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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편집: 2021년 11월 14일 (일) 11:50
묘호 원종(元宗)
어진
파일:정원군 어진.PNG
이 어진은 고궁박물관에 소장된 어진이다.
이 어진은 선원보감에 있는 원종(정원군)의 초상화이다.
생몰년도 음력 서력 1580년 6월 22일 ~ 서력 1619년 12월 29일
양력 서력 1580년 8월 2일 ~서력 1620년 1월 23일.
재위 기간 양력 추존왕
음력 추존왕
부모 어머니 인빈 김씨
아버지 선조
배우자 인헌왕후 구씨
후임 왕 (인조)
시호 원종공량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
(元宗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
생몰 장소 탄생 경복궁의 별전(別殿)
사망 회현방(會賢坊)
부(琈)
?

개요

정원군(定遠君)은 조선 중기의 왕자, 공신, 왕족이자 추존왕으로 대원군에서 왕으로 추존된 인물이다. 조선 제14대 왕 선조와 인빈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인조의 아버지이다.

생전의 작위는 정원군(定遠君)이고 사후에 대원군으로 추존되었다가 다시 왕으로 추존된다. 성은 이(李), 휘는 부(琈), 본관은 전주(全州), 정식 시호는 원종공량경덕인헌정목장효대왕(恭良敬德仁憲靖穆章孝大王)이며 명나라로부터 공량(恭良)의 시호를 받았으며, 명나라로부터 시호를 받은 마지막 왕이기도 하다. 정치적 목적에 의해 왕으로 추존되었다.

생애

원종 추존의 당위성을 주장한 이정구의 서간 (1630년대)
인조의 정원군 추숭에 반대하는 김장생에 대해, 이정구는 인조가 선조를 아버지로 불러야 하고 정원군을 백숙부로 불러야 한다는 김장생의 논리를 반박하였다.

초기 생애

경복궁의 별전(別殿)에서 선조의 다섯째 서자이자 인빈 김씨 소생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용모가 출중하였고 태도가 신중했으며, 효성과 우애가 남달라서 선조의 총애를 받았다라고 그의 묘비에는 써져 있지만 선조실록에는 성품이 포악하고 행동이 방탕하여 당시 사람들에게 손가락질과 탄핵을 받았다라고 되어 있다. 임해군과 순화군을 능가하는 선조의 아들들 중 최악의 망나니였지만 아들이 왕이 됨에 따라 과도한 띄워주기를 했다.

1587년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으며, 구사맹의 딸(후일의 인헌왕후)과 혼인하여 4남을 두었다. 그러나 첫째 능풍군은 일찍 죽었으며, 둘째 능양군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고 조선 16대 왕이 된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당시 선조를 호종한 공로로 전란이 종결된 뒤 1604년(선조 37년) 호성공신에 책록되었다.

활동

1610년(광해군 2년) 4월 세자 이지의 가례식 때 종친 대표의 자격으로 참석하였다.[1] 그해 7월 경창군(慶昌君)의 혼례를 주관하였다. 1611년 사옹원 도제조를 지냈다.

광해군 즉위 이후 그의 모후 인빈 김씨가 광해군의 모후 공빈 김씨의 숙적이었던 탓에 일체의 정치적 활동을 삼가고 조용히 근신하였다. 그러나 아들 능창군이 역모로 몰려 죽는 것을 보았다.

생애 후반

그는 술을 좋아하였는데, 후일 인조 즉위 후 편찬된 광해군일기에 의하면 그는 "걱정과 답답한 심정으로 지내느라 술을 많이 마셔서 병까지 들었다.[2]"고 한다. 그는 늘 말하기를 “나는 해가 뜨면 간밤에 무사하게 지낸 것을 알겠고 날이 저물면 오늘이 다행히 지나간 것을 알겠다. 오직 바라는 것은 일찍 집의 창문 아래에서 죽어 지하의 선왕을 따라가는 것일 뿐이다.[2][3]”라고 했다 한다. 이는 《월사집》(月沙集)과 《흥경원지》(興慶園誌), 연려실기술에도 같은 내용이 전한다.

1619년 회현방(會賢坊)에서 사망하였다. 사망 당시 향년 39세였다.

생전에 아들 능창군을 후사없이 죽은 형 신성군의 양자로 보냈지만 그가 신경진의 옥사에 역모로 몰려 사형되는 것을 봤고 이 때문에 화병으로 죽었다고 한다.[4] 아들 인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원군에 추존되어 정원대원군(定遠大院君)으로 불렸고, 이후 인조는 선조-정원대원군-인조로 이어지는 왕통을 세우기 위해 그를 왕으로 추존하려 하여 조선 조정에 새로운 논쟁을 불러왔다.

사후

화상(畫像)이 있어서 인조 즉위 후 영희전(永禧殿)에 봉안하였으며 무덤은 경기도 김포시에 있는 장릉(章陵)이다.

사망 직후 바로 경기도 양주군 곡촌리에 안장되었다. 흥경묘라 했다가 아들 인조가 왕이 되면서 대원군으로 추존되고 묘는 묘에서 원으로 승격되어 흥경원이 되었다.

1627년 인조에 의해 묘소가 김포군 성산 언덕으로 천장하여 부인 계운궁 구씨의 묘소와 합장하고 흥경원이라 칭하였다. 1632년 10년간의 논쟁 끝에 원종(元宗)으로 추존되었다. 묘소는 흥경원에서 장릉으로 격상되었다.

  1. 광해군일기 28권, 광해군 2년(1610 경술 / 명 만력(萬曆) 38년) 4월 29일(갑진) 5번째기사 "세자 관례 때 정원군을 종친으로 삼다"
  2. 2.0 2.1 광해군 147권, 광해군 11년(1619 기미 / 명 만력(萬曆) 47년) 12월 29일(무인) 6번째기사 "정원군의 졸기"
  3. 연려실기술 제22권 "원종 고사본말(元宗故事本末)"
  4. 한국역사연구회, 《모반의 역사》, 세종서적, p.259, 2001, ISBN 8984070645