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시 제목 | 부마항쟁에서 5.18까지(운동화와 똥가방) |
기본 정렬 키 | 부마항쟁에서 5.18까지(운동화와 똥가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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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ID | 35442 |
문서 내용 언어 | ko - 한국어 |
문서 내용 모델 | 위키텍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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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키베이스 항목 ID | 없음 |
설명 | 내용 |
문서 설명: (description ) This attribute controls the content of the description and og:description elements. | 1979년 10월 중순이었다. 나는 후배를 만나기 위해 여수에 내려가 있었고 그때 부마항쟁이 터졌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항쟁 발발에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정세 인식에 큰 문제가 있다는 걸 충격 속에서 깨달은 나는 부산과 마산의 현장에 꼭 한 번 가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이곳저곳을 돌며 일을 본 후 23일 경 광주로 올라왔다. 그 사이에 광주에서는 사건이 하나 발생 했다. 전남대 여학생 고희숙씨 등이 학원사찰정보기관원들이 상주하고 있던 본관 건물의 학생 지도 상담실에 방화를 했던 것이다. 박정희 정권은 악랄하게도 이 사건의 확대 조작을 진행하고 있었다. 박정권은 부마항쟁이 타 지역으로 확산될까 봐,특히 광주 지역에 항쟁이 번질까 봐 잔뜩 긴장하고 있던 터 였다. 즉각 예방조치 차원에서 방화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박병기 등 일부 나이 어린 제적생들과 전남대 운동권 학생 30여 명 을 한꺼번에 연행해 고문을 하며 사건의 확대 조작을 한참 진행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