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이스

최근 편집: 2022년 12월 24일 (토) 10:08

나는 나에 대해 오갔던 이야기들을 모조리 떠올려본다. 나는 잔인한 악마인 동시에, 불한당에게 끌려가 목숨이 위험했던 순진한 희생양이고, 나를 교수형에 처하면 사법당국이 살인을 저지르는 게 될 만큼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이고, 옷차림이 단정하고 깔끔한데 죽은 여자를 털어서 그렇게 꾸민 거고, 신경질적이며 뚱한 성격이고, 미천한 신분인 것에 비해 조금 교양이 있어 보이고, 말 잘 듣고 착한 아이라 나를 나쁘게 말하는 사람이 없고, 교활하며 비딱하고, 머리가 멍청해서 바보 천치와 다를 바 없다. 나는 궁금하다. 내가 어떻게 각기 다른 이 모든 사항들의 조합일 수 있을까?

Alias Grace

그레이스(또는 알리아스 그레이스)는 캐나다 작가 마거릿 애트우드의 소설로, 1996년에 출간되었다. 2017년 동명의 미니시리즈가 만들어져 넷플릭스에 공개되었다.

개요

젊은 하녀 그레이스 마크스는 그녀가 일하던 집의 주인인 토머스 키니어와 가정부 낸시 몽고메리를 살해한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는다. 감옥에 갇혀 하루하루를 보내는 그녀에게, 그레이스의 무죄를 탄원하려는 위원회의 의뢰를 받은 정신분석 전문의 사이먼 박사가 찾아온다. 사이먼 박사는 그레이스와의 상담을 통해 사건을 둘러싼 진상과 그레이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을 파헤치려고 하지만, 상담이 계속될수록 사건의 진상은 더욱 수수께끼가 되어간다.

1843년 여름 토론토에서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받았던 실존 인물 그레이스 마크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마거릿 애트우드는 일찍이 그레이스의 이야기에 매료되어 그레이스를 주인공으로 한 각본을 쓰기도 했는데, 당시에는 그레이스의 사건을 단순한 치정극으로 여겼으나 이후 생각이 바뀌면서 좀더 정확한 관점에서 집필하고자 한 결과물이 1996년작 Alias Grace이다.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총 6화.

캐나다 영화/TV 업계의 여성 유명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만들었다고 한다. 원작자인 마거릿 애트우드가 참여했고, 주연인 사라 가돈, 각본 사라 폴리, 감독 매리 해론, 제작 노린 핼펀, CBC 의 샐리 카토, 넷플릭스의 엘리자벳 브래들리 등.

원작의 큰 분량이 많이 잘려나갔지만, 면밀하게 준비한 작품으로써 나름의 매력을 가지고 완성되었다. 각본을 쓴 사라 폴리는 17살 때 원작소설을 접한 뒤 완전히 매료되었고, 언젠가 영상으로 만들겠다는 꿈을 가진 채 계속 영화계에서 일하며 짬짬이 각본을 작업했다고 한다.

뒷이야기들

  • '대상화되는 여성'에 관한 여러가지 비틀기나 비꼬기를 담고 있다. 예컨대 TV시리즈의 첫 장면에서 그레이스는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추어보는데, 많은 미술작품이나 소설 등에서 여성이 (성적 매력이나 여성미를 점검하며) 거울 속에서 보는 자신의 모습은 남자들이 판타지로 상상하는 여성에 가깝다. 그레이스는 그 전통적인 구도를 똑같이 연출한 뒤, 그곳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사람들이 멋대로 상상하는 그레이스'를 하나하나 호명해서 관찰한다. 드라마 후반부에 그레이스가 베일을 쓰는 장면도 마찬가지이다. 베일을 쓴 여성은 순결하고 고분고분한 신부/처녀의 이미지를 연출하기 위해 오랫동안 쓰여온 장치이지만, 그레이스는 역시 똑같은 구도를 연출한 뒤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과 전혀 다른, 기괴하고 불안한 모습을 한 채 비웃음조로 '남자가 알고 싶어하는 나(우리)의 모습'을 이야기한다. 이외에도 여자들의 불행을 걱정하는 척하지만 실은 포르노로 소비하며 꼴리는 남자들의 모습, 가부장적 질서와 성별권력을 간과한 구원자 서사의 허망함, '알 수 없고 오묘한 존재'로 여성을 간주하는 것이 실은 멋대로의 관점이라는 것 등을 은연중에 풀어내며 수많은 질문을 던진다.
  • 사라 가돈은 관련 인터뷰에서 알리아스 그레이스를 마거릿 앳우드의 다른 작품이자 스트리밍 서비스 훌루에서 상영 중인 시녀 이야기(Handmaid's tale)와 비교해 각각 우리가 어디에서 왔고, 앞으로 어디로 향하고 있을지에 대한 통찰을 담고 있는 두 가지 이야기를 동시대에 볼 수 있는 것이 행운이라고 언급했다. 그레이스는 19세기 여성의 삶을, 시녀 이야기는 여성이 노예화된 디스토피아 미래사회를 묘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