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천

최근 편집: 2020년 5월 8일 (금) 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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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랏일이 급한데 암탉 수탉 가리지 말고 써야지 언제 저런 병아리를 길러서 쓰겠느냐. 암탉이 낳은 병아리가 저렇게 꼬꼬댁 거리니 길러서 쓰려면 아직도 멀었다.[1]

박순천(朴順天, 1898년 10월 24일 ~ 1983년 1월 9일)은 대한민국정치인이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본명은 박명련(朴命連)으로,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수배되어 도망다니다가 "순천댁"이라 불려서 개명하게 된다.

일제강점기 여학교의 교사로 있을 시절 제자들에게 정신대 지원을 종용하였고 1명을 정신대로 보낸 친일 행적이 있다.1948년 최초의 남한단독선거에서 종로에 출마했는데, 이때 종로의 홍등가와 제2부인들, 첩 등은 축첩반대, 공창폐지를 외치는 대한부인회 회원들에게 표를 줄 리가 있겠냐는 말을 하기도 했다. 5선의원으로 활약했고, 60년대 내내 민주당 지도부를 맡았다. 서서 16시간을 일하는 여공에게 생리휴가가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국회의원들을 쫒아다니면서 설득하였고, 이후 생리휴가법을 두고 박순천법이라 할 정도로 크게 기여하였다. 산전산후휴가 역시 박순천이 입법한 것이다. 식민지 시절에는 농촌여성의 생활에 관심이 많아서 절미운동 등 직접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운동을 했다. 밥 공장, 탁아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제기하기도 하는 등 모성애의 사회화라는 래디컬 페미니즘적 의제까지 두루 섭렵했다.[2][3]

여성 최초의 야당 당수였지만 박정희의 10월 유신 이후 육영수여사추모위원회 의 이사장을 맡는 등 친정부 성향을 가지게 되었다.

  • 제2대, 제4대, 제5대, 제6대, 제7대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