4월 17일 건축 위원회 위원장으로는 이대수 장로를, 서기에는 백형설 집사, 회계에는 신영한 집사를 임명 하였다. 그리고 첫 단계로 9월 11일부터 일년간 주일 헌금을 통해 $30,000을 목표로 건축 헌금을 조성 하기로 하였다. 그러자 불과 3개월만에 목표 액인 $30,000의 건축기금을 조성함으로써 교회 건축에 기초를 닦아 놓았다.

1대 담임 이창식 목사 위임

1976년 3월 7일 부터 부임하여 예배를 진행하던 이창식 목사는 그로부터 2년 6개월이 지난 1978년 9월 24 드디어 1대 담임목사로 정식 위임을 받게 되었는데, 이날 백학구 장로의 장립과 문병옥 초대 권사의 취임예배도 함께 이루어졌다.

비록 짧은 기간 이지만 사실상 창립 담임목사로 시무했던 해람 백리언 목사를 1대 담임목사로 기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백목사가 창립 직후 5개월만에 당했던 불의의 교통사고로 더 이상 시무를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처 정식위임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어서 목회를 이끌어가던 이창식 목사가 1978년 9월 24일 최초로 정식위임을 받음으로써 장로교 전통에 따라 1대 담임목사가 된다. 그리고 백리언 목사는 창립목사가 되는 것이다. 자료 사진에 따르면 조수경 목사 부임 당시 3대목사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위임 목사의 의미를 잘 몰랐던 데서 온 착오로 보인다.

박명필 전도사의 부임

1979년 6월 19일 해람 장로교회에 박명필 전도사가 부임한다. 그리고 1986년 9월14일 출범한 권사회 (1995년 5월 ‘여신도회’에 합류) 고문으로 임명된다. 1995년 6월 4일 은퇴 하기까지 자신의 전도사 생활중 말년의16년간을 해람장로교회에 헌신적인 노고를 쏟은 후에 당시 교우들의 많은 사랑을 받으면서 감사와 기쁨속에 44년간의 전도사 사명을 마친다. 박명필 전도사는 2012년 8월 12일 별세했다.

세번째 예배처 Faith Presbyterian Church로의 교회 이전

두번째 예배처소로 사용해왔던 천주교평신도회관 (850 S. Bonnie Brea St., LA, CA)을 떠나 1979년 7월 8일2057 Century Blvd., LA, CA에 위치한 Faith Presbyterian Church로 창립 이후 두번째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로 이사하게 된 예배처는 기존의 천주교 평신도회관으로부터 직선 거리로8마일 남쪽으로 다소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이 변함없이 출석하여 예배를 보았다고 한다.

제 2차 건축 위원회 구성

1975년 1월 5일 헝거리언 개혁교회(Hungarian Reformed Church)에 첫 예배처소를 정하고 그로부터 2년후인 1976년 12월 26일 두번째로 천주교 평신도 회관(Knight of Columbus Council 621 Building)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2년반이 지난 1979년 7월 8일 에는 Faith Presbyterian Church로 이사하게 되면서 세번째 예배처소에 이르기 까지 두번의 이사를 치렀고 이 과정에서 겪은 세입자로서의 서러움은 앞에 해람 장로 교회 20주년 기념지 카이로스 ‘단편회고’ 의 셋방살이 설움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꾸준히 교인 수 가 증가 했으며 그에따른 여러가지 불편함을 감수하는 과정에서 이제는 자체 교회건물이 필요함을 절실히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1979년 9월 2일 김종근장로를 위원장으로 하는 2차 건축 위원회를 구성 하한다. 1980년 5월에는 그동안 매입 수속중에 있던 교회 대지를 매입완료 하였다.

그해 9월 14일 부터 ‘교회건물 수리를 위한 2차 건축헌금’의 목표액을 $40,000로 정하고 10월5일까지 모금한 결과 $67,870로 초과 도달했다. 1차 건축헌금과 비교해볼 때 1차 건축헌금은 목표액 $30,000을 초과하여 1978년 9월에 $46,228이 조성 되었었다.

제2차 건축 위원회를 구성하고 2년후인 1981년 12월 27일에 드디어 현재 주소 (1640 W. Cordova St. Los Angeles, CA)로 이사 하면서 세입자 신세를 벗어나 최초로 자체 건물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남신도회 창립

해람장로 교회 ‘남전도회’ 는 1979년 12월 2일에 창립총회를 열고 초대 회장으로 정용진 집사를 선출했다. 1980년 4월20일에는 평신도 교양지 ‘종’지(편집인:정용진)를 창간 하여 1993년 1월 31일당시 7호까지 발간했다. 그간 국내외 선교사업은 물론 구제 사업, 교회 내 화단 조성 및 조명 시설, 어린이 놀이터 시설, 농구 코트를 시설 하였고, 93년도에는 새로 구입한 건물을 친교실로 개조하는 일에 회원들이 적극 참여하여 대공사를 성공적으로 마쳤으며, 경제적으로도 교회에 많은 보탬이 되었다.

1대회장 정용진, 2대회장 백형설, 3대회장 신기효, 4대회장 이덕유, 5대회장 이진수, 6대회장 김세진, 7대회장 조성철, 8대회장 이명우, 9대회장 정압섭, 10대회장 김인성, 11대회장 박노철, 12대회장 송상하, 13대회장 신효우, 14대회장 윤응진

1995년 1월 부터는 명칭을 ‘남전도회’에서 ‘남신도회’로 변경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