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폐화된 경제 대 돌봄과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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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붕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3월 16일 (목) 19:28 판 (새 문서: 7장. 사회적 형평성이 탈성장의 기반이다 사만다 메이롯, 패트리샤 E. 퍼킨스 도입 성장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사회적 불평등에 의존하고 이를 악화시키기 때문에, 이러한 불평등을 근절하고 최소화하는 것은 탈성장을 향한 필수적인 단계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장 지향적 시스템을 그 반대로 대체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사회적 형평성은 다양한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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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장. 사회적 형평성이 탈성장의 기반이다 사만다 메이롯, 패트리샤 E. 퍼킨스 도입 성장 중심의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은 사회적 불평등에 의존하고 이를 악화시키기 때문에, 이러한 불평등을 근절하고 최소화하는 것은 탈성장을 향한 필수적인 단계이다. 그러나 이것은 성장 지향적 시스템을 그 반대로 대체하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사회적 형평성은 다양한 이유로 탈성장 전환의 열쇠이다. 정치적, 이론적, 존재론적, 윤리적 관점은 모두 사회적 형평성을 우선시하게 만드는 동기다. 정치적으로 실행 가능하려면, 탈성장 운동은 교차적이고 차별적인 착취로 인해 성장 중심 시스템에 의해 소외되거나 배제된 모든 사람들 사이의 동맹을 지원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다양하면서 사회적으로 통합된 운동은 강력한 운동이다. 이론적으로, 사회적 형평성은 사회적 신뢰와 웰빙의 핵심이기 때문에, 탈성장 거버넌스 프로세스도 공정성에 달려 있다(Büchs and Koch 2019). 존재론적으로는, 관계적인 집합적 사회성, 복수성, 종간 호혜성에 대한 비서구적 이해가 탈성장의 미래 잠재력을 상상하는 데 도움이 된다(Nirmal and Rocheleau 2019). 그리고 윤리적으로, 사회적 형평성은 희망과 공동의 목적을 심어주고 탈성장을 위한 확고한 기반을 마련하는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가치이자 목표다. 따라서 포괄성과 사회적 형평성은 탈성장과 밀접하게 얽혀 있다. 이 장에서 우리는 그들이 윤리적이고, 적절하고, 탄단한 근거를 갖는, 미래 지향적인 탈성장 전략들을 뒷받침하는 방법을 탐구한다. 이 장을 작성하고 이러한 상호 관련된 관점을 논의하면서 우리는, 아니시나베, 하우데노사우네 및 웬다트 종족의 영토를 강탈한 땅인 몬트리올과 토론토에서 살고 있는 백인 중산층 시스젠더(cisgender, 역주 - 생물학적 성과 사회적 성이 일치하는 사람들)인 여성 학자들로서 갖고 있는 특권을 인식하고 있다. 우리의 견해는 부분적일 수밖에 없으며, 다른 사람들이 이 토론에 참여하여 풍부하게 만들어주기를 희망한다. 다음 절에서 우리는 식민주의와 연결되어, 국가 내부 및 국가 간의 사회적 불평등을 끔찍한 수준으로 이끈 체계적인 자본주의 착취의 기반으로서 차별적 구조의 확장에 초점을 맞춘다. 세 번째 절에서는 탈성장이 더 큰 사회적 형평성을 달성하기 위한 경로인 이유와 방법을 살펴본다. 네 번째 및 다섯 번째 절에서는 탈성장 학자와 ​​활동가가 변혁적 행동주의의 기본으로서 사회적 형평성에 어떻게 더 깊이 관여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제안한다. 성장 지향적 시스템은 어떻게 불평등에 의존하며 불평등을 낳는가? 경제 성장은 매우 높은 수준의 안락함에서 더 길고 건강한 인간의 삶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일부 국가들의 생활 수준을 향상시켰다(Victor 2019, Folbre 2020). 그러나 이러한 이익은 자원 추출, 폐기물 처리, 생물종 및 서식지의 손실과 같은 많은 생태적 비용과 빈곤, 사회적 배제, 공동체 붕괴, 소외, 과밀화, 범죄와 같은 사회적 비용(예: Victor 2019), 그리고 생산적 노동과 재생산 노동 모두의 착취(Salleh 2017)와 함께 발생한다. 이러한 문제들과 끊임없는 성장의 다른 많은 영향은 지역과 지방의 규모에 따라 그리고 국가 사이에 불균형하게 분할되어 있으며, 일부 지역의 경제 성장은 다른 지역의 탈-발전과 억압에 크게 의존해 왔다(Victor 2019). 이러한 착취는 계급, 젠더, 출신, 씨족, 민족, 인종, 장애/비장애 및 국적과 교차적으로 연결된다(Kallis 2018, 40). 성장과 관련된 불평등은 국가 내 및 국가 간에서 증가하고 있으며, 이는 성장 지향적 시스템에 얽혀 있고 피할 수 없는 것이다(예: Piketty 2020, Wilkinson and Pickett 2010, Stiglitz 2016). 많은 탈성장 학자/활동가는 성장의 이점에 관한 환상과 그 사회적 형평성 문제에 비판을 집중한다(예: Kallis et al. 2020, Gilmore 2013, Gabriel and Bond 2019). 유럽의 산업 성장은 토지와 공유지를 강제로 사유화하고, 기본적 필요에 대한 “농민”의 접근을 가로막고, 생존을 위해 노동력을 값싸게 팔도록 강요함으로써 엘리트 축적에 의존했다(Hickel 2021). 마르크스는 이것을 “원시적 축적”이라고 불렀다(Marx, 1887). 계급투쟁은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교차적 차별의 한 부분일 뿐이며, 축적의 동학은 제국주의와 인종차별로도 이어졌다. 식민화는 더 많은 토지, 자원, 원자재, 원주민 노예 노동을 채굴과 생산에 가져옴으로써 더 큰 성장을 위한 길을 열었다(예: Marx 1887). 동시에, 불평등하게 분배된 경제적 이익을 가지고 유럽인들은 다른 사람들을 약탈하고 대서양 횡단 노예 무역의 확장을 촉진했다(예: Folbre 2020, 131). 경제 성장은 말 그대로 폭력적으로 착취당한 사람들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Harvey(2004, 75)는 “원시적 축적”이 계속 진행 ​​중인 프로세스로 파악하면서, 신용 시스템과 금융 자본을 약탈, 사기 및 절도의 주요 수단으로 설명하고 “강탈에 의한 축적”이라는 새로운 메커니즘을 설명한다. 여기에는 예를 들어 자연의 상품화와 지구 환경 공유지의 고갈과 서식지 파괴를 초래한 자본 집약적 농업 생산 방식, 문화와 역사 및 지적 창의성의 상품화, 공공 자산(예: 대학)의 기업화와 민영화가 포함된다. 젠더화된 노동 분업과 배제는 또한 성장 기반 사회를 뒷받침한다. Mies(1998)가 설명하는 바와 같이, 수세기 동안 여성은 “외재화되고, 문명화된 사회 외부에 있다고 선언되고, 밀려 나고, 따라서 빙산의 물 밑 부분처럼 전체의 기초를 구성하지만 비가시화 되었다”(77). 임금 노동은 “확연하게 젠더화된 형태를 취했으며 여성은 보수가 가장 적은 직업으로 제한되었다”(Folbre 2020, 15). 성장 패러다임은 “이원론(dualism)을 강화하고 돌봄을 평가절하”함으로써 젠더 불평등을 영속화했다(Dengler and Strunk 2018). 양성애규범성의 프레임에 갖힌 젠더 역할은 시간이 흘러도 지속었고, 여성이 여전히 가사 노동의 가장 큰 부담을 지는 이분법적 논리를 강화하여(Craig 2016), 일부 여성/어머니가 유급 노동과 무급 노동 모두를 책임지게 하여 유급 노동에 온전히 접근하지 못하게 만든다(Dengler와 Strunk 2018). 성장 패러다임은 GDP 증가에 의존하기 때문에, 무급 노동보다 임금 노동을 우월하게 평가하게 만든다. 중요한 것은 젠더와 다른 모든 불평등들은 교차적 차원을 갖는다는 점이다. 즉, 이들은 인종, 민족, 계급, 섹슈얼리티, 역량 그리고 나이 같은 “일반적으로 다양하고 상호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많은 요인들에 의해 형성”된다(Hill Collins 및 Bilge 2016, 2).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의 필요는 1960년대와 1970년대의 반인종주의적 사회운동, 백인 페미니즘의 두 번째 물결, 또는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조직한 노동조합에서 다루어지지 않았는데, 각 운동은 오로지 하나의 분석과 행동의 범주(각각 인종, 젠더 또는 계급)에만 초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은 동시에 흑인 그리고 여성 그리고 노동자였기 때문에,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이러한 단초점 렌즈는 그들이 직면했던 복잡한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공간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Hill Collins and Bilge 2016, 3). 교차성은 흑인 여성에 의해 분석적 개념으로 처음 도입되었다(Crenshaw 2017). 보호자나 주인 역할을 하는 남편으로부터, 경제적으로나 성적으로 독립적인 여성에 대한 마녀사냥과 고문, 노예 여성/모든 여성에 대한 수탈과 착취, 그리고 “착한 여성” 또는 어머니 그리고 주부(남성 “생계책임자(breadwinner)”에 의해 유지되는)로서의 여성의 이미지에 이르기까지(Mies 1998, Federici 2004), 이러한 불평등에 대한 여성의 투쟁은 끝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성장으로 초래된 불평등은 교차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주변성을 악화시키고(Olofsson et al. 2014), 그들의 분노를 집중시킨다. “희생 구역”에서의 채굴, 강탈 및 폐기물 처리와 관련된 생태적 피해는 환경 정의와 토지반환 운동을 촉발한다(Hickel 2021, Yellowhead Institute 2020). 무급 노동, 돌봄, 신체적 및 사회적 재생산을 제공하는 사람들에 전가되는 부정의한 짐은 젠더 정의, 돌봄 경제, 최전선 노동자 운동으로 이어진다. 사유 재산, 노예화 및 인종 차별과 관련된 치안 및 감금의 차별적인 상황은 감옥 폐지, 경찰 재정 삭감, Idle No More(역주 - “더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다”라는 의미의 캐나다 원주민 운동) 및 Black Lives Matter 운동을 촉발한다. 개인 서비스, 농업, 위험한 작업, 취약한 노동 보호 속에 국가 간의 제품 수입 및 수출에서 수반되는 환경 및 사회적 피해를 위해 이주 노동을 사용하는 것은 투자 철회, 세금 조정, 이민자 권리 및 금융/자본, 노동, 국제적 상품 이동을 규제하려는 여타의 시도들을 통해 국가와 공급 사슬에 걸친 성장의 부정적 영향들을 반대하는 운동으로도 이어진다. 기후정의 운동은 성장이 초래한 기후 위기의 영향을 다룰 수 있는 수단과 대리인을 갖지 못한 소외된 그룹과 지리적 지역에 미치는 차별적인 영향에 초점을 맞춘다. 성장이 다수의 세계에 낙수효과의 이익을 가져오지 못하거나, 소수의 세계 내에서 공평한 부의 분배와 생활 수준 향상을 가져오지 못하는, 이런 오래된 “발전”이라는 속임수는 세계적으로 저항 운동에 계속 기름을 부어 넣는다(Stiglitz 2016). 그리고 그들의 범죄성 정도와 그럼에도 처벌받지 않는다는 현실과 별개로, 토착민들에게 집중적으로 가해지는 토지 강탈, 대량학살 폭력, 지속적인 환경 및 사회적 파괴와 같은 자본주의의 식민적 유산이 있다. 원주민들은 지속적으로 저항하고, 비원주민 지지자들이 함께 한다. 이러한 모든 운동은 정치적, 이론적, 존재론적 및/또는 윤리적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이는 그들 사이에서 동맹을 형성하는 방법을 제공한다. 성장이 초래하는 불평등의 비용은 측정이 불가능하고, 영향을 받는 사람들 사이에 공동의 대의가 될 수 있는 잠재력이 분명히 존재하며, 이는 강력한 정치적 대응 세력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 다음 절에서는 이와 관련된 도전 과제 및 잠재력에 대해 설명한다. 탈성장 내에서 사회 형평성이라는 초점의 잠재력과 도전들 일반적으로 소외되고 자본주의적 성장의 다양한 측면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탈성장은 일종의 회의 주재자로서, 일정한 인식과 연대를 촉발할 수 있다. 그러나 Muradian(2019)이 지적하듯이, 탈성장은 쉽게 팔리는 상품이 아니다. 탈성장 커뮤니티는 대부분 백인, 교육을 잘 받은, 그리고 중산층(Muradian 2019)으로, “세계의 다른 지역의 소외된 인구와 연결하기 위한 의사 소통 및 정서적 장벽을 만드는” 가치, 관심사 및 이해를 나타낸다(257). 탈성장은 다수 세계의 이론적이고 활동적인 전통과 존재론으로부터 비롯되지만(Hickel 2021, Latouche 2009), 때로는 소수 세계에서 발전하고 소수 세계를 위한 개념으로서 제시되기도 한다. 이는 소수 세계가 탈성장 제안을 위한 규범, 한계 및 전략을 세우는 “지구적인 문제들을 풀기 위해 행해져야 하는 것들에 관한 의제 설정에서 오래된 (신)식민지적 비대칭성”을 재창조하는 경향이 있다(Dengler 및 Seebacher 2019, 249). 일부 사회 및 환경정의 그룹에서는 “탈성장”이라는 용어가 매력적이지 않거나 가난하고 소외된 커뮤니티의 요구와 부합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즉 탈성장이 다른 국가의 다문화성과 다양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다거나, 너무 인간 중심적이거나, 다수 세계에서조차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거나, 본질적으로 유럽(또는 북반구) 중심적이기 때문에, 탈성장은 탈식민적 조망에서 저항을 위한 많은 공간을 제공하지 않으며 부유한 고소비 사회에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연결이 없는 프레임을 제시한다는 것이다(Rodríguez-Labajos et al. 2019, 177–179). 따라서 탈성장에 대한 윤리적 입장은 기존의 권력 차이와 지배적인 존재론적 관점이 저항 운동 내에서조차 물화되어 스스로를 독성 사이클로 몰아넣는 경향에 초점을 맞춘다. 문화적으로 그리고 존재론적으로 자본주의로부터 소외되고 배제된 사람들은 성장에, 또는 아마도, 탈성장에도 관여하는 데 관심이 없을 가능성이 높다. 대신, 그들의 행동주의와 존재 부활은 서로 다른 차원과 관계를 따라 작동한다. 원주민 기후 학자 카일 화이트(Kyle Whyte)가 비원주민 서구의 기후 정의와 관련하여 설명했듯이, “식민주의 문제에 대한 관심이 없는 탓에, 기후 정의 옹호자들은 실제로... 가장 강력한 기후 변화 부정론자의 복지부동 제안 보다 원주민의 웰빙을 위해 훨씬 좋을 해결책을 제안하지 않고 있다... 원주민 기후정의 운동은 식민주의, 자본주의, 산업화를 결합하여 그들의 열망의 맨 앞에 두는 점에서 구별된다”(Whyte 2017, 1). 공유된 아이디어를 인식하고 개념화 및 우선 순위를 확장할 수 있는 탈성장 활동가라면 존재론적 분리를 넘어서 관계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Singh 2019). “부엔 비비르(buen vivir)”, “수막 카우사이(sumak kawsay)”, “수마 카마나(suma qamaña” 등과 같은 용어로 표현되는 인간/사회/자연 관계 속에서 가치, “선(goodness)” 또는 “웰스(wellth)”"에 관한 원주민의 존재론적 이해는 “성장에 대한 논의를 사회적 및 환경적 성취로 대체한다”(Gudynas 2015, 204). “부엔 비비르는 확장된 또는 관계적 존재론의 커뮤니티 내에서만 가능하다... 충만한 삶은 커뮤니티 내에서 깊은 관계를 통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Gudynas 2015, 203). 따라서 이러한 존재론적 이해는 탈성장 운동가와 연구자들이 이제 막 탐구하기 시작한 시간, 공간, 종-관계, 다양성/복수성 개념에 관한 탈성장의 개념을 확장한다(Richter 2019). 성장에 내재된, 그리고 일부 탈성장 사고에도 존재하는 자연에 대한 데카르트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시각은 자연을 사회와 분리시키고 서구적 사고(및 식민화하는) 방식에 닻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현재 생태 위기의 근본 원인이며 일부 저자에 따르면, 존재론적 차이(또는 플루리버스; Escobar 2017, Nirmal and Rocheleau 2019 참조)에 의해 계속해서 생성되는 발현적 과정 속에서 탈성장 담론에 의해 영속화될 수 있다(Richter 2019). 존재론적 분할을 넘어, 원주민과의 연대 속에서 활동하기를 원하는 비원주민들에게 또 다른 도전은 식민 관계를 복제하는 대신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것이다(Davis 2010). 이는 탈식민 운동을 전략화하고 지도하려 하기 보다는, 원주민 투쟁을 지원하는 동시에 광범위한 정착민의 무지와 안일함에 맞서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식)민 정착민의 행동은, 그러한 의도가 아니더라도 권력과 특권에 대한 욕심, 갈등이나 공포로부터의 거리, 문제가 되는 ‘타자들’과 개인 행동의 영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자유로 나타날 수 있다. 탈식민화는 그 범위가 어떠하든 간에, 가능한 한 많은 안락함이나 특권을 유지하려는 노력에 의해 동기가 부여될 수는 없다. 위계적 억압의 특성을 감안할 때, 억압에 맞서려면 위계질서 내의 일부 개인이 상당한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Barker 2010, 322). 특권을 가진 탈성장 운동가는 자신을 둘러싼 불의의 현재 상태와 이러한 불의를 영속시키는 시스템에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해체하기와 관련되는 부당한 희생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사회적 형평성 중심의 동맹을 구축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현재 지역적으로나 세계적으로 존재하는 인종 차별, 성차별, 외국인 혐오, 동성애 혐오, 능력주의 등에 대해, 그것들이 이런 스스템에 서로 서로 갖는 특권에 대해, 그리고 그것들을 해체하는 방법에 대해 적극적으로 배우고 성찰해야 한다. 이 새로운 자기 이해 속에서 그들은 이러한 투쟁들을 식민화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을 지원하는 사회적 투쟁들에 대한 정치적 작업에 집중하는 그룹에 도달할 수 있다(Gobby 2020). 서로 다른 그룹의 투쟁은 서로 다른 경제적, 문화적 맥락에 있기 때문에 내러티브, 동기 및 전략에서의 차이가 거의 불가피하다(Burkhart et al. 2020). 예를 들어, 여러 운동들이 모두 정의를 추구하더라도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할 경우 “도덕적 준거 틀”의 간극이 발생할 수 있다(20). 탈성장 관점에서 보면, 성장 패러다임이 “사람들의 마음과 몸에 깊숙이 박혀 있는” 탓에, 사회적 형평성 중심 운동들이 성장이나 자본주의를 그들이 싸우고 있는 부정의의 주요 원인으로 보지 않는다고 여길 수 있다(Büchs and Koch 2019, 160). 그들은 분할과 착취에 대한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동인보다 성장이 가져오는 증세에만 초점을 맞춘다는 것이다. 다음 두 절에서 우리는 동맹 구축과 결합된 탈성장이 위에서 언급한 정치적, 이론적, 존재론적, 윤리적 차이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몇 가지 생각을 해볼 것이다. 탈성장 운동을 위한 동맹 전략 탈성장 저자들은 겉보기에 서로 단절된 것처럼 보이는 여러 사회생태적 투쟁들이 성장 기반 경제 시스템이라는 원인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동맹을 형성할 필요성에 대한 글들을 써왔다. 정의 운동들 간의 동맹은 지역 및 세계적으로 탈성장 이니셔티브를 위한 비옥한 기반을 제공한다. 실제로 운동들은 현장으로부터 파트너십을 구축할 수 있으며, 지역적으로 그리고 정치적 네트워크를 활용하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도달할 수 있다(Lorek and Fuchs 2013). 예를 들어, 식민지 폭력을 해체하기 위한 원주민 및 탈식민 운동은 존재론적 지혜를 공유하며, 출발부터 사회적 형평성을 구축하고 이에 의존하는 운동 거버넌스에 대한 새로운 접근의 기반을 제공한다. 환경 정의, 페미니스트, LGBTQIA*, 반인종차별주의, 능력주의 반대자 그룹은 연대하여 어떤 대의나 사회 운동에 힘, 단결 및 연대를 제공한다(예: Davis 2010, Rodríguez-Labajos et al. 2019). 잘 구축된 동맹은 모든 그룹의 특정한 요구와 관심 사항을 해결할 수 있는 공간을 허용한다. 동맹 형성은 상호 지원과 실용적이고 집단적인 에너지에서 비롯된다. 동맹은 사회 정치적 행동을 촉진하고 개념적으로 서로를 풍부히 할 뿐 아니라(Akbulut et al. 2019, 6), 성장의 정언명령이 부과한 공통적 장애물을 극복하는 새로운 전략 발전을 돕는 다양한 조망을 초대할 수 있게 한다(Scheidel and Schaffartzik 2019, 331). 그러한 맥락에서 개별적인 관계 구축과 정보 공유는 동맹을 구축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들의 강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구축된 관계의 깊이와 직접적으로 관련될 수 있다. 따라서 동맹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요소에는 존중하는 관계, 신뢰, 시간을 내기, 분노와 식민지 유산의 인정, 특권과 이익을 이해하기, 죄책감을 갖고 활동하기, 차이를 존중하기, 협력, 원주민-비원주민(또는 정착민) 관계의 역사로부터 배우기가 포함된다(Fitzmaurice 2010, Lynne Davis와 Heather Shpuniarsky의 2005년 강의 요약). Dengler와 Seebacher가 설명하듯, “탈성장은 북반구에 의해 제안되고 남반구에 부과된 전 지구적 변혁의 청사진으로 오해되어서는 안 되며, 오히려 이미 존재하는 남반구의 사상과 운동들에 대한 북반구의 보완으로 이해해야 한다”(Dengler와 Seebacher 2019, 249).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적 경제 관계, 특히 불평등은 탈성장 운동의 최전선에서 논의, 해체 및 재평가를 위해 지속적인 주제여야 한다. 탈성장 운동의 전략으로 커먼즈 구축 또 다른 관련 접근 방식은 커뮤니티 수준에서 생계와 웰빙을 제공하는 비자본주의적이고 공평한 방법을 구축하는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커먼즈 이론가들은 탈성장 이론과 실천에 많은 기여를 했다. 커먼즈 이론가인 실케 헬프리치(Silke Helfrich)와 데이비드 볼리어(David Bollier)는 많은 커먼즈(이미 수십억 명의 사람들이 의존하고 있는)가 성장 경제의 경계 바깥에 있으며, 따라서 탈성장의 기반으로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회적 신뢰, 웰빙, 다양한 종류의 식품 및 서비스 조달, 사회적 규범 및 집합적 거버넌스의 혁신, 비시장적 조달을 위한 기술에 대한 그들의 기여는 모두 공평한 탈성장 변혁의 한 부분이다. “만약 ‘경제’가 분산화된 생산, 모듈화, 딥합적 소유 그리고 돌보는 책임 같은 핵심 커먼즈 개념을 통해 재상상될 수 있다면, 자본주의적 개념과 제도들(기업, 세계 시장, 경쟁, 노동)을 거부하면서 매우 높은 성과를 내는 경제 체제라는 아이디어를 수용할 수 있게 된다”(Helfrich and Bollier 2015, 78). 사회적 형평성에 초점을 맞춘 운동은 시장 밖에서 생계를 지원하는 방법을 촉진할 수 있으며, 이 역시 또한 탈성장과 부합한다. 그러나 탈성장 운동가들은 자본주의적 구제 금융이나 신자유주의적 처방을 통한 커먼즈의 포섭에 저항하는 투쟁에 함께 해야 한다. 미국과 다수 세계의 다른 대학들이 결과를 상업화하기 위해 연구 결과를 비밀과 유료화의 벽 뒤에 숨기고(Caffentzis and Federici 2014), 또는 세계은행이 지역 주민들이 수 세대 동안 그들이 살았던 숲에서 새로운 “게임 파크”를 위해 몰아 내고(Isla 2009), 또는 개방된 스위스 알프스 초원과 낙농 협동조합 그리고 메인 주의 바닷가재 어업 공유지가 시장을 위해 생산하도록 유도되는 상황을 생각해보자(Caffentzis and Federici 2014). 커먼즈는 공공재의 가치를 강화하고 원칙화하는 방식으로 협력적이고 사회적으로 생산되는, 투명하게 공유되는 부를 통해 평등하게 조직되고 운영되는 커뮤니티를 필요로 한다. 탈성장과 커먼즈가 서로를 지지하면 생계와 사회적 형평성도 튼튼해지고(Caffentzis and Federici 2014) 사람들 사이의 관계도 성장한다. 따라서 탈성장 운동은 현장에서부터 사회적 형평성을 구축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이론적 및 실제적인 측면에서 커먼즈의 생성/복원에 전략적으로 초점을 맞춰야 한다(Brownhill et al. 2012). 결론: 사회적 형평성은 탈성장의 핵심이다 자본주의적 성장은 식민주의, 가부장제, 인종과 계급 차별에 기초하고 의존하기 때문에 이러한 유해한 구조를 없애고 제거하는 것이 탈성장의 핵심이다. 이 장에서 우리는 탈성장 운동의 최전선에 있는 사회적 형평성과 함게 사회생태적 변혁이 더 윤리적이고, 정치적으로 실현 가능하고, 이론적으로 튼튼한 근거를 갖고 존재론적으로 풍부해진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시도했다. 소수 세계에서도 사회적 형평성을 요구하는 그룹 간의 동맹은 탈성장을 포함한 사회정치적 변혁의 중요한 부분이다. 전 세계적으로 모두를 위한 웰빙은, 특히 팬데믹과 기후 혼란의 시기에, 소외된 사람들이 대처 방법에 대해 갖고 있는 오랜 지식에도 불구하고 성장 지향적인 경제 시스템에서 소외되고 착취당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은 시기에 긴급한 우선 순위의 문제다(Kousis and Paschou 2017). 이러한 위기는 자본주의 외부에서 그리고 자본주의를 넘어서 생계를 유지하면서 웰빙과 신뢰의 커뮤니티를 만들기 위한 구조와 기술을 구축하는 사회적 형평성 지향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16장. 돌봄: 돌봄 분야의 사회생태적 변혁을 위한 전략 개요 코리나 뎅글러, 미리엄 랭, 리자 M. 제바커 도입 우리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더욱 악화된, 다중적이고 연속되는 위기를 살아가고 있다. 우리는 변혁적 해법을 찾기 위해, 채굴 자본주의, 백인 우월주의, 식민주의, 가부장제에 구조적으로 기반을 둔 성장 의존적 경제 체제에서 탈피해야 한다. 이 장은 매우 젠더화된 돌봄/돌봄 노동의 영역의 탈성장 전략에 초점을 맞추고 이윤보다 사람과 지구를 우선시하는 전략에 중점을 둔다. 돌봄/돌봄 노동의 개념을 간략하게 소개한 다음 변혁 전략에 관한 에릭 올린 라이트와 낸시 프레이저의 견해를 결합하는 방법을 설명한 후, 우리는 크리스타 비크테리크(Christa Wichterich 2015, 86)의 재정의(redefine), 재분배(redistribute), 재평가(revalue)라는 삼중-R 목표에 기여하고, 그럼으로써 모두를 위한 돌봄과 건강에 기여하는 탈성장 전략을 논의하고 평가한다. 돌봄과 돌봄 노동: 간략한 소개 돌봄/돌봄 노동의 개념은 때때로 사회적 재생산/재생산 노동과 동의어로 사용되며 실제로 많이 겹친다. 자녀 양육, 노인 돌보기, 룸메이트를 위한 요리 또는 커뮤니티 주방에서의 요리 등은, 무급으로 이루어질 경우 이러한 활동들은 모두 무급 돌봄 노동과 사회적 재생산이다. 그러나 이러한 개념들의 사회적-역사적 진화에는 차이가 있다. 사회적 재생산/재생산적 노동은 보수 없이 수행되는 노동을 생산적/임금 노동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개념화하는 페미니스트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나온다. 돌봄/돌봄 노동의 개념은 더 광범위하고 확실히 덜 정치적이다. 이는 노동의 내용을 강조함에 있어서 무급뿐만 아니라, 예를 들어 국가, 시장, 비영리 부문에서 제공하는 유급 돌봄 노동도 가리킨다. 돌봄 노동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를 찾기는 어렵지만, 돌봄에 내재된 관계성과 (상호)의존성은 공통분모다. 좁은 의미에서 돌봄은 종종 간병인이 돌봄 수용자에게 제공하는 보살핌 활동으로 정의되며, 감정과 친밀감은 물론 비대칭적인 권력 관계, 제한된 자율성 및 취약성을 포함한다(Tronto 1993, Jochimsen 2003).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며 자급 자족하는 이성애자 남성을 이상으로 간주하는 사회에서는 예외적인 것으로 프레임 되었지만, 돌봄에 대한 의존은 모든 삶이 그것과 함께 시작되고 대부분의 삶이 그것과 끝나는 것이다. 돌봄에 대한 더 넓은 개념화는 인간의 주체-주체 관계를 넘어선다. 사회생태적 변혁의 핵심으로서 돌봄은 사람뿐만 아니라 비인간 생명체와 지구상의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복잡한 그물에도 적용된다(Pacto Ecosocial del Sur 2021, The Care Collective 2020). 현재의 경제 시스템에서 무급 돌봄 노동은 눈에 띄지 않고 매우 젠더화되어 있다. 화폐화된 경제에서 모든 생산 과정의 필수 전제 조건이지만, 무급 돌봄 노동은 금전적 보상 그리고/또는 사회적 인정 없이, 주로 이성애자 가정에서 여성에 의해 수행되는 공짜 보조금으로 간주된다(Himmelweit 1995, Jochimsen and Knobloch 1997, Dengler and Strunck 2018). 젠더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를 활용하는 시간 사용 연구에 따르면, 여성은 전 세계적으로 무급 돌봄 노동의 3/4을 수행한다(ILO 2018, 53f). 유급 돌봄 부문에서 돌봄 노동자의 약 2/3가 여성이다(ibid., 167f). 1970년대부터 시작된 내러티브인 자유주의 페미니스트의 “임금 노동을 통한 해방”은 많은 여성들에게 그들의 “2교대째” 무급 돌봄 노동을 수행하거나(Hochschild 2003) 아니면 이 일을 유급 돌봄 노동자들, 즉 노인 요양 또는 아동 보호 기관의 저임금 (종종 이주) 여성들에게 아웃소싱하는 둘 중 하나의 불만족스러운 선택을 하게 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세계의 부와 웰빙이 근본적으로 사회적 재생산의 보이지 않고 여성화된 영역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페미니스트 주장을 확인시킨다(FaDA 2020). 보육 시설과 학교 폐쇄는 가정의 “사적 영역”에서 젠더화된 분업을 악화시켰으며(Bahn et al. 2020), 때때로 팬데믹 기간 동안 가족 내의 젠더 폭력 수준 증가와 같은 문제적 경향과 결합되었다(Roesch et al. 2020). 그러나, 무급 돌봄 노동이 유급 돌봄 부문으로 전환되는 경우에도 “가치화되지만 제대로 평가받지는 못하는(valorised but not valued)” 경우가 많다(Dowling 2016). 체계적으로 급여가 적게 지급되고 수익성과 효율성에 대한 압박을 받는 시장화된 돌봄에서 특히 그렇다. 공공 조달과 관련하여, 복지 국가는 역사적으로 가부장적이고 식민적이며 이분법적 이성애규범성을 재생산하며, 부정의한 양의 글로벌 자원을 요구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Koch and Mont 2016, Bhambra and Holmwood 2018, Dengler and Lang 2022). 시장화된 돌봄이나 복지 국가 모두 글로벌 사회 복지는 고사하고 돌봄을 둘러싼 정의로운 전환을 위한 청사진이 아니다. 탈성장 사회는 돌봄 노동을 가치화하지 않고 이상적으로 가치를 평가하며, 한편으로는 이성애규범적 가족의 “사적 영역”을, 다른 한편으로는 “공적” 시장, 국가 및 비영리 조직을 넘어서 돌봄 노동이 수반하는 기쁨과 부담을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집합적인 형태의 돌봄에 중점을 둔다. 변혁 전략에 대한 개념적 노트 우리는 라이트(2013)가 정식화한 반자본주의적 변혁 전략의 범주를 기술적인, 설명적인 틀로 읽을 것을 제안한다. 이 범주들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으며 위계화되어서는 안 된다. 단절적 변혁에 대한 라이트 정의는 일견 가장 급진적인 전략으로 보이다. 그러나 20세기 혁명들의 긴 역사에서 그것은 권력과 새로운 엘리트의 재구성으로 이어졌을 뿐이며, 성장의 정언명령을 극복하지도 않았고 사회적 재생산의 지속가능한 방식을 구축하지도 않았다. 경계 부위에서 작동하는 틈새적 변혁은 광범위한 전략들을 포괄할 수 있다. 그들은 체제 변화의 기회를 만들 때까지 다소 자기중심적인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탈출”하거나 수평적으로 확장(scaling-out)하는 것을 목표로 할 수 있다 공생공락, 연대 및 호혜의 논리가 실현되는 예시적 공간에서 이런 전략들은 변혁적인 주체성을 잠재적으로 생성한다(Global Working Group Beyond Development 2018). 우리는 기존 제도들의 영역 내에서 작동하는 공생적 전략은 포섭의 위험이 있다는 체르트코브스카야의 말(2장)에 동의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은 틈새적 전략들이 확장되고 번성할 수 있는 조건을 생성하는 데 필요하다. 이 장에서 우리는 라이트의 아이디어를 페미니스트 논의에서 보다 통상적인 프레이저(Fraser 1997)의 프레임워크와 결합한다. 적극적 전략(Affirmative strategies)은 주어진 구조 내에서 작동하는 반면, 변혁적 전략은 구조 자체를 변경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러나 적극적 전략은 잠재적으로 “권력 관계를 변경하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급진화되는 추가적 투쟁의 길을 열기 때문에 변혁적 효과를 낳는다”(Fraser and Jaeggi 2018, 174). 따라서, 우리는 “비개혁주의적 개혁”(Gorz 1967), “구체적인 유토피아”(Bloch 1959) 또는 “혁명적 현실정치”(Luxemburg 1903)와 같은 개념들에 공감한다. 모두를 위한 돌봄과 그것이 탈성장에 갖는 적절성 다음 절에서는 탈성장 사회에서 다른 (1) 임금 시스템, (2) 시간 체제, (3) 돌봄을 조직하는 방식을 설정함으로서, 무급 돌봄 노동을 재정의, 재분배 및 재평가하려는 세 가지 전략을 소개하고 논의한다. 이 장의 주요 초점은 아니지만, 우리는 보건 및 돌봄 부문의 임금 노동이 공정한 임금, 존엄한 노동 조건, 예방 및 전인적 돌봄을 위한 더 많은 시간 투입의 측면에서 철저히 재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임금 관계의 변화와 노동의 재정의 임금 노동은 임금에 의존하는 사람들이 다른 모든 형태의 노동과 활동보다 임금 노동을 우선시하도록 강요하는 자본주의 성장 기반 사회의 지배적인 구조다(Weeks 2020). 따라서 임금 관계의 변화는 모든 종류의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을 재정의하고, 재분배하고, 재평가하는 핵심 전제 조건이다. 이 절에서는 이를 위한 수단으로 가사 임금(WfH) 캠페인, 돌봄 소득(CI) 그리고 보편적 기본소득(UBI)에 대해 논의한다. 국제적인 “가사노동에 임금을”(Wages for Housework, WfH) 캠페인은 국제 페미니스트 컬렉티브(IFC)를 공동 설립한 Mariarosa Dalla Costa(1972), Selma James(1972) 그리고 Silvia Federici(1975)의 지적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했다. IFC는 1972년 WfH-캠페인을 시작했고 곧 유럽, 북미, 심지어 멕시코와 아르헨티나 전역에 WfH 작업 그룹들이 생겼고, ‘레즈비언에 합당한 임금’ 그리고 ‘가사 임금을 위한 흑인 여성들’과 같은 주제 그룹들까지 갖게 되었다(Toupin 2018). “돌봄 노동”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지기 전까지 이 캠페인은, 당시까지는 “사랑의 노동”으로 간주되던 재생산 노동을 경제의 기초로 가시화하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 체제를 전복하는 것이라는 이중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1970년대 페미니스트 운동의 맥락 속에서 WfH는 여성을 (남성을 함축하는) 임금 노동이라는 의문의 여지 없는 범주에 통합한다는 자유주의적 페미니스트의 개념적 비판으로 독해될 수 있다. WfH는 젠더화된 노동 분업을 제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재생산 노동을 자본주의 가치 평가에 포함하도록 요청했다는 이유로 비판받았다(예: Davis 1983). 그러나 WfH는 라이트의 용어의 현실정치나 공생적 전략으로 의도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그것이 보이지 않는 끊임없는 보조금에 의존하고 있음을 폭로함으로써)와 가부장제(젠더화된 분업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모두에 대한 급진적 도발로 의도된 것이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WfH는 틈새적 변혁이 번성하던 역사적 시기에 단절적인, 변혁적인 변화를 목표로 삼았다. WfH와 베이징 플랫폼의 1995년 합의를 바탕으로 국가 회계에서 “무급 돌봄 노동을 고려하라”고 요구한 돌봄 소득(CI)은 Global Women's Strike(2020), 몇몇 탈성장 연구자들(예: Barca 2020) 및 유럽을 위한 그린 뉴딜(2019)에 의해 지지를 받아 무급 돌봄 노동에 대한 보상을 목표로 하는 공생적 제안이다. CI는 국가 기관에서 돌봄인에게 지급하는 “참여 소득”(Atkinson 1996)의 한 형태다. 사회적으로 필수적이지만 전유되고 비가시화된 돌봄 노동을 위한 자본을 요구함으로써, CI는 “사람, 도시와 농촌 환경, 그리고 자연 세계”(Global Women's Strike 2020)를 돌보는 사람들에게 부를 재분배하여 돌봄인들의 사회적 지위와 돌봄 노동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돌봄 노동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강조함으로써, 이 제안은 돌봄 노동의 젠더화된 분포를 직접적으로 다루고 권력에 대한 변혁적이고 단절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CI는 탈상품화된 삶의 차원을 넓히기 보다는 돌봄을 금전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적극적 조치의 요소도 보인다. Wichterich(2015, 88)는 조건부 현금 이전은 항상 “사회 불평등 문제에 대한 개인적 및 금전적 해결책을 찾는 신자유주의적 포섭”의 위험을 감수한다고 지적한다. 더욱이, 실제로 돌봄 금여의 수급 자격을 증명하기 위한 실질적인 필요는 감시, 굴욕, 관료주의라는 문제적 차원을 내포하고 있다(Baker 2008). 따라서 CI의 변혁적 잠재력은 주로 구체적인 설계에 달려 있다. 현재까지 CI는 실행되지 않았지만 전 세계 여러 그룹에서 지지하고 있다(예: IWRAW Asia Pacific 2020, Barca et al. 2020). 보편적 기본소득(UBI)의 제안은 모든 사람에게 지급되는 정기적이고 고정된 연령 기반 현금 지급을 구상하므로 자격의 함정을 피한다(Torry 2019). 혹독한 경제 위기와 코로나-19 상황에서 불평등의 엄청난 증가로 인해 UBI에 대한 토론이 세계 여러 지역에서 활성화되었고 국제 기관(예: ECLAC 2020)의 지지를 받았다. UBI가 특별히 돌봄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지만 여러 페미니스트 학자들은 이를 돌봄 노동을 재구성, 재평가 및 재분배할 수 있는 전략적 가능성으로 논의한다(Zelleke 2021; Winker 2015). CI와 마찬가지로 UBI는 국가 기관에서 배분하는 공생적 제안이지만, 보편적이기 때문에 적격성을 결정할 권한이 있는 사람은 없다. 페미니스트의 관점에서, UBI의 단절적 변혁의 잠재력은 사회 보장을 임금 노동과 분리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예: Schulz 2017, Winker 2015). 이를 통해 화폐화하지 않으면서 무급 노동 형태들을 사회적으로 재평가할 수 있으며, 보다 일반적으로 틈새적 전략이 번성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나 UBI는 사회의 모든 구성원 사이에서 돌봄 노동의 젠더-정의적 재분배를 자동적으로 해결하지 않으며 결정적으로 문화적 전환과 보완적 조치들에 달려있다(Katada 2012). 보다 최근의 제안들은 “보편적 돌봄 소득”으로 재구성함으로써 UBI 설계 내에서 돌봄의 중심성을 강조한다(Kallis et al. 2020, 71). 남반구의 주변부 지역에서 UBI의 일부 적용은, 예를 들어 자립 농민들을 착취적이고 환경을 악화시키는 임금 노동에 포함시킴으로써, 빈곤을 완화하고 생산성을 향상시켜서 성장을 보조한다(예: 케냐, Lowrey 2017 참조). 이것은 비상품화된 경제를 기반으로 무급 노동과 생계를 존엄케 하고 인정하고자 하는 탈성장 비전과 양립할 수 없으며, 임금 관계의 특수한 맥락을 변경할 필요성을 증명한다. 시간 체제의 변경과 돌봄 업무의 재분배 돌봄을 재정의하고, 재분배하고, 재평가하는 또 다른 핵심 전략은 임금 노동에 소요되는 시간을 다른 모든 형태의 노동에 할애할 수 있도록 확보함으로써 임금 노동의 권좌를 박탈하는 것이다. 20세기 내내, 생산성 향상의 맥락에서 또는 경제 위기시 단기적 경제 정책의 맥락에서 노동 시간의 전반적인 단축에 대한 요구가 종종 제기되었다(Zwickl et al. 2016). “피고용자와 실업자 사이의 노동 재분배”(Kallis et al. 2015, 13)로서 노동공유(work-sharing, WS)라는 탈성장 제안은 임금 노동의 지배적 역할 그 자체를 밀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기 때문에 그런 관점과는 다르다. 입법을 통해 WS를 실행하는 것은 임금 노동에 소비하는 모든 사람의 시간을 줄임으로써 모든 종류의 틈새적 전략이 번성할 수 있도록 하는 공생적 제안이다. 그러나 WS와 같은 젠더-중립적으로 보이는 제안은 매우 젠더화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Dengler and Strunk(2018)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임금 노동에 소요되는 매일의 시간 단축은 예를 들어 “금요일 휴무”를 제안하는 것보다 무급 돌봄 노동의 재분배와 관련하여 더 많은 변혁적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Kallis et al. 2013). 더욱이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재생산하지 않기 위해, WS는 저소득자에 대한 완전한 임금 보상을 요구하거나 임금 노동이 생계 보장과 분리되는 다른 방법을 요구한다(Winker 2015). 프리가 하우그(Frigga Haug, 2008)는 임금 노동에 소요되는 시간을 줄이는 대신에,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노동의 급진적이고 총체적인 (재)분배와 사회가 스스로를 조직하고 자연과 상호 작용하는 방식의 변화를 열망한다. 그녀의 “4-in-1 관점”은 모든 사람이 생활 수단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유급 노동, 인간과 인간 이상의 존재들(more-than-humans)을 위한 돌봄 노동, 공동체 및 정치 활동, 여가 및 자기 계발을 위한 시간에 각각 4시간을 투입한다고 상상한다(Haug 2011). 4-in-1의 실현은 Haug(Ibid.)에 따르면 보편적인 기본소득과 반드시 ​​연결되지만, 모든 사람이 돌봄 노동을 포함하여, 자기 몫의 모든 종류의 노동을 수행해야 하는 사회적 의무에 의존하기 때문에 무조건적이지는 않다. 그녀는 하루 4시간의 정치 활동을 요구함으로써 “아래로부터의” 정치 참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데(Haug 2008),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 시간 체제의 변혁을 형성하는 데 참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 경제의 변화에 대한 제안은 현상 유지에서 시작하지만 다양한 권력 관계를 전복시킬 잠재력이 있는 혁명적 현실정치로 이어진다. 돌봄을 중심으로 사회를 재조직하기 임금 관계와 시간 체제를 변화시키는 전략은 돌봄을 중심으로 사회를 재조직하기 위한 주요한 탈성장 전략 수립에 영향을 미치며, 이는 한편에선 시장/국가/비영리 부문에서 화폐 매개의 돌봄 노동 그리고 다른 한편에선 이성애규범적 핵가족에서의 무급 돌봄 노동 사이의 이분법을 넘어서 민주적이고 집단적인 돌봄의 구조를 요구한다. 2012년에 설립된 케어 레볼루션(CR)은 연대에 기반한 사회를 위한 기반으로서 돌봄을 변혁하고자 하는 정치 전략이며, 동시에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등지의 다양한 돌봄 파업과 긴밀히 연결된 사회 운동일 뿐 아니라 80개 이상의 협력 파트너를 가진 정치 네트워크이기도 하다. Gabriele Winker(2015)의 책 󰡔돌봄 혁명: 연대 사회를 향한 발걸음󰡕은 CR 배후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스트 분석의 기초를 보여준다. CR의 비전은 “유급 돌봄 노동과 무급 돌봄 노동의 구분이 더 이상 적용되지 않는 ... 인간의 필요를 지향하는 급진 민주주의 사회”로 대략 그려진다(Winker et al. 2018, 421). CR은 지구행성적 경계를 존중하는 광범위한 돌좀 개념을 적용하지만(Winker 2021), 결정적으로 인간의 생명과 필요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UBI 또는 WS와 같은 일부 비개혁주의적 개혁들이 연대 기반 돌봄 경제로 가는 길을 열 수 있음을 인정함으로써, CR은 변혁의 넓어지는 틈새적 공간을 위한 더 광범한 맥락을 제공한다. 프라이부르크의 Care-Rat(Winker et al. 2018)와 같은 지역 돌봄 위원회는 CR이 기존의 돌봄 인프라를 민주화하고 돌봄의 집합적 재구성을 시도하는 한 사례다. 이는 다음과 같은 논의와 밀접하게 연결된 전략이다. 이는 돌봄의 커머닝과 관련한 토론과 긴밀히 연결되는 전략이다. 커먼즈에 관한 연구가 지난 수십 년 동안 활발해졌다. 커먼즈를 일종의 재화/자원으로 간주하는 논의와 달리, 우리는 커먼즈를 삶의 (재)생산의 공유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관계와 민주적 자치의 프로세스로 간주한다(Caffentzis and Federici 2014, Bollier and Helfrich 2019, Perkins 2019). 매일 매일의 돌봄 활동과 보건 돌봄 부문의 일부는 시장, 국가, 가정 및 비영리 조직을 넘어 돌봄의 커먼즈(Caring Commons, CCs)로 조직될 수 있다(Akbulut 2016, Gutiérrez Aguilar 2017, Dengler and Lang 2022). 돌봄 노동을 커먼즈로 재조직하는 전략의 사례로는 지역사회 기반 의료 돌봄 시스템인 베네수엘라 바키시페노의 협동조합 Cecosesola(이 장의 후반부 참조)와 독일 함부르크의 베델의 Poliklinik, Ollas Comunes(1970년대 칠레에서의 공공 주방), 오늘날 스페인에서 커머닝된 육아, 노인을 위한 공동 주택 프로젝트 등이 있다. 이러한 사례들은 주로 재화의 공동 관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 돌봄과 공생공락의 관계를 변혁하고 (재)구축하는 데 중점을 둔다. 실비아 페데리치(Silvia Federici, 2019, 4)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처럼, CCs는 “이미 존재하는 현실이자 ... 맹아적 단계에서 자본주의 너머의 세계를 예견하는 조망”이다. 인간과 비인간 형태 생명의 상호의존성을 분명히 인정하면서, CCs의 규모를 확장될 때 그것은 변혁적이고 단절적인 잠재력을 지닌 틈새적 전략으로 읽힐 수 있다. 임금 관계와 시간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는 공생적 전략들은 그러한 커머닝 실천의 가능성 조건을 향상시키고, 보다 일반적으로 돌봄의 재조직이 번성할 수 있도록 해준다. 결론: 모두를 위한 돌봄 탈성장 사회를 위한 돌봄에 관한 전략은 비-인간중심적이고 비-이분법적 관점을 채택하여 인간 및 인간 이상 존재들과의 돌봄 관계를 구축하며, 다중적 상호의존성을 인정한다. 지난 수십 년간의 경험과 토론은 노동의 재정의와 재구성 그리고 일상 활동의 재구조화는 돌봄 윤리를 사회생태적 변혁의 중심에 둠으로써, 현재 돌봄 노동을 특징짓는 젠더, 계급, 인종, 식민주의의 선을 따라 존재하는 불균형과 부정의를 극복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페미니스트 탈성장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라이트와 프레이저가 설명하는 서로 다른 전략적 수준은 서로를 보완한다. 임금 노동을 뒤로 밀어붙이는 공생적 요구들은 일상적인 관계, 습관, 루틴의 보다 광범위한 변혁을 위한 가능성의 구조적 조건을 만들어내며, 여기서 도시와 시골의 커뮤니티들은 그들의 특수한, 민주적이고 자치적인 방식으로 정해진 필요에 따라 돌봄의 커먼즈를 확장한다. 이러한 탈성장 미래에서는 모든 성별의 사람들이 그들 일생의 일부를 돌봄 노동에 투여함으로써, 돌봄을 재정의, 재분배 및 재평가하는 데 필요한 문화적 변화에 기여한다. 화폐화된 경제 대 돌봄과 환경: 적대감 해소에 대한 탈성장 관점 Corinna Dengler and Birte Strunk / 번역: 희음, 김혜민 개요 본 논문은 현재의 성장 패러다임이 기존의 젠더·환경적 부당성을 어떻게 영속화하느냐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탈성장 일자리 나누기 제안을 통해 이를 완화할 수 있는지를 조사한다. 성장 패러다임에서 생태학적 과정과 돌봄 활동이 화폐화된 경제에 의해 구조적으로 평가절하되는 방식을 설명하기 위해 "ICE 모델"의 적응된 프레임워크를 사용한다. 한편, 이 패러다임은 이원론을 강화하고 돌봄을 평가절하함으로써 젠더 부정의를 영속시킨다. 반면, "녹색 성장"은 생산 공정을 비물질화하는 데 성공하지 못하기 때문에 환경 부정의가 영구화된다. 성장 필수성에 대한 비판에서, 탈성장은 환경 부정의의 완화를 촉진할 뿐만 아니라 돌봄을 중심으로 한 사회의 회귀를 요청한다. 본 논문은 성별에 민감한 방식으로 설계될 경우, 보다 광범위한 가치 변환의 일환으로 탈성장 작업 공유 제안은 젠더·환경적 부당성을 모두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결론짓는다. 키워드 탈성장, 성적 불평등, 지속가능성, 업무 공유, 성별 노동시간 평등, 돌봄경제 1. 인트로 페미니스트 그리고 생태경제학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한된 방법으로만 서로 연관을 맺고 기입해야 한다. Bina Agarwal이 "환경 및 성별에 대한 종합적 우려는 개발, 재분배 및 제도 변화와 관련된 많은 오랜 이슈를 재분배할 필요성과 새로운 빛을 던질 가능성 모두를 열어준다."(1992: 152)고 말한 20여 년 전에 이미 유익한 협력의 가능성이 지적되었다. 상호 교류의 근거를 제공하는 한 가지 주제는 "성장 기반 자본주의 경제 패러다임"에 의한 돌봄과 자연의 구조적 평가 절하에 대한 비판이다(Perkins 2007: 228). 그러나 지금까지 이 문제는 대부분 개별적으로 접근되어 왔으며 Perkins(2007)에 따르면 공유 분석은 오래 전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분석은 현 상황에서 형식 경제에 대한 과도한 강조를 비판하는 동시에 돌봄과 자연에 대한 우려를 통합한 것에 기초할 수 있다. 현상에 비판적이면서도 환경 지속 가능성을 사회 정의와 결합하려는 한 가지 접근 방식은 생태경제학에 뿌리를 두고 성장하는 운동인 "탈성장"이며, 나중에 더 논의될 것이다. 글로벌 북부에 의해 그리고 글로벌 북부를 위해 개발된 개념이기 때문에, 이 글은 무엇보다도 부유한 서구 사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성장 패러다임 내에서 돌봄과 자연의 구조적 평가 절하에 대한 기존 문헌을 종합함으로써, 우리는 성장이 돌봄과 자연을 구조적으로 재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어느 정도 제공할 수 있는지 논의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본고는 현재의 성장 패러다임이 기존의 성별 및 환경적 부정의를 어떻게 영속시키고, 이러한 것들이 탈성장 일자리 나누기 제안을 통해 완화될 수 있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룬다. 따라서 우리는 귄셀리 베릭, 야나 반 데어 뮬렌 로저스, 스테파니 세기노가 페미니스트 경제학에서 다음 단계라고 부른 것, 즉 "평등을 추구하는 데 지속가능성의 원칙을 잣대와 목표로 삼아 성장의 본질을 보다 폭넓게 문제화한다"고 이름 붙인 것에 기여한다(2009: 24). 동시에, 우리는 탈성장 담론에 기여하는데, 이는 지금까지 페미니즘이 "광범위한 정교화가 필요한"(Demaria et al. 2013: 201) 주제임을 인정하기까지 이르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돌봄과 자연에 관한 기존의 논쟁과 탈성장 담론에서 제기되는 주장과 제안들을 연결하는 이론적 기여로 볼 수 있다. 2. 화폐화된 경제: 적대감을 개념화하기

 이 논문은 Maren Jochimsen과 Ulrike Nobloch(1997)에 의해 개발된 그림 1에 묘사된 "ICE 모델"을 채택한 것을 기반으로 한다. 원래의 모델은 산업경제 사고와 행동(I), 돌봄 활동(C), 생태 과정(E) 사이의 (상호)관계를 상세히 설명한다. 산업경제적 사고와 행동이 상위에 있고 생태학적 과정과 돌봄 활동이 삼각형의 하단에 있는 구조는 근본적인 위계질서를 반영한다. 마릴린 워링(1988)은 국내총생산(GDP)이 여성의 무급 돌봄 노동은 물론 생태학적 과정에도 구조적으로 눈을 감는다고 비판함으로써 이러한 위계질서를 문제 삼은 최초의 작가 중 한 명이다. 요힘센과 노블록은 "현재의 경제 과정은 가격을 매길 수 있는 것에만 가치를 부여하며, 따라서 교환 가치가 있는 것에만 반응할 수 있다"(1997:109)고 지적함으로써 이러한 비판을 기반으로 한다. 이러한 사용에서 교환 가치로의 전환은 삼각형의 기저를 구조적 부주의로 이끌었고, 이에 따라 "지배적 경제 사고의 주요 사각지대"를 만들었다(Pietilä 1997: 20).

산업경제적 사고와 행동(I), 돌봄 활동(C), 생태적 과정(E)의 (상호) 관계를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첫째, I와 E의 관계에 관하여, 요힘센과 노블록(1997)은 산업생산이 생태학적 과정에 의존하고 제한됨에도 불구하고, 전자는 후자를 파괴하는 경향이 있다고 강조한다. 장 폴 들레아지는 자연을 "수도꼭지와 개수대, 또는 경제 활동의 처음이자 마지막 단계"로 개념화한다. 그러나 현대 주류 경제학은 자연에 대한 부정적인 영향을 "외부성"으로 취급하여 자연이 모든 경제 생산 과정에서 수행하는 근본적인 역할을 인정하지 않는다(O'Hara 1997). 둘째, I와 C의 관계는 유사한 힘의 비대칭으로 특징지어진다. C는 한편으로는 "산업경제적 사고와 행동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 토대를 구성한다"(Jochimsen and Nobloch 1997: 110)고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돌봄 활동이 실제 업무라기보다는 당연한 일로 간주되어 평가절하되고 있다(Folbre 1994). 피에틸레는 돌봄 노동을 무시하고 경제 생산과 인위적으로 분리하는 대신 시장에서 서비스될 수 없는 '인간의 필수적 욕구 충족을 위해 직접 일하기' 때문에 '1차 경제'로 봐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운다(1997: 120). 마지막으로, 요힘센과 노블록(1997)은 C와 E, 즉 삼각형의 기저에 있는 두 관계를 알차고 없어서는 안 될 공생적인 것이라고 설명한다. 돌봄활동은 보다 큰 생물물리학적 맥락에서 이루어지며 산업경제 생산과정과는 달리 "생태적 과정을 지속하려는 경향이 강한 것으로 조정"한다(Jochimsen and Nobloch 1997: 110). E와 C의 I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생태학적 과정과 돌봄 활동이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태학적 과정과 돌봄 활동은 경제 주류 내에서 산업 경제학 사상에 의해 자주 간과되고 평가절하된다는 점에서 서로 유사하다(Nelson 2009). 더욱이 오하라가 지적한 바와 같이, 생태학적 과정과 돌봄 활동은 모두 "공식 경제의 생산 과정에 수없이 많은 필수적인 서비스를 제공한다"(1997: 142). 따라서 사회적으로 평가절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모두 공식적인 경제가 기초가 된다. 이 때문에 요힘센과 노블록(1997)은 삼각형의 근간을 화폐화된 경제와 대조되는 유지경제로 요약한다. 우리가 적응한 개념 프레임워크는 그림 2에 묘사되어 있으며, 요힘센과 노블록이 "유지 및 통화"와 그 두 세계 사이의 극복할 수 없는 경계(1997: 111) 사이에 만든 구별에 기초한다.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경계는 다양한 페미니스트 학자들에 의해 다른 개념적 이중성으로 귀속되었다(Agarwal 1992; Jochimsen and Nobloch 1997; O'Hara 1997; Pietilä 1997; Mies 2005; Biesecker and Hofmeister 2010). 예를 들어, 오하라는 (가치 있는) 생산과 (가치 없는) 생산의 질적 구분이 생산 과정 자체에 대한 집중, 즉 "내부 집중"을 촉진한다고 강조한다. "외부", 즉 생산이 이루어지는 사회적, 생물학적 맥락은 이 초점의 외부에 남아 있다. (1997: 142) 마이스는 빙산의 가시적인 끝부분과 표면 아래에 있는 "빙산 경제"의 더 크고 보이지 않는 부분을 구별한다(2005:270). 앞서 언급한 페미니스트 학자들 사이에서는 화폐화와 유지, 생산성과 생식, 가치와 무가치, 세는 것과 세지 않은 것,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경계가 극복되어야 한다는 데 폭넓은 공감대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경계를 넘는 것은 페미니스트 경제학자뿐만 아니라 생태경제학에서도 반복되는 주제였다(Biesecker and Kesting 2003; Common and Stagl 2005). 1944년 초에 카를 폴라니(1944/1957)는 경제를 사회에 내재된 것으로 묘사했고, 이를 다시 자연환경에 내재된 것으로 묘사했다. 그림 3은 폴라니의 임베디드 접근 방식(왼쪽 원)과 적응 ICE 모델(그림 2)을 결합한 우리의 적응 프레임워크를 보여준다. 그림 3(오른쪽 원)에서 우리는 요힘센과 노블록(1997)이 말하는 "돌봄 경제"를 보여준다. 이 개념은 출발점으로 주의를 기울이고 산업 생산 과정, 생태 과정, 돌봄 활동을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한다. 오하라는 화폐화된 것과 유지된 것 사이의 인위적인 경계를 뛰어넘는 경제에 대한 유사한 개념을 개발했는데, 유지된 것이란 “생산을 그것이 일어나는 구체적인 생물물리학적, 사회적 맥락으로 “내재화”하려고 하는”(1997:142)  "지속적인 생산"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비제커와 호프마이스터는 최근 기고문에서 생산성의 개념을 "중재의 범주, 생산성과 생산성, 자연과 사회 사이의 가교"로 발전시켰다. 이 세 가지 개념은 모두 화폐화된 경제와 유지된 경제의 경계가 극복된 사회를 묘사하지만, 현재의 주류 경제학에서는 그 경계 자체가 크게 도전받지 않고 남아 있다. 따라서 이를 어떻게 진척시킬 것인가에 대한 핵심적인 문제는 남아 있다.

페미니스트와 생태경제학의 대부분의 제안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경제 규율의 주제에 대한 확장된 정의를 경계를 극복하는 데 있어 실질적이라고 본다는 것이다. 단순히 화폐화된 경제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경계를 넘어서는 경제학은 "사회가 어떻게 스스로를 조직하여 삶의 생존과 번영을 제공하는가"에 대한 확대된 정의가 필요할 것이다(넬슨 2009: 4). 이를 위해 마릴린 파워는 "경제활동 분석을 상호의존적인 사회 프로세스로" 취급하는 사회제공의 방법론을 도입한다.(2004: 6). 그러나 GDP에 포함된 것만을 중시하는 시스템에서 상호의존성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피터 빅터(2015)가 지적하듯이, 한 국가의 GDP와 그에 따른 경제성장은 현재 산업경제 사상과 행동(I)의 가장 핵심에 있다. 기존 문헌에서 거의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았던 한 가지 질문은 돌봄 경제가 성장 패러다임과 양립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는 현재의 성장 패러다임이 어떻게 기존의 성별과 환경적 부당성을 영속시키는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함으로써 이 둘은 양립할 수 없다고 아래에서 주장한다. 3. 현재의 성장 패러다임은 어떻게 젠더 불평등을 영구화하는가? 산업적 사고와 행동(I)과 돌봄 활동(C)의 관계를 시작으로, 페미니스트 경제학은 상당한 양의 통찰력을 제공한다. 페미니스트 경제학은 "하나의 특정 경제 패러다임으로 식별되지 않는다" (Power 2004: 3) 그러나 다양한 가닥은 오늘날 여성이 차지하는 역할뿐만 아니라 경제 연구에서 역사적으로 여성이 해온 역할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입장을 공유한다. 오랫동안, 학문으로서의 경제학은 화폐화된 경제에 유일한 초점을 두었고, 따라서 전통적으로 유지 영역을 책임지는 것으로 여겨졌던 여성들을 구조적으로 배제했다. 비록 화폐화된 경제에서 여성의 역할은 지난 수십 년 동안 바뀌었지만, 역사적 분열의 영향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한다. 지금도 고용의 경력 모델은 가정적 책임에서 더 자유롭다고 가정되는 남성에게 유리한 것으로 보인다(Sirianni and Negrey 2000; Craig 2016). 대조적으로, 여성들은 여전히 무급 요양 노동의 가장 큰 몫을 제공하는 사람들이며, 따라서 종종 "간단한 예고를 통해 핵심 장시간 초과 근무는 불가능하며 중추적이며 남성 중심적인 직업에서는 배제될 수 있다"고 가정된다(Rubery, Smith, Fagan 1998: 93). 이러한 구조적 불평등은 경제 성장과 젠더 불평등의 영구화 사이의 연관성과 어떤 관련이 있는가? 낸시 포시테, 로베르토 파트리치오 코르제니에비치, 발레리 듀란트(2000)가 지적한 바와 같이, 양성평등과 경제발전 사이의 관계에 대한 몇 가지 이론이 있으며, 이는 주로 경제성장과 동일시된다. 그들은 세 가지 일반적인 접근 방식을 개략적으로 설명한다. (1) 현대화-신고전적 접근은 경제성장이 여성의 인적자본 성취도를 높이는 데 기여할 것이며, 장기적으로 성별 불평등을 해소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고용과 소득 격차를 해소할 것으로 간주한다. (2) 보세럽 논문과 '개발 중인 여성'(WID) 접근법은 경제발전 초기 단계에서 경제성장이 '남녀의 업무역할 계층화'(Boserup 1970: 140)로 이어져 성별 간 격차를 더 벌린다고 주장한다. 다만 장기적으로 임금근로에서 여성을 배제하면 노동시장이 타이트해지고, 여성근로자에 대한 수요 증가로 여성의 교육훈련 접근성 증진을 위한 정책적 노력이 늘어나 여성의 노동참여가 확대되고 양성평등이 확대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3) "성별 및 개발"(GAD) 접근법은 "개발"이 더 큰 양성평등을 조장한다는 가정에 다소 비판적이다. Forsythe, Korzeniewicz, Durrant(2000)에 따르면, 이 접근법은 두 가지 해석을 포함한다. 첫째는 경제성장과 양성평등 사이에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성장과 무관한 제도적 장치(가부장적 가치체계 등)가 성불의를 지속하는 이유라는 점이다. 두 번째 해석은 경제 성장이 실제로 젠더 불평등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것인데, 이는 경제 성장이 남성의 지위에 비해 여성의 지위를 감소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위의 일부 척도의 개선은 종종 다른 척도의 악화와 일치하며, 때로는 새로운 문제의 발생과도 일치한다."(2000: 578). 이 기고문에서, 우리는 접근법 (1)과 (2)에 대한 관점, 즉 경제 성장이 여성의 노동 참여로 이어져 더 큰 양성 평등으로 이어진다는 관점이 여러 가지 이유로 주의 깊게 고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제 성장이 여성의 더 큰 노동 참여로 이어진다는 것은 사실일 수 있지만, 우리는 이것이 결국 더 큰 성평등으로 자동 변환된다는 종종 암묵적인 가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는 접근 (3)과 함께 단순히 수익화된 영역에 대한 여성의 참여를 증가시킴으로써 여성을 "권력화"하는 이러한 관점은 매우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어떤 면에서는 여성의 지위를 증가시킬 수 있지만, 다른 면에서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돌봄 책임은 결국 누군가에 의해 지어져야 하며, 지속적인 성 역할 때문에 가정 돌봄 업무에 대한 책임은 여전히 여성에게 있다고 가정한다(Craig 2016). 이것은 종종 여성들이 유급과 무급 노동의 이중적인 부담에 노출되게 한다. 따라서 우리는 평등한 임금노동기회를 양성평등의 주요 잣대로 보는 위에서 설명한 첫 두 가지 접근법이 용어의 정의를 너무 좁게 제시한다고 주장한다. 임금 노동에 종사하는 여성이 이중 부담을 견디거나 가정 돌봄에 대한 "그녀의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가정한다고 해서 구조적 성불평등이 지속되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확실히 글로벌 북부의 많은 맞벌이 부부들은 고용된 돌봄 제공자 시장에 이전의 돌봄 책임을 아웃소싱함으로써 이러한 문제적인 선택을 회피한다(시리아니와 네그리 2000; 사센 2002). 마이스(2005)가 지적한 바와 같이, 따라서 많은 여성들은 실제로 여성의 노동 참여를 증가시키는 전략으로부터 이익을 얻었다. 하지만 이것은 종종 다른 사람들(다시 말하지만, 대부분의 여성)의 희생으로 일어났다. 이러한 맥락에서 리세 이사크센, 데비 삼바시반, 알리 호흐실드는 이른바 '돌봄의 배수관' 또는 '글로벌 보모 체인'(2008: 406)이라고 불리게 된, 동양에서 서양으로의 돌봄 이동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마찬가지로 사센(2002)은 글로벌 도시와 생존 회로에 대한 그녀의 글에서 글로벌 북부에 있는 맞벌이 부부인 세계화와 글로벌 남부에 사는 가정부, 보모, 간호사 및 성 노동자에 대한 글로벌 북부에 대한 증가하는 수요 사이의 명확한 연관성을 밝힌다. 따라서 유지경제와 화폐화 경제의 경계는 더 이상 백인 중산층 여성과 남성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을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취약한 사람들과 이익을 보는 사람들 사이에는 지속된다. 게다가 메이스의 노선을 따라 단순히 백인 중산층 여성의 화폐화 경제 참여 증가라는 관점에서 젠더 불평등을 해결하는 "경제적 권한 부여" 전략은 경계를 문제없이 남길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여성 해방과 평등에 대한 요구의 공동 선택 개념과 언어"(2005: 272)라고 주장할 수 있다. 이러한 전략은 경계를 극복하기보다는 유급과 무급 노동의 계층적 이원론까지 강화시킬 수 있다. 발 플럼우드는 여성을 "이원론의 관점에서 남성적인 제도와 문화에" 무비판적으로 흡수하는 전략은 여성을 해방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성과 보살핌과 관련된 것에 대한 평가절하를 강화한다고 지적한다(1986: 130). 단순히 무급 간병 업무에서 많은 여성을 벗어나게 하는 전략을 채택하여 그 매력이 없음을 재확인하는 대신, 간병 업무를 남성과 여성에게 매력적인 것으로 재확보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줄리 넬슨(2016)은 최근 "남성애"에 대한 풍부한 서사가 남성들이 돌봄에 대한 책임을 되찾을 수 있게 한다고 제안함으로써 그러한 전략 중 하나를 제안했다. 이와 유사하게, 시리안니와 네그레이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남녀 모두가 두 배의 짐이지만 두 배의 풍요로움이기도 한, 일과 가정의 약속을 경험하지 않도록 하는 가치관의 심오한 변환"이라고 주장하는 에밀리 스토퍼(1982)를 언급한다. 그러나 우리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이러한 변화는 현재의 성장 패러다임에서는 달성하기 어렵다. 이 패러다임은 국내총생산(GDP) 증가를 기반으로 하므로 정량화할 수 있는 것만을 포착하기 때문에 반드시 임금 노동을 무급 노동보다 중시해야 한다(O'Hara 1999). 이것은 악의의 문제가 아니라 단순히 성장 패러다임 내에서 본질적으로 생산되고 재생산된 내러티브의 결과이다. 넬슨(2013)은 내러티브를 다루는 것이 경제학자의 일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만, 현재의 경제 주류는 그 자체로 내러티브라는 사실을 잘 알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유지경제에 관한 내러티브의 변화는 성장 패러다임을 가져오기 어려운 것이 분명한데, 이는 근본적으로 "환경보건이나 사회복지에 대한 조치보다 금전적 평가에 더 쉽게 자신을 빌려주는" 경제 조치에 기반을 두고 있다(O'Hara 1999: 85–6). 국내총생산(GDP)으로 계산하여 수익화된 경제에 돌봄 활동을 포함하려는 시도는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가정 돌봄 노동은 돌봄이 수반되는 곳에 효율성의 언어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임금 노동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한편으로 그 노동은 그것을 하는 사람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생산성 향상이 거의 또는 전혀 불가능하다"(도나트 2000:118). 따라서 단순히 가사 돌봄노동을 "평이한 노동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것은 돌봄 경제로 가는 길이 아닌 것 같다(Himmelweit 1995: 14). 결론적으로, 성평등에 대한 우리의 정의가 여성의 노동참여의 단순한 증가를 넘어선다면 우리는 성장 패러다임에서 산업경제적 사고와 행동(I)과 돌봄활동(C)의 비대칭적 관계를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우리의 프레임워크(그림 2)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유지 경제는 돌봄 활동뿐만 아니라 생태학적 과정(E)으로도 구성된다. 성장 패러다임 안에서 경계를 극복하는 것이 가능한가에 대한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I와 E의 관계도 살펴봐야 한다. 4. 현재의 성장 패러다임은 어떻게 환경적 불평등을 영구화시키는가? 지난 40년 동안 환경 문제는 1971년 로마 클럽 보고서와 1972년 유엔 인간 환경 회의를 시작으로 점점 더 많은 관심을 받아왔다. 그 후 리우데자네이루(1992년), 요하네스버그(2002년), 코펜하겐(2009년), 리우데자네이루(2012년), 파리(2015년)에서 열린 많은 회의가 열렸다. 모두 세대 내 및 세대 간 정의의 문제인 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구속력 있는 협정을 수립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Ikeme 2003). 예를 들어, 글로벌 북부가 훨씬 더 큰 탄소배출국임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남부의 작은 섬 국가들이 글로벌 북부에 있는 국가들보다 기후 변화로 더 많은 고통을 받는 것은 세대 내 정의에 대한 장애물이다(해밀턴 1999). 세대 간 정의와 관련하여, 환경 시스템을 저하시키는 것은 미래 세대에게 불공평하며, 자원이 매우 고갈되고 기후 변화가 그들의 환경을 살 수 없게 만든다면 그들 스스로를 유지하기 더 어려운 조건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Gardiner 2006). 1987년 Brundtland 보고서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속 가능한 개발의 개념은 종종 환경적 부당성을 해결하고 그에 따라 성장 패러다임에서 경제적, 사회적, 생태적 측면을 조화시키는 수단으로 간주되어 왔다. 지속 가능한 개발 개념의 핵심 가정은 경제 성장이 "녹색"이 될 수 있고, 따라서 부정적인 환경 영향과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녹색 성장"의 바람직함은 유엔 환경 프로그램(2011) 보고서인 <녹색 경제를 향한: 지속 가능한 개발과 빈곤 퇴치를 위한 경로>에서 매우 명쾌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녹색경제는 더 이상 생태학적 과정을 파괴하려는 경향이 강한 '수정'이 아니라(Jochimsen and Nobloch 1997: 110) 지속하는 것이 된다.그러나 녹색성장의 개념이 "끝없는 성장 패러다임의 한계에 대한 과학적 증거에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화폐화 경제와 유지 경제의 경계를 극복하기 위한 해결책으로 녹색경제를 고려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Ehresman and Okereke 2015: 19). 생태 현대화의 지지자들은 생산과 소비의 "녹화"라는 기술적 수정을 통해 경제 성장이 지속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는 1865년 산업혁명의 맥락에서 이미 제련 철의 단위당 필요한 석탄 투입량이 감소하는 동시에 총 석탄 소비량이 증가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이로부터 그는 "자연 자원을 사용하여 효율성을 높이는 기술 변화는 그 자원의 소비율을 감소시키기보다는 증가시킨다"(Alcott 2015: 121)고 결론지었다. 이 현상은 제본스의 역설로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 역설에 대한 설명은 성장 패러다임에서 효율성 향상은 소위 반등 효과로 상쇄된다는 것이다: 자원 투입의 낮은 비용은 생산 증가를 허용한다. 효율성 향상을 통해 기술 변화는 상대적인 측면에서 생산과 부정적인 환경적 결과를 분리할 수 있다(Herring 2006). 그러나 단위 성장이 디커플링 속도보다 더 빠르게 발생하는 한, 상대적인 디커플링만 달성될 수 있을 뿐 절대적인 디커플링은 달성될 수 없다. 볼프강 삭스는 "자원 효율성의 증가만으로는 성장에 대한 지적 억제와 함께 가지 않는 한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Herring 2006: 15)고 지적한다. 따라서 경제성장과 효율성 향상에 의존하는 것은 환경적 부당성에 대한 해결책이 되지 못할 것이다. 사실, 이사벨 앵글로브스키가 지적하듯이, 성장은 "[환경]불의를 만드는 과정의 일부"이다(2015:35). 따라서 경제의 광범위한 탈물질화를 가져올 미래 기술을 기대하기보다는 효율성 제고와 성장을 넘어서는 해결책을 논의해야 한다. 지속 가능한 개발이나 녹색 경제의 아이디어의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적, 사회적, 생태학적 우려를 통합하는 것이 나쁜 생각이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문제는 그것들이 환경 문제의 만병통치약으로 제안된 잘못된 합의를 구성하기 때문에 기본 원칙에 대한 토론보다 기술적 수정을 우선시한다는 것이다(안드로이치와 맥도너 2015). 넬슨은 기후 변화와 같은 환경적 도전이 "우리 직업에는 중대한 변화가 필요하다"(2013:152)는 것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이러한 변화가 성장 패러다임에 대한 비판적 입장과 세대 간, 그리고 세대 내 환경적으로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상향식 접근법의 강화를 포함한다고 주장한다. 5. 경제 재정치화의 필요성 이상으로부터 현재의 성장 패러다임에서 산업경제적 사고와 행동(I)이 그 근간을 이루는 유지경제(C와 E 둘 다)를 체계적으로 훼손한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따라서 현재의 성장 패러다임은 기존의 성별과 환경적 부당성을 완화하기보다는 영구화한다. 현재의 부당함에 대한 보편적인 치료법이 권력, 재산 및 분배 문제를 해결하지 않기 때문에 성장과 효율성을 촉진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더 편리할 수 있다. 그러나 헤링의 지적처럼 "핵심 질문은 기술적 문제가 아니라 윤리적, 경제적 문제라기보다는 문화적 문제"(2006:19)이다. 그것이 단지 미래 세대를 희생시키면서 자원 집약적인 우리의 생활 방식을 살기 위한 것일까? 우리는 어떤 사회에서 살고 싶은가? 모두를 위한 좋은 삶이 있을 수 있을까? 이것들은 지속 가능한 발전의 정치적 담론인 기술 관료주의에서 다루어지지 않는 깊이 있는 규범적 질문들이다(칼리스, 데마리아, 달리사 2015). 이에 따라, 지역 돌봄 노동 상황에서 여성의 지식 시스템을 포함한 상황별 지식 시스템은 크게 소외되었다(O'Hara 1999). 현대의 성별과 환경적 부정의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지식 체계와 질문을 회수해야 한다. 마이즈가 지적했듯이, "그런 사회나 경제를 위한 준비된 청사진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놀랍게도 우리가 묻고 있는 것과 같은 질문을 하는 사람들, 집단, 조직, 풀뿌리 단체 및 운동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2005: 273). 그러한 운동 중 하나는 탈성장 운동으로서, 스스로를 "경제 발전, 성장, 기술 혁신 및 발전에 대한 민주적 논쟁의 부족에 대한 대응"으로 자리매김한다(Demaria et al. 2013: 199). 그것은 현재의 환경적, 성별적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한 새로운 방법을 찾고, 따라서 더 사회적으로 공정하고 환경적으로 건전한 사회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해 이러한 주제를 둘러싼 토론을 정치화하려고 시도한다. 6. 탈성장 : 운동에 대한 짧은 소개 탈성장 운동은 상대적으로 젊고, 성장하는 운동으로 학술적 연구와 정치적 행동주의의 결합을 목표로 하며, 생태 경제학, 사회 생태학, 경제 인류학과 같은 사상의 학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Martínez-Alier 2012). 1970년대 초 André Gorz와 Nicholas Georgescu-Roegen이 이 용어를 사용한 것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2002년부터 프랑스에서 데크로아상스(Décroissance, 감소, 감퇴, 하락)의 사회운동이 일어났으며, “포스트 성장 사회에 대한 다각적인 비전”을 제안했다.(Muraca 2013:147) “탈성장”이라는 영어 용어는 2008년 파리에서 열린 탈성장 컨퍼런스에서 처음 소개 되었고, 이후에 바르셀로나(2010년), 몬트리올(2011년), 베니스(2012년), 라이프치히(2014년), 부다페스트(2016년)에서 추가적인 컨퍼런스가 이어졌다. Kallis, Demaria, 그리고 D'Alisa(2015)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국제적인 연구 영역으로서 탈성장은 다른 무엇보다도 성장 비판에 대한 해석적 틀로 정의될 수 있고, 이 해석적 틀은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위기는 경제성장과 관련이 있다”는 진단을 제시한다고 말이다(Demaria et al. 2013: 194). 그러나 용어 자체는 다르게 제시할 수도 있지만, 탈성장은 본질적으로 경제적 개념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되며, 단순히 GDP를 축소하라는 요구로도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Demaria et al. 2013;Muraca 2013). 대신, 초점은 피할 수 없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목표로서 경제 성장을 폐지하는 데에 있다. 중요한 측면은 마이너스 GDP 성장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GDP에 일어나는 일이 부차적이라는 점이다. 대신, 가장 중요한 것은 복지, 사회 정의, 생태적 지속 가능성의 측면들이다(Schneider, Kallis, and Martínez-Alier 2010). 그러나, 현재 계산되는 GDP의 감소는 실제로 가능한 결과인데, 왜냐하면 탈성장은 더 낮은 수준의 생산과 소비의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Kallis, Demaria, and D’Alisa 2015). 그러나, 이것은(탈성장은) 자발적이고 의식적인 변화이기 때문에, 이것은 경기 침체와 “성장 체제 내에서 계획되지 않은 탈성장”과는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Schneider, Kallis, and Martínez-Alier 2010: 511). 오히려, 우리가 탈성장에 대해 이야기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것은 지속 가능한 탈성장으로서, 이것은 “사회적으로 지속 가능하고 공평한 사회의 처리량 감소(그리고 결국에는 안정화)”를 목표로 한다(Kallis 2011: 874). 지속 가능한 탈성장의 아이디어의 필수적인 부분은 이것이 “전반적인/전체적인 탈성장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Schneider, Kallis, and MartínezAlier 2010: 512). 특정한 지역은 물론 어떤 특정한 부문들은 여전히 선택적으로 성장이 필요 할 수 있다. 한편으로는, 경제에서 여전히 번창해야만 하는 부문들이 있는데, 예컨대 교육, 돌봄, 건강, 혹은 재생 가능 에너지 등이 있다. 또 한편으로는, 지역과 관련해서 보았을 때, 탈성장은 북반구의 선진국에 의해 그리고 주로 북반구의 선진국을 위한 개념이라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러나, 글로벌 자본주의의 맥락 안에서 북반구의 선진국에서의 소비의 감소는 북반구과 남반구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북반구의 선진국에서의 탈성장은 (단기적으로) 남반구의 저개발국에서의 고용 기회와 소득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인정하야 한다. 북반구의 선진국에서의 탈성장은 수입되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 감소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것들은 보통 남반구의 저개발국에 의해 수출된다. (예컨대 인도나 방글라데시에서 만든 의류, 필리핀에서 온 보모 등) 틀림없이, 계급, 인종, 그리고 세계적 불평등에 대한 복잡한 영향들은 탈성장 학자들에 의해 훨씬 더 크게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탈성장은 이러한 세계적으로 불평등한 교환 패턴들에 대한 정확한 해답인데, 이러한 패턴은 궁극적으로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불평등을 강화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탈성장 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북반구 선진국들의 “제국적 생활 방식”은 남반구 저개발국들을 억압하고 글로벌한 환경 정의에 장애물이 된다고 말이다(Brand and Wissen 2013). Kallis, Demaria, 그리고 D’Alisa에 따르면, 탈성장은 “남반구의 저개발국들이 같은 길을 따르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곳의 국가들이 좋은 삶으로 정의하는 그들만의 궤적을 찾을 수 있는 개념적 공간을 열어두기 위해” 북반구 선진국들에서 추구되어야 한다(2015: 5). 만약 탈성장이 GDP를 축소하는 경제 전략이 아니라면, 또는 경제 성장을 완전히 폐지하라는 요구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탈성장은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 탈성장의 핵심은 “새로운 기술과 효율성 향상이 생태 위기의 핵심 해결책이라 주장하는 생태적 근대화에 대한 믿음을 비판하는 것”에 있다(Demaria et al. 2013: 198). 이러한 비판은 어떤 종류의 질문들을 구체적으로 물어볼 수 있는 공간을 열어주는데, 이때 질문들이란, 우리가 위에서도 주장했듯이, 사회적이고 환경적인 위기들을 다루기 위해 우리가 사용하는 전략들을 재-정치화하기 위해 물어져야 하는 것들이다. Demaria 등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탈성장은 새로운 이야기들을 위한 개념적 공간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서구 사회들의 “사회적 상상력의 성장-기반의 근원”에 도전한다고 말이다(2013: 209). 이러한 상상력들은 가장 지배적인 정치적 목표인 경제적 합리성에서 벗어나는 가치의 변화를 암시한다. 대신, 경제 성장은 한 사회가 모두에게 좋은 삶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는 목표에 도움이 될 때만 정당화된다. 탈성장은 단일한 하나의 이론이 아니며, 단일한 아이디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Demaria et al. 2013). Konrad Ott(2012)가 보여주었듯이, 탈성장 운동 내에는 복지 지표로서의 단순한 GDP 비판부터 자본주의에 대한 급진적인 거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종류가 있다. 탈성장 지지자들에게, 이러한 입장의 다양성은 모순이 아니라, 환경 및 사회 정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상호 보완적인 전략들을 촉진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Demaria et al. 2013). 7. 탈성장, 화폐화된 (경제), 그리고 유지 (경제) : 적대 극복하기 탈성장을 현행 제도의 대안으로 도입한 이상, 이제 남겨진 질문은 다음과 같다. 탈성장은 성장 패러다임에서 확인된 젠더와 환경적 불평등의 영속화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탈성장과 환경적 지속 가능성 간의 연결고리는 탈성장과 젠더 불평등의 연결고리보다 훨씬 더 명확하게 확립되어 있다. 이에 대한 이유 중 하나는 탈성장이 생물경제학과 생태경제학에 이론적 뿌리를 두고 있는 반면에, 페미니스트 경제학은 오히려 동맹으로 간주되고 있기 때문이다(Demaria et al. 2013). 더 나아가, 탈성장과 환경적 지속 가능성 간의 연결고리는 생산을 줄임으로써 환경적 압력을 완화하는 것을 명시적인 목표로 하기 때문에 직관적으로 더 직접적일 수 있다. (그러나) 젠더 평등의 문제에 관해서는, 문제가 그렇게 딱 떨어지게 명확하지 않다. 탈성장 학자들은 페미니스트 운동이 GDP를 비판한 최초의 운동 중 하나였다고 인정하면서(Waring 1988),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두 운동 간에 근본적인 공통점을 본다(Schneider, Kallis, and Martínez-Alier 2010). 그러나 탈성장 학자들은 또한 “탈성장의 젠더 차원에 대한 좀 더 정교한 설명이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다(Demaria et al. 2013: 206). 지금까지, 탈성장은 “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적 맥락 안에서 사회적 재생산의 성과 계급 신체-정치에 대한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Picchio 2015: 210). 따라서 탈성장은 유급 노동과 부불노동의 분할에서 젠더 불평등에 대해 전반적으로 잘 보려고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Bauhardt 2014). 이러한 현존하는 젠더 불평등이 탈성장의 프레임 내에서 다뤄지지 않는다면, 현재의 상황을 안정화시킬 위험이 있다(Perkins 2010). 따라서 탈성장은 페미니즘의 문제들을 훨씬 더 많이 그들의 담론 안에 통합해야만 한다. 우리는 비록 아직 광범위하게 설명되지 않았지만, 탈성장 담론 내에 그러한 논쟁을 위한 명확한 출발점이 이미 있다고 주장하고자 한다. 실제로, Giacomo D’Alisa, Marco Deriu, 그리고 Federico Demaria가 언급하듯이, “사회-환경 정의에 대한 강력한 주장 안에서, 탈성장을 주창하는 사람들은 돌봄 노동에 대한 좀 더 공정한 분배를 위한 페미니즘적 주장을 무시할 수 없다”(2015: 64).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들은 심지어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돌봄을 둘러싸면서 사회의 중심을 다시 잡는 것은 탈성장으로의 길을 열어줄 것이다.”(2015: 64). 우리는 이러한 견해에 동의하지만, 더 나아가 그 반대의 주장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 돌봄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은 탈성장의 길을 열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탈성장도 돌봄 경제를 향한 길을 열 수 있다. 왜 우리는 탈성장이 현재의 성장 시스템보다 돌봄 경제에 더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는가? 성장 패러다임에 내재된 내러티브들은 사회적 신분의 상징과 같이 수량화 할 수 있는 것에 기초하여 가치와 사회적 인정을 부여한다. 반면에, 탈성장 사회에서, 사회적 인정은 오히려 쾌활함과 단순함과 같은 개념들과 관련이 있을텐데, 이때 이 개념들을 위해 보수가 높은 직업은 필요하지 않다. Kallis, Demaria, 그리고 D’Alisa가 강조하듯이, “탈성장의 상상력은 돌봄의 재생산 경제를 중심으로 한다.”(2015: 4). 이러한 내러티브의 변화는 고임금 노동과 무급 돌봄 노동 사이의 사회적 매력의 인식 차이를 감소시켜 화폐화된 경제와 유지경제 사이의 분할을 화해시킬 것이다. 따라서 탈성장 사회의 상상력은 젠더 간의 유급 및 무급 노동의 분배에 있어서의 더 큰 평등을 달성하는데 필수적인 돌봄 노동의 재평가에 도움이 된다. 우리가 보았듯이, 생산 감소를 통해 환경적 압력을 직접적으로 완화하려는 탈성장의 열망은 따라서 커리어보다는 유쾌함에 기초한 사회적 인정의 재평가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내러티브의 이러한 변화는 무급 노동과 돌봄 활동을 재평가할 수 있는 내재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근로-시간제의 구조적 변화는 이러한 목표를 향한 첫걸음이 될 수 있다. 노동 분담은 매우 중요한 탈성장의 제안으로서, 페미니즘적 관심사를 고려하고 추정적으로 젠더-중립적 정책이 젠더화된 효과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더 큰 환경적이고 젠더적인 평등을 확립하는데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8. 일자리 나누기 : 탈성장의 제안 탈성장은 생산의 감소를 제안하기 때문에, 임금 노동은 줄어들어야 할 것이고, 실업을 피하기 위해 (임금 노동)은 분담되어야 할 것이다. (예: Jackson [2009] 참조). Schor [2010]; Knight, Rosa, Schor [2013]. Kallis, Demaria, 그리고 D’Alisa는 그들의 저서 ‘탈성장 : 새로운 시대를 위한 단어’에서 일자리 나누기를 “유급 부문의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한 취업자와 실업자 간의 노동 재분배”로 정의한다.(2015: 13). 따라서 일자리 나누기는 중심적인 탈성장 제안으로써, 여기서 모든 사람은 임금 노동과 화폐화된 영역에서 더 적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이 제안이 새로운 것도 아니며, 탈성장 학자들에 의해 독점적으로 제안된 것도 아니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첫째로, Clara Zwickl, Franziska Disslbacher, Sigrid Stagl(2016)의 지적처럼 일자리 나누기는 환경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경기침체를 흡수하기 위한 일반적으로 효과적인 단기 경제 정책으로 자주 활용되어 왔다. 탈성장 제안은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이러한 이해와는 다른데 왜냐하면 “탈성장 제안은 현재의 임시방편적 정책으로서의 지위를 넘어 북반구의 선진국에서의 일자리 나누기로 확대되기를 열망”하기 때문이다.(Schor 2015: 196). 이것(탈성장 제안)은 또한 최근 4차 산업혁명의 맥락에서 시작된 일자리 나누기에 대한 두 번째 논의와도 다르다. 이 논의에서는 일자리 나누기를 디지털화 및 자동화가 증가하는 시기에 필수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예: Frey and Osborne [2013] 참조). Brynjolfson과 McAfee [2014]). 일반적으로 디지털화된 시대에 일자리 나누기를 실업의 위협에 대한 가능한 해결책으로 규정하는 이 논쟁과는 달리, 탈성장은 좀 더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며 “미취업과 파트-타임 노동을 바람직한 생활 방식으로 전환”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Schor 2015: 197). 그러나 탈성장은 지속 가능하고 선택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앞서 논의한 바와 같이, 이는 예컨대 교육과 유사한 돌봄 영역이 여전히 번창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Kallis, Demaria, 그리고 D’Alisa는 따라서 탈성장 경제는 “노동 집약적인 경제가 될 것이기 때문에 실업 문제에 덜 직면할 것”이라고 지적한다.(2015: 12). 일자리 나누기를 이러한 중요한 탈성장 제안으로 만드는 한 가지 주장은 현재의 업무 수준이 환경적으로 지속불가능하다는 것이다(Schor 2015). 역사적으로, 20세기에는 생산성 증대로 인해 근로시간이 상당한 정도로 감소하였다(Himmelweit 1995; Kallis et al. 2013; Zwickl, Disslbacher 및 Stagl 2016). 하지만 근로시간의 단축에도 불구하고, 생산과 소비는 증가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앞서 언급한 디지털화 담론은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오늘날 노동시간의 단축은 여전히 다른 무엇보다도 생산성 증대와 관련이 있으며 기술은 필연적으로 더 낮은 고용수준으로 이어질 것이지만, 이에 반해 생산과 소비 수준은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탈성장 시나리오에서는, 기술 주도의 생산성 증대는 정확히 생산을 증가하는데 사용되지 않을 것이다(Nørgárd 2013). 대신, 생산 감소를 통한 환경적 불평등의 완화는 탈성장 일자리 나누기 제안의 핵심에 있다. 그렇다면, 환경적 지속 가능성은 정확히 어떻게 노동 시간 단축과 소비 사이의 관계에 영향을 받는가? François-Xavier Devetter과 Sandrine Rousseau(2011)는, 그들의 프랑스 가구에 대한 포괄적 사례 연구에서 소위 부의 효과에 대한 경험적 증거를 발견했다. 이 효과는 소득의 매개 범주를 통해 줄어든 노동 시간과 소비를 연결한다. 즉, 더 많은 근로 시간이 더 높은 소득을 창출하여 더 많은 소비와 더 많은 환경적 피해로 이어진다. 게다가, 많은 경험 연구들은 최근에 (매우) 긴 노동 시간과 지속 불가능한 소비 패턴 사이의 직접적인 연관성을 확립했는데, 특히 음식과 운송/교통과 관련하여 그러하다. (Jalas 2002; Sanches 2005; Schor 2005; Rosnick and Weisbrot 2006; Devetter and Rousa 2011; Knight, Rosa and Schor 2013). 그러나 이것이 또한 실제로 그러한지 아닌지는, 즉 근로 시간의 감소가 더 지속 가능한 소비 패턴으로 해석될지 여부는, 결정적으로 추가 여가 시간이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달려 있다. 만약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휴가를 가거나 쇼핑을 하는 것과 같은 에너지와 물질 집약적인 활동들에 참여한다면, 일자리 나누기는 실제로 역효과를 낼 수 있다. 탈성장론자들은 이 지점을 인정하고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근로 시간을 줄일 때 “환경적 편익은 자원 집약적이거나 환경적으로 해로운 소비로 시간이 흘러가지 않도록 보장하는 보완적 정책이나 사회적 조건에 결정적으로 의존한다.”고.(Kallis et al. 2013: 1545). 사회적, 정치적 맥락을 고려할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근로시간과 환경적 압력이 상당히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여전히 유의미한 발견이며, 이는 “환경적 지속가능성을 촉진하는 정책의 매력적인 대상”이 된다.(Knight, Rosa, and Schor 2013: 698). 환경적 지속가능성과 더불어 탈성장 제안으로서의 일자리 나누기는 “사회적으로도 지속가능한” 것을 목표로 한다(Knight, Rosa, Schor 2013: 693). 젠더 평등은 사회적 지속가능성을 위한 주요 전제조건이다. 따라서 탈성장 사회에서 의도하지 않은 재생산을 피하기 위해 구조적인 젠더 불평등을 해결하는 것은 중요하다. 일자리-나누기 제안은 다양한 형태로 온다. 근무일에 초점을 맞출 때, 한 정책 제안은 “특히 아이들의 학교생활과 맞물리는 5, 6시간”을 제안한다(Sirianni and Negrey 2000: 69). 또 다른 제안은 Kallis 외 연구진(2013)이 제시한 “금요일 휴무”제안과 같은 주 4일 근무이다. 더 나아가, 더 긴 휴가, 예컨대 안식년 또는 더 긴 출산/육아 휴가를 제안함으로써 한 해 또는 심지어 라이프 사이클에 초점을 맞추는 제안들도 있다. 젠더 중립적으로 프레임이 설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다른 일자리-나누기 체제가 깊은 젠더화된 효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Rubery, Smith, 그리고 Fagan은 “노동-시간 체제의 범주화와 젠더 평등의 문제를 결합하기 위해서는 어떤 유형의 노동-시간 체제가 젠더 평등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1998: 89) 그렇다면 어떤 일자리 나누기 제안이 성평등에 유리하다고 볼 수 있을까? 가장 정교한 탈성장 제안은 거의 틀림없이 Kallis 외 연구진의 “금요일 휴가” 제안이다.(2013) 저자들은 근로시간 단축이 “여성이나 돌봄 제공자와 같이 일반적으로 열거되지 않은 업무 책임으로 인해 시간이 더 제한된 사람들에게 이익이 될 것”이라고 추측하지만(2013:157), 이들의 초점은 생태학적 우려에 맞춰져 있는데, 하루 덜 통근하는 것이 환경적인 압력을 완화한다고 가정되기 때문이다. 반면에, 페미니즘적 문제는 처음부터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측면이라기보다는 추가적인 측면으로 간주된다. 오히려 우리는 Sirianni와 Negrey와 함께 “근로시간 단축에 대한 페미니즘적 접근법은 근로일의 기간 단축을 강조할 것”이라고 주장한다.(2000: 69). 남성의 가사일에 대한 기여는 집안 주변의 물건을 고치거나 정원을 가꾸는 것과 같은 가끔 하는 일들로 구성되는 경우가 많지만, 여성은 다른 가족 구성원들을 돌보는 것과 같은 일상적인 활동을 담당하는 경우가 많다.(Sirianni and Negrey 2000; Hochschild and Machung 2003; Seebacher 2016). 여성들은 매일의 “두 번째 교대”(Hochschild 와 Machung 2003)를 그들의 직업(“첫 번째 교대”)와 결합하여 처리해야만 한다. 이는 종종 가정에 대한 기여를 더 유연하게 계획할 수 있는 남성에 비해 시간 압박을 증가시키는데, (남성들의 경우) 특히 어린이나 노인 가족 구성원과 관련하여 일상적인 돌봄 활동이 여성에게 미치는 지속적인 “긴급함의 감각”(Senior 2014)에 직면하지 않는다. 근무일에 초점을 맞춘 일자리 나누기 제안은, 남성과 여성의 1교대를 줄임으로써, 여성의 이중 부담을 덜어줄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는 젠더 간 일상 돌봄 활동을 보다 평등하게 나눌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는 것이다. 게다가, 근무일에 초점을 맞춘 일자리-나누기 제안은 서로 다른 이동 패턴(Scholten, Friberg, and Sandén 2012; Solá 2016)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반드시 “금요일 휴일” 제안보다 생태학적이지는 않다. Sola는 “여성은 가사와 육와 활동에 참여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에서 남성보다 더 많은 시간-공간 고정성 제약을 경험한다.”라고 말한다. (2016: 32) 직장과 돌봄 책임이 양립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많은 여성들은 집에서 더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 때문에 남성들보다 환경적으로 덜 해로운, 통근 거리가 짧다.(Scholten, Friberg, Sandén 2012; Solá 2016) 또한 여성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출근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남성은 자동차를 이용하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기술적 인공물로서의 자동차와 그리고 관련된 젠더 정체성 형성 과정”과 무관하지 않다.(Solá 2016: 33) 따라서, 근무일에 초점을 맞춘 일자리 나누기 제안은 남성이 일상적인 돌봄 활동의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 있게 함으로써, 더 많은 “여성적”이고 그럼으로써 더 생태적인 통근 패턴을 채택하도록 이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여기서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근로 주보다 근무일에 일자리 나누기 제안을 집중시키는 것이 (a)많은 돌봄 활동의 일상적 특성을 고려하는 방식에서 더 페미니즘적이며, (b)반드시 덜 생태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남성이 일상 돌봄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한다면 이것은 좀 더 생태학적인 통근 패턴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더 단축된 근로 주는 여성의 일상적인 가사 돌봄 책임과 관련해 크게 달라지지는 않겠지만, 근로일의 단축은 여성의 이중 부담을 덜어줄 가능성이 높은데, 첫째로 그들의 “1교대”를 단축함으로써, 그리고 둘째로 남성도 일상 돌봄 업무를 맡을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줌으로써 말이다. 9. 탈성장 : 돌봄 경제를 향한 가능한 방법? 이전 섹션에서 보았듯이, 탈성장 일자리 나누기 제안은 실제로 젠더와 환경적 불평등을 모두 다루기 위한 틀을 짤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역 주장, 즉 탈성장 일자리 나누기 제안이 자동적으로 환경 지속 가능성과 젠더 평등으로 이어진다는 것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생산 감소, 일자리 나누기, 그리고 환경적 압력 완화 사이에 본질적인 연관성이 있다고 지적했다. 탈성장 정책 제안으로서의 일자리 나누기 그 자체가 환경 지속 가능성을 보장하기에 분명 충분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단계를 구성할 수 있다. 그러나 탈성장 사회에서 일자리-나누기와 젠더평등의 연관정은 자명하지 않다. 우리는 페미니스트의 우려/관심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근무일의 단축에 초점을 맞춘 탈성장 일자리 나누기 제안이 여성의 이중 부담을 진정으로 완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것은 중요한데, 우리가 단지 화폐화된 경제에서 고용의 문제를 다루는 한 젠더 평등은 달성될 수 없다. 우리는 짧은 노동일(five 6-hours days)에 초점을 맞춘 일자리 나누기 제안이 남성들이 돌봄에 대한 책임을 되찾을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준다고 주장하지만, 물론 이것은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모든 사람들을 위한 더 많은 자유 시간은 더 많은 남성들이 무급 돌봄 노동에 참여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거시적인 차원에서, GDP에서 벗어나는 것은 수량화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사회적 재평가를 초래하여 유지 경제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의 여부는 정치적 또는 제도적 변화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과 내러티브들의 변화에도 달려 있다. 일자리 나누기 제안은 그 본성에 의해 오직 화폐화된 경제에서 오직 유급 노동만을 다루고 일상적인 돌봄 활동에서 남성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도록 직접적으로 야기할 수 없기 때문에, 독립적인 탈성장 정책 제안으로서의 일자리 나누기는 젠더 평등을 야기하기에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이야기를 향한 더 넓은 변화의 일부로서 그리고 Linda Nierling이 “일의 사회적 정의(societal definition of work)”(2012: 241)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일자리 나누기는 환경적 지속가능성과 젠더평등 모두에 상당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가치관, 내러티브, 그리고 “사회적 상상력”의 변화는 탈성장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Demaria 외 여러 학자들은 심지어 “개인의 가치와 행동의 변화가 탈성장의 주요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명시한다. (2013: 202) 만약 이러한 탈성장의 잠재력이 가사 돌봄 노동에 대한 남성의 책임을 조명하는 데 사용되고 유급 및 무급 돌봄 노동 모두에 대한 일반적인 재평가와 함께 진행된다면, 탈성장 제안은 실제로 환경 지속 가능성뿐만 아니라 젠더 평등을 촉진할 수 있는 상당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탈성장은 실제로 화폐화된 경제 대 돌봄과 환경이라는 적대를 극복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우리는 주장한다. 10. 결론 이 논문의 시작 부분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현재의 성장 패러다임은 어떻게 기존의 젠더와 환경 불평등을 영속화하는지, 그리고 탈성장 일자리-나누기 제안을 통해 이러한 점은 완화될 수 있는지 말이다. 개조된 ICE 모델의 개념적 틀은 생태적 과정과 돌봄 활동들이(요약하자면 유지 경제)산업 경제 사상과 행동에 의해 구조적으로 어떻게 평가 절하되는지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우리는 녹색 성장과 같은 치료법이 생태학적 불평등을 완화하기보다는, 영구화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젠더 불평등과 관련해서, 우리는 이중부담이 해소되기는커녕 전가됐다고 주장해왔다. 따라서 우리는 화폐화된 것과 유지되는 것 사이의 문제적인 경계가 성장 패러다임에서 거의 도전받지 않고 있다는 것을 논의했고, 이 경계를 극복하는 한 가지 가능한 방법으로 탈성장을 도입했다. 지속 가능하고 선택적인 탈성장의 의미에서, 탈성장은 그 핵심에 환경적 불평등의 완화를 가지고 있다. 탈성장은 또한 돌봄을 둘러싼 사회의 재-중심화를 목표로하기 때문에, 유급 및 무급 돌봄 노동의 재평가를 더 촉진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잠재적으로 더 큰 젠더 평등을 촉진할 수 있다. 일자리 나누기는 젠더에 민감한 방식으로 광범위한 탈성장 의제의 일부로 설계될 경우 환경 및 젠더 불평등 모두를 해결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구체적인 탈성장 정책 제안으로 논의되어 왔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이 글의 목적이 성장 대 탈성장이라는 또 다른 이원론을 확립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화폐화된 것과 유지되는 것 사이의 경계를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가능한 대안으로 탈성장을 논의하는 것이었다고 덧붙이고 싶다. <탈성장 : 새로운 시대를 위한 단어>에서, 페미니스트 경제학은 하나의 동맹으로 나열되어 있으며, 따라서 “탈성장 프로젝트와 많은 것을 공유하지만 오늘날까지 탈성장과 느슨한 연관성만 가지고 있는” 사상의 학파 중 하나로 간주된다(Kallis, Demaria, and D’Alisa 2015: xxi). 우리는 이러한 지점은 불행한 일이라고 주장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돌봄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이 탈성장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고 믿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탈성장이 돌봄 경제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는 상호-교류의 많은 잠재력을 보며 이 연결이 이론적 및 경험적 근거 모두에 대한 향후 연구에서 더 자세히 설명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