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란의 매춘부

최근 편집: 2023년 5월 11일 (목) 19:21
희붕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5월 11일 (목) 19:21 판 (새 문서: == 책 소개 == 이 책은 성노동자이자 성노동자 권리 운동 활동가인 저자들이 쓴 책으로, 비매춘부들의 추상화된 언어에 가려져 왔던 현직 성노동자들의 생생한 발언들에 기대, 매춘을 둘러싼 이분법에 반대한다. 매춘이 폭력인지 노동인지, 그것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따지는 추상적 논의 속에서 성노동의 현장, 구체적이고 다양한...)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책 소개

이 책은 성노동자이자 성노동자 권리 운동 활동가인 저자들이 쓴 책으로, 비매춘부들의 추상화된 언어에 가려져 왔던 현직 성노동자들의 생생한 발언들에 기대, 매춘을 둘러싼 이분법에 반대한다. 매춘이 폭력인지 노동인지, 그것이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는지를 따지는 추상적 논의 속에서 성노동의 현장, 구체적이고 다양한 성노동자의 삶과 목소리는 지워지기 때문이다. 지금 매춘을 통해 삶을 이어가는 이들은 ‘행복한 창녀’도 아니고 ‘탈성매매 여성’도 아니다. 오늘 밤이나 내일,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위험이 닥치리라는 것을 알면서도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서 매춘을 해야 하는 이들이다. 따라서 저자들은 매춘이 인간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을 획득하기 위한 방편이라는 가장 기본적인 사실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성산업의 분석은 이제 추상적 논의에서 벗어나 성노동자의 복잡다단한 경험에 기반해 물질적으로, 실용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성노동자를 성산업에서 구출되어야 하는 대상으로 보는 방식, 성노동을 찬미하고 성산업의 문제를 과소평가하는 양극단에서 벗어나 실제로 성노동자의 삶을 위험하게 만드는 물질적 조건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실질적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그렇기에 바로 성노동자들의 구체적인 삶과 물질적 조건에 영향을 주는 핵심적 구조인 섹스, 노동, 국경의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를 다루고, 이어서 성노동자와 성산업을 규율하는 법제화 모델들의 사례들이 매춘부들의 삶에 구체적으로 어떤 경제적 영향을 주는지 면밀히 살펴본다.

목차

추천의 글 하나의 정답 대신, 구체적인 현실과 구조에서부터 변화를 만들기 위해 ―나영(성적권리와 재생산정의를 위한 센터 셰어 SHARE 대표) 흔들릴지언정 멈추지 않아야 할 질문―박이은실(여성학자)

들어가며 1. 섹스 2. 노동 3. 국경 4. 빅토리아 시대의 유물: 영국 5. 감옥국가: 미국, 남아프리카공화국, 케냐 6. 인민의 집: 스웨덴, 노르웨이, 아일랜드, 캐나다 7. 특권층: 독일, 네덜란드, 미국 네바다 8. 만능열쇠는 없다: 아오테아로아(뉴질랜드),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나가며

감사의 글 옮긴이의 글 주(註)8

저자

몰리 스미스 (Molly Smith)

영국 에든버러에 거주하는 성노동자이자 영국의 성노동 비범죄화, 성노동자의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한 운동 등에 중점을 둔 성노동자 단체인 성노동자 지지 및 저항 운동Sex Worker Advocacy and Resistance Movement, SWARM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다. 스코틀랜드의 성노동 비범죄화를 추진하는 성노동자 단체인 스코트-펩SCOT-PEP에도 참여하고 있다. 《가디언》과 《뉴리퍼블릭》에 성노동 정책에 관한 글을 기고해왔다.

주노 맥 (Juno Mac)

영국 런던에 거주하는 성노동자이자 영국의 성노동 비범죄화, 성노동자의 더 나은 노동조건을 위한 운동 등에 중점을 둔 성노동자 단체인 성노동자 지지 및 저항 운동Sex Worker Advocacy and Resistance Movement, SWARM에서 활동하는 활동가다. 테드TED의 〈성노동자들이 진정 원하는 법률The Laws that Sex Workers Really Want〉을 비롯해 성노동자 권리 보장에 관한 여러 강의를 진행해왔다.

역자

이명훈

전직 사회교사. 지금은 대학에서 예비교사들을 만나고 있다. 상호배움, 정치, 돌봄, 살림의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교육의 가능성을 고민해왔지만, 아직도 그 물음표 주위를 맴도는 중이다. 다수의 인간, 개, 식물과 식구로 지내면서 취약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의지하고 살아갈 수 있는지 배우고 있다. 잔혹한 낙관을 쫓기보다 불확실한 삶을 신뢰한다. 교육자나 연구자란 이름은 여전히 무겁고 부담스럽지만, 흔들리는 일상에 필요한 언어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주변화되고 비가시화된 몸들의 노동과 정동에 관한 이야기를 옮기게 된 건 이 때문이다. 교육과 운동의 언저리에서 내 몫의 역할을 찾으려 한다.

리뷰

오래된 반란 곁에서: 홍승은

성노동이라는 단어를 쓸 때면 손끝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진다. 오랜 시간 성매매를 둘러싼 긴장과 대립을 간접 경험하며 생긴 반응이다. 성매매가 아닌 성노동이라고 표현하는 순간, 이어질 문장들은 사라지고 납작한 메시지만 수신된다. ‘당신은 성매매가 얼마나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지 인정하지 않는군요. 어떻게 성을 사고파는 일을 노동이라 표현하죠? 그 현장이 얼마나 참혹한지 몰라서 하는 말인가요? ’나는 금기가 된 단어를 사용하는 일보다, 그 금기로 인해 더 많은 논의가 이어지지 못하는 현실을 두려워하기로 했다. “나도 성노동하고 싶다”고 말하던 남성이 있었다. 그에게 성노동은 섹스를 즐기며 간편하게 돈을 버는 일석이조의 유희였다. 성노동은 강간을 합리화하는 일이므로 모든 여성의 인권을 떨어뜨린다고 분개하는 페미니스트도 있었다. 문란한, 허영심으로 가득 찬, 주체성이라곤 없는, 여성 인권을 떨어뜨리는 이들. 여러 갈래의 시선은 같은 곳을 향했다. 성매매를 처단하라. 국가 권력에 기댄 이 말은 정작 현실에서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놓인 주변화된 위치와 위협은 건드리지 않았다. 아무런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태로 성노동자들은 음지로 밀려났다. 강간이나 살해를 당해도, 경찰에게 피해를 당해도 호소하지 못했다. 460페이지에 달하는 <반란의 매춘부>는 영국에 거주하는 페미니스트이자 성노동자인 몰리 스미스와 주노 맥이 집필한 책이다. 여느 ‘좋은 ’ 책이 그렇듯, 이 책은 이분법을 거부한다. 반성매매론/성노동론 , 불법화/합법화 , 강제/자발 , 폭력/노동을 횡단한다. 역자의 말처럼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양극단 사이에 있다.” 저자들은 성산업이 심각하게 성차별적인 토대 위에서 굴러가며, 폭력적이고 착취가 만연한 현장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다만, 그 현장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자원이 무엇인지 세분화해서 질문한다. 성노동자를 향한 낙인을 없애는 것을 넘어 빈곤, 이주, 인종, 성소수자 등 구체적인 물적 토대를 질문하고 함께 나아가자고 말한다. 나는 역사적, 세계적, 구조적으로 형성된 성산업 시스템에 놀라는 한편, 성노동자의 투쟁 역사를 읽으며 몸을 떨었다. 성노동자는 중세 유럽에서부터 공권력에 맞서 파업과 시위를 통해 노동권을 주장했으며,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19세기 영국에서는 성노동자들이 상호 부조, 소득 공유, 공동 육아를 위한 공동체를 만들어 서로의 운명을 공유했다. 그뿐만 아니라 HIV/AIDS, 성소수자 운동, 슬럿워크(강간 당하지 않으려면 헤프게 입고 다니지 말아야 한다는 경찰관의 발언으로 인해 2011년 캐나다에서 시작된 시위), 성교육, 동의 구하기 운동 등에 참여해왔다. 그들은 페미니즘이 구해 줄 대상이 아니라, 이미 페미니즘의 우산 안에서 함께 운동해온 동료였다. 우리는 저자들이 지적하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해야 한다. “오늘 밤이나 내일,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성판매자들에게 또다시 위험이 닥치리라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노동은 많은 사람에게 생존을 위한 유일한 수단으로 남아 있다.” 긴급한 문장 앞에서 ‘책임 ’은 어떻게 가능할까. 금기는 살아 숨 쉬는 이들의 존재를 고립시킨다. 우리에게는 제대로 알 책임이 있다. 이분법 사이 무수한 소음 속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오래된 반란의 곁에서.

스스로를 먹이고 살리기 위한 투쟁: 희음

몇 년 전의 일이다. 젠더이론을 주제로 모인 한 세미나 뒤풀이 자리에서 누군가 말끝에 불쑥 이런 이야기를 꺼냈다. '성매매 여성인데 자기가 페미니스트래요. 계속 일할 거라고 하고 그게 자기한테 맞다고까지 하면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주장하는 게 말이 돼요? 진짜 어이없어.'

그때 나는 '왜요, 그럴 수도 있죠.'라고 작게 답하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대화 속에 등장한 여성에 대한 심정적 동의는 있었으나 '그 일'과 '페미니스트'가 어째서 상충하지 않는지, 혹은 어째서 동시에 말 되어질 수 있는 개념인지 설명할 언어가 나에게 없었던 것이다.

이 마음 편치 않았던 기억이 희미해져 갈 때쯤 나는 이 책 <반란의 매춘부>를 읽게 되었고, 책의 '들어가며' 부분 말미에서 눈이 번쩍 뜨이는 경험을 했다. "성노동자는 원래 페미니스트다"라는 문장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문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성노동자들이 얼마나 오랜 역사에 걸쳐 광범위한 사회운동의 주체가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중세유럽에서 성매매업소 노동자들은 길드를 형성하여, 경찰의 단속과 직장 폐쇄, 노동조건에 맞서 파업을 하고 거리 시위를 벌였다. 15세기의 매춘부들은 독일 바이에른 시의회 앞에서 그들의 활동이 죄가 아닌 노동이라 주장한 바 있다. 191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200명이 업소 폐쇄에 항거하는 행진을 비롯해 HIV/AIDS, 성소수자 운동, 라이엇 걸, 슬럿워크, 성교육, 논모노가미운동 등 많은 운동에는 이들의 시간이 새겨져 있다.

이쯤에서 궁금해질 수도 있다. 이 운동들을 모두 페미니즘 운동으로 분류할 수 있는가? 적어도 그래야지만 이들을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을 테니 이는 필수적으로 따라 붙는 질문일지 모른다. 여성운동으로서의 성격이 분명한 운동들을 제외한, 15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사회운동에 대해서라면 특히나 더 의구심이 불거질 수밖에 없다.

나는 이 같은 질문에 이렇게 답해보려 한다. 먼저 페미니즘의 가장 기본적인 테제가 '여성도 인간이다'라는 것이라면, 인간이 무엇인지를 먼저 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남성에게만 주어져 있었던 그 '인간임'이 무엇인지를. 나는 그것이 한 존재가 자신의 삶을 둘러싼 조건과 환경을 이해하고 해석하여 어떤 삶을 살 것인지를 정하여 스스로, 혹은 서로가 그러한 방향으로 나아가는 주체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페미니스트란, 여성을 포함하여 사람으로 태어난 이 땅의 모든 존재가 이 '인간임'을 선포하고 드러내는 자에 다름 아닐 것이다. 말하기로써, 행위와 실천으로써, 또 그렇게 살아감으로써.

그렇다면 이들 성노동자들의 명확한 의지와 목표의식이 집단적 행위로 표출된, 파업과 거리 시위와 행진 그리고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진 목소리는 이들이 "원래 페미니스트"였음을 증명하고도 남는 것이 아닐까.

그뿐만이 아니다. 그것이 사회구조적으로 강제되어 있었든 그렇지 않든 생존하기 위해 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수단이 매춘뿐이었을 때, 그 일을 한 것 역시 그 자체로 이들이 '인간임'을 드러내는 데 모자람이 없을 터이다.

위에 열거한 저항운동의 여러 움직임 중 특별히 인상적이었던 기록 하나를 따로 빼두었다. 1859년 <런던 타임즈>에는 "나는 분별 있게 처신하는 사람이며, 당신과 경찰에게 항거한다. 왜 당신들은 매끄러운 얼굴로 도덕에 대해 떠드는가? 도덕이란 무엇인가?"라는 한 매춘부의 글이 실렸다고 한다. 여기서 경찰은 법의 사제다. 공식적으로는 법의 이름으로 법과 도덕 바깥의 울퉁불퉁한 군더더기를 잘라내는 자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특히 성노동이 범죄화된 국가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들의 제복은, 그들을 거의 자동적으로 성노동 종사자에게 전지전능한 폭력을 행사하도록 만들었다. 이 책에서는 성노동자들에게 구타, 강간, 강탈을 서슴지 않는 경찰들의 만행을 수도 없이 들려준다.

극단적으로는 매춘부 거리 '청소' 운동의 일환으로 18년 동안 82명의 여성을 마음껏 살해한 러시아의 경찰이자 살인자인 미하일 폽코프의 예시에서부터, 함정 수사를 통해 대상 여성을 강간한 뒤 체포하는 많은 폭력의 예시들까지.

영국의 성노동자 여성이 <런던 타임즈>를 통해 묻고 꼬집었던 저 날카롭고도 통찰적인 질문이 150년이나 흐른 뒤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이 놀랍고도 참담했다. 그 질문은 어쩌면 '경찰관'을 넘어서는 '법' 자체에 대한 질문이 아니었을까. 법이 어떻게 한 사회의 가장 소외되고 취약한 집단과 사회적으로 낙인찍힌 신체에 무자비한 비도덕과 폭력으로 내리꽂히는지에 대한. 법이 아니었다면, 법이라는 이름을 빌리지 않았다면 성노동 현장 곳곳에서 경찰들의 이 같은 폭력 행위가 이렇게 당당히 자행되지는 못했을 테니까.

이 책을 읽은 후 '성노동자'는 나에게 예전과는 다른 템포와 뉘앙스를 갖는 단어가 되었다. 저자들 역시 맥락에 따라 성노동자를 매춘부, 성산업 종사자, 성판매자 등으로 바꾸어 사용하기는 하지만, 성을 파는 행위가 그 행위 주체 스스로를 먹이고 살리는 일이 될 때 그것은 '성노동'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음을 확실히 한다.

이 책의 모든 문장과 행간을 떠받치고 있는 전제가 바로 이것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흔히들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성적) 지배에 대한 구조를 먼저 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성산업이 세계의 수맥처럼 촘촘히 뻗어 있는 시대에 이미 그 영역에서 일하면서 생계를 보전하고 있고 또 그곳에서 계속 일하지 않으면 안 되거나 그곳에서 일하기를 원하는 이들에게 구조를 보라는 말은 어떤 의미가 되는가.

다시 말하자면 이들은 구조를 보지 못해서가 아니라,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의 이 명백한 성적 착취구조 속에서도 성산업을 통하지 않고서는 온전히 생존하기 어렵거나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삶을 이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이 일을 한다. 또한 성산업 현장에서 일어날 수 있는 위험과 그곳에서의 젠더화 되고 성애화 된 노동이 갖는 한계를 알면서도, 그보다 더 긴급한 제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일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럴 때 구조를 보라는 말은, 나아가 그 말 안에 있는 진의, 즉 구조를 봄으로써 성산업 하에서 이뤄지는 노동들이 진짜 '노동'일 수 없음을 보라는 말은, 지금 그들이 이어나가고 있는 그 생생한 삶을 삶이 아닌 것으로 취급하겠다는 말과도 같지 않을까. 혹은 그 삶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않는 이들이라면 누구라도 그 '치욕의 구조' 속에서, '노동권'을 주장하거나 보장받지 못하는 상황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하며, 안정과 안전의 권리를 탈취 당해도 좋다는 말과 같지 않을까. 만일 그것이 '성노동'이 아니라고 말하려 한다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