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기

최근 편집: 2016년 10월 10일 (월) 18:58
탕수육 (토론 | 기여)님의 2016년 10월 10일 (월) 18:58 판 (물대포 사건 정리중)

백남기(1947년 10월 8일~2016년 9월 25일)는 농민운동가, 사회운동가이다.

생애

그의 생애는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과 우리 농업을 지키기 위한 활동으로 채워진 일생이었다.

  • 1947년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 출생
  • 1963년 광주서중학교 졸업
  • 1968년 광주고등학교 졸업
  • 1968년 중앙대 행정학과에 입학
  • 1971년 10월 위수령 사태 때 시위 도중 1차 제적
  • 1973년 10월 교내 유신 철폐 시위 주도[1]
  • 1974년~1975년 – 수배 중 명동성당에 피신
  • 1975년 – 전국대학생연맹 가입 및 2차 제적, 갈멜 수녀원 잡부 1년, 일흥농원 포도원 1년, 갈멜 수도원 수도사 3년
  • 1981년 귀향 [2]
  • 1980년 3월 – 복교
  • 1980년 – 어용 학도호국단을 철폐하고 재건 총학생회 1기 부회장 역임
  • 1980년 5월 8일 – ‘박정희 유신잔당(전두환, 노태우,신현확)’ 장례식 주도
  • 1980년 5월 15일 – 서울의 봄 때 의혈중앙 4000인 한강도하 주도 (흑석동 캠퍼스에서 서울역까지 도보 행진)
  • 1980년 5월 17일 – 군부 계엄 확대 조치로 기숙사에서 계엄군에 체포
  • 1980년 7월 30일 – 중앙대학교 퇴학 처분(3차 제적)
  • 1980년 8월 20일 – 수도군단보통군법회의에서 계엄 포고령 위반으로 징역 2년 선고
  • 1981년 3월 3일 – 3‧1절특사로 가석방
  • 1981년 – 고향 보성으로 귀향(수도작, 낙농업, 밭농사 등)
  • 1981년 11월 – 박경숙(율리아나) 씨와 결혼
  • 1983년 – 정치활동 규제자에서 해금 및 복권
  • 1986년 – 가톨릭농민회 가입
  • 1987년 – 가톨릭농민회 보성, 고흥협의회 회장
  • 1989년~1991년 – 가톨릭농민회 전남연합회장
  • 1992년~1993년 –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
  • 1992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창립(준) 주도
  • 1994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공동의장
  • 2014년 – 가톨릭농민회 전남 동지회 회장
  • 2015년 – 우리밀살리기운동 광주‧전남본부 자문위원
  • 2015년 11월 14일 – 민중초궐기 대회에 참석했다가 경찰의 물대포에 의해 쓰러진 후 의식불명
  • 2016년 9월 25일 오후 1시 58분 – 중환자실 입원 317일 끝에 사망

(따로 각주가 없는 이력의 출처는 가톨릭농민회)

활동

민주화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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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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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대포 사건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

2015년 11월 14일 민중총궐기에서 경찰이 분사한 물대포에 맞고 쓰러져 응급실로 이송되었으나[3], 의식불명 상태가 지속되었다.[4] 당시 오마이뉴스는 단독 기사를 통해 경찰의 물대포가 백씨의 머리를 노린 정황을 보여주는 영상을 공개하였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살수차는 인권보호장비"[6], "(시위대의) 폭력 행위를 끝까지 추적하겠다"[7] 등 강경 발언 일색이었다.

2015년 11월 17일 경찰의 살수 강도 시연

논란이 계속되자 2015 11월 17일 서울 신당동 서울지방경찰청 기동대에서는 집회 때 사용되는 살수차의 구조 등을 설명하고 살수 강도를 시연하는 자리가 마련하였다. 연합뉴스의 기사에 따르면 "화면이 너무 작아 시위대가 잘 보이지 않고 야간에는 조명을 비춘다고 해도 사물 식별이 쉽지 않을듯"했으며, 기자단이 표적지나 마네킹을 세워두고 rpm에 따른 충격을 시험해 볼 것을 요구했으나 경찰은 이를 거부했다.[8]

2015년 11월 22일 지속되는 비난 여론에 따른 경찰총장의 "인간적 사과"

시연 이후에도 살수차를 제작한 업체에서 근무하던 전직 직원이 "물대포 직사는 살상 행위에 가깝다. 그걸 사람에 대고 쏘는 것은 죽이려 작정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주장한 인터뷰가 공개되고[9] 더불어민주당문재인 전대표가 병원을 방문하는 등[10] 여론이 잠잠해지지 않자 "인간적으로는 제가 오늘 충분히 안타깝다고 생각하는 사과를 했다"고 하면서도 법률적 책임이 뒤따르는 차원의 사과는 거부했다.[11]

2015년 12월 5일 2차 민중총궐기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의 쾌유와 국가폭력 규탄 범국민대책위원회'가 주관하는 2차 민중총궐기에 대해 경찰은 집시법 12조를 근거로 집회 금지 조치를 내렸으나[12], 법원은 이를 부당하다고 판단하여 집회 주관자가 낸 옥외집회 금지통고 집행정지 신청을 받아들였고[13] 경찰이 이를 수용하여[14] 예정대로 집회가 진행되었다.

경찰의 우려와 달리 집회는 평화롭게 마무리되었다[15][16]

2015년 12월 21일 사건 발생 100일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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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25일 여야가 청문회 개최에 합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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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5일 백남기씨 316일만에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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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28일 서울대병원의 '병사' 진단 및 부검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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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이 보기

바깥 고리

  1. “민주주의와 민족농업을 지키기 위해 평생을 바친 고 백남기 농민의 삶”. 《민중의 소리》. 
  2. “생명과 평화의 일꾼, 백남기 농민 끝내 스러지다”. 《뉴스타파》. 
  3. “김승남 "경찰, 공권력 동원해 폭력..강신명 해임해야". 《뉴시스》. 2015년 11월 15일. 
  4. “물대포 의식불명 농민 가족들 "어떻게 그렇게 사람을..". 《한겨레》. 2015년 11월 16일. 
  5. “[단독 영상] 경찰 물대포, 백씨의 머리 노렸다”. 《오마이뉴스》. 2015년 11월 16일. 
  6. “이상원 경찰청 차장 "살수차는 인권보호장비". 《한겨레》. 2015년 11월 16일. 
  7. “강신명 "폭력 행위 끝까지 추적" 시위대 "경찰청장 파면을". 《중앙일보》. 2015년 11월 17일. 
  8. “농민 백씨 넘어뜨린 물줄기 시연..성인 남성도 '휘청'. 《연합뉴스》. 2015년 11월 17일. 
  9. “[단독] 살수차 업체 전 직원 "물대포 조준, 살상행위..백씨 못 봤을리 없다". 《한겨레》. 2015년 11월 19일. 
  10. “[종합]문재인 등 野지도부, 백남기씨 병원 방문”. 《뉴시스》. 2015년 11월 20일. 
  11. “강신명 "인간적으로 사과"..與 '폭력시위' 野 '과잉진압'. 《아시아경제》. 2015년 11월 23일. 
  12. “경찰이 빼든 '집시법 12조'..서울 웬만한 도로 모두 집회 불가”. 《한겨레》. 2015년 12월 2일. 
  13. “법원 "경찰의 '2차 민중총궐기' 집회 금지 부당"(종합)”. 《연합뉴스》. 2015년 12월 3일. 
  14. “법원 "2차 민중총궐기 금지 부당"..경찰 "수용하겠다"(종합2보)”. 《연합뉴스》. 2015년 12월 3일. 
  15. “2차 민중총궐기 대회 서울광장서 개최.."평화집회" 한목소리”. 《머니투데이》. 2015년 12월 5일. 
  16. “꽃을 든 야당 "평화집회 계기로..시민·경찰도 성숙". 《머니투데이》. 2015년 12월 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