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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편집: 2021년 11월 14일 (일) 11:48
묘호 익종(翼宗)→문조(文祖)
어진
1954년 부산 용두동 화재로 익종(문조)의 어진이 절반으로 불에 타서 익종(문조)의 얼굴을 부분도 탔다.
이 그림은 선원보감에 있는 익종(문조)의 초상화이다.
생몰년도 음력 서력 1809년 8월 9일 ~ 서력 1830년 5월 6일
양력 서력 1809년 9월 18일 ~ 서력 1830년 6월 25일
재위기간 음력 추존왕
양력 추존왕
부모 어머니 순원왕후
아버지 순조(純祖)
배우자 신정왕후
후임 왕 (헌종)
시호 사후시호 효명세자(孝明世子) → 익종효명대왕(翼宗孝明大王)
대한제국
추존이후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
영(旲)
생몰장소 탄생장소 창덕궁 대조전
사망장소 창덕궁 대조전
덕인(德寅)

개요

효명세자는 헌종의 아버지로서 조선의 추존왕이고 대한제국의 추존황제이다. 자(字)는 덕인(德寅)이며 성은 이(李), 휘(諱)는 영(旲),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1819년(순조 19년) 왕세자에 책봉되었고, 1827년 부왕 순조의 명으로 대리청정을 하였으나, 청정 4년만인 1830년 병으로 사망하였다. 후에 아들 헌종이 즉위하면서 익종으로 추존되었고, 고종이 그의 양자 자격으로 즉위한 뒤에는 황제로 추존되었다.

정식 시호는 문조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文祖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宏猷愼徽綏緖佑福敦文顯武仁懿孝明翼皇帝)로 재위에 오르지 못한 추존왕임에도 불구하고 역대 조선 국왕중 가장 긴 시호를 가지고 있다. 세자 시절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흔히 효명세자(孝明世子)로도 불린다.

생애

효명세자는 1809년(순조 9) 순조순원왕후의 장자로 창덕궁 대조전에서 태어나[1] 1812년, 왕세자에 책봉되었으며, 1817년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1819년 음력 10월에 세자빈(신정왕후)과 가례를 올렸다.

1827년에는 아버지 순조의 명에 따라 대리청정을 하여, 안동 김씨세도 정치를 견제하고 처가인 풍양 조씨의 인물과 다른 당파의 인물들을 중용하였으며[1] 이인좌의 난 이후 축출당한 소론계열 인사들을 추가로 등용하였다. 1828년에는 창덕궁 내에 연경당(演慶堂)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830년 5월창덕궁 대조전에서 사망하였다.[1] 당시 그의 나이 22세였다.

사후에 아들인 헌종이 순조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한 뒤 그를 익종(翼宗)으로 추존하였으며 이후 족보상 6촌이 되는 흥선대원군의 둘째 아들인 이명복이 그의 입승대통을 이어받아 왕(고종)으로 즉위하였다.[2] 대한제국 성립 이후인 1899년에는 양자인 고종에 의해 문조익황제(文祖翼皇帝)로 재추존되었고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경역내에 위치한 수릉(綏陵)이다.

시호

1863년 신하들의 건의로 이듬해 홍운 성렬 선광 준상(洪運盛烈宣光濬祥)의 존호가 올려졌다. 1868년 11월에는 요흠 순공 우근 탕정(堯欽舜恭禹勤湯正)의 존호를, 1875년 11월에는 계천 건통 신훈 숙모(啓天建統神勳肅謨)의 존호가 더해지고, 1876년 11월에는 건대 곤후 광업 영조(乾大坤厚廣業永祚)의 존호가 추가되었다.

1878년에는 다시 장의 창륜 행건 배녕(莊義彰倫行健配寧)의 존호가 더해졌다. 기태 수유 희범 창희(基泰垂裕熙範昌禧), 1886년 11월에는 입경 형도 성헌 소장(立經亨道成獻昭章)의 존호가 더해져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돈문현무인의효명대왕(體元贊化錫極定命聖憲英哲睿誠淵敬隆德純功篤休弘慶洪運盛烈宣光濬祥堯欽舜恭禹勤湯正啓天建通神勳肅謨乾大坤厚廣業永祚莊義彰倫行健配寧基泰垂裕熙範昌禧立經亨道成獻昭章敦文顯武仁懿孝明大王)이 되었다.

이후 1900년 대한제국 수립 후 황제로 추존되면서 익황제가 되면서 체원찬화석극정명성헌영철예성연경융덕순공독휴홍경홍운성렬선광준상요흠순공우근탕정계천건통신훈숙모건대곤후광업영조장의창륜행건배녕기태수유희범창희입경형도성헌소장굉유신휘수서우복돈문현무인의효명익황제가 되었다.

기타

글과 춤을 좋아하여 직접 무용 춘앵전을 편곡하기도 하였으며 춤을 출 장소인 연경당(演慶堂)을 지었다. 이만큼 음악에 관심을 보인 조선의 왕 또는 세자는 세종세조 이후 유일하다. 조선에서 예악(禮樂) 곧 예의와 음악은 정치의 근본으로 여겨졌으며 정치의 기반을 다지려던 임금들은 예의 또는 음악에 관심을 쏟았다. 조선 전기의 세종과 세조 또한 그러하며 조선 후기의 효명세자, 곧 익종 또한 그렇다고 여겨진다. 다시 말해 왕권이 약해지던 조선 후기에 왕권의 기반을 다지려 음악에 관심을 쏟은 것이라 여겨지며 이러한 바를 높이 사 아버지 순조는 그의 죽음 뒤에 글월(文)로 옛적(古)을 드러냈다(示)해서 문호(文祜)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왕세자입학도첩(王世子入學圖帖)은 1817년(순조 17) 3월 11일 성균관에서 치러진 효명세자의 입학례를 기념한 화첩이다. 2010년 6월 17일 서울특별시의 유형문화재 제307호로 지정되었다.

그의 초상화는 여러 점이 있었다. 헌종 때 그의 어진이 그려졌고, 고종 때 다시 그의 어진이 제작되었다. 현전하는 것은 고종 때 그려진 어진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중이었으나 한국전쟁 당시 동란으로 불에 일부 탔다. 그러나 어진의 훼손이 심하고 얼굴 부분을 알아볼 수 없어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다.[3][4]현재 전하는 초상화로는 선원보략(선원보감)에 그려진 어진이 있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강목왕(康穆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어진

위에 있는 익종 어진은 1954년 6.25전쟁 이후 부산 용두동 화재로 인해 반쯤 탔으나 불행하게도 얼굴 부분까지 타버렸다.


파일:효명세자 복원본.jpeg

권오창 화백이 그린걸로 추정되는 효명세자의 불에 탄 어진을 복원한 것이다. 선원보략의 효명세자 그림과 비슷하다.


이 그림은 선원보감에 있는 익종의 초상화이다. 그런데 그림을 대충을 그렸는지 신하들이 착용하는 사모(관모)와 단령(관복)으로 그려서 제대로 그렸는지 의심된다.


파일:익종.PNG

1927년에 열성어진이라는 책에 있는 익종(문조) 초상화이다.

  1. 1.0 1.1 1.2 유네스코 등록 세계유산, 창덕궁(3) :: 네이버 뉴스
  2. http://www.koreanhistory.org/webzine/read.php?pid=18&id=273
  3. 권오창 화백이 문조의 어진을 복원하였으나, 얼굴을 상상하여 그려서 정부가 지정한 표준영정이 되지 못하고, 권화백이 개인 소장하고 있다.
  4. 복원된 효명세자 어진 링크에 들어가면 아래 이미지가 효명세자(문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